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71)

그렇다.

마나 홀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힘을 줌과 동시에 자칫 생명을 앗아갈 수 도 있는 폭탄같은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몸속에 단 하나의 마나홀 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푸르다는 것만큼이나 변할 수 없는 진리 같은 것이다.

하물며 드래곤도 단 하나의 마나 홀을,아니 드래곤 하트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아니,두 개를 만들지 말고 단전의 마나를 이용해서 정령을 소환하면 되지."

[마스터,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요!마법사나 검사,정령사가 각기 마나를 모으는 장소가 다른 건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잖아요!]

마나 홀의 위치는 발휘하는 능력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사실이지만 마나는 사람의 몸을 이롭게 한다.

그렇기에 주로 많은 마법수식을 계산해야 하는 마법사는 머리와 가까운 심장에 마나홀,아니 서클을 만든다.

그리고 나같은 정령사는 정신력과 체력 등 모든 것이 종합되어야 하기에 몸의 중심인 명치에 마나 홀을 만든다.

그리고 주로 체력에 중점을 두는 검사들은 가장 손쉽게 마나를 쌓을 수 있으며 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단전에 마나를 모은다.

심장에 모은 마나는 두뇌순환에 도움을 줄 것이고 명치에 모인 마나는 몸을 골고루 이롭게 해줄 것이다.

단전에 모인 마나는 힘과 근력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테고,이처럼 각기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마법사는 정신력과 지력에 중점을 두는 만큼 체력이 약하다.

그렇기에 쉽게 내상을 입고는 한다.

마법이 실패하거나 반사되어 오면 가볍게는 각혈에서 심하게는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사망하기도 한다.

검사는 체력에 중점을 두지만 그만큼 정신력이 떨어지게 된다.

정신마법에 검사가 유난히 약한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검사는 내상에 강하고,내상을 당한다고 해도 마법사나 정령사에 비해 빠르게 회복한다.

정령사는 정령을 소환하고 유지하는 데 체력과 정신력이 동시에 소모되기 때문에 그 둘의 중간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정령사는 마법사에 가깝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론이다.

"알기야 알지.그렇다고 단전에 모은 마나로 정령을 소환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잖아.운용하기 힘들 뿐,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하,하지만 단전에 마나를 모으면 정신력이......]

"정신력이야 따로 키워주면 되지!친화력이 따라주니까 에이니라면 괜찮을 거야."

나는 어느 샌가 에이니를 내 제자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라이벌로 만드느니 차라리 말 잘 듣는 제자로 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좋은 것으로 나를 이롭게 한다.

내 인생 철학이지 않은가?

[그,그래도......마스터는 지금 호랑이를 키우려고 하시는 겁니다.자칫 장성한 호랑이가 덤비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괜찮아.에이니가 호랑이라면 나는 드래곤일 테니까."

아마도 말이다.

여전히 투덜거리는 라이를 앞세워 동굴을 빠져나왔다.

동굴 주변은 작은 공터였는데 여기저기 커다란 바워가 있어서 나는 구중 하나에 적당히 걸터앉았다.

아직 아넬 언니는 오지 않은 모양이었고 주위는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동굴 안에서는 밝기만 하던 라이도 밖으로 나오니 영 빛을 내지 못했다.

어두운 건 딱 질색인데......

"아도......크흠."

나는 아돌을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 괘씸한 녀석을 벌써 부를 수야 없지.

감히 주인이 업슨 데서 주인 험담을 해?

평생까지는 아니어도 한 달 정도는 소환하지 말아야겠다.

[아,저기 와요,마스터.]

때마침 저 멀리 수풀 너머로 아넬 언니의 은발이 얼핏 보였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니 아넬언니가 점점 가까워졌고 언니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에이니도 보였다.

불안한 듯 떨리는 초록색 눈동자,그리고 언니와 손을 잡고 있는 탓인지 더욱 하얗게 보이는 피부색,객관적으로는 귀엽기 그지없는 소녀지만 언니의 부족 내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지니!"

연신 에이니를 돌보느라 내 쪽을 보지 않던 언니가 뒤는게 나를 발견한 듯 손을 흔들었다.

나도 언니를 따라 작게 손을 흔들어보였고,이내 공터에 다다른 언니가 뒤로 물러서는 에이니를 토닥여 내 앞으로 데려왔다.

에이니는 나를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는데,흡사 개를 마주한 새끼 고양이 같은 태도였다.

제자로 삼으려는 아이이니 나는 어떻게든 친해보려는 생각에 나름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에이니?"

