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살아."
그리고 묘하게 드래곤의 말은 얼핏 들어면 프러포즈 같기도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드워프랑은 좀......
"우씨,너무해! 나 어리다고 무시하는 거지!흐이잉."
"몇살인데 너?"
난 어느새 말을 놓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 탓이 아니다.
나한테 얕보인 드래곤 탓이지.
게다가 이미 포기한 목숨 드래곤한테 원 없이 반말이나 해보련다.
"음......503살."
"어리구나,드래곤치고."
"응,3년 전에 겨우 독립했는걸. 그래도 폴리모프도 쓸 수 있고 용언도 쓸 수있어. 아직은 어려서 하루 세번만."
좋겠네,나이랑 얼굴이랑 잘 어울린다.
"흐흥......아,이녀석은 만살도 넘어."
나는 여전히 숯 덩어리인 라이를 집어들며 말했다.
"우와,우리 할아버지랑 비슷하네? 우리 할아버지는 10032세야! 대단하지?"
"이 녀석은 만 살 넘고부터는 나이를 안 세어봤대. 귀찮아서"
묘하게 인간이 할 만한 대화가 아니었지만 상대가 드래곤이니 어쩌랴.
"저,정말?멋지다! 난 언제 그만큼 먹지?"
"3650000일만 푹 자."
내 심드렁한 대답에 어린 드래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우와아! 그렇구나!어떻게 알았어? 너 대단하다!"
이거 아무래도 저능아 드래곤인가?
"365곱하기 10000하면 되잖아."
"나,난 수학 싫어해."
그런 놈이 용케도 칼이랑 보석 만든다고 그러고있구나.
좀 미소년으로 폴리모프 했으면 같이 살아줬을 지도......
"나도 싫어해."
"정말? 그럼 우리 동지네?"
이 녀석 조금 맹한게 잘 구슬리면 살아날지도?
이 어린 드리곤의 실상이 보이기 시작하자 꼭 인생 포기할 필요 없이 잘 다독이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집에 보내줘."
"안되."
"동지라며! 그것도 못해줘?"
"......그럼 정령도 가버리잖아."
뭐랄까 마치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기분이랄까?
음,어린아이 맞구나.
"그럼......일단 날 집에 보내주면 나 안죽을게. 대신 가끔가다가 놀러와서 내 정령이랑 같이 너랑 놀게 해줄게. 그 방패 같은 금속도 만들어주고.드래곤 네가 뭐 만들 땐 도와줄게.그리고 라이한테 천년 쉬고나서 드래곤 너랑 꼭 계약하라고 해줄게.어때?좋지? 나 죽으면 드래곤 너도 손해야."
"......가끔?얼마나?"
"한......10년에 한번?"
너무 긴가?
내가 조금 심했나 싶어서 드래곤의 얼굴을 슬쩍 봤는데 어린 드래곤은 해맑게 웃으며 손벽을 치고 있었다.
"와아!정말?그렇게 자주?"
"으응......한번 오면 한달씩 놀아줄게. 어때?"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이군,시간 개념이 많이 다른 걸 보니.
"그래!우선 한달 먼저 놀아주고 가!"
"......10년 있다 오면 안될까?"
"안돼!놀고 가!"
쳇!그래,죽는 것보다야 이쪽이 낫겠지.
나는 나를 잡아온 드래곤이 맹하다는 데에 깊은 감사를 느끼며 이 어린 드래곤의 엄마 아빠 드래곤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새끼라고 겨우 낳아놓은 게 이꼴이니......쯔쯧.
┌
라일로 크로웰 백작 귀하.
댁은 평안하시오,크로웰 백작?
우선 짐은 크로웰 가가 얼마나 충성스럽고 우직한 집안인 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바요.
하지만 모처럼 봄날을 맞아 한창 기쁘기만 할 크로웰 백작에게 본의 아니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게 되었소.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귀댁의 장녀이다 현재 드리케 아카데미 정령부의 교사로 활동 중인 지니 크로웰 양은 지난 19일 엘란의 건국 천구년 기념 파티에 수행원으로 참석했소.
그리고 그날 과인으로서도 감히 입에 올리기 겁나는 참담한 일이 벌어졌소.
