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가 한껏 입맛을 다셨다.
아아,세상은 아름다워라.
새로운 인연
마기의 레어를 떠나고 어느 덧 일주일이 흘렀다.
여비로 쓸 보석도 마기에게 넉넉히 받아왔고 적지만 먹을 것도 얻어왔다.
워프는 이용하지는 못하지만 대신 오우거로 번신한 라이의 어깨나 손바닥 위에 앉아 있었기에 딱히 힘든 여정도 아니었다.
다만......
꼬르르륵
"배,배고파아......"
먹을 것이 떨어진 지 어느덧 하루가 흘렀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여전히 광활한 숲을 헤맬 뿐이었고 도시는 커녕 작은 마을도 보이지 않았다.
뭘 잡아먹으려고 해도 보이는 건 대부분 몬스터들이나 늑대 무리.
나는 마기와 달리 몬스터를 먹을 만한 위인이 못 되었고 늑대 고기를 씹을 만큼 굶주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간혹 보이는 토끼나 사슴 따위를 먹을 만한 비위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 까탈스러운 줄은 나도 몰랐다.
오래 걷지도 못하겠고 비린 음식도 못 먹겠다.
나름 아카데미 생활이 고급스럽게는 했던 모양이다.
나는 따뜻하게 데운 스프를 시작으로 스테이크나 생선찜 같은 간이 잘 배인 음식을 먹고 싶었다.
하다못해 과일이라도,지금은 모두 소화되어버린,마기가 주었던 육포와 과일들이 그리워졌다.
아아,질렸다고 버린 게 한 두개가 아닌데.
[그러게 반대 쪽으로 가자니까요,마스터!]
"아덜레이드가 그랬잖아!이쪽으로 조금만 가면 마을이 있다고."
쳇,제 집 주소도 모르는 드래곤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머릿속에 대륙지도가 있는데 이러고 있어야 한다니.
마기 이놈......
[마스터도 참,우리가 흡수한 게 얼만데 순순히 길을 가르쳐줬겠어요?]
"씨이,그래도 드래곤 말을 안 믿으면 누구 말을 믿어?"
마기에게 받은 선물은 대충 세 가지다.
마기가 만든 검 하나와 본의 아니게 라이에게 준 드래곤 하트,그리고 자신의 보물들!
분명 그것은 선물이었다.
강탈이 아닌 선물!
보물을 주겠다는 아덜레이드의 말에 나는 산더미 같은 보물 중 대략 3분의 2정도를 라이로 하여금 흡수하게 했다.
반만 흡수할까했지만 모처럼 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었고,다 흡수하자니 또 인간 나라에 가서 강탈 해올까 봐 언덕을 이룰 정도만 남겨두었다.
몽땅 흡수해 왠지 밉보이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뭐,그 정도로도 충분히 밉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라이가 있으면 언제든지 보석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굳이 그렇게 많은 양의 보석을 흡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이는 자신이 흡수한 보석이나 금속에 한해서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이것저것 많이 흡수해둬서 나쁠 것은 전혀 없었다.
물론 기존에 흡소한 보석이나 금속을 증식시킬 수도 있지만 그에 따르는 마나를 따지느니 새로 보석을 흡수해두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흡수한 것을 뱉기만 하는 것은 마나가 거의 필요 없어서 금고 역할도 한다.
그건 그렇고 정말 아덜레이드가 길을 엉터리로 가르쳐준 걸까?
이쯤 되니 조금 의심이 들었다.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숲이 끝나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정글화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군데군데 늪지대도 나오고 말이다.
드래곤의 말은 그 하나하나가 약속이다.
거짓은 있을 수 없고 작은 거짓이라도 내뱉었다가는 그 넘치는 영생과 무한한 힘을 잃고 한낱 덩치 큰 몬스터가 되어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려야 할 터였다.
[쳇,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다 흡수해버릴 걸 그랬어요.그렇죠,마스터?[
나는 오우거로 변신한 라이로 하여금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깍지를 끼게 하고 그 위에 앉아 이동 중이었다.
그렇다보니 당연 위를 올려다 보면 금색 오우거의 커다란 얼굴과 이빨이 보였다.
그리고 지금 그 금색 오우거는 나를 내려다보며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아,오우거는 영 얼굴이 부담스러워서 못 봐주겠다.