"자,에이니.언니에게 인사하렴.너 때문에 언니가 오해를 샀잖니?"

"시,싫어.이 언니 이상해!마녀 고양이 같아!"

......이,이 계집애가?!

순간 내 눈이 번쩍 뜨이는 걸 느꼈는지 아넬 언니는 에이니를 슬쩍 놔줬고 내 눈길을 마주한 에이니가 후다닥 왔던 길을 도로 뛰어 갔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하고 다만 멀찍이 나무 뒤에 숨어 내 쪽을 주시했다.

야!고양이는 너지!

"미안해,지니.애가 원래 저렇지 않은데.....,.낮을 좀 가리기는 해도 착한 아이야."

"......마녀 고양이는 대체 뭐에요?"

"그,글쎄?"

[그거야 마스터 눈매가 워낙 사납게 치켜 올라가 있으니 그런......키악.]

주절주절 뭐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술술 말하는 라이의 귀를 한껏 잡아당겼다.

오늘 늑대 귀가 얼마나 늘어나는지 한 번 볼까?앙?

"지,지니!뭐하는 거야?"

"네?오호홋.그냥 귀에 파리가 앉은 것 같아서 떼어주려고요."

[마스터는 파리를 꼬집어서 잡으......케케켁!]

냅다 라이의 수염을 잡아당겼다.

뽑힐 리는 없지만 진짜 늑대라면 뽑히고도 남을 애정을 심어서 말이다.

물론 아넬 언니가 보기에는 쓰다듬어주는 걸로 보이도록 한껏 상냥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니는 여전히 동물을 좋아하는구나.예전에는 뱀이었지?"

"네,기억하시네요?"

"물론이지!그 뱀이 켄타와 앙숙이었잖아.뱀과 노는 켄타는 참 듬직했었지."

과거를 회상하듯 아련해지는 언니의 눈동자.

잠깐,듬직해?

뭐가?라이랑 피 튀기지 않는 혈투를 벌이던 게?

아넬 언니의 눈도 이루제 급인가?

"그,그래요?"

"그럼,얼마나 듬직했는데.그 완벽한 근육이라든가 털털하고 뒤끝 없는 성격.남자다운 배포까지.정말로 켄타는 남자 중의 남자였어."

"아하하핫.켄타 아저씨를 많이 좋아하셨나 보네요."

그 넘치는 근육과 단순 무식한 성격이 언니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단 말이지?

언니의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거야.

"나는 말이야 지니,내가 켄타를 사랑했고 그런 켄타를 닮은 에이니를 낳았다는 데에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어.다만 부족 사람들은 에이니의 피부색이 특이하다고 배척한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야."

코라느이 정글 부족들은 대개 부족 안에서 같은 부족 사람끼리 혼인을 치른다.

그렇기에 부족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친족이다.

부족 안의 모두가 서로 사돈이고 사촌이고 친척인 것이다.

더군다나 아넬 언니와 같이 검은 피부에 은발이 상징인 부족은 더더욱 그랬다.

외부의 피는 자신들의 상징을 더럽힐 뿐이라고 생각할 테니.

부족 사람들이 에이니를 배척한다는 걸 볼 때 언니는 굉장한 모험을 한 것이다.

"언니는......모험을 좋아해요.그렇죠?"

"응,나는 모험을 좋아해.그래서 대륙으로 나가 용병생활을 했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에이니를 낳았지."

"정말 후회하지 않아요?"

"그럼.나는 내가 인정한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었는걸. 켄타는 내가 인정한 유일한 남자야."

자신이 인정한 강한 남자의 아이를 낳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는다.

언니의 말이 나에게는 썩 와 닿지 않았다.

오히려 에이니라는 한 소녀를 힘들게 만들었으니 옳지 못한 결정이라고까지 생각된다.

하지만 조용히 웃고 있는 언니를 보자면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잘못 된 것 같기도 했다.

"......언니?"

"응?말하렴.지니."

"갑작스러운 얘기지만......제가 에이니를 데려가도 될까요?"

여전히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에이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 제안에 언니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던 언니의 얼굴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무,무슨 소리니,지니?에이니를 데려가다니?"

"이건 정령석이라는 거에요.그리고 이정령석을 사용하기 위해선 정령사가 필요하죠.그리고 그 정령사로 가장 알맞은 건 바로 에이니죠."

나는 동요하는 언니의 눈 앞으로 식물의 정령석을 들어 보였다.

