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71)

외전 : 페로와 이로

페로와 이로는 사이좋은 이란성 쌍둥이다.

평민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이 아이들은 고작 4살 때부터 함께 합창이나 하듯 부모님이 운영하는 서점의 책을 줄줄이 읽었고 5살 때쯤에는 한두 번 읽었을 뿐인 책들의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

지 않고 줄줄이 외웠다.

때로는 부모도 어디 있는지 몰라 찾아 헤매는 책들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냈다.

쌍둥이가 하나같이 뛰어난 머리를 타고 난 덕에 마을 어른들의 관심을 한 몸,아니 두 몸에 받았다.

더군다나 몇 천 권의 책을 줄줄이 왼다는 쌍둥이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성주가 둘 모두 양자와 양녀로 입양하고 싶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딱히 집안이 어려운 것도 아닌지라 부모는 거절했고 머리가 비상한 아이들 또한 스스로 입양을 거부했다.

그렇게 귀족의 자제가 될 수 있는 기회도 거부한 페로와 이로의 부모를 유혹한 것은 드리케 아카데미라는 천재 양성소!

아이들의 나이가 8살이 되던 해 나라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그들은 서점 책장의 어느 칸에 있는 무슨 책 몇 권의 몇 번째 장 몇째 줄,몇 번째 단어가 무엇인지까지 줄줄 외우는 쌍둥이를 보고 크게 감탄했다.

그리고 두 쌍둥이 모두에게 드리케 아카데미 입학을 권했다.

이런 경사가 또 있을까?

재학 중에는 준남작의 지위를 받고 졸업만 한다면 자연스레 남작의 직위가 보장되는 것이다.입양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그야말로 가문의 영광.

그들의 부모는 보통 유아반은 5살부터 있으며 8살인 지금 입학해도 늦은 감이 있다는 말에 서둘러 아이들을 아카데미에 입학시켰다.

입학금은 일절 없었으며 오히려 평민 같은 경우는 자식이 드리케 아카데미에 입학해 있으면 세금을 면제해준다고 했다.

석 달에 한 번 일주일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여섯 달에 한 번 한 달간의 방학이 있다고 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부모와 헤어진 소년 페로와 소녀 이로는 아카데미 관계자의 손에 이끌려 드리케 아카데미에 조금 늦은 8살의 나이에 입학했다.

페로와 이로의 드리케 입학 사흘째.

"페로 오빠,나 집에 갈래.여기 싫어."

"왜?책도 많고,먹을 것도 많고.난 좋은데?"

아무리 똑똑하다고는 하지만 이제 겨우 8살짜리 아이.

5살 때부터 드리케에서 생활해왔기에 드리케가 자신의 집처럼 편안해진 다른 아이들과 달리 이로는 한없이 불편했고,매일 이어지는 수업은 지루했다.

새로운 책이 한가득 있었지만 즐겁지 않았다.

"싫어!엄마아빠 보고 싶어!집에 갈 거야!"

"석 달만 있으면 갈 수 있잖아.참아,이 바보야."

"나 바보 아냐!이 바보야~.흐아앙~."

남자아이인 페로는 새로운 환경이 즐겁고 신기하기만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자아이인 이로는 기어코 집으로 가겠다며 저녁 무렵 밥을 먹다 말고 식당을 뛰쳐나갔다.

"야아,밥은 먹고 가야지."

그 모습에 페로는 남은 빵을 입에 물고 한 손에는 스프를 챙겨든 채로 이로를 따라 나갔다.

이때 식당을 나서는 이 두 쌍둥이를 발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들이 없는 식사시간을 틈타 뛰쳐나온 이로는 금세 걸음을 멈췄다.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지도와 지명이 있었지만 지금 이곳이 드리케 아카데미라는 사실만 분명했지 어느 쪽이 남쪽이고 북쪽인지는 알수가 없었다.

"우,우아아앙.엄마아~아빠~흐어어엉."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목 놓아 울고마는 이로.

하지만 앙앙대면서도 발길은 멈추지 않았는데,이내 처음 보는 낯선 건물들이 나오자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그런 이로 앞에 나타난 이는 빈그릇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쌍둥이 오빠 페로였다.

"쯧쯧!그러게 내가 뭐랬어?"

"오,오빠아앙~.으허어엉~."