다음부터는 늑대로 해야지.
"그러게.그보다 얼굴 좀 치워봐,침 떨어질 것 같아."
[에엑!전 침 없어요,마스터!]
"눈물은 나던데?"
[그,그건......응?]
꼬르륵,꼬르르륵
라이의 눈물은 다이아래요~
뭔가 핑계를 대려던 라이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일주일 내내 내가 잠들 때를 제외하고는 한시도 쉬지않고 걸어온 라이다.
피로를 느끼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니 라이에게는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니었다.
다만 지루한 일일 뿐이다.
게다가 왠만한 몬스터나 짐승들은 라이의 생김새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니 여정은 편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진짜 오우거와 달리 육중한 몸무게를 자랑하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지만 그 특유의 험상궂고 부리부리한 생김새나 커다란 덩치만으로도 숲의 지배자를 흉내 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뭐,오히려 괴력 면에서는 라이가 월등히 앞서지 않을까 싶다.
우우거가 제법 영리하다는 건 9년 전에 당해 봤으니 대충 알지만 그래봤지 몬스터였다.
"왜?"
[약 30미터 앞에 사람이있습니다,마스터.]
"몇명?혹시 마을 아니야?"
[마스터의 꼬르륵 소리 때문에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요?]
쳇,좋겠구나.
너는 배고플 일이 없어서!
나는 연신 배고픔을 호소하는 배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맞으면 알지?"
[몰라용]
라이가 오우거의 얼굴로 귀여운 척을 했고 나는 차마 그 모습을 봐줄 수가 없었다.
욕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 근처에 사람이 있다고 하니 소란을 피할 겸 적당히 라이를 변신시켜야겠다.
"일단 1번에서 5번 사이로 적당히 변신해."
[늑대로?]
"그래."
1번에서 5번은 변신할 수 있는 동물의 차례다.
1번은 당연히 뱀,2번은 늑대,3번은 여우,4번은 쥐,5번은 새.
물론 새로 변신해도 날지 못하기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12번까지 있지만 6번인 오우거를 빼고는 7번부터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라이가 애용하는 것은 대개 늑대나 여우,간혹 내 명령에 죽지 못해 오우거 정도다.
최근에는 거의 오우거였고.
라이의 손에서 내려 땅을 딛고 섰다.
커다란 황금빛 오우거의 몸이 순간 녹아내리는가 싶더니 금세 부피를 줄여 늑대의 형상이 되었다.
변신 중인 라이는 흡사 아메바,아니 슬라임 같은 모습을 모여준다.
물컹물컹하지만 끈적이거나 묻어나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늑대로 번한 라이는 역시나 황금색을 띠었는데 오우거 때보다는 약간 어두운 황금색이었다.
아마도 기존 동물의 털색에 조금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더불어 눈색도 선명한 황금색,전에는 검은 눈동자였는데.
나는 늑대로 변한 라이의 등에 올라탔다.
[어떻게 할까요,마스터?사람이 있는 쪽으로 갈까요?]
"그래."
한 달하고도 일지일만에 사람을 만날 생각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속직히 말하자면 뭐 좀 얻어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것도 있었다.
라이는 가벼운 몸짓으로 나무들 사이를 헤치면서 숲을 달렸다.
나는 그런 라이의 갈기 털을 꽉 움켜쥐고 몸을 낮췄다.
자칫 눈 먼 나뭇가지와 충돌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털이라기보다는 매우 가는 금속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저희들끼리 엉키기도 하고 뽑으면 바람에 날려갈 만큼 가벼운 금속 실.
나로선 그 재질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금속을 섞고 변형시켜서 늑대의 털과 가장 비슷한 느낌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솥단지에 넣고 끓일 때부터 마나가 많이 들긴 했다.
하지만 진짜 동물의 털 같은 느낌을 내기 때문에 마나가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 같으면 변신할 때마나 일일이 마나가 필요했겠지만 지금의 라이는 자도 ㅇ마나 충전기여서 내 마나가 필요할 일은 거의 전무했다.
[마스터!]
"응?"
급작스레 라이가 멈춰섰다.
[화살 날아옵니다.]
"무......으앗!"
