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71)

7시 반쯤 되었을까?

겨우겨우 준비를 마친 나는 마차를 타기 위해 궁 밖으로 나왔다.

필사의 노력으로 화장을 가볍게 끝내고 머리는 풀어놓은 상태에서 양옆 머리를 약간 뒤로 넘긴 뒤 작은 푸른색 리본을 달았다.

안 달겠다고 해놓고는......쳇.

그 외에도 예의 그 왕에게 하사받은 아쿠아 마린 목걸이와 귀고리, 작은 아쿠아 마린이 자잘하게 달린 써클렛까지.

내 인생 최고로 화려한 차림이 아닐까 싶다.

[마스터, 저 여자가 달고 있는 보석 먹어도 돼요?]

[먹으면 뒤져.]

토파즈 궁은 손님용 궁이라더니 과연 파티 시간이 다가오자 온통 마차를 타러 나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중 아마도 외국의 왕녀로 보이는 이가 나보다 다섯 배는 화려한 차림으로 궁에서 나왔다.

그녀들의 갖가지 보석에 는독 들이는 라이.

내가 으름장을 놓자 금세 입을 삐죽거렸다.

[너무하세요. 이 상태로 움직이지도 말라고 하시고,아무것도 못 먹게 하시고......]

[안 먹는다고 배고픈 것도 아니잖아. 참아!]

지금 라이는 내 오른손목에 달려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영 불안해서 라이를 혼자 방에 놓고 올 수 없어서였다.

한시도 쉬지 않고 껄떡대는 녀석인 데다가 드미트리도 아니고 드리케 아카데미는 더더욱 아닌 곳이니만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자고 옷 속에 넣자니 라이가 있을 자리가 없었기에 결국 라이는 팔찌 흉내를 내야 했다.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라이의 껍질 표면을 조금 더 뭉툭하고 매끄렇게 바꿨는데 꽤나 그럴싸한 팔찌로 보였다.

두께가 10센티미터는 되고 한쪽에는 루비 두개가 붙어 있어서 누가 봐도 뱀의 형상을 따온 두꺼운 팔찌정도로만 보였다.

라이가 크게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걸릴 일은 없으리라.

익숙하지 않은 높은 구두 탓에 겨우겨우 중심을 잡으며 디켈 3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지금 나는 수행원의 신분이니 항상 왕을 따라다니면서 보필하고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뭐,실상 본인이 소드마스터인 디켈 3세를 보호할 일은 없겠지만

더군다나 이미 기절하는 바람에 하루 동안 수행원 노릇을 못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파티에서 수행원 노릇을 하는 건데 파티에서 수행원이 하는 일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단지 대외용으로 왕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곁에 세워두는 정도일까?

수행원 본인이 원하고 왕이 묵인해준다면 사적인 시간도 즐길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에쉬를 만나려 했지만 녀석이 없으니......쳇.

[마스터!왕이 옵니다.]

라이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왕이 함꼐 워프를 타고 왔던 다른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궁을 나오고 있었다.

저쪽은 아마도 국빈급 손님들이 묵는 방이려나?

같은 궁이지만 내가 나온 곳과는 입구가 달랐다.

왕이 보이자 나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왼손은 배에 놓고 오른손을 뒤로 빼고 허리는 45도로 숙인다.

왕에게 표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인데 남자의 경우 손 위치가 반대다.

바닥으로 향한 내 시야에 왕의 다리가 보였다.

"오오,과인은 그대가 숙녀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군."

칭찬으로......받아들여야겠지?

"감사합니다,전하."

"고개를 들게.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불편해 보이기에 다른 수행원을 동행할까도 했지만...... 그대가 간절히 파티에 참석하기 바랐던 것을 떠올렸지."

흑흑,그냥 다른 애 데려가지 그러셨어요.전하!

"네,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 감사드립니다."

왕의 말에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으나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고 공손히 대답했다.

나는 교육받은 대로 멋들어진 제복을 차려 입은 사내에게 소개장을 건넸다.

엘란 제국의 문장이 선명히 찍힌 초대장을 받아든 사내가 확성마법이 걸린 마이크를 통해 입장을 알렸다.

"드미트리 칸 디켈 3세 전하와 그 수행원 크로월 백작 영애 드십니다!"