"에이니가......?"

"네.에이니는 저조차도 탐날 만큼 뛰어난 친화력을 가지고 있어요.그러니 에이니라면 훌륭한 정령사가 될 수 있을 거에요.물론 저를 따라 드리케로 갔을 때의 이야기죠.

언니의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생각에 잠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언니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내 눈을 마주보나 싶더니 에이니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나를 마주본 언니는 입술을 꼭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던 두 눈동자는 결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떠나는 날이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아넬 언니는 실버 울프 부족의 수장,그러니까 족장의 딸이었다..

그러니 외부인의 아이를 낳고도 부족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고,외부인인 나에게 정령석에 대해 의뢰할 수 있었다.

"이만 갈게요,언니."

"그래.더 오래 머물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지니."

"아뇨,충분히 고마웠어요,언니.이로써 저는 언니에게 두 번의 은혜를 입었는 걸요"

언니는 나를 마을에 더 머물게 해주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아무리 족장 딸의 손님이라고 해도 외부인에 대한 배척이 유별난 실버 울프족 사람들이 나와 라이를 계쏙 반겨줄 리 없었다.

나도 한시라도 빨리 도시로 가기 위해 마을에 들어선 지 이틀째인 오늘 떠날 채비를 했다.

"......엄마,나 정말 가야 해?"

어젯밤 꽤나 울었는지 퉁퉁 부운 눈으로 에이니가 아넬 언니에게 물었다.

여전히 언니의 옷깃을 꼭 쥔 채였다.

"에이니,지니 언니를 따라가렴.언니가 너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야."

언니가 나에게 부탁한 것은 에이니가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개방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핍박 속에서 점점 작아지는 에이니를 보는 것이 괴롭다고 털어놓은 언니는 에이니가 마을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으면 드리케에서 거둬달라고 했다.

"엄마도 같이 가면 안 돼?"

"안 돼.나는 에이니 네가 부족 사람들이나 내 영향을 받지 않고 자라길 바란단다.너는 이제 스스로 걸어가야 해!"

지난 이틀 동안 보아온 에이니는 부족 사람들의 눈치와 구박과 질시 속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과도하게 엄마인 아넬 언니만을 따랐다.

언니의 딸 답지 않게 유난히 낯을 가리고 소심한 아이였던 것이다.

"왜?왜?엄마는 강한 전사잖아!그러니까 엄마는 닮아도 되잖아."

"안 돼!나는 강한 전사가 아니야,에이니.세상에는 나보다 더 강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단다.이 좁은 숲에서는 그것을 알 수 없어.드리케라면 너를 보다 똑똑하고 강한 어른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거야."

"흐,흐이잉.싫어,안 갈래!엄마랑 여기서 살 거야!마을 사람들이 나를 싫어해도 나는 엄마가 좋아!그러니까 엄마랑 살 거야!흐에에엥!"

결국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에이니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정령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려는 것이지 아이를 돌보는 보모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이렇게나 앙앙거리는 울보 꼬마라면 더더욱 그랬다.

보모 노릇은 마기한테 한 것으로 충분......

짜악!

엄마야!

나는 놀라 두 눈을 껌뻑거렸다.

시끄럽게 앙앙대던 에이니도 울음을 그쳤고 멀찍이서 우리를 지켜보던 마을 사람 몇몇이 놀라 수근거렸다.

[저게 일명 '싸대기 치기'기술,맞죠?부부싸움에서 몇 번 봤어요,마스터.]

[시꾸라!이 눈치 없는 개야.]

[저도 싸대기 치기는 조금 일가견이 있는데요.뱀일 때는 자주 했잖아요,마스터]

[죽을래?]

이제 왠만한 구박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라이는 내 살벌한 눈길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붉게 달아오른 에이니의 뺨을 훔쳐보았다.

앙앙대는 게 조금 시끄럽기는 했지만 난데없이 에이니의 뺨을 때린 아넬 언니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어,언니?"

"에이니!너는 실버 울프족의 딸이야!경박하게 울어선 안 돼!네가 어디 있든,무얼하든,너는 분명 실버 울프족의 일원이다.그것을 잊어서는 안 돼!네가 실버 울프족으로서 지켜야 할 세가지가 뭐지?"

"후울쩍.첫째......긍지를 잃지 않는다.둘째.꺾일 지언정 휘어서는 안 된다.셋째,원수는 잊되 은혜는 잊어서는 안 된다!나는 자랑스러운 숲의 딸로서 실버울프족의 긍지와 의지를 이어갈 것이다."