나는 얼핏 고개를 들었다가 번쩍이는 화살촉을 발견한 순간 초인적인 속도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라이의 뒤통수를 움켜쥐어 앞을 방어했다.
태탱
팅
[마,마스,트어!으,악!]
"아돌!라이트닝 댄스!"
또다시 날아온 화살 몇 개가 라이의 얼굴이며 아슬아슬하게는 귀를 맞고 튕겨나갔다.
나는 그에 맞서 빠른 공격을 하기 위해 아돌을 불렀다.
라이트닝 댄스!
주변에 적으로 간주되는 모든 존제에게 연달아 쇼킹 그레이습 정도의 공격을 가하낟.
소수보다는 다수에게 빠른 속도로 적당한 충격을 주기 위한 기술이다.
[크하핫핫]
치리릿
"끼악!"
치칙
"쿠악!"
지지짓
아돌이 한 번 번쩍하고 움직일 때마다 나무 위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함꼐 무기로 보이는 검과 활,화살 등이 떨어져 내렸다.
돌도 있잖아?
[크카카캇!더 없어?응?더 없나,주인?]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모두 공격을 끝낸 모양인지 아돌이 정신없이 날아다니며 다음 사냥감을 찾았다.
시전어도 업시 한 공격인 데다가 원래 다수를 공격하기 위한 마법이었기에 위력이 반감되어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보였다.
오히려 나무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입은 부상이 더 큰 듯 했다.
"없어,돌아가 봐."
[엑?내 출현은 고작 이걸로 끝......]
아돌은 내 정령들 중에 공격력 면에서는 꽤나 쓸만한 녀석이지만 그만큼 산만했다.
아돌을 역소환한 나는 나를 공격한 괴한들을 노려보았다.
딱히 피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화살을 날려댄 녀석들에게 좋은 눈길을 줄 수가 없었다.
다섯 명의 사람 중 방금 추락으로 부상을 입은 게 하나,지금 도망 가는 게 둘.
"왜 날 공격했지?"
다리를 다쳤는지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주위로 두면의 사람이 몰려들었다.
대답은 커녕 더 이상 접근하면 덤빌 듯한 강한 경계태세.
내가 뭐 죽인데?
먼저 죽이려던 녀석들이!
나는 조금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은 갈색 피부에 회색 머리카락.
[그냥 싸그리 죽이죠,마스터!]
"......왜 날 공격했냐고 묻잖아!"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존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지금 조금 화가 난 상태였다.
갑작스레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무엇보다......배가 고팠다.
꼬르르륵
젠장,내 배는 눈치가 없는지 한참 분위기 잡는데 배고픔을 호소 했다.
그 덕인지 조금 긴장을 푼 그들이 입을 열었다.
"......너,외부인,여기 우리 땅!"
정글에 사는 부족 중 하나인 듯했다.
어색한 공통어였다.
정글부족이라......
짐작은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땅에 좀 들어갔다고 냅다 화살을 날려?
내가 그렇게 만만......
[지네 땅이라는데요?땅문서 보여달라 그래요,마스터.]
[닥쳐!]
도데체 어디서 이상한 것만 잔뜩 주워들어온 라이는 꼭 욕먹을 짓을 했다.
내가 라이를 노려보는데 다시 어눌한 공통어가 들려왔다.
"우리,지킨다!마을!너!킹왕짱 큰 늑대!위험하다!"
......저 인간도 어디서 이상한 공통어를 배웠네?
[푸헤헤헷!킹왕짱이 뭐냐,킹왕짱이?푸헤헤.쿠헉!]
늑대 주제에 쓸데없이 표정이 풍부한 라이가 웃겨 죽겠다는 듯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입을 길게 찢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앞발 하나를 들어 보족 사람들을 가리켰다.
딴에는 웃긴 모양이었는데......
"이 보신탕이?그게 웃겨?웃기냐고!결국 너 때문에 화살을 쏘았다는 얘기잖아!"
[크,크거걱.]
라이는 고통에 무감각하긴 하지만 주인님 혼내시는데 아픈 척이라도 해 준다.
물론 그게 더 괘씸하다.
들입다 라이의 털을 쥐어 뽑고 있는데 숲을 헤치고 또 다른 부족 일행들이 뛰어왔다.
아마도 도망간 사람들이 지원군을 불어온 모양이다.