그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재앙과 같은 것으로 신의 시련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소.
드래곤의 출현!
가히 최고의 재앙이라고 하겠소.
황금빛 찬란한 그 드래곤은 엘란의 황제폐하에게 매우 많은 양의 보석을 요구했소.
폐하께서 어쩔 수 없이 요구에 응했지만 드래곤으로서는 그 많은 보석도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오.
드래곤은 더 숨겨놓은 것이 없냐며 진노했고 그 자리에 있던 황제폐하와 과인,그 외 수 많은 외국의 귀족들을 공격했소.
드래곤의 전유물이라는 브레스로 말이오.
그 공격을 막아 낸 것이 귀댁의 장녀 지니 크로웰이요.
중금 정령사인 그녀가 어떻게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막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는 온 힘을 다해 황제 폐하와 과인을 지켰다는 사실이오.
하지만 그 직후 불행히도 그녀는 드래곤의 손아귀에 잡혀갔소.
보석과 함께 말이오. 아마도 드래곤은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그녀가 마음에 들었거나,거슬렸던 모양이오.
그렇게 지니 크로웰 양은 그 날 드래곤과 함께 사라졌소.
그 일로 황제폐하와 과인은 그 자리에 있던 귀족 백여 명과 외국의 왕족들의 동의를 얻어 지니 크로웰을 제국공신으로 인정하는 바요.
황제와 여러 왕족의 목숨을 구하고 스스로를 희생했으니 그녀의 공은 그 자리에서 전혀 모자람이 없소.
또한 그녀의 본가인 크로웰가에는 후작위를 내리는 바요.
드래곤에게 넘긴 어마어마한 금품으로 인해 위로금을 전하지 못해 미안하오.
대신 크로웰 백작가에는 3대에 걸친 세금 감면과 공신가라는 칭호를 내리며 두달 뒤인 5월에 정식으로 작위 수여식이 있을 것이오.
그 일에 대해서는 다음달 내로 자세한 편지를 보내겠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깊은 애도를 표하는 바이며 크로웰 가가 곤란하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면 과인은 언제든 크로웰 가의 편에 서 줄 것이오.
어려워 말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지체 없이 글을 올리시오.
가장 먼저 읽고 가장 먼저 답해주겠소.
룬력992년 3월 22일
드미트리 칸 디켈 3세
┘
와그작
"아니,제라스! 무슨 짓이냐? 국왕 전하꼐서 친히 보내주신 서한을......!"
얼굴 가득 수심이 짙은 중년인의 외침에 '제라스'라고 불린 젊은 남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지금 이게 무슨 뜻인지 알면서 그러시는 겁니까?"
"......국왕 전하의 뜻이다."
"국왕 전하의 뜻? 그래서 아직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분명치않은 아이를 두고 위로금 운운합니까? 지니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데,왕은 단 한마디도 지니를 찾으러 기사단이나 수색조를 파견한다는 말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는 드래곤이야. 너라면 비바람에 바다 속으로 사라져서 행방불명된 사람을 찾는답시고 바다로 뛰어들 테냐? 자연을 원망할 테냐? 신을 원망할 테냐? 드래곤은 그런 상대다. 우리의 힘이 미치는 상대가 아니야!"
울부짖는 중년인의 이름은 라일로 크로웰.
지니 크로웰의 부친이다.
그리고 그와 마주선 푸른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젊은 이가 제라스 크로웰,지니 크로웰의 오라비이자 크로웰 가의 장남이다.
제라스는 검술에 제법 일가견이 있으며 성격이 급하고 호승심이 강했다.
한쪽 구석에서 잔뜩 움츠린 채 그런 둘을 바라보는 금발의 소년은 지니의 남동생이자 크로웰 가의 차남 데니카 크로웰,머리는 좋지만 겁이 많아 헛똑똑이 취급을 받곤 한다.
"아뇨!드래곤은 자연도 아니고 신도 아니에요! 다만 커다란 몬스터일 뿐!"
"제라스!대체 왜 이러는 거냐?"