페로는 자신에게 안겨드는 동생 이로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동생이 길을 잃고 헤매는 동안 그 모습을 빵과 수프를 마시며 훔쳐보았다.때론 왔던 길을 빙빙 돌고 있는 동생을 보며 히죽히죽 웃기도 했다.

하지만 도와주지 않은 것은 동생이 길 찾는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는 이 순간을 기다린 것이었다.

동생 이로는 고집이 매우 세기 때문에 본인이 안 된다고 좌절하기 전에는 포기하지 않을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그래.이제 그만 기숙사로 돌아가자,이로!슬슬 사감선생님이 잠잘 준비를 마쳤나 살필 시간이야."

"훌쩍.으응,근데 나 오늘 아침에 침대보 안 갰어.또 베게도 바닥에 놓고 왔어,오빠."

"그래,그래!이 오빠가 다 도와줄게.그리고 이제 집에 가겠다고 떼쓰면 안 된다?갈 때는 나랑 같이 가?"

"으응,석 달 있다 같이 가자,오빠.그리고 나 배고파.얼른 기숙사로 돌아갈래!"

아카데미 안을 헤매는 동안 단정했던 초록색 단발머리가 잔뜩 헝클어졌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로는 그새 기숙사로 돌아가자며 칭얼거렸다.

그런 동생을 뒤에 달고 자신 있게 발걸음을 옮기는 페로.

얼마나 걸었을까?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어두워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주변 건물이 낯설게만 느껴졌다.쌀쌀해진 날씨에 페로가 재채기를 했다.

"엣취!"

"오빠,여기 맞아?나 이런 길 모르는데."

"으응,맞아!여기가 어디냐면......으음.아!지름길이야,지름길."

길을 잃은 것이 분명했지만 페로는 이로가 겁먹고 울 것을 염려해 당당하게 말했다.게다가 페로는 뭔가 믿는 구석도 있었다.

"지름길?"

"그래,지름길.이쪽으로 가면 우리가 수업 듣는 제 3수업관이 나올 거야!"

"정말?"

"그렇다니까!"

조금 의심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로는 자신만만한 페로를 믿고 순순히 그 뒤를 따랐다.

오빠 페로의 옷깃을 꼭 잡고.하늘에 별이 뜰 무렵 오빠 페로가 이내 울상이 된 채 이로를 돌아보기 전까지 말이다.

"이,이로!여기 어디야?"

"몰라,이 바보야!"

"히잉,이쪽으로 가면 수업관이 나올 줄 알았는데?크힝."

평소 추위를 잘 타던 페로는 날이 추워지자 코를 훌쩍였다.

"오빤 바보야!지름길이라며!이게 뭐야?길 잃는 지름길이야?"

"미,미안해.어떤 책에서 길을 잃으면 가장 빛나는 별을 따라가라고 했단 말이야.그런데 길이 안 나와."

줄줄이 위웠다 뿐이지 정확한 뜻이나 의미는 알지 못했던 페로는 이로에게 꾸중을 들어야 했다.

믿었던 구석에 허망하게 배신당한 페로는 결국 두 번째 방법으로 길을 물어볼 어른을 찾았다.

남자는 안 되고 젊은 여성에게 물어봐야 된다는 또 하나의 얕은 지식을 떠올리며.

"배고파!졸려!추워!오빠 바보!"

"자,잠깐만!예쁜 누나한테 길을 물어보면 돼!"

"예쁜 언니?왜 예쁜 언니한테 물어봐야 되는데?"

이로의 되물음에 페로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더라?머릿속의 책장을 펄럭펄럭 넘긴 페로가 이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남자어른은 조심해야 된대.여자어른은 좋댔어.여자 중에 젊고 착하고 상냥해 보이는 누나한테 물어봐야 해.그러니까 예쁜 누나를 찾자."

"그런데 길 물어보는 데 예쁜 것도 중요해?"

"응!아빠 그랬어!예쁜 누나가 착한 누나라고."

"아빠가?그럼 맞겠지,뭐.예쁜 언니 찾아보자."

몹쓸 지식을 아빠에게 전수받은 페로는 어두운 밤길을 돌아다니며 예쁜 누나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밤이라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가 산책로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걷는데,길을 잃고 처음으로 사람을 발견했다.자신들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 엉아였다.

"......엉아네?"

"오빠,저 오빠한테 물어보면 안 돼?나 배고파아."

"으음......아!그럼 길 말고 다른 걸 물어보자."

그 엉아는 수풀 사이에서 무언가로 어딘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망원경이라는 것 같았다.