이것들이 적당히 놔줬더니 지원군을 불러?
역시나 검은 피부에 은발을 한 비슷비슷한 열댓 명 정도의 원주민들이 숲에서 나올 때 쯤 잠시 고민하다가 아돌을 불렀다.
"아돌!"
[나도 주인이라고 하나 있는 게 어찌나 괴팍하고 무식......]
혹여 있을 전투에 대비해 아돌을 불렀는데 마침 아돌은 누군가를 험담하고 있었다.
자신이 소환된 것도 모르고 말이다.
"오호호,그러셨쎄요?"
[이,이보게 주인!그건 절대로 주인 얘기가 아닐세!물론 주인이 조금 많이 무식하고 괴팍하긴 하지만 나는 결백하......]
"죽기 전에 불러주마,아돌."
[이,이보게 주이이인~]
역소환은 순식간이다.
마나를 끊으면 선 끊긴 티브이의 화면처럼 정령이 사라진다.
아돌은 때려봐야 내 손만 아프고,마침 안 불러주는 것을 최고의 고문으로 알고 있으니 녀석에게 가장 효과적인 벌은 소환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까짓 정령 한 마리 없는 셈 치지 뭐.
내가 그렇게 머릿속으로 정령 하나를 지워내려고 할 때 익숙한 단어가 들려왔다.
"지니?"
......응?
잘못 들었나? 원주민 어인가?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근원은 새로 지원 온 부족 원주민들이 모여 서 있는 쪽이었다.
그리고 그 중 유난히 또렷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원주민 하나를 발견했다.
반짝이는 은발에 훤칠한 키,그리고 비교적 옅은 갈색 피부,반가움을 넘어서 감격 받은 듯한 표정의 30대 여성,고만고만한 원주민들 사이에서 유난히 예쁘장한 얼굴의......
"아넬......언니?"
[앗,얼마 전에 봤던......]
9년 전이 얼마 전이냐?
그럼 마기는 방금 전에 본 거겠다?
라이에 대한 질책이 드는 것도 잠시......
"맙소사,지니!정말 너니?"
"언니!"
나도 그 순간 밀려오는 반가움에 내가 배고프다는 사실과 화가 나 있었다는 사실도 잊고 말았다.
그리고 원주민들을 헤치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아넬 언니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지니!이제 어른이 다 됐네?"
능숙하고 상냥한 공통어를 구사하며 내 손이며 얼굴을 만지는 그녀는 분명 9년 전 내 생명의 은인이었던 아넬리아였다.
그렇다면 저들이 실버 울프족?
일족 모두가 훌륭한 쌍검사라는?
그럼 여긴 부족 국가 코란?
여러 의문이 떠올랐지만 무엇보다 아넬에 대한 반가움이 제일 컸다.
"언니는......!저도 벌써 열아홉 살인걸요. 근데 언니가 어떻게 여기에 있죠?용병일은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걸.용병일은 나이도 있고,아이도 있고 해서 은퇴했어. 지니를 똑 닮은 귀여운 여자아이야!그 아이도 지니를 알아.내가 항상 네 얘기를 했거든."
"아이요?언니처럼 훌륭한 용병이......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요,언니!"
"나도 그래!딱 봤을 때 혹시 했지만 반짝이는 정령을 보고 확신했단다!"
그 반짝이는 정령이라면 이제 다시는 못 볼 겁니다,아넬언니.
"전 여기가 어딘 줄도 몰랐기에 언니네 부족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마주보고 있으니 저도 언니인 걸 알겠어요!"
"그래?나는 이제 늙었는걸.지니는 한창 꽃 필 때고!"
"언니도 여전히 젊은걸요.그 때와 똑같아요!아름답고 당당하고 강한 아넬 어니는 제 생명의 은인이자 제 영웅인걸요!"
"어머,여전히 말솜씨가 좋은걸.난 벌써 8살짜리 딸이 있는 아줌마인걸.영웅은 너무 과분해,지니!"
......응?
그러고 보니 딸이 있다고?
그래서 용병단을 은퇴했다고?
왠지 이 말을 꼭 물어봐야 될 것 같은 느낌이......
"언니,그럼......남편 분은......누구세요?"
"에이니의 아빠 말이니?"
