몇 걸음 떼기 무섭게 등 뒤로 에이니의 찢어지는 울음소리와 기쁨에 찬 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기분은 바닥을 기는데 라이는 뭔가 매우 기쁜 모양이었다.
힐끔 라이를 내려다보니 그 복슬복슬한 꼬리를 한껏 흔들며 커다란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에이니를 놓고 가는 게 퍽 마음에 든 듯했다.
"지가 아쉬우면 따라오겠지!"
에이니를 뒤로 하고 씩씩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상공에서 봤던 다듬어진 길이 있는 방향을 떠올리며 서둘러 움직이자니 에이니가 숲이 떠나가라 울면서도 나와 라이를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멀어져서 수풀에 가려진다 치면 어느 새 튀어나와 눈물을 글썽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타났다.
"너무해!왜 날 놓고 가는 거에요!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쳇,따라오잖아?[
라이는 아쉬운 듯 말했고 나는 더욱 빠르게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이내 깔끔한 길이 나왔고 서둘러 걸은 탓인지 에이니의 울음소리는 멀어져 있었다.
한 달하고도 열흘 만에 보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 길을 딛고 서자 조금 기분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길 위로 올라선 순간 멀찍이서 흐릿하게 들리던 에이니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응?"
[죽었나?]
"에라,이......!"
퍼억!
[쿨럭!마,마스터?]
내 발길질에 라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언뜻 푹신에 보이지만 녀석은 분명 매우 단단하기 때문에 발가락이 얼얼했다.
하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오랜 경험으로 라이에게 직접적인 터치를 가해봤지 나만 아프다는 걸 알고도 때렸기 때문이다.
"쯧,에이니한테 가봐."
[네에엑?왜요?]
"너 같은 놈이 물어 죽일까 봐 그런다!얼른 가서 데리고 와!"
[히잉~]
다시 한번 발길길을 가할 태세로 발을 들어 보이자 라이가 꼬리를 말며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프지도 않은 매질에 설설 기는 것을 보면 나름 충직한 녀석이다.
일단 내가 뭔가를 시키면 이유를 묻기는 해도 거부하는 일은 없었다.
가끔 엉뚱하게 일을 처리해서 그렇지.
잠시 라이가 헤치고 들어간 숲을 바라본 나는 미엘타 쪽으로 먼저 걸음을 떼었다.
기다릴 것 없이 가고 있다 보면 알아서 따라올 터였다.
몇 걸음 가다 보니 문득 에이니에게 조금 심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저 또래의 아이들은 대개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영리했다.
에이니처럼 시끄럽게 울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들이 드리케의 유아반 학생이라는 점을 볼 때 평범한 아이들은 아니지만 분명 같은 또래의 아이 아닌가.
내가 10살 때를 떠올려도,미아나 이루제,앙숙인 레오,미리네를 봐도 그랬다.
하나같이 자존심 강하고 아이답지 않는 성격의 소우자다.
아,물론 전생을 떠올리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에이니가 우달리 유약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은 분명햇다.
아넬 언니와 그렇게 약속해놓고도 처음 이삼일만 조용했지 사흘째 밤부터 훌쩍이나 싶더니 어느 새 다루기 곤란한 울보 꼬마게 되어 있었다.
자주 우는 것은 아니지만 뻑 하면 엄마보고 싶다고 불만을 토하고 훈련 좀 시킬라 치면 또박또박 대드는데 하마터면 손을 올릴 뻔했으니 말 다 했다.
여러모로 에이니는 내게 곤란한 상대였다.
잘해주자니 말을 듣지 않았고 미워하자니 아넬 언니의 딸이라는 점과 앞으로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영 거치적거렸다.
되지도 않게 정령술이랑 검술을 같이한다고 떼쓰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정령술을 얕보는 태도가 아닌가?
한창 인상을 찡그리며 머리를 바쁘게 굴리는데 문득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라이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니 내가 나온 숲과는 길 하나를 두고 마주한 숲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아마도 나처럼 숲을 ,헤매다 나온 모양이었는데 조금 동질가밍 들어서 그들의 행색을 살폈다.