본래 수행원은 성은 커녕 이름도 없이 수행원이라고만 소개되지만 그래도 여자라고 성까지 소개해주었다.

파티장에 들어선 나는 그 엄청난 넓이와 화려함에 경악했다.

이런 무식한 크기의 홀이 성 안에 있다니.

역시 엘란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홀로 특별한 일이 있을때만 사용된다는 일명 크리스털 홀.

직계 황족의 생일이나 이번 같은 건국기념일 같은 때가 아니고서는 들어와 보기 힘든 곳이었다.

작위가 낮은 귀족들은 입구에도 설 수 없는 곳.

천장 곳곳에 붙어 있는 샹들레에에 자연스레 눈이 갔다.

몇개가 붙어있는 거야 대체? 저 샹들리에 하나가 후작령 성의 한 달 세금과 맞먹는다던가?

족히 몇 십개는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전하!오랜만에 뵙습니다."

"저 툰두라 후작입니다. 기억하시지요?"

"처음 뵙겠습니다.전하!저는......"

"드미트리는 여전한가요?"

"요즘 정세가......"

"요즘 밀가루 값이 폭등......"

내가 잠시 샹들레에에 눈길을 준 사이 어느새 디켈 3세는 귀족들에게 빙 둘러싸여 있었다.

그로 인해 나는 얼결에 국왕과 멀어져버렸다.

어떻게든 국왕과 친분을 만들어보려는 귀족 떼에 밀려서 말이다.

국왕은 파티에 입장하기 전에 나에게 따로 만나고 싶은 이가 있어면 만나러 가도 상관 없으니 내 나름대로 편히 파티를 즐기라고 말해주는 호의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만날 사람이 없는걸요,전하!

[......마스터,여긴 뭐하는 덴가요?]

[잘 차려입고 비싼 것을 먹으며 쓸데없는 말을 떠들에대는 곳이지.]

외국 귀족들에 둘러싸여 있는 왕을 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파티는 밤새 이어질 테고 왕의 곁에 있지 않는 한 내가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지금쯤 에쉬를 찾아다녀야겠지만 계획이 틀어져버렸기에 나는 넘치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쩔까,하고 주위를 빙 둘러보는데 파티장 사이사이에 마련된 간단한 간식과 음료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나는 간단히 요기라도 할 겸 발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굽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옆으로 기우는 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삐끗

삐끗!삐끗!삐끗!

꺄아악!

차마 이런 자리에서 꼴사납게 넘어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중심을 잡자니 높은 구두 굽 탓에 용이하지 않았다.

결국 옆으로 넘어지는데 얼결에 뻗은 팔이 마침 내 곁을 지나가던 누군가의 어깨를 짚었다.

제법 탄탄한 게 아마도 남자인가 싶었다.

"음?"

어깨의 주인인 듯한 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겨우 잡은 어깨도 중심을 잡기에는 조금 부족했는지 결국 넘어지려는데......

"아......"

"이크!"

어깨의 주인으로 생각되는 사람의 손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후,다행이야,마침 코르셋을 하고 있어서.

아!물론 넘어지지 않은 것도.

"가,감사합니다."

휘청거리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올을 손가락으로 추스르며 겨우겨우 몸의 중심을 잡았다.

"괜찮으세요?"

"네,덕분에......감사합니다."

몸을 돌려 도움의 손길을 뻗어준 남자를 마주본 나는 잠시 멈칫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붉은색 머리! 어째 얼굴도 조금 붉어 보이는데......

기분 탓인가?

"별말씀을. 처음 뵈는 것 같은데......외국에서 오셧나요?"

"네에,드미트리에서......그쪽은?"

사교계 대화 예절 첫 번째, 질문을 받을 경우 상대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한다.

그렇지 않아 대화가 끊기면 예절에 어긋난다고 했던가?

나는 기억나는 대로 충실히 행했다.

"저는 엘란 사람입니다. 아버지께서 엘란의 공작위에 계시죠. 레이디는?"

첫 대면에 아버지 자랑이라......

잠깐,엘란의 공작가?

현재 엘란의 공작가는 두개,그리고 저 붉은 머리카락!

그렇다면 혹시?

"부친이 백작위에 계십니다. 제 이름은 지니 크로웰이에요. 공자의 성함은......?"