"네!"
그러고 보니 실버 울프족은 강한 모계사화라 남자는 거의 집안일만 한다던가?
나는 슬쩍 아넬 언니의 뒤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족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전부 여자였다.
9년 전에 언니가 했던 말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자신은 우수한 신랑감을 찾기 위해 정글에서 나와 용병생활을 하는 중이라고 했던가?
"누구긴,누구야?켄타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방금 아넬 언니가 뭐라고 그랬지?
라이는 들었나?
[......샤벨이래요,마스터.]
......아아,샤벨?
"샤벨 단장님이요?그래요.나이가 좀 많기는 하지만 실력 있는......"
"아니,켄타 말이야!켄타 몰라?"
"......아아,할큰가 헐큰가 그 아저씨요?그래요 아주 착하......"
그래,그 사람 착했지.나한테 큼직한 고기 뒷다리도 주고.
"켄타라니까!"
[끄아아알?]
"흐아아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부정.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경악성.
"왜 그래?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이니,지니?"
내 반응에 아넬 언니가 당황스레 되물었다.
그도 그렇 것이 너무 안 어울리잖아!
켄타라면 덩치 빼곤 볼 것도없는데?
게다가 켄타는 매일 아넬 언니에게 구박만 받지 않았었나?
그런 두 사람이 부부라고?
그 때 아넬 언니는 중 상급 용병이었고 켄타도 상급 용병이었으니 그렇게만 본다면 괜찮은 커플이지만 아넬 언니와 켄타?
그건 인류의 손실이 아닐까?
"조,조금......많이 당황스럽네요.대체 켄타 아저씨의 어떤 부분을 보고 결혼하신 거에요?"
"음,결혼?우린 결혼하지 않았어."
"하지만 아이가 있다고......?"
"아이의 아빠가 켄타일 뿐이야.우리 부족은 결혼같은 건 하지 않아,지니.강한 남자의 아이를 낳을 뿐이란다."
나는 순간 눈 앞이 깜깜해졌다.
실버 울프족.
코란의 정글에서 살아가는 모계사회의 정글 부족으로 부족원 하나하나가 쌍검을 쓰는 강한 전사들이며 특유의 은발과 짙은 피부색이 특징.
이 정도가 내가 아는 아넬 언니의 보족 실버 물프에 대한 정보의 전부었다.
"그,그럼 켄타 아저씨는......지금 어디에 있죠?"
"글쎼,8년 전쯤에 헤어졌는데.돈이 조금 더 모이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어.그러니 지금 쯤 고향에 있을 거야."
"그럼,그럼......설마 켄타 아저씨는 언니가 아이를 낳았가는 걸 모르는 거에요?"
"그럴걸.그때 켄타는 내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도 몰랐으니까."
내가 지금 놀라는 이유는,내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서가 아니라도,아넬 언니의 사고방식이 나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전생까지 갈 것도 없이 이 세계에도 내가 아는 이상 이런 식의 생활방식은 없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다만 아이를 낳고 기른다?
"괜찮아요?켄타 아저씨가 밉지 않아요?"
"왜 미워해?내가 말하지 않았는걸.게다가 알려줬다면 나를 따라오려고 했을 거야.우리 부족은 외부인에게 엄격하거든.특히 남자라면 더욱 그래."
꼬르르륵
차라리 켄타 아저씨와 결혼했다고 했으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다만 강한 남자의 아이를 낳을 뿐이라......
너무나 내가 속한 사회와는 상반된 문화였다.
게다가 왜 하필 켄타지?
분명 그 넘치는 근육에서 솟아나는 괴력 하나는 쓸만......
"어,언니,혹시해서 묻는데 언니의 아이는......켄타 아저씨를 닮았나요?"
"응,나보단 켄타를 더 닮았어."
"헉!"
[여자 켄타?]
오오,신이시여!
왜 아넬 언니에게 그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나만 미워해도 충분할 것을......
나는 상상을 멈춰야만 했다.
켄타를 똑 닮은 8세의 근육질 소녀에 대한 상상을.
나는 곧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군.
내가 몸을 부르르 떨며 끔찍한 상상을 털어내려고 머리를 휘젓는데 아넬 언니의 뒤에서 눈을 데룩데룩 굴리던 부족원 하나가 다가왔다.