그들은 각기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후드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보이는 거라고는 후드에 가득 달라붙은 나뭇잎과 진흙 정도 일까?
전체적으로 어두운 차림새였지만 나 역시 비슷한 차림새였기에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숲을 여행하는 데 있어 이만큼이나 실용적인 차림새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입고 있는 후드와 로브는 아덜레이드가 직접 만들어준 것으로 온도 조절은 물론이고 항상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는 클린 마법이 걸려 있는 나름 마법 아이템이다.
누구한테나 어울리는 깔끔한 밝은 회색이어서 시중에 팔아도 제법 돈을 만질 수 있을 터였다.
클린 마법이 걸려있다는 것 되새기면서도 혹여 저들처럼 나뭇잎이나 흙이 묻었을까 싶어 옷차림을 훑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라이가 수풀에서 나왔다.
[마스터!다녀왔어요.칭찬해주세요.]
한달음에 내 쪽으로 뛰어오는 라이와 엉거주춤한 자세로 수풀 사이에서 나를 바라보는 에이니.
한껏 풀죽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숲에서 넘어진 듯 무릎에서는 핏물이 줄줄 흘렀고 볼에도 긁힌 자국이 있었다.
에잇,처량맞은 꼴하고는......괜스레 찔리잖아.
[마스터,제 말좀 들어보세요!왜 안오나 했더니 멍청하게 땅바닥에 자빠져 있지 뭐에요?나무뿌리 사이에 다리가 꼈는데 그걸 못빠져 나오더라고요.약해빠졌죠?]
"에휴......"
짧은 한숨을 내쉰 나는 숲과 길의 경계에 오도카니 서 있는 에이니에게 다가갔다.
에이니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조금씩 뒤로 물러서더니 내가 완전히 다가섰을 때에는 숲 속으로 몸을 들인 상태였다.
에이니의 두 눈에 깔린 감정을 읽어보자면 강한 반감 정도일까?
아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방금 전에 숲에 버리고 왔던 것이 더욱 골이 된 것 같았다.
"훌쩍......"
눈물을 삼키는 에이니를 보자니 울컥하고 또다시 더러운 성질이 고개를 들었지만 내가 심했던 것고 있고 해서 나는 에이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일단 씻고 좀 먹어야 될 것 아니야?"
하지만 에이니는 내가 내민 손을 잡기는 커녕 오히려 고개를 내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밀어진 내 오른손이 무안해졌다.
이 꼬맹이가?
제가 잘못한 건 생각도 안 하고 지금 저 삐쳤다고 시위하는 거야,뭐야?
[야!꼬맹이.마스터가 오라잖아!]
"싫어!저리 가!"
내가 뭐라고 화를 내기도 전에 곁에 있던 라이가 먼저 다가가 에이니의 옷자락을 물어 당겼다.
그에 라이의 하얗고 날카로운 이가 번뜩이자 에이니가 기겁하며 주저앉았다.
원래 늑대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고 에이니의 입장에서는 말까지 하는 늑대다 보니 더욱 그런 모양이다.
처음에 라이를 타고 이동하는 것을 거부한 것만 떠올려 봐도 알 수 있었다.
에이니가 진저리를 치며 손을 휘젓자 라이가 귀찮은 듯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마을이 코 앞인데 여기서 죽치고 있고 싶지 않았고,나는 에이미가 거부하든 말든 에이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귀찮게 하지 말고 어서 와!"
에이니는 입술을 앙다물며 고개를 도리질쳤지만 내가 아무리 피곤하다고 해도 고작 8살 짜리 소녀의 힘에 질 정도는 아니었기에 억지로 에이니를 잡아끌어 길로 나왔다.
"시,싫어요!"
빽 소리를 지르는 에이니.
나는 그런 에이니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에이니의 두 눈을 빤히 마주보다가 꽉 쥐고 있던 에이니의 손목을 미련없이 놓아버렸다.
"아,그래?그럼 잘 있으렴,에이니."