망원경의 앞에는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자신들의 기숙사와 언뜻 비슷하게 생겼지만 훨씬 크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살금살금 페로와 이로는 미동도 않고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엉아에게 다가갔다.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시야가 낮은 페로와 이로에게는 한눈에 보였다.

"저기요,엉아!"

"키아아악!"

페로가 살며시 말을 걸며 등을 두드리자 엉아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이 어찌나 괴상한지 둘 역시 화들짝 놀랐다.그리고 페로와 이로는 쌍둥이답게 순간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남자어른은 이래서 위험하구나.'

"흐,흐에엥~."

놀란 이로가 울먹이는데 비명을 지른 남자는 자신의 앞에 선 두 명의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뭐야?애들이잖아.들킨 줄 알았네."

"우,울지마,이로!"

"이 오빠 무셔워,오빠.흐잉잉."

비밀스러운 작업 중이던 남자는 자신의 행각이 누군가에게 들킨 줄 알고 놀랐지만 그 상대가 아이들이라 조금 안심했다.

비슷하게 생긴 아이 둘이 자신의 앞에 왜 서 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이나 다른 학생에게 들킨 줄 알고 깜짝 놀랐던 심정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그보다......뭐냐,니들은?"

마음이 진정되자 남자가 시큰둥하게 물었다.열일곱에서 열여덟이나 되었을까?

얼굴에 약간 앳된 기는 있지만 겉모습은 일반 어른과 다름없었다.

"저기 엉아!뭐 좀 물어볼게요."

"응?뭔데?"

"예쁜 누나는 어디 있어요?"

꼭 닮은 아이들 중 그래도 조금 더 똘똘해 보이는 아이 페로의 해괴한 물음에 남자는 잠시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침묵을 지켰다.

한 대 쥐어박아서 선생에게 넘겨버릴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랬다가 선생들한테 자신이 한 일을 이를까 봐 조금 걸렸다.

꼬맹이들의 입도 막을 겸 공범자로 만들 생각에 두세 걸음 떨어져 있는 아이들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와봐."

페로가 경계하며 물었다.

"왜,왜요?"

"흐이이잉."

"예쁜 누나 어디 있냐며?보여줄게."

남자의 말에 둘 중 그래도 사내라고 페로가 조심스레 다가왔다.남자는 페로에게 자신의 보물 1호 망원경의 파인더를 가리켰다.

"여길 보라구요?"

"그래,그래.잘 봐봐.마침 지금 청소년부 최고의 미인을 감상하던 중이거든."

남자가 아이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에 페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원경 곁에 붙은 파인더를 들여다보았다.

작은 십자가가 보였고 그 안에 웬 사람이 거꾸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와아!움직인다.엉아!이거 망원경 맞죠?"

페로가 잔뜩 신나하며 물었다.그러자 놀란 사내가 페로의 입을 막았다.

"작게 말해,작게!"

"네,엉아.근데 이 누나가 제일 예쁜 누나라고요?"

밤이라서 조용히 하라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페로는 다시 파인더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꾸로 비치고는 있지만 분명 그 안에는 핑크색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녹색 눈의 예쁜 누나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분명 예쁜 누나이긴 했지만 왠지 괴짜같다는 게 페로의 생각이었다.

페로의 질문에 남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페로를 살짝 밀쳐내곤 망원경을 한차례 만지작거렸다.

"자,봐봐.같은 연금술반인데 미아라고 하지.방금 전의 핑크머리는 이루제!이 두 명이 청소년부 남성들을 양분하고 있어.서로 사이는 매우 안 좋아!으음,그러고 보니 왠지 모르겠지만 연금술부에는

미인들이 가득하단 말이야?"

다시 페로의 눈이 파인더 안으로 향했다.

반짝이는 금발과 서글서글한 비취색 눈동자의 누나가 매우 두꺼워 보이는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예쁘다기보다는 굉장히 청초한 누나였다.

"오빠아,나도 볼래,나도!"

"응?그래,봐아.엉아,내 동생도 봐도 되죠?"

"그래,그래.얼마든지."

남자가 순순히 허락하자 방금 전까지 울먹이던 이로는 금세 방실방실 웃으며 페로가 했던 모양을 따라 파인더를 들여다보았다.

"우와아,이쁜 언니야다.근데 왜 천장에 매달려 있어?"

"응?망원경은 거꾸로 보인다고 책에 나오잖아.굴절 때문에."

