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71)

"가장 먼저 오늘 이렇게 모인 본국과 외국의 왕족,그리고 귀족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소. 제국 엘라닝 건국 이래 천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대제국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의 덕이 아닌가 싶소. 우리는 서로 나라는 다르지만 동맹이라는 하나 된 이름으로 모여 서로를 돕고......"

쿠콰콰쾅

왕의 연설이 채 서장도 지나지 못했을 때였다.

지축을 울리는 커다란 소리와 함꼐 크리스털 홀의 천장을 장식하고 있던 샹들리에들이 쟈르르르 소리를 내며 서로 맞부딪쳤다.

몇몇 샹들리에가 빛을 잃고 꺼졌다.

"뭐야?"

"꺄악!"

"이게 무슨......?"

"에그머니!"

미세하게 발을 타고 전해 올라오는 진동.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땅이 우르르 울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와 기함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지금의 사태로도 충분히 경악할 상황인데 소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쿠웅-!

쿠궁-!

쿠쾅-!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지진이 일어난 듯 땅이 연신 울어댔다.

얼핏 거대한 무언가의 발소리 같기도 했는데 나는 화들짝 놀라서 굉음의 원인을 찾아 주위를 정신없이 돌아봤다.

라이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드래곤!]

콰가가각

라이가 한 말의 뜻을 인식하기도 전에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돌덩이와 샹들리에! 맙소사!

찾았다! 인간놈들!

별의별 괴용

운디네?아니야!

"운다인!워터실드!"

후우웅

투둥

운디네를 부를까 했지만 저 커다랗고 많은 돌덩이를 운디네가 막을 수는 없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곧바로 운다인을 불렀고 소환된 운다인의 몸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지면서 물결치는 방어막이 되었다.

떨어진 돌덩이들은 실드에 퉁하고 뒹겨나갔고 그때마다 실드가 작게 일렁였다.

급하게 펼친 데다 장거리로 펼쳤기에 방어력이 조금 떨여졌지만 돌덩이를 막기에는 적당했다. 최대로 늘린 방어막의 방에거리는 약 20미터!

무너지고 있는 천장의 크기에 맞추려 했지만 이 이상은 무리였다.

그나마 왕과 황제를 보호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끄악!"

"사,살려줘!"

"우아아악!"

겨우겨우 실드의 범위 안에 있던 귀족들은 멀쩡했지만 실드 밖에 있던 귀족 몇몇이 돌덩이에 깔린 듯 고통을 호소했다.

천장이 무너지지 않은 쪽의 귀족들은 난리를 치며 홀 밖으로 우르르 도망가고 있었다.

황제의 좌석이 있던 쪽으로 반절은 무너져 내린 크리스털 홀의 천장!

마침 연설이 있어서 귀족들이 황제의 좌석 주위에 모여 있었기에 실드의 보호 범위에 있을 수 있었으니 운이 없다고도 할 수 있었다.

"전하!"

나는 황급히 왕에게 다가갔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왕도 약간 얼이 빠져 있었다.

그래도 서서 오줌을 지리거나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과연 왕족이다 싶었다.

"맙소사."

황제도 왕도 뭔가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멍한 표정으로 뻥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실드를 펼치고 왕을 찾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나도 뭔가 싶어 고개를 드니 뚫린 천장 사이로 무언가가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절로 입이 벌어졌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드래곤?"

[아까 제가 말 했잖아요,마스터.]

정말 실존한단 말이야,드래곤이?

애초에 이쪽은 별 해괴한 게 다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했지만 드래곤까지있단.

나는 그 존재를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두개의 황금빛 눈동자는 보는 이를 소름끼치게 만들었고,천장을 짚고 있는 번뜩이는 손톱의 크기에 질겁했다.

손톱 하나가 왠만한 사람보다는 커보였다.

밤하늘의 달 마져 가리는 거대한 황금 드래곤!

-누가 황제냐?

천장 위로 얼굴을 내민 드래곤이 물었다.

의지로 말을 전한다는 게 라이와 얼핏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휠씬 웅장하고 커다랬다.