"지니라...... 과연 레이디의 미모만큼이나 멋진 이름이군요. 제 이름은 랏샤무 페드리,현재 황궁에서 정식 기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관찮으시다면......함께 발코니로 가시겠어요?"

기억났다!

개 싸가지 페드리 가의 차남!

근데.....너 얼굴은 왜 붉히니?

"아뇨,모처럼 파티에 참석했으니 좀 더 이 분위기를 즐기고 싶네요."

이것들이 형제가 쌍으로 사람을 기억 못해?

사람 속을 잘도 뒤집는단 말이지,이 형제가.

나는 겉으로는 방실방실 웃었지만 속은 썩어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조국의 수행원으로서 파티에 참석한 몸으로 차마 성질대로 버럭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참아야하느니......

"아쉽군요. 파티 분위기라면 발코니에서도 즐길 수 있는데 말이에요."

가만보자.

이 녀석 그때 나보다 두살 많았으니까,지금은 21살이겠군.

그래,그래.

한창 작업 걸고 싶을 때지.

다아 이해해.

내가 한 미모 하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제발 내 허리 좀 놔 줄래?

"그런가요?그보다 페드리 공자,손 좀......치워주시겠어요?"

"아!이런 실례.레이디의 미모에 넋을 잃는 바람에 그만 잊고 있었군요."

느끼한 말투에 이어 느끼하게 손을 떼어낸 랏샤무의 발언은 순간 내 등을 오싹하게 할 정도였다.

녀석에게 보이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옷 속은 닭살 천지.

[우웨에엑. 마스터 굉장한 정신 데미지를 주는 공격이에요.]

동감이야.

"우훗,그럼......저는 이만 실례."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나는 나를 잊은 데 대한 복수보단 녀석을 피하기로 했다.

하지만 황급히 몸을 돌리는 나를 잡아끄는 녀석의 커다란 목소리.

"아,조,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크로웰양!"

아악! 조금 웅성댄다 싶을 정도의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이 랏샤무의 커다란 목소리에 내 쪽으로 쏠렸다.

그 시선은 대개......

'쟤 뭐야?'

'아, 시끄러워.'

'어디서 연애질이야?'

언젠간 죽이고 말 테다,페드리 형제!

나는 주변의 쏘아지는 시선에 다시 몸을 돌려야 했다. 차라리 그때의 개 싸가지 랏샤무로 돌아가 주면 안 되겠니?

"호호홋! 작게 말씀하셔도 될 것을요."

"그렇군요. 당신이 떠날 것만 같아서......"

[우궤에엑.]

그래, 라이.

내 몫까지 토해주렴.

이 녀석에 비하면 브라이트는 귀여운 거야.

앞으로 브라이트에게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방실방실 웃었다.

녀석을 한 대 후려갈겨주고 싶은 것은 필사적으로 참으며.

"오호홋,크로웰이라고 불러주세요."

"아,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어째서인지 크로웰양을 처음 만난 것 같지만은 않아서요."

"......어디서 뵈었던가요?"

그래,넌 그래도 네 형보단 조금 나은 모양이구나. 그래도 나를 조금이나마 기억......

"아마도......전생에서?"

[꾸웨에엑.]

이가 갈린다,갈려!

아까 한 생각은 취소.

차라리 네놈 형이 낫겠다!

너도 전생에 서울에 살았냐고 묻고 싶은 것을 나는 꾸역꾸역 참아냈다.

"후우......그,그런가요?그거 굉장한 인연이겠네요."

"그렇죠? 그로웰 양의 빛나는 두 눈동자를 보니 제 심장이 이렇게나 떨리고 두근대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겁니다."

"호호홋."

[마스터,죽일까요?]

[안 돼애애애.]

'돼'라고 하고 싶다.

정말로......

이 녀석을 어떻게 치운다지?

나는 발그레한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을 웃는 척하며 슬쩍 외면함과 동시에 탈출구를 찾아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런 내 시야에 밝은 오랜지색의 머리를 화려하게 틀어 올리고 갖가지 장식으로 인해 어디가 옷이고 어디가 장신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화려한 여성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다가오는 것이 들어왔다.

분명 겉으로는 사뿐사뿐 걷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적의가 가득했다.

누구지? 난 처음 보는 사람인데?