울먹이던 에이니가 울음을 그쳤다.

붉게 달아오른 뺨이 아프지 않은지 아니면 그런 체하는 건지 낭랑하게 말하는 에이니는 조금 의젓해 보였다.

"그래,그리고 한 가지 더.우리 일족의 성인은......평생 단 한 번의 눈물이 허락된다.에이니,너는 이제 내 곁을 떠나니 스스로 당당한 일족의 일원이 되어야 해.그러니 더는 울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때린 에이니의 볼을 쓰다듬은 언니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언니의 눈에도 분명 가늘지만 한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저것이 언니의 평생 단 한번의 눈물일까?

"네,네에.안 울게요.훌륭한......정령사가 되어 돌아올 거에요."

문득 엄마가 보고싶어졌다.

이제 얼굴도 흐려진 전생의 가족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흐릿해지는 그 얼굴 위로 겹쳐진 것은 이 세계에 계신 부모의 얼굴이었다.

연이어 나아게는 낯설기만 하던 오라비와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아,이제 나도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마탑에서 통신마법을 이용해 학교와 본가에 간단하게 소식을 전한 뒤 산맥을 넘어 엘란을 경유,드리케로 돌아간다는 것이 현재의 계획이다.

산맥을 넘을 것 없이 그대로 코란의 정글을 헤치고 나가도 드미트리에 갈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조금 돌아가더라도 길이 잘 정돈되어 있고 먹을 것과 숙박시설이 풍부한 엘란을 경유하는 것이 백번 나으리라.

엘란을 경유할 경우 산맥을 두 번 넘어야 한다는 불편사항이 있지만 그 정도 불편함이야 참아낼 수 있었다.

엘란을 경유하지 않고 코란을 가로질러 매일같이 춥고 음습한 정글 속에서 배고픔에 몸부림치는 것보다는 훨씬 편한 길 아니겠는가?

"엣취!"

문득 등을 돌리고 잠들어있는 에이니를 바라보았다.

모처럼 피워놓은 모닥불에서도 멀찍이 떨어져 잠들어 있었는데 내가 어지간히도 불편한 모양이었다.

에이니가 나와 붙어 있을 경우는 함께 라이의 등에 타고 이동 중일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처음에는 제 발로 걷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라이를 쫓아 뛰어오다 대 여섯 번쯤 구르고 힘에 부쳐 숨이 넘어갈 상태가 되어,제 발로 라이의 속도를 쫓아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절실히 실감하고 라이 등에 올라탔다.

마을을 떠나고 지난 일주일간 내가 에이니에게 느낀 점이라면 생김새와 달리 고집은 세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녀석은 기어코 나에게서 식물의 정령석을 빼앗아갔다.

죽어도 자신이 가지고 다니겠다는데 혹여 잃어버릴까 봐 주지 않으려고도 했지만 자신의 부족 것이니 자신이 갖겠다며 생난리를 피웠다.

결국 나는 정령석을 넘겨야 했다.

이미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물건이기도 했고 말이다.

게다가 나는 마기가 준 검과 식량주머니를 챙기기에 급급했다.

[마스터,저 꼬맹이 여기에 버리고 가는 게 어때요?]

모처럼 마음에 드는 의견이지만......

"안 돼."

잘 키워서 드미트리에 도움이 될 만한 정령사로 키워볼 겸,그 넘친다는 친화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볼 겸해서 데려온 아이지만 에이니는 아넬 언니으 ㅣ딸이었다.

내게 있어 중요한 두명의 은인 중 한 명의 하나뿐인 딸.

켄타의 딸이기도 하지만 그건 제쳐두자.

음,따지고 보면 켄타도 생명의 은인이긴 한데......

그렇다면 내 은인은 아넬 언니와 에쉬 외에 켄타도 포함되는 건가?

[왜요?저는 저 녀석 등에 태우고 다니기 싫어요,마스터!]

"......그럼 오우거로 변해서 안고 다닐래?"

[쳇!]

오우거로 변하는 걸 뱀만큼이나 싫어하는 라이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 눈길을 피했다.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쉬고 있는 지금도 마치 진짜 늑대가 휴식 중인 것처럼 두 발에 턱을 괴고 커다란 몸을 둥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다.

변신중의 행동은 대개 그 흡수한 몸이 기억하고 있는 본능에 따르는 듯했다.

그런데 왜 새로 변하면 못 나냐고요.