귀족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황제에게로 향했다.

"접니다.제가 이 제국의 황제입니다.위대한 드래곤이시여!"

만인지상의 황제가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

그에 다른 귀족들이 따라 무릎을 꿇었다.

디켈 3세도 마찬가지.

나도 따라 무릎을 꿇고 운다인을 돌려보냈다.

실드도 사라졌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드래곤이 왜 여기에?'라고 말이다.

다른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강한 의문이겠지만 그 생각을 입 밖에 낼 만큼 제정신인 사람은 없었다.

드래곤은 황제가 누군지 알자 바로 본론을 꺼냈다.

-보석을 가져와라.이 홀을 가득 채울 만큼! 그리고 네놈들이 가지고 있는 미스릴을 몽땅 모아 와!

이 홀을 가득 채울 만큼의 보석? 그리고 미스릴?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그만큼의 보석을 바치고 나면 저희 제국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제발 자비를......!"

-그래도 가져와!

황제는 드래곤에게 협상을 시도하려는 듯했지만 드래곤이 괜히 드래곤이겠는가?

허튼 짓이었다.

중간계 최고의 생명체이자 신에 가장 가까운 생명체라고 평가되는 것이 드래곤이다.

그 엄청난 무력과 만고의 세월 동안 쌓은 지혜는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다는 전설 속의 존재!

그 중에서도 골드 드래곤은 가장 현명하고 가장 인자하다고 들었는데......

그렇제도 않은건가?

"오오,위대한 드래곤이시여! 그랬다가 저희 제국은 멸망합니다! 적대국의 손에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제발,제발 자비를!"

-그 적대국에 지금 다녀오는 길이다. 그러니 너희도 내놔!안그러면 몽땅 부숴버릴 테다!

그래,드래곤은 보석을 굉장히 좋아해서 자신의 레어 안이 보석을 산같이 쌓아놓는다는 글도 있었지.

그리고 그 조달 방법은......

이런것이었군.

하지만 미스릴은 왜?

몽땅 가져가서 전용 갑옷이라도 만들 셈인가?

"여봐라!보석을,보석을 가져와라!미스릴도 모두!"

황제는 더 이상 드래곤에게 협상을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곁에 있던 귀족들에게 명했다.

그들은 곧바로 홀 밖으로 뛰어갔는데 다리가 풀리는지 몇몇 귀족이 철퍼덕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빨리빨리 가져와! 크르르르

그래곤이 재촉하듯 말하며 목을 울렸는데 그 소리에 귀족 몇몇이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혹여 드래곤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나 또한 묘한 긴장감이 전신을 옥죄어 와서 식은땀이 흘렀다.

[너......혹시,드래곤도 이길 수 있냐?]

[네?마스터,미쳤어요?무슨 턱도 없는 소리를......]

그래,내가 미쳤지.그래도 혹시 해서 물었건만 역시나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이었다.

하긴 스케일이 다르니 어쩔 수 없었다.

드래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시간은 지독하게도 느리게 흐르는 듯 했고, 이내 귀족들이 돌아왔다.

귀족 중 한명이 황제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는데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닌 듯 황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렷다.

황제는 드래곤에게 말을 전했다.

"보,보석이 마련되었습니다,위대한 드래곤이시여!"

홀의 밖을 가리키며 황제가 말하자 드래곤은 곧바로 몸을 세우더니 그 거대한 몸으로 걸음을 옮겼다.

쿠궁

쿠쾅

아까 그 소리는 드래곤의 발소리였나보다.

드래곤의 눈이 멀어지자 황제가 홀 밖으로 나섰고 다른 귀족들이 따라 나섰다.

국왕과 나 또한 그들 사이에 동참했다.

홀 밖으로 나오니 그 자리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보석이 가득 쌓여있었다.

과연 제국의 저력은 대단하구나,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는지 가뜩이나 험악한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이게 뭐야? 홀을 못채우잖아!그리고 미스릴은!