"멋진 금발이군요. 꼭 한번 만져보고 싶은......"

"그런가요?칭찬 감사합니다."

내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녀석이 돌연 내 머리카락을 한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잠시 만지작거리다 녀석은 내 머리카락을 자신으 입으로 가져갔다.

잠깐!안돼!

"페드리 공자!"

녀석의 입이 내 머리카락에 닿기 바로 직전 그를 제지한 것은 예의 화려한 여성이었다.

후우,졸지에 커트할 뻔했네!

"비,비아스테스양?"

그녀의 조금 화난 듯한 목소리에 랏샤무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는데 머리카락을 놓지는 않았다.

"뭐하시는 거죠,페드리공자?"

"잠시......이 여성분과 대화를......"

뭐야,왜 날 보는거야 랏샤무?

난 저 여자가 반가운 사람이야.

비아스테스라는 여자의 눈이 나를 향햇다.

슬쩍 웃으며 말을 걸어왔는데 입가만 웃고 있었다.

저것도 기술이군.

"그래요? 제가 끼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나는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고 그녀는 조금 새침한 눈길을 보내더니 나와 랏샤무 사이에 섰다.

아아, 기름통에 빠졌다가 겨우 빠져나온 기분인걸.

"페드리 공자,무슨 이야기 중이셨나요?"

"이쪽 레이디의 머리색에 대해서......"

"흐음,금발인가요? 보통이군요."

여자의 시선이 순식간에 나를 아래위로 훑더니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래,그래.

조금 거슬리지만 봐준다.

랏샤무만 데려가라.

"그쪽의 머리색도 보통이군요."

"......칭찬인가요?"

"물론이죠."

"흠,그쪽의 그 목걸이도 아주 보통이군요."

아쭈,이게 목걸이를 건드렸어? 이게 어떤 물건인 줄 알아?

"어머,그래요? 안목이 있.으.시.군.요? 드미트리의 국왕 디켈 3세 전하께서 친히 하사해주신 물건이랍니다."

"구,국왕 전하께서요? 드미트리에서 오신 모양이지요? 부친 되시는 분 작위가......?"

여자의 눈에 슬쩍 '잘못 건드렸나?' 하는 후회가 스쳤다.

"백작위에 계십니다. 대단치 않죠. 비아스테스 양은요?"

"그렇군요. 정말 대단치 않네요. 제 아버님은 아메롱 후작이시랍니다. 혹시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풋,아.....메롱 후작이시라구요? 들어본 것 같네요."

메롱이래 메롱.

아, 웃겨 죽겠네.

화내고 싶은 것과 웃고 싶은 것을 번갈아 참았더니 배가 당길 정도였다.

내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자 비아스테스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호홋,저희 집안이 조금 유며아긴 하죠. 고작 드미트리의 백작가에서 알고 있을 정도면 말이에요."

고작? 이게 기름통에서 구해줬다고 오냐오냐 했더니 기어오르네?

"그래요? 그 말씀, 저희 드미트리 국왕 전하에게 직접 해주시겠어요?"

"어,어머머! 마치 제가 무슨 큰 실례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게다가 겨우 백작 영애이면서 드미트리의 국왕 전하와 친분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친분이야 당신보다는 있지 않을까 싶군요. 그리고 '고작'이라든가 '겨우' 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시는 것 아닌가요? 품위없게 말이에요. 비아스테스 아메롱 후작 영애!"

"무,무례하시긴...... 본인도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저는 아메롱 후작가의 영애! 그런 저에게 말이 험하시군요. 고작 드미트리의 백작 영애가 말이에요. 경우가 없으시군요."

[와아,싸움이다. 마스터,우선 가볍게 한대 치고 들어가죠?]

나와 비아스테스 사이로 파파팟,기싸움이 오고 갔다.

라이 말대로 성격 같아서는 한대 후려 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말로 끝내리라.

내가 재차 입을 열려는데 돌연 랏샤무가 끼어들었다.

"잠깐! 진정하시죠,숙녀 분들. 오늘 같은 날에 서로 기분 상해 좋을 것은 없지 않습니까?"

이 싸움의 시작은 너 때문이거든?

랏샤무의 제제에 상관 않고 내가 말을 이으려는데 비아스테스가 그세 표정을 화사하게 바꾸더니 입을 열었다.