"왜 이러냐고요? 제가 묻고 싶어요! 왕이야말로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그 어린아이를 데려가 놓고,벌써 15년 넘게 그 아카데미인지 뭔지에 박아놓고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그동안 지니가 집에 돌아온 건 열 번도 되지 않아요! 게다가 9년 전부터는 한번도 못 오고 있구요!"
제라스 크로웰,그는 왕에게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10살 때 사랑스러운 동생을 나라라는 이름으로 빼앗겼다.
그 덕에 어린 마음에 동생을 빼앗아간 나라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또한 자라날수록 유난히 왕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보이는 아버지에게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헌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런 그에게 동생의 행방불명을 알리는 왕의 편지에는 위로금만 운운할 뿐 동생을 찾아보겠다는 말은 단 한 줄도 없으니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그거야 지니가 스스로 거기에 있겠다고 해서 그런 것 아니냐?"
"말도 안 돼요. 그 젊고 꽃 같은 아이가 뭣 하러 그 아카데미에 일생을 바친답니까? 보나마나 나라에서 잡아두는 것이겠죠! 다른 집안 영애들은 벌써 약혼을 했어도 댓 번을 했을 나이에 말입니다! 젠장,다 필요 없어요.왕이 안 찾는다면 저라도 찾으러 가겠습니다!"
"무슨......?제라스,제발 진정해라. 네가 가긴 어딜 가겠다는 거야?"
"드래곤인지 뭔지가 있을 법한 산을 모조리 찾겠어요. 그깟 드래곤,신화나 전설에서 잘 포장해놨을 뿐이지,그래봤자 몬스터죠! 그러니 지니가 드래곤의 공격을 막아낸 것 아닙니까? 사람들은 겁먹고 있을 뿐이에요. 별것 아닌 허상에 지레 겁먹고 내 동생을 죽은 사람 취급하고 있다구요!"
치기라면 치기였다.
본래 전설이니 신화니 하는 것을 잘 믿지 않는 제라스는 당장에 동생을 찾으러 가겠다며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런 제라스를 백작보다 먼저 불러 세운 것은 구석에서 뻣뻣하게 굳어 있던 데니카였다.
"혀,형!잠깐만."
"오오,그래 데니카. 네가 이 바보 녀석 좀 말려보거라!"
크로웰 백작은 평소 겁이 많은 데니카이지만 그래도 똑똑한 녀석이니 제라스를 잘 말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데니카는 그런 그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나도......나도 갈래,형!데려가줘!"
"데니카아!"
크로웰 백작이 신음 같은 비명을 흘렸다.
막 문을 나서려던 제라스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좋아,따라오려거든 떠날 준비를 해!"
"으응!"
"이,이,이 바보 녀석들이!"
백작이 뒷목을 부여잡으며 몸을 휘청거렸지만 크로웰 형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빠르게 문을 나섰다.
지니 크로웰을 찾아 두 명의 남성이 출발했다.
지니가 행방불명 된 지 나흘 째 되는 날이었다.
드미트리 왕궁 마법사의 탑.
다른 마법사의 탑에 비해 마법사층이 조금 얇기는 하지만 그래도 6서클 마법사가 세 명이나 있으니 마탑이라고 하기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은 곳이었다.
대부분 지고한 노인들이 모여 있다 보니 평소 조용하기 그지 없던 마탑 안에서 최근 어울리지 않게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왓다.
그 소리가 울리는 곳은 8층에 위치한 누군가의 방이었는데 층수로 보아하니 5서클 정도 되는 마법사의 방 같았다.
그 울음소리는 대부분 누군가를 안타깝게 부르짖는 내용이었는데,대충 이랬다.
"흐어어엉. 지니야아,지니이이......네가 이렇게 날 버리고 가버리다니~! 나보고 어찌 살라고오.흐엉엉."
옅은 갈색 머리카락과 눈이 퉁퉁 부었지만 보라색이 언뜻 보이는 걸 보아 그의 정체는 브라이트 케니얀.
그리고 그런 그를 달래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그,아니 그녀는 브라이트의 충실한 신하이자 동료 쟈이맘이었다.
"브라이트님,그만 진정하세요! 이러다 병나시겠어요!"