"그,그것이 전부입니다.미스릴은 지금 가지고 오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드래곤이 잔뜩 화가 난 듯 굵고 긴꼬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저 꼬리에 맞으면 최하 사망이겠다.

라이의 꼬리는 비교도 안되겠는걸.

-비어도 한참 비어! 이 몸이 네 놈들 속을 모를 줄 아느냐? 보나마나 어딘가 숨겨놓은 것이 있겠지!

"아,아닙니다! 정녕코 저것이 전부......"

-에잇!이것들이 정말!

휘유우웅

분노한 드래곤의 입으로 황금빛이 모여들었다.

뭐하는 거야 저게?

"신이시여!"

"브레스!"

"끼아아악!"

브레스!

들어본 적 있었다.

최소 8클래스 마법의 위력을 내는 일명 드래곤 빔.

드 중에서도 레드드래곤의 화염 브레스나 블랙 드래곤의 산성 브레스는 9클래스의 위력과ㅏ 맞먹는다는......

골드 드래곤의 것은 광선이었던가?

-다시 묻겠다. 숨겨놓은 것을 모두 내놓을 테냐?

"제발......저것이 전부입니다,위대한 드래곤이시여!"

-이놈들이......감히!

황제가 간절히 말했지만 드래곤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입안에 응축된 브레스를 그대로 토해내려 했다.

얼핏 본 황제의 표정은 망연자실했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디켈 3세가 소드마스터이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선 하등 도움이 되질 못했다.

그렇다면 결국 나설 수 있는 건 나 정도였다. 왕을 지켜야 해.

그리고 얄밉지만 이 많은 귀족들도!

더 이상 길게 계산할 것도 없이 나는 브레스가 터져 나온다고 느낀 순간 발악하듯 소리쳤다.

"막아!"

누구에게? 아돌? 페인? 엔다이론? 그 누구에게도 아닌 라이를 향한 강한 바람이라고 해야 할까?

내 외침과동시에 라이가 내 손목을 떠나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순풍!

한번에 마나의 대부분이 빠져나갔다.

라이를 중심으로 기묘한 소리가 흘러나오면서 그 주위로 회색빛이 일렁였다.

슈와아앙

그와 동시에 브레스로 인해 밝아졌던 눈앞으로 짙은 그늘이 졌다.

그 그늘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마도 라이로 추정되는 거대한 방패였다.

드래곤 몸집의 반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방패.

아무런 무늬도 아무런 장식도 없는 밋밋하고 동그란,단시 무식하게 커다랗고 거무튀튀한 방패였지만 그것은 족히 브레스를 막아냈다.

브레스와 맞부딪친 방패의 외곽으로 브레스의 잔재로 보이는 하얀 빛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빛이 닿는 땅이ㅐ 일말의 부스러기도 없이 한줌 먼지로 화했다.

나는 브레스의 위력에 감탄했고 그것을 막아내는 라이에게 더한 뿌듯함을 느꼈지만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라이 떠한 브레스의 힘에 밀려 땅을 긁어대며 점점 뒤로 밀려왔다.

쿠과가각

"뭐야?"

"피,피해!뒤로 가!"

돌연 등간한 거대한 방패에 사람들이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들도 분명히 느낄 터.

저 방패가,라이가 자신들을 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들의 얼굴로 얼핏 절망이 조금 가시고 사랑ㅅ다는 기쁨이 떠올랐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브레스는 멈추지 않고 쏘아져왔고 라이가 화한 방패에 얼핏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라이! 힘내!"

[마,마스터,으끄응......]

다른사람들의 눈에는 단순한 쇳덩이 방패로 보일지 몰라도 왠지 내는에는 라이가 죽어라 용을 쓰며 버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절로 드는 안타까움에 몸을 떠는데 누군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랏샤무였다.

"뭐해요?피하지 않고!"

얼핏 사람들이 우르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상황은 묘하게 바뀌어서 드래곤과 라이가 대치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전하는?"

"디켈3세 말입니까? 저쪽에 계십니다."

조금 떨어진 쪽에서 국왕이 나에게 손짓하는 것이보였다.