[와!얼른 가요,마스터!"
그래,나도 귀찮다.
나는 내가 손을 놓은 순간 하얗게 변하는 에이니의 얼굴을 봤기에 더더욱 에이니를 내버려두었다.
알아서 따라오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방금 전 숲 속에서 그랬듯 에이니는 결국 나를 따라올 수밖에 없었고 나도 끝내는 에이니를 챙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버릇을 좀 고쳐줘야겠다.
괜히 오냐오냐 해줬다가는 점점 기어오를 테니 말이다.
게다가 내 예상이 맞는다면 에이니는 아마도 3초 내로 울음을 터뜨릴 거다.
세볼까?
3,2,1......
"흐흐,흐아아앙.다 이를거야!왜 뻑하면 나 버리고 가!"
"빙고!"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쯤에서 돌아볼 수도 있지만 나는 에이니가 울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라이는 나보다 두어 걸음 앞서서 걸었는데 에이니가 긿긴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다.
"흐아아앙.엄마아아......엄마~흐엉!"
내 딴에는 강하게 기른다고 험하게 대하는 것이지만 제 딴에는 많이 서러웠는지 에이니가 숨이 넘어가라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처량한지 문득 뒤를 돌아볼 뻔했다.
안 되지 안돼.
버릇을 단단히 고쳐야 한다고!절대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 먹었는데 그런 나의 굳은 마음을 무색하게 만드는 부름이 들려왔다.
"어이 새댁!애 데려가!"
......설마 나한테 한 말은 아니겠지?그러리라 믿......
"거기!회색 망토 입고 누렁이랑 가는 새댁!딸내미 데려......"
"이익!누가 새댁이야!누가?두번이나 강조하지 마!"
[쿠악!누가 누렁이야!누가?]
크악!어떤 자식이야!
"아르르르."
라이가 하얗다 못해 반짝이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사납게 울었다.
나 역시 내게 사나운 어금니가 있다면 그와 같이 행동했을 거다.
뒤를 돌아보니 세 명의 여행객 중 유난히 덩치가 큰 사내가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다.
"흠,그럼 새댁 보고 새댁이라 그러지 뭐라 그래?아줌마?"
"......라이,물어!"
새댁을 넘어 아줌마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나는 누르고 눌러 온 짜증을 쏟아낼 제물을 찾아냈다.
오냐,너 잘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뭣 같은데!
실로 오랜만에 내려진 나의 공격 명령에 라이가 한달음에 사내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사내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휙 공중으로 뛰어올라 그 반동 그대로 사내를 덮쳤다.
사내는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리만치 쉽게 뒤로 넘어졌다.
"훅!"
카캉
그 찰나의 순간 덩치의 사내가 검집 채 빼들어 라이의 입을 막은 듯 했지만 그 검집은 라이의 이빨 앞에서 마치 유리조각처럼 조각조각 부서져내렸다.
라이가 입 안에 남은 검의 파편을 아그작아그작 씹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먹보 같으니라고......
내가 사람들 앞에서는 흡수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인지 녀석은 친히 씹어 삼키려는 모양이었다.
"카드득,까각."
그런 라이를 밀어내려는 듯 사내가 버둥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그에 아랑곳할 라이가 아니었다.
한걸음 다가선 내 눈에는 라이가 한쪽 앞발로 넘어진 사내의 가슴을 꾹 누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렁이라는 칭호가 어지간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새댁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라이가 다시 사납게 입을 벌리며 재차 덮치려는데 곁에 있던 사내 둘이 검을 빼들어 라이의 등과 머리를 내려쳤다.
카앙!
캉!
"허억!"
검들은 라이에게 상처를 내기는 커녕 허망하게 튕겨 나왔고,당연히 검을 휘둘렀던 두 사내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경악에 가득 찬 표정이다.
이내 라이의 이빨이 사내의 목 줄기에 닿았을 때 나는 라이를 제지해야 했다.
"그만해,라이!"
"아르르......크흥!"