"흐어엉.지니이,다 내탓이야. 그런 데 괜히 가라 그래서.흐어어엉.지니가 귀신이 되어 날 원망하고 있으면 어쩌지?응?"
"정신 차리세요! 아직 죽었다고 확실히 결정 난 것도 아니고......지니님은 반드시 살아계실 거에요!"
"지니가......안 죽었다고?"
브라이트가 지니의 부고소식에 울어 젖히기 시작한 지 만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그런 브라이트의 두 눈동자에 생기가 돌앗다.
그러고 보니 그는 지니가 드래곤에게 잡혀갔다는 소리에 죽었겠구나,하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그럼요! 그렇게 쉽게 돌아가실 분이 아니잖아요.골드 드래곤은 현명하고 인자하다는데,그렇게 쉽게 죽이진 않으실 거에요!"
쟈이맘은 '애초에 다 죽인다고 브레스를 뿜어낸 드래곤이 과연 그럴까?'하는 생각을 떠올리긴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그렇지? 그러고보니 지니가 날 두고 그렇게 쉽게 죽을리가 없잖아?"
"그러믄요~"
순간 쟈이맘의 혀가 꼬였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럼 지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밥은 잘 먹고 있을까?응?"
"그,글쎄요."
"아아,걱정돼 죽겠네. 울고 있진 않을까? 그 드래곤이 지니한테 흑심을 품으면 어쩌지?신부로 삼으려고 하면?"
알 사람은 다 알지만 쟈이맘은 브라이트에게 애틋한 사랑의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신하 집안으로서 이루어질 수 없는 명백한 짝사랑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짝사랑하는 상대가 누군가를 그리는 모습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저렇게 걱정하고 있으니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쟈이맘은 조금 원망스레 입을 열었다.
"피,그렇게 걱정되면 찾으러 가보시던가요.":
"응?찾으러 가?"
"헙!"
급격히 초롱초롱해지는 브라이트의 눈동자에 쟈이맘이 자신의 두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이런......!
"나 휴가 받을 거 있는데...... 쟈이맘! 나 휴가 며칠 받을 수 있지?"
"저,브라이트님?그건 그냥 한 말이고요.도대체 드래곤이 어디 있는 줄 알고......"
"갈 거야!찾아라도 봐야지!휴가 몇일 받을 수 있느냐니까?"
브라이트의 재촉에 쟈이맘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한 달하고 10일 정도요."
"그래?어서 가서 휴가 신청하고 와!한달하고 10일!몽땅!난 짐 쌀 테니까 빨리!"
"에엑,브라이트님?"
사람 부려먹는 데 일가견이 있는 브라이트는 그새 쌩쌩해져서는 쟈이맘의 등을 떠밀었고 울상을 한 채 브라이트의 방을 나온 쟈이맘은 결국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끄적끄적 휴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브라이트의 것과,자신의 것 두장을 말이다.
스토커 마법사 하나와 그 쫄따구 하나가 또 지니를 찾아 출발했다.
지니가 행방불명 된지 7일째 되는 날이었다.
본래는 공용 수련실이었지만 어느새 지니의 전용 수련실로 굳어진 그곳은 외진 곳이 위치했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지니가 그곳을 자신의 수련실로 점찍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기도 했다.
쾅쾅쾅
그런 수련실이 오늘은 조금 소란스러웠다.
수련실 앞에서 연신 문을 두들기는 두 명의 꼬맹이.
두 꼬마 아이들의 손에는 각기 묵직한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언니이~."
콩콩콩
"누나아~."
쾅쾅쾅
페로와 이로였다.
1년 전 쯤 우연히 길을 잃었다가 지니의 수련실을 찾은 아이들은 그 뒤로 때때로 지니를 찾아 수련실로 놀러오곤 했는데 그때마나 갖은 구박을 받았다.
지니가 때로 없는 척도 했지만 결국 아이들이 한참 문을 두들기면 포기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물론 꿀밤이 뒤따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좋다고 한 달에 두세번씩 찾아오는 아이들이었고 어느새 지니도 반쯤 포기해서 최근에는 페로와 이로가 찾아오면 왔나보다,해서 문을 바로바로 열어주었다.
헌데 오늘은 어째 이상했다.