하지만 내가 떠나면 라이는......

"나 말고...... 전하를 데리고 가줘요. 난 라이, 저 방패 곁에 있어줘야 해요!"

"그게 무슨......?"

파카가각

막다 못한 방패의 외곽이 바스러졌다.

저러다 라이가 조각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라이는 죽나?

라이는 저것이 본체잖아?

[마스터,더,더는......!]

"이익!브레스면 다냐? 언제까지 나올 셈이야! 그쳐!"

라이 죽겠다!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그 순간 거짓말 같이 브레스가 멈췄다.

그와 동시에 방패가 액체로 화하나 싶더니 그것이 일렁이며 저들끼리 모여들었다.

나는 실로 오랜만인 9년만에 눈물을 글썽이며 어느 새 뱀의 형상으로 돌아온 라이에게 뛰어갔다.

[마스터,임무......완수했습니다.]

"라이!"

새하얗던 몸은 간데없고 볼썽사납게 바스러지고 꼬리가 없는 흉물스러운 형상.

[그러니......제발......물방울만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라이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는데,나는 그런 라이를 집어들었다.

혹여 바스러질세라 조심스럽게.

-그게 뭐야? 용? 그게 뭐야? 그게 뭐야?

쿠콰쾅

"쿨쩍......응?"

방금 전까지 온갖 성질을 부리며 황제와 왕을 향해 브레스를 뿜어내던 드래곤이 눈을 반짝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름 경쾌한 발걸음인가 본데 나는 귓구멍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게 뭐냐고?응? 엄청 단단한데?

사실 라이의 존재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모두 멀찍이 도망가 주위에 사람은 없었고 물어본 이가 드래곤이다 보니 살며시 입을 열었다.

"제......정령인데요."

-멋진데!

급격히 바뀐 태도에 뭐라고 감정을 표현하기도 전에 드래곤의 커다란 손이 나를 움켜쥐었다.

얼핏 모이 떠오르나 싶었는데......

"끼아악!"

순식간에 나는 지상과 멀어져 공중으로 떠올랐다.

드래곤의 손에 잡혀서 말이다.

잠깐! 너무 높아!

이게 무슨 사태인지 인식이 되질 않아 해롱거렸다.

그 순간, 산같이 쌓여있던 보석이 공중으로 떠오르는게 보였다.

그 보석들은 한데 뭉치더니 검은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언제 도착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쪽에는 미스릴로 보이는 것들이 잔뜩 쌓여있었는데 그것들 또한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홀 속으로 빨려들고 이내 홀은 사라졌다.

저 정도 양의 미스릴과 보석들은 살아생전에 볼 줄이야!

아니 그전에 드래곤을 볼 줄이야!

아니 그 손에 잡혀......응? 잠깐 나 지금 꿈꾸는 건가?

-텔레포트.

텔레......?응?

끼아아악!

-일어나!

홀연히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떡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아직 머릿속이 몽롱하고 이동마법의 후유증으로 해롱거렸다.

목이 제못대로 휘청이는 돗 했다.

"흐아아,여긴 어디? 난 누구?"

지금 내 눈이 반쯤 풀려 있을 거라는 데 라이는 못 걸겠고 아돌을 걸겠다.

-정신 차려!

다시 한번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마치 무언가 절대적인 것이 나를 맑은 곳으로 끌어내는 듯한 감각.

정신을 차린 나는 앉은 자세 그대로 눈만 데룩데룩 굴렸다.

내가 있는 곳은 아마도 동굴 속, 그것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깉은 동굴 속같았는데 천장에는 마법석이 깨알같이 박혀 있었다.

이 게 소문으로만 듣던 드래곤 레어? 보석은 어디 있지? 아니 그 전에 드래곤은? 라이는?

라이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문득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헉!라이?"

"후!용언 두번 쓰니 지치네......야!"

어디선가 걸쭉하고 두껍다 못해 쉰 듯한 느낌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목소리의 주인이 보이지 않자 앉아 있던 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

"야!이놈이? 여기다.여기......!"