평소와 달리 엉덩이가 아닌 목을 노리던 라이는 내 명령에 아쉬운 듯 사내의 몸에서 내려와 내 곁에 섰다.
나를 올려다보는 라이가 콧등을 씰룩거렸다.
저 사내의 숨통을 끊지 못한 것이 어지간히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러개 왜 목을 물려고 그래?평소처럼 엉덩이나 물 것이지.]
만약 목이 아닌 엉덩이라면 나도 말리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이 몸을 하고 있으면 자연스레 목에 입이 가는 걸요.전에는 뱀이었으니 그랬던 거죠.그리고 이 몸을 보고 누렁이라니!죽어 마땅하잖습니까,마스터!]
[너 누렁이 맞아]
[허걱!]
라이의 털색은 좋게 말하면 진한 황금빛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누런색이었다.
"내 검이......!"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가 손잡이만 남은 자신의 검을 보며 믿을 소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꽤나 멍청한 표정으로 나는 그런 그를 한껏 비웃어주었다.
새댁?아줌마?그러가 어디서 감히 그런 망발을......
"흥!그러게 말을 바로 해야죠.누굴 보고 새댁이라는 거야?"
"으으익!겨우 그런 거롤 사람을 죽이려 들어?당신 제정신이야?"
내 비아냥에 넘어져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쭈,저게?
이미 새댁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그는 내게 밉보여 있었고 얼굴을 보아 하니 나이도 나와 비슷해 보였기에 나는 거리낌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죽였나요?죽였냐고?안 죽었잖아!"
저만 소리 지를 줄 아냐?나도 소리 지를 줄 알아.
이거 왜 이러셔?
"뭐,뭐 이런 몰상식한 여자가 다 있어?"
"몰상식"?어디 몰상식한 여자한테 한번 먼지 나게 맞아 보시렵니까?아앙?"
"뭐야?새댁을 보고 새댁이라고 그런 게 뭐가 나빠!애까지 딸려서 아가씨 소리 들어려는 건 도둑 심보라고!"
"이,이봐!미쳤어?누가 누구 딸이야?누가?난 아직 싱싱해!아직 십대 소녀라고!눈알 똑똑히 뜨고 봐!"
순간 흥분한 나는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혀 내리며 그나마 미약하게 유지하던 존댓말을 버리고 소리쳤다.
이 몸은 분명 19살이란 말이다!물론 전생을 합치자면 조금 민망해지지만 얼굴은 분명 19세의 소녀의 것이었다.
아차,이제 소녀는 무린가?
"그럼 저 애는 뭐야?"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던 에이니는 돌연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황급히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으이구,저런 답답이 같으니라고.
앞으로 어떻게 가르쳐야 될지 까마득하기만 했다.
"쟤는 제자라고!딸이 아냐!눈이 있으면 똑바로 봐.네 눈은 장식이냐,이 멍청아?"
"머,멍청이?"
사내는 멍청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너덧 걸음 떨어져 있던 사내는 한 손을 번쩍 치켜들며 한 대 치려는 기세로 다가오려고 했고 그에 따로 부르지 않았음에도 라이는 잽싸게 움직여 나와 사내 사이로 끼어들었다.
"카르르릉."
이미 라이에게 한차례 당해본 사내가 움찔 몸을 멈췄고,사내의 일행인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와 사내의 몸을 부여잡았다.
나와 입씨름을 벌인 사내가 제법 덩치가 커서 그 둘은 사내에게 매달린 듯한 모양새였다.
"진정해,채드!네가 잘못한 거야!"
"채드 씨!진정하세요!"
그중 평범한 생김새의 사내가 타이르듯 할하자 채드라 불린 사내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말했다.
"에잇!그래도 그렇지,개를 풀어 사람을 물게 하다니?너무한 것 아냐?광견병이라도 옮으면 어쩌려고!"
[과,광견병?]
졸지에 광견병 걸린 누렁이가 된 라이는 화가 지나친 모양인지 말을 잇지 못했다.
"채드!아무튼 진정해,진정!"