"Rkatnsdlrk ekcutek. djtj clfygodi gksek."
"dlfeks qnfjwls ekflfmf akcvjtj qnahrdmf eofk, rm enldp ehfdkrksek. dl dkdlsms so dhfowjs clsrnk. dnlgjagkwl dksgdmsl gkaRp ehfdkrkwk."
뭐라는 거야?
알라리 깔라리?
내가 아넬 언니와 아는 사이라는 것을 눈치 채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경계심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다만 나무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다친 여성 하나가 나를 죽어라 노려볼 뿐이었다.
그러게 누가 화살을 날리래?
진작 말하지,아넬 언니랑 아는 사이라고.
[뭐래요?]
[......몰라.]
그런 건 안 배웠어,인마.
대륙 공통어도 아니고 고대어도 룬어도 아닌 처음 듣는 언어였다.
부족어인가?
코란에는 수천이 넘는 부족이 있고 그에 따라 수천 가지의 언어가 있다고 하더니 그중 하나인 모양이다.
잠시 부족어로 이야기를 나누던 언니가 나를 돌아보았다.
"지니!"
"네,아넬 언니."
"일단 우리 마을로 가자.오래 머물게는 해줄 수 없지만 먹을 것은 줄게.그런데 그 늑대는 위험하지 않은 거지?"
"네,위험하지 않아요.아까는 놀라서 그만......"
내 대답에 아넬 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가 언니네 부족에게는 꽤나 위협적인 존재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그렇다면 그 늑대가 날뛰지 않도록 네가 잘 돌봐줘. 우리 부족은 늑대를 숭상하지만 동시에 매우 두려워하거든."
"네,걱정 마세요.날뛰면 이빨을 모조리 뽑아드릴게요."
[쿨럭!마,마스터?]
"우선 마을로 가기 전에 부상자를 간단하게 치료해야 해. 다리를 다친 것 같으니 부목을 대야겠어."
말을 마친 아넬 언니는 다친 부족원에게 다가가 다리를 살펴 보았다.
다리는 붉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 부족원은 아넬 언니에게 뭐라고 따지는 듯했고,그에 언니는 난처해 보였다.
나때문인가?
슬쩍 그쪽으로 다가간 나는 부상자의 다리를 조심스레 만져 보았다.
꾹,누르자 부상자가 신음을 흘렸다.
"아얏!"
'아얏!'은 분명한 대륙 공통어인 모양이다.
잠시 주물러보니 뼈가 부러지지는 않은 것 같았고 조금 금이 간 정도인 듯 했다.
아주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괜찮겠지만 아넬 언니와 같은 부족 사람들인 데다가 내가 다치게 하기도 했으니 나는 나름의 책임감을 느껴 운다인을 불렀다.
"운다인!"
마침 정글이었기 때문에 주변에는 습기가 넘쳤고 그만큼 운다인도 빠르게 나타났다.
작은 물 회오리가 허공을 빙글빙글 돌다가 이내 돌고래의 형상이 되었다.
파랗고 보석같은 눈을 빛내며 운다인이 내 곁으로 날아왔고 그런 운다인의 움직임을 부족원들은 황망한 눈길로 쫓았다.
"그,그게 뭐니,지니?정령?"
"네,정령이에요.물의 중급 정령 운다인이죠."
"벌써 중급정령사가 된 거니?대단하구나,지니!그런데 갑자기 정령은 왜?:
"제가 다치게 했으니까요.쉿!치료마법은 집중이 중요하거든요."
아넬 언니의 물음에 짧게 대답을 마친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치료 마법은 물의 정령마법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며 많은 집중력을 요한다.
같은 물의 중급정령이라고 해도 치료마법을 쓰지 못하는 운다인이 더 많을 정도였다.
사용한다고 해도 겨우겨우 힐이나 쓰는 정도일까?
나 같은 경우에는 엔다이론과의 계햑 후 운다인이나 운디네를 조종하고 다루는 것이 더욱 쉬워졌기에 그럭저럭 그 이상의 회복마법도 가능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난해한 마법임에는 틀림없었다.
"후우,자애로운 물의 힘이여 순수한 치유의 힘이여 여기 이 다친 이를 그 권능으로 감싸 안아라,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