한참을 두드려도 지니가 나오지 않았다.
"라이~."
콩콩콩
"야,똥뱀!"
쾅쾅쾅
이내 마지막 수다느로 지니의 애완 뱀을 불러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이를 드러내며 어디선가 나타나곤 했는데 말이다.
"오빠,오늘은 언니 없나봐."
"그러게?모처럼 쥐도 잡아왔는데."
"오빠가 쥐 잡아와서 도망 간 거야!라이는 그런 거 안먹어!"
"아냐!누나가 라이한테 쥐 주면 좋아할 거라고 했어!"
묵직한 주머니의 정체는 쥐인 모양이었다.
결국 지친 두 아이는 수련실 앞에 털썩 주저않았다.
"오빠,나 배고파."
"이거 먹을래?"
페로가 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안에는 쥐가 들어있었다.
"......오빠나 먹어,이 바보 똥돼지야."
"너나 먹어,이 똥뱀아!"
페로의 반격에 이로가 볼을 부풀렸다.
"아빠한테 이를 거야,욕했다고!"
"그게 욕이냐?그리고 난 오빠라 욕해도 돼!"
"안돼!"
"돼!"
지니의 부재에 심통이 난 아이들이 칭얼거리며 싸우는데 누군가 나무를 헤치고 수련실로 다가왔다.
분홍색도 아닌 핑크색 머리의 여자였는데 그녀는 바로 이루제였다.
그리고 그런 이루제를 보며 페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디선가 본 얼굴 같았기 때문이다.
"어라,너희들 여기서 뭐해?"
"......누난 누구에요?"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너희 뭐하냐니까?"
아이들의 귀여움에 적당히 넘어가줄 만도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질문을 강조했다.
"나는 페로에요.얘는 내 동생 이로."
"왜 오빠가 내 소개를 해? 내가 할 거야."
잠자코 있던 이로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에 페로는 역시 여자들은 비위 맞추기 힘들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럼 다시 해라."
"음,나는 이로에요.행정학반이구요.아홉 살!"
"이름 말고,여기서 뭐하고 있었냐고?"
물어본 것 빼고는 관심 없는 이루제다.
"아,지니누나 기다려요!누나 어디 갔는지 알아요?"
페로의 물음에 이루제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지니는......이제 여기 안와."
"에에!왜요?여기 라이 선물도 가져왔는데?"
"라이?너희도 라이 좋아해?"
이로가 방실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모양이다.
"네!좋아해요,귀엽잖아요!"
"네가 뭘 좀 아는구나?좋아,가르쳐줄게.지니는 말이야 지금 드래곤의 뱃속에 있어."
"......드래곤?"
"그래,드래곤!드래곤이 잡아갔거든.아마 지금쯤 드래곤의 뱃속에서......흐윽!우리 예쁜 지니는 지금 쯤 드래곤의 똥이......흐흑."
홀로 감정에 젖어 훌쩍이는 이루제를 보며 페로가 이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누나 조금 위험해 보이지 않아?"
"왜에?"
"아아,지니.부디 귀신에 되어서 나한테 드래곤 본이나 아니면 라이라도 데려다줬으면......나 귀신도 보고 싶은데."
"......조금이 아니라 많이 위험해 보이잖아."
이로가 고개를 저었다.
이로가 보기에는 자신이랑 취향이 비슷해서 좋은 언니 같은 모양이다.
"아니야.멀쩡해 보이는데?"
"흑흑,아무튼 지니는 이제 볼 수 없을거야.라이도 못보겠지?라이이이......"
"......안 되겠다.도망가자."
위험을 감지한 페로가 이로를 잡아끌고 숲을 빠져나갔다.
한참을 걸어 청소년부 기숙사가 나오고 이제는 익숙해진 길을 따라 유아부로 돌아가려는데 이로가 또 불만을 토했다.
"나 안 가!모처럼 나왔는데......지니 언니 보고 싶어!"
"바보야!지니 누나 이제 못 본대잖아."
이로가 울상을 지었다.
"왜?"
"드래곤이 어쩌고 하지 않았냐?아까 그 누나 말,무서워서 잘 못 들었어."