"채드씨,제발~!"
씩씩거리던 채드는 일행이 연신 다독거리자 조금 효과가 있는지 진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댁이 진정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지!
나느 한 손으로 라이의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진정 좀 됐어?그러먼 사과하시지."
"......사과?"
"그래요,사과!멀쩡한 숙녀를 졸지에 유부녀로 만든 것에 대한 사과는 해야죠."
[저도요!저도 사과 받을래요,마스터.]
너는 누렁이 맞다니까.
나는 잠시 라이를 내려다보았다.
개치고 덩치는 크지만 온몸이 진한 금색으로 되어 있어서 늑대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무늬가 없기 때문일까?
오히려 덩치는 큰 누렁이에 가까워 보이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서 사과해,채드!숙녀에게 새댁 운운한 것은 분명 네 잘못이다."
"그래요 채드 씨.사과해요!"
"우,우씨이......!"
다행히 일행 두 명은 정신이 제대로 박힌 것 같았다.
조금 진정이 된 나는 슬그머니 다시 존대를 붙였다.
최소한의 존대이기는 하지만.
"자자,사과하시죠!죄송합니다.제가 실수했습니다,라고.그렇지 않으면 우리 누렁이에게 매운 맛을 보게 될걸요."
"어서 채드!"
"채드 씨!"
일행의 재촉에 채드의 인중이 길게 늘어났다.
이봐,흉한 표정은 집어치우라고!
[마스터,저는요?]
[넌 됐어.]
자신도 사과를 받고 싶은지 라이가 칭얼거렸다.
하지만 누렁이는 맞는 말이잖아?
"......죄송하게 됐수다."
"이거 미안합니다.일행이 큰 실례를......"
"용서하세요.원래 채드 씨가 이런 분이 아닌데 산행이 피곤해서 그러신 겁니다.이해해주세요."
마지못해 채드의 입에서 나온 사과는 내가 바란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곁에서 굽실거리는 두 남자를 봐서 적당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뭐,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사과 받은 걸로 치죠.앞으로는 조심하시길,흥!"
[마스터,이제 사과 받았으니 도시로 갈 건가요?]
[그래야지.]
꽤나 전부터 강조했다시피 나는 문명에 굶주려 있었기에 라이의 말에 도시쪽으로 몸을 돌렸다.
우선 제일 좋은 여관을 잡고 제일 비싼 식사를......
[마스터!그럼 제 등에 타세요.제가 순식간에 모셔다 드릴게요!]
[응?라이 네가 웬일로?]
평소 말 취급 당하는 걸 싫어하는 라이가 웬일로 자청해서 등에 타라고 하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도시로 가는 제일 빠른 방법이었고 거부할 이유도 딱히 없었기에 라이의 등에 올라타 목털을 움켜쥐었다.
라이가 슬쩍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가요?나중에 안 혼낼 거죠?]
[응?왜 혼내?]
[아니에요,마스터!그럼 가도 되죠?]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라이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갔다.
순간적으로 몸이 뒤로 기울었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라이의 이동 속도는 꽤나 빨라서 블론디(브라이트가 선물한 말)에 뒤지지 않았다.
눈을 두세 번 깜박거렸을 뿐인데 어느 새 저 멀리 미엘타의 성문이 보였다.
다른 도시라면 수도의 성문이다 보니 문지기가 일일이 신분패 검사라든지 보초를 목적으로 서 잉ㅆ을 텐데 미엘타는 부족 국가 코란의 수도인 만큼 수많은 부족의 사람들이 지나가기에 문지기가 없었다.
문지기가 설 때는 전시 때 정도일까?
사실 코란에는 도시라고 부를 만한 것도 수도인 미엘타 정도여서 문지기라는 계념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뭐 문지기가 없는 것이 나로서도 편한 일이고.
어느새 성문에 다다랐고 성문 안으로 즐비한 가게들이 보였다.
이제야 좀 쉬겠구나!
힐끔 뒤를 돌아보니 예의 세명의 남자는 이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라이가 빠르긴 빠르......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