"어머? 페드리 공자,저희는 다만 예절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지 전혀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답니다. 그렇죠, 백작가의 크로웰 양?"

"물론이죠,메롱......아메롱 후작가의 비아스테스 양."

"그것 보세요.호호호."

은귾 백작가 라는 단어에 힘을 주는 비아스테스.

그래,너 메롱후작 딸이라 좋겠다,이 계집애야.

한눈에도 비아스테스는 랏샤무에게 짙은 호감을 드러냈는데 랏샤무는 그녀에게 조금 쩔쩔매는 것 같긴 했지만 때때로 비아스테스의 시선을 피해 내게 후덥지근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음?누가 이긴거죠,마스터?]

[......내가 이길걸.]

지고는 못살지,암. 우선 랏샤무를 이용해야겠지?

저렇게 봐달라고 아우성인데 말이야.

"페드리 공자?"

"네?말씀하시죠.크로웰 양."

"아까 말씀하셨던 것 말인데요......지금이라면 괜찮을 것 같네요."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거죠?"

이런 눈치없는......

비아스테스는 벌써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여우 눈을 뜨고 있건만.

나는 손가락을 까닥임으로써 랏샤무에게 귀를 빌려달라는 뜻을 전했다.

랏샤무는 힐끔 비아스테스의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이내 내 쪽으로 귀를 갖다 댔다.

비아스테스의 눈은 그야말로 찢어질 수 있는 최고점까지 달해있었다.

"발코니 말이에요."

"헛!"

짧은 말이었지만 랏샤무는 충분히 알아들은 듯 했다.

"무,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저도 알고 싶군요."

"호홋,별 이야기 아니랍니다. 그렇죠,페드리 공자?"

"그럼요! 비아스테스 양과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보다......실례지만 이만 자리를 피해주시겠습니까,비아스테스 양?"

랏샤무도 싫지만 비아스테스도 싫다.

결론?

둘다 해치운다.

우선 비아스테스!

랏샤무의 말에 비아스테스가 입술을 앙다물며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슬쩍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이잇!조,좋아요. 이만 피해드리죠. 하지만 저도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피하는 거란 걸 알아두시길!흥!"

가라,가! 그름 방제나 하라고 불렀더니 불 붙이고 있어!

씩씩거리며 사라지는 비아스테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다시 방긋 웃으며 랏샤무를 올려다보았다.

"방해꾼이 사라졌네요,페드리 공자."

"정말 그렇군요. 그보다 어서 발코니로......"

"좋아요. 마침 할 말이 있었답니다. 묻고 싶은 것도요."

"얼마든지! 가시죠,크로웰양."

랏샤무가 내미는 손 위에 손을 얹고 랏샤무를 따라 사람들을 지나고 지나 어느새 가장 외진 발코니에 도착했다.

파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라 먼저 온 손님은 없었다.

"한적하군요."

"네,하지만 달빛도 좋고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니만큼 오붓이 얘기를 나누기엔 더 없이 좋겠죠."

"정말 그러네요."

"묻고 싶다던 게 무엇인가요? 저에 대해? 아니면 저희 집안에 대해?"

아니,다 필요 없고 로베닌에 대해.

"저는 사람의 됨됨이나 소양을 보지 집안을 보지는 않아요,공자님."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만큼 그 조건에 걸맞은 사람도 없겠군요."

슬쩍 랏샤무가 내 손을 잡아 쥐었다.

그러자 이어지는 라이의 질문.

[물어요?]

[아니.]

"호홋,그런가요? 그보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페드리 공자의 형님 되시는......로베닌 페드리 공자에 대해서에요."

그 질문에 랏샤무의 표정히 싸하게 굳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그땐 친해보이더니? 그새 싸웠나?

"당신도......형님을 노리는 건가요?"

"......무슨 말씀을? 저는 다만 드미트리에서 우연히 로베닌 페드리 공자를 만난 적이 있어서 물었을 뿐인걸요."

이 싸람이! 큰일 날 쏘리를!

"그,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형님은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때때로 형님을 노리고 저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요? 대단하나면 어떤......?"

"온 대륙에 무재라는 이름을 날리는...... 그런 검술의 천재죠,제 형님은. 그래서인지 저는 사교계에서도 '랏샤무'라는 이름보다 로베닌 페드리의 동생으로 더 유명하죠."