뭐야,드래곤인가?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오자 불안했다.

혹시 여기 드래곤 뱃속 아냐? 슬쩍 두려움과 거부감이 뭉클뭉클 마음 속에서 자라났다.

"으응?"

"아이,씽!밑에 있다고!"

"......풋!"

아이고,이런 푼수때기 입같으니! 내 생각이 맞는다면 라이를 쥐고 있는 저것은 분명......

폴리모프한 드래곤일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 짧고 뭉툭한 몸체와 금색의 너저분한 수염,머리카락,까만 피부의 마치 짱돌을 연상시키는 모습에 웃음을 흘려야 했다.

"웃어?왜 웃는 거야!"

크크큭,무슨 드래곤이 드워프로 폴리모프야.

하다못해 엘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냐?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나는 입을 열었다.

"아,아뇨.드래곤님 맞으시죠?"

"그래!아는 걸 보니 그래도 개미새끼보단 똑똑하구나. 그보다 이거 뭐야?"

철푸덕

"큭!"

드워프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돌연 들고 있던 라이를 내 얼굴에 집어던졌다.

그 고통이란......

이거 무지하게 아프구나!

그대로 내 얼굴을 휘리릭 휘감더니 엉엉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흐엉어엉!마스터~ 저 드래곤이 가뜩이나 남은 비늘도 없는데 억지로 다떼어갔어요.흐어엉.물방울 싫단 말이야!꺼이,꺼이~]

이 짜식이 눈물도 안 나는 게 왜 이리 징징대?

그래고 숨막혀.

"그것 뭐냐고? 브레스를 막아내기에 굉장한 금속인가 했더니 고작 다이아몬드잖아!"

"그건 변신한 모습이죠. 지금 이모습은 다이아고요."

"그럼 변신시켜!"

[꺼이,꺼이. 마스터어~저 물방울 싫어요.]

다시 하려고 해도 그 때 처음 해본 것인데다가 마나도 없는데......

라이를 억지로 떼어낸 나는 얼굴에 묻은 숯 검댕을 지워내며 말했다.

"지금 마나가 없어서 어려운데요. 조금 기다리셔야......"

"그럼 빨리빨리 해!"

"......네이."

내가 죽지못해 산다.

드래곤이면 다냐?

더럽고 아니꼬워서정말.

내가 지금 왜 드래곤 비위나 맞추고 있어야 하는거야?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꼬였니?

구시렁거리며 명상을 하려는데......

"참,그거 어떻게 소환해?"

"......라이요?"

"그래,정령이라며! 보아하니 비속성같은데,어떻게 소환해?"

"드래곤인데 모르시나요?"

드래곤은 세상에 모르는 게 없다고 하던데?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잘 알지. 정령 따위에 관심 두는 드래곤은 없어!"

지는 보아하니 대장장이에 관심 두는 것 같은데......

그보다야 정령이 훨씬 낫다고

"정령진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요. 라이에게 물어보죠."

[엥? 저도 몰라요,마스터. 그리고 저는 세상에 하나뿐이라서 이제 소환 못합니다.푸헤헤헷!]

라이의 말은 오로지 나에게만 들렸다.

라이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외부로 들리게 하는 기능은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인간이나 이종족으로 바꿔 언어발휘가 가능한 구강구조를 갖춰야 한다는데,아무리 그래도 사람 시체는 못쓰니 그럴 일은 평생 없을 듯 하다.

"모른데요.그리고 라이는 금속의 정령인데 더는 소환 못한다고 하네요."

"에엑!정말?"

"네."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비속성 정령은 워낙 제각각이라 그에 관한 정보가 도통 없으니.

내 대답에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드래곤이 물었다.

"그럼 네가 죽어서 계약자가 없어지면 다시 소환살 수 있어?"

"쿨럭!그,그런......?"

이 드래곤이 여차하면 나를 죽이려고?

"있어,없어?"

"......라이?"

마지못해 내가 묻자 라이가 고개를 저었고 그에 드래곤은 가뜩이나 늙어보이는 드워프의 얼굴을 찡그렸다.