잠시 라이와 에이니를 번가랑본 나는 라이에게 다가갔다.

"불침번 잘 서라."

어차피 잠이라는 개념이 없는 라이이기 때문에 나는 부담 없이 라이에게 불침범을 서게 한 뒤 베개로 더 없이 알맞은 크기인 아리의 꼬리를 배고 눈을 감았다.

지루한 숲 속의 시간은 금세 흘렀다.

매일 밤 라이의 꼬리를 베고 잠들일 열흘째인 오늘,나는 조금 화가 나 있었다.

바로 에이니 때문에.

"에이니!내가 분명 명상을 하고 있으라고 했잖아!그런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

수도 미엘타에 가까워졌기에 운다인을 타고 주변을 둘러본 나는 잘 다듬어진 길을 발견했다.

이제 울퉁불퉁한 숲길을 떠나 제대로 된 길을 걸어 미엘타로 갈 생각에 들뜬 기분으로 에이니와 라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에이니는 내가 지시한 명상이 아닌 쌍검술 연습에 한창 빠져 있었다.

그 순간 뭐랄까,배신감?

아니,그보다는 가볍지만 분명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대답 없이 다만 자신의 손에 들린 두 개의 검을 꼬옥 쥐는 에이니를 보자니 점점 짜증이 치밀었다.

"말해봐.왜 명상이 아니라 칼질이나 하고 있었던 거지?"

"카,칼질이 아니에요!쌍검술이라고요!"

에이니는 울컥했는지 처음으로 내게 '네,아니요'가 아닌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내 화를 부추길 뿐이었다.

"칼질이든 쌍검술이든@네가 배워야 할 건 정령술이야!검술이 아니라!알아들어?"

"나,난......쌍검술을 할 거에요!쌍검술은 엄마가 가르쳐준거란 말이에요!"

아아,정말이지 철없는 이런 어린애 따위 마음 같아서는 있는 힘껏 때려주고 싶었다.

두 눈을 또랑또랑 치켜뜨고 나를 노려보는 아이.

울음이 많은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내게 대들 때를 보면 여간내기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최근 에이니의 심리를 들춰 보자며 나를 향한 적개심과 아넬 언니에 대한 그리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그럼 정령술은 필요 없겠구나.그렇다면 당장 네 집으로 돌아가!나는 정령술을 가르칠 제자를 데려왔지 어중간하게 검술이나 하려는 꼬마를 데려온 게 아니란 말이야!"

"못 가요!아니,안 가요!나는 엄마랑 약속했어요!꼭 훌륭한 정령사가 될 거라고요!정령술과 쌍검술......둘 다 할 거란 말이에요!"

"웃기지 마!정령술이 그렇게 우스워 보여?검술과 함께 배워도 될 만큼 우스워 보이냐고!네가 얼마나 대단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넌 이미 다른 정령사보다 뒤쳐졌어!마나 홀을 단전에 만든 이상 너는 남들보다 두 배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다 할 거에요!쌍검술도......정령술도......다 할 거야!흐아앙!"

내가 어쩌자고 이런 대책 없는 꼬맹이를 제자 삼는답시고 데려왔지?

친화력이 넘치면 뭐해!

검술에 정신이 팔려 있는 데다가 뻑하면 대들고 말로 안 되면 울어버리는 이런 어랜애를!

나는 분명 벌겋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진정하자,진정.이런 꼬맹이 때문에 흥분하면 안 되지.

[......그냥 정령검사 시키죠,마스터?]

잠자코 있던 라이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속편한 녀석 같으니라고.

"안 돼.그랬다가는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녀석이 될 거라고!"

[그럼 어때요?어차피 식물의 정령을 소환할 정도만 가르치면 되는 녀석인데.]

그렇기야 하지만 처음 제자로 삼은 아이니만큼 이왕이면 훌륭하게 키우고 싶었다.

어중간한 녀석으로 키우기에는 라이도 인정한 친화력이 아까웠다.

왜 정령사라는 재능이 있으면서도 검사 따위를 하겠다는 거야?

"흐아앙~당신 싫어!우리 엄마 보고 싶다고!왜 만날 잔소리만 하는 거야!흐이잉."

"시끄러워!뻑 하면 울지 좀 마!"

빽빽 불만을 토하며 우는 에이니에게 짜증스레 말했다.

이게 바득바득 기어 올라?

그래 너 한 성격 한다 이거지?

"다,다 할거야.엄마랑 약속했단 말이야.흐잉!"