조금 불쌍하기도 한가?

"그런......페드리 공자도 거물에 제법 조예가 있지 않나요?"

"또래에 비해 조금 나을 뿐 저희 집안에서는 썩 내세울 것도 못 됩니다. 형은 15살 때 이미 검기를 발현하는 소드 유저의 경지에 들어선 천재니까요. 전 20살때 겨우겨우 해낸 일을 말이에요."

"20살에 소드 유저라면 충분히 뛰어난걸요."

"아뇨,제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형님의 그림자를 벗어나진 못합니다. 아버지도 형님도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니까요."

아,그놈 참,놀려먹으려고 했더니 사람 마음 약해지게 하네.

"그래도......그런 대단한 형님이라도 동생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 아니겠어요?"

"아닙니다! 형님은......지독한 냉혈한이에요. 지금도 멋대로 여행을 떠났다가 헤이드리케에 몸져 누워있는걸요. 그러고도 편지 한 장 없는 사람입니다! 어째서 제 가족의 소식을 남의 입으로 들어야 하죠?"

뭐야?그래도 로베닌 녀석을 썩 좋아하나 본데?

"아파서 편지할 겨를이 없었겠죠."

"아무리 그래도......형님은,형님은......검술 외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어요. 10ㅓ년을 보아온 성의 하녀 이름도 매일다시 묻습니다.그 정도면 광기라구요!저는 형님이 두렵습니다."

그래,그 하녀 참 불쌍하다. 동질감이 느껴져.

"그건......큰 문제네요. 자칫 사람 하나를 폐인으로 만들지도 모르는......"

"맞숩니다!저만 해도 형님에게 빼앗긴 여성이 한둘이 아니라구요!"

"......여성한테는 관심이 없을 것 같은데요?"

"아뇨,오는 여자 가는 여자 안 막습니다.여자들도 저한테 접근하는 척하고는 어느새 형님과 놀아난다구요! 형님은 그 여자들 이름도 기억 못하면서 필요하면 만나고,또 금세 외면해버려요! 진절머리가 납니다!"

그녀석, 갈수록 마음에 안 들잖아? 잠깐,중요한 건 이게 아닌데.

"그,그런 형님이라도 싫어하는 게 있겠죠? 인간인걸요."

"형님이 싫어하는 것?아,있습니다."

"그게 뭐죠?"

대체 뭐냐?로베닌 페드리의 약점이!

나는 두 눈을 빛내며 귀를 쫑긋 세웠다.

"여우요. 형님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사냥터에 따라갔다가 사냥용으로 풀어놓은 여우에게 물렸었다는군요. 그 때의 흉터가 아직도 등에 남아있는데......그 때문인지 여우 털로 만든 물건만 봐도 진저리를 치세요. 그 자리에서 찢어발기시죠."

찢어발긴다고?그럼 별로 효과 없는데.

"그럼 무서워하시는 것은요?"

"왜 그런 걸 물어보시죠? 형님이 무서워하시는 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요."

쳇,더 이상 파고들면 수상하다고 여길지도......

이쯤에서 관둘까?

싫어하는 것은 여우라......흐음.

"그냥요. 대단한 사람도 뭔가를 무서워하고 싫어한다는 게 인간적으로 보이지 않나요?"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이렇게 속 편하게 형님 얘기를 한 것은 처음인 것 같아요.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크로웰양이 물으면 뭐든 대답해주고 싶어지는군요."

내 화술이 뛰어나서 그래,후훗.

"속이 시원하시다니......다행이네요."

대화 내내 네ㅐ 손을 쥐고 있던 랏샤무가 능숙하게 깍지를 끼더니 슬쩍 다가왔다.

"크로웰양......"

지긋이 나를 내려다보는 모양세가 내가 눈이라도 감아주길 바라나 본데 턱도 없지.

내가 빤히 자신을 쳐다보자 조금 주춤하는가 했던 랏샤무의 얼굴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잠깐!"

손을 들어 황급히 랏샤무의 입을 막아냈다.

깜짝이야!

큰일 날 뻔했네!

"이 손에 키스를?"

"아뇨,페드리 공자. 사실 전 당신에게 고백할 게 있답니다."