이루제를 떠올린 페로가 절로 몸을 떨었다.
뭔가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왜?예쁘잖아.그럼 착한 언니 아냐?"
"예쁘다고 다 착한 게 아니래.전에 집에 갔을 때 아빠가 그랬어."
"흐응,그러고 보니 우리 엄만 착한데 안 예뻐.그지?"
"응,착한 것만큼 안 예뻐.이리토 선생님이 훨씬 예뻐."
엄마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하며 페로는 이리토 선생을 떠올렸다.
상냥하고 예쁜 행정학반 선생님.
소문에 의하면 마법도 할 수 있다고 하던데 확실하지는 않았다.
"아,이리토 선생님?그 선생님 마법사잖아."
"응,마법도 한대!그러고 보니 생각났다.드래곤이라는 거 사람들한테 마법을 가르쳐준 굉장히 똑똑한 생명체래."
"아아,나도 읽었어.그러니까......H열에서 위에서 7번째 단에 있던 그 책 있잖아.거기서."
이로가 언젠가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응,그거랑 그 옆옆 칸에 있는 책 중에 '뻔한 용사 이야기'라는 책에도 나와."
"나 그 이야기 좋아해!드래곤이 예쁘고 착한 공주님을 신부로 삼으려고 납치해 가는데 용사가 구하러 가잖아!그리고 드래곤을 무찌르고 공주님을 구해!
"응,근데 그 용사 그거 다 아이템 발이야."
페로가 심드렁하게 말했고 이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맞아!신검이 무슨 세트로 있더라?"
"응,그런데......지니 누나도 드래곤한테 잡혀갔다고 하지 않았어?"
문득 이루제의 말을 기억해낸 페로가 손뼉을 치며 말하자 이로가 고개를 갸우뚜거리며 되물었다.
"아,그랬던 것 같아.근데 언니는 공주님이 아닌데?"
"......그리고 예쁘긴 한데,안 착해."
두 쌍둥이가 하나 된 마음으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그럼 용사가 언니 구하러 안 가?"
"아빠가 그랬는데 예쁘기만 하고 성질 더러운 여자는 남자들도 싫어한대.그러니까 아마 안 갈 것 같아."
"불쌍해......"
"그러게."
힐끔 이로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골똘히 생각에 빠져드나 싶더니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 말했다.
"아!오빠,나 좋은 것 생각났다."
"뭔데?"
"우리가 지니 언니를 구하러 가는 거야!용사가 안 가주니까 못 돌아오는 거잖아."
"우리가 어떻게 구해?신검이 없는데."
페로의 되물음에 이로가 검지를 내저으며 소리도 안나는데 혀를 차는 시늉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언니한테 같이 가달라고 하면 되지!"
"그 누나?그 누나는 신검 있대?"
"아니,그래도 오빠가 그랬잖아,왠지 무섭다고.그러니까 그 언니라면 드래곤도 무서워할 거야!"
이로의 당찬 말에 페로는 정말로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 누나라면 무서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페로는 솔깃했다.
"으음......그럴까?"
"응!그 언니한테 가보자."
"끄응,좋아!지니 누나를 구하러 가는 거야!"
신검까진 아니지만 무서운 누나와 함께라면 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페로가 호기롭게 외쳤다.
이로 또한 그에 좋아라,손뼉을 치며 방방 뛰었다.
"그럼 우리 용사야?"
"응!우리 최초의 쌍둥이 용......"
페로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로는 자신의 앞으로 그림자가 지는 것을 보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말썽쟁이 쌍둥이를 잡으러 온 이리토 선생이 있었으니......
"여기서 뭐하는 거죠?페로,이로 말썽쟁이 쌍둥이들!"
"서,선생님!"
"흐익......"
착하고 예쁜 마법사 선생의 등장에 페로와 이로가 질겁했다.
지니를 구하러 용사의 길을 떠나겠다는 말을 꺼내기도 젆에 두 쌍둥이는 이리토 선생의 손에 들려 징징거리며 기숙사로 돌아가야만 했다.
최초의 쌍둥이 용사 이야기가 지어질 뻔했다는 전설이......
지니가 행방불명된 지 10일 째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