이야,100년은 더 삭아 보인다.

[아뇨,저는 제가 선택한 주엔한테만 가는걸요.그리고 마스터가 돌아가시면 한 천년 쉬려고요.]

흐흥

"라이는 자기가 선택한 사람하고만 계약하고 제가 죽고 나면 한 천년 쉰다네요."

-정말?사실이야?

돌연 드워프의 입에서 예의 그 웅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용언?

"저,정말......그렇습니다. 사실입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이 움직였다.

용언인가?

저 드래곤 의심 더렇ㅂ게 많네.

내가 거짓말 안 하길 잘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드워프의 몸을 한 드래곤이 돌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뭐야아?갖고 싶어!갖고 싶어!나도 금속의 정령 가질래!"

쿨럭,이건 또 뭐냐?

"하하하핫.왜,왜 가지고 싶으신데요? 별로 쓸모 없어요."

아,돈 만들 때랑 인터폰이랑 자동문이랑......음,자잘한데는 제법 쓸모가 있군.

내가 금속 써먹을 데가 없으니 그런가?

하긴 브레스도 막아내던데 꽤 괜찮은걸.

지금 드래곤도 탐내고 있고 말이야.

"검이랑 방패랑 갑옷이랑......장신구 만들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리고 방패가 됐을 때의 금속 성분을 조사해보고 싶어! 그러니까 나 줘!"

이거 뭐......드래곤은 구르던 몸을 멈추더니 그대로 날 노려보며 말했다.

드래곤인데,두려워야하는데,이건 무슨 바닥에 붙은 껌 딱지 같구만......

"드리고 싶어도 라이 마음이라......"

"그럼 좋아. 까짓 인간!네 놈까지 통째로 갖지 뭐."

"......싫어요."

"뭐?거부하는 거야? 죽인다.너!"

드래곤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검지손가락을 들이밀며 말했지만 어차피 드래곤에게 잡혀온 마당에 죽을 목숨이지 뭐,평생 잡혀서 쇳덩이 만드는 거 보조하느니 죽고 말지.

"죽이시든가.흥!"

"뭐,뭐야?이게,이게 까불어? 인간 주제에?"

"죽여라,죽여."

나는 완전히 배 째라,하는 심정이었다.

어차피 드래곤이 발가락으로 눌러도 죽을 목숨 굳이 질질 끌어 연명하리?

차라리 지금 죽을란다.

한이 있다면 로베닌 그 녀석에 대한 원한과 정령왕을 소환하지 못한 것일까?

"이씽......엄마한테 이를거야!"

"네이,이르시옵소서."

"아,아빠랑 할아버지한테도 이를 거야!"

......나도 엄마랑 아빠랑 할머니 있어,드래곤 일가랑은 잽도 안되겠지만.

"그전에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후잉,죽으면 안돼! 그럼 정령도 가버리잖아! 그냥 나랑 살자.나랑 살아,응?밥도 주고,산책도 시켜줄게!응?"

"죽을거야."

내가 개냐?

아무리 드래곤 눈에는 인간이나 개미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아니야.

그렇게 사느니 죽고 말지.

나는 지금의 상황에서 굳이 드래곤 비위나 맞추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죽은 인생 다시 사는 것,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인생이었고 몇 십년을 드래곤 심부름이나 하느니 깔끔하게 지금 죽는 게 나았다.

[앗!마스터 벌써 죽으면 안 돼요. 저랑 천 년만 놀아요!]

"죽으면 안돼! 천 년을 어떻게 기다려? 나랑 살아."

난 백년 밖에 못살아 이 왠수야.

그리고 까짓 드래곤한테 천년 쯤......

음,천년이면 드래곤 용생에 10분의 1이니까 조금 긴가?

드래곤은 성격이 급해 보였는데 나와의 계약이 끝나면 천년은 놀다가 새로 계약하겠다는 라이를 기다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천년 뒤에도 라이가 이 푼수드래곤이랑 계약해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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