"고백이요?무슨?"

"사실 전 오래전에 페드리 공자와 만난 적이 있어요."

랏샤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전 기억이 나질 않죠? 당신 같은 운명의 여인을 만난 사실을 제가 잊을 리가 없는데. 대체 언제 만났죠?1년 전?2년 전?"

"기억 못하시다니...... 섭섭한걸요. 한 가지 분명히 알려드릴 수 있는 사실은 그때 페드리 공자가 제게 하신 말씀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다는 거죠."

"제가 무슨 실례를 했나요? 아니면 그 때 다른 여성분을 만나고 있었나요?"

"둘 중 하나네요."

이내 랏샤무의 몸이 멀어졌다.

잠시 기억을 더듬나 싶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 다른 여성이 있었나요? 하지만 걱정 마시길. 지금 이 순간부터 전 오로지 그대의 연인이......"

"아뇨,제게 큰 상처를 줬었죠. 또한 제 조국을 무시했어요."

"제가요?그럴리가?"

결정타를 날려줄까?이래도 기억 못하면 넌 바보다.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죠. '드미트리 촌놈 주제에!' 그리고 '드미트리 따위 속국 중에서도 열등국!'이었던가요?"

"하아? 말도 안돼요! 제가 왜 당신에게 그런 말을......?"

"......운디네,언워터 브리딩!"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운디네는 소환되자마자 랏샤무의 곁으로 그의 몸집만한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크허억!이,이건......?"

"어때요?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나요?"

넘실거리는 거대한 물방울.

랏샤무가 그때보다 커졌으니 당연히 물방울의 크기도 그때보다 두 배는 커졌다.

물방울의 출현에 놀란 랏샤무가 발코니 바닥이 털썩 주저앉았다.

놀라긴 놀란 모양이다.

"혹시...... 토너먼트 결승 때의......그 정령사?"

"이제 기억나시나요? 제법 뜨거운 대화를 나눴었죠,아마? 한번 더 까불면 죽인다고 했던가?"

"맙소사,그럴 리가. 말도 안돼요! 지금......장난치시는 거죠?"

"돌아가 운디네. 자,잘보세요. 그때 그 여자아이와 닮지 않았나요?"

[네,주인님.안녕히 계세요.]

소환하기 무섭게 돌려보냈지만 운디네는 불평 하나 없이 작별인사와 함꼐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뚫어져라 쳐다보는 랏샤무.

"정말......입니까?"

"두말하면 입아프죠."

떨리는 목소리로 확인하듯 물어왔던 랏샤무의 얼굴이 내 단호한 대답에 붉게 달아올랐다.

눈을 내리깔고 이를 앙다무는 모양세가 대단히 민망한 모양이다.

랏샤무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열지 못했고 나는 붉으락푸르락하는 랏샤무의 얼굴을 구경했다.

그렇게 1분이 지났을까?

랏샤무가 입을 열었다.

"그,그,그게......!"

"에른 드 칸 메갈로프로피스 황제 폐하 드십니다!"

때마침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가 도착했음은 이제 곧 그의 연설이 시작돈다는 소리였기에,나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린 랏샤무에게 작별을 고했다.

"바이,바이,페드리 공자."

발코니를 나오니 마침 황제가 붉은 융단을 밟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있던 발코니는 가장 외진 곳,그리고 그곳에서 나오면 바로 홀 맨 끝에 위치한 황제의 좌석이 보인다.

융단은 좌석까지 이어져 있었기에 잠자코 기다리면 황제가 좌석에 앉을 터였다.

그러니 이쪽에서 기다리면 디켈 3세 국왕도 올터, 굳이 찾으러 이 넓은 홀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슬쩍 좌석 근처로 모여드는 귀족 속에 섞인 나는 디켈3세를찾아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왕을 발견했다.

서둘러 다가가려는데......

"황제 폐하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모든 귀족 분들은 집중해주십시요."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소란스럽던 파티장은 황제가 황성마법이 걸린 마이크를 받아들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른 이들이 멈췄으니 나도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왕과의 거리는 열 걸음 정도일까?

일단 왕을 수행하는 것은 잠시 뒤로 미뤄야 했다.

행동을 멈추고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여저하군. 흰 머리가 조금 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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