"한 가지만 묻자.에이니 너는 네가 검술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니?"

"훌쩍,이익......"

눈물 고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에이니는 영락없는 8살짜리 소녀였다.

고집 센 울보 꼬마.

"왜 말을 못해?대답해봐.넌 네 스스로 네가 검술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그렇다면 둘 다 동시에 해도 좋아."

"난......검술에 재능은 없어요.그래서......더 하고 싶어요!검술은 엄마가 가르쳐 준 거고,부족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대화가 안 돼,대화가!

대체 왜 재능도 없는 검술 따위를 연마하겠다는 거야!

검술 따위 정령술에 짐이 될 뿐인데!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녀석이 아직 어려서 모르는 모양이다.

정령술과 검술을 병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를.

"이렇게 하자.앞으로 5년,네가 13살이 될 때 까지는 정령술만 하는거야. 그리고 그 뒤에는 쌍검술을 하든 창술을 하든,네 마음대로 해도 돼.그때는 나도 일절 너에게 터치하지 않을게,어때?"

"하지만......5년이나 검을 놓으면 여태껏 한 훈련이 헛수고가 되는 걸요."

"그거야 네 사정이지.난 정령술 선생이지 검술 선생이 아니니까."

내 말에 에이니는 울상을 지었다.

조금 너무한가 싶기도 하지만 에이니가 계속 어중간한 검술을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에이니에게 저 두개의 검이 어떤 의미인지는 나도 알겠지만 정령술을 배우는 데 있어서는 짐일 뿐이니 한시라도 빨리 떼어내야 했다.

난 이왕이면 호랑이를 기르고 싶지 어중간히 덩치만 큰 고양이를 기르고 싶지는 않았다.

"흐,흐이잉~흐에에엥."

울상을 짓고 있던 에이니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 꽤나 곤혹스러웠던 모양이다.

"울지만 말고 말을 해!말을!"

"흐아아앙,엄마아~"

싫다,싫어.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걸까?

자질이 보인다고 해서 이런 어린애를 데려온 것이 벌써부터 후회가 되었다.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잊알라치면 훌쩍거리며 잠드는 걸 보는 것도 곤욕인데,눈앞에서 대놓고 연이어 울어대니 죽을 맛이었다.

"시끄러워!너,너 정말 그러고도 아넬 언니의 딸 맞아?"

"난,난 분명 우리 엄마 딸이에요!히끅!"

"믿을 수가 없어!아무리 애라도 해도 그렇지.왜 그렇게 울어대는 거야?넌 바로 열흘 전에 내 눈앞에서 아넬 언니와 약속했잖아!이제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그,그치만......!"

대책 없는 꼬맹이 같으니라고!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싶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다!

아마 에이니를 내 제자로 데려온 일은 내 평생 가장 치명적인 실수로 기록되리라.

마기와 헤어지고 이젠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쁨과 은인인 아넬 언니를 만나고 거기에 새로운 두 정령과 계약했다는 기쁨에 아둔해졌던 거야!

모처럼 발견한 재능 있는 아이를 데려가서 제자로 삼을 생각만 했지 이렇게나 골치 아플지는 몰랐다.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아이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묻겠어!정령술이야?검술이야?"

"난......모르겠어요.난 둘다 해야돼요.하나를 선택할 수 없어요!"

[아,짜증나.마스터 콱 목줄을 뜯어버릴.,.....]

"아악!몰라!네 마음대로 해!나는 미엘타로 가겠어!피곤해 죽을 것만 같다고!"

열흘 동안 쌓인 피로,인 정확히는 마기에게 잡혀 레어에서 생활하면서부터 조금씩 쌓인 피로와 짜증이 폭발해버렸다.

나는 철인이 아니란 말이다.정령사라고!

내가 한 수련들은 정령술에 관한 거지 체력수련이 아냐!

아무리 편하게 왔다고는 해도 열흘이나 숲을 헤매고도 멀쩡할 수는 없단 말이다!

나는 웅얼거리며 이도저도 아닌 태도를 보이는 에이니에게 화가 났다.

그 정도의 문제에도 분명하게 답하지 못해서야 어디 마음 놓고 가르치겠는가?

피곤에 지친 몸으로 더 이상 에이니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서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들어가고 싶었고 따끈따끈한 고기가 먹고 싶었다.

나는 단숨에 몸을 돌려 숲을 헤치며 걸어 나갔다.

"이익,정말 싫어!"

[마스터,어디가요?마스터!저건 버리고 가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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