"아아,그랬지?"

이로는 뭐가 그리 좋은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런 이로를 바라보던 페로가 남자에게 물었다.

"근데 엉아,그럼 이 둘 중 누가 더 예쁜 누나예요?나 물어볼 것 있는데......"

"음,물어볼 것?글쎄,누가 더 예쁘냐고 하면......곤란한 질문인데."

"에?그럼 엉아는 제일 예쁜 누나가 누군지 몰라요?"

페로의 되물음에 남자가 인상을 찡그렸다.제일 예쁜 여자라!

그로서도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다.항상 예쁘장한 여자들 방이나 훔쳐봤지 제일 예쁜여자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이 꼬마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것은 청소년부의 모든 여자들 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에게는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다.(자존심 쓸때가 얼마나 없었으면......)

잠시 청소년부 여자들의 정보를 훏던 그의 머릿속에 번쩍하고 잊힌 미녀 하나가 떠올랐다.

"아!그래!있다,있어.최고의 미녀."

"와!정말요?그게 누군데요?"

"그......이름이 뭐더라?나도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2년전인데,굉장한 미인이었어!미아와 이루제와도 친해 보였는데?그때 16살이었으니 지금 18살이겠다.윈칸 축제에서 우승까지 했던 실력자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거의 수련실에만 틀어박힌 사람이거든.그래서 그런지 햇빛을 받지 않은 하얀 피부가 일품이지!"

"그 누난 어디 있는데요?"

페로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이로는 여전히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수련실이 아닐까?그래도 2년 전까지는 가끔 보였는데 최근 들어 더 안 보여.캬아,내가 망원경을 2년만 더 일찍 구했었어도 지니 크로웰의 사생활을 낱낱이......아!기억났다.그래,그래.지니 크

로웰이야!"

"지니 크로웰?그 누나가 제일 예뻐요,그럼?"

"그럴걸.거의 수련실 밖으로는 나오지 않아서 웬만한 사람은 모르는 미인이지.누구더라?아!브라이트 케니얀이라는 유명한 마법반 선배도 죽어라 쫓아다녔거든!마법반을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2년인가?졸업하기 전까지는 매일 쫓아다녔지.그 선배랑 친한 쟈이맘 선배랑 내가 친했거든.그래서 기억해."

남자의 말을 경청하는지 페로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수련실이 어디냐고 페로가 물으려는데 기숙사 건물 밑으로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뱀이 보였다.

"끄악!뱀이다!엉아,뱀이에요!"

"응?기숙사에 웬 배......아!저거야,저거!야,꼬맹이.저 뱀이 그 지니 크로웰의 애완 뱀이야.쫓아가봐.지니 크로웰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오옷!가자,이로!어서 와,예쁜 누나한테 길 물어보러 가야지!"

"으응?오빠 저거 되게 재밌는데......"

망원경에 매달리다시피 하는 이로를 페로가 잡아끌었다.뱀이 기숙사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로가 이로의 손을 잡고 타다닥 뛰어가는데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길을......물어본다고?"

애들 생각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파인더를 들여다보았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헥헥!오빠,나 힘들어."

"얼른 와,이로!저 뱀을 쫓아가면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어."

"히잉,아까 그 오빠한테 물어보지."

"안 돼!예쁜 누나여야 해!"

정신없이 뛰면서도 아이들은 곧잘 말을 주고받았다.아직 배가 덜 고픈 모양이었다.

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순식간에 나타났다.바로 앞에 있다 싶으면 어느새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뱀이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수풀 너머로는 숲이 이어졌다.

"앗!뱀아!"

페로가 안타깝게 외쳤다.그러자 사라졌던 뱀이......

"불렀냐?"

하는 태도로 다시 수풀 사이로 나타났다.새하얀 몸이 달빛에 번들거렸고 붉은 눈과 붉은 혀는 마치 루비 같았다.

"저기......같이 가면 안 돼?"

페로의 떨리는 제안에 뱀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말을 알아듣다니!

"오빠,뱀이 말을 알아듣네?"

"아빠가 백사는 몸에 좋은 거랬어!그래서 그런가?"

"샤아악!"

돌연 나름 순하던 뱀이 입을 쩍 벌리며 페로를 위협했다.무엇이 거슬렸던 것일까?

"끼악!오빠!"

"저,저리 가,이 똥뱀아!"

비명을 지르는 이로와 그런 이로를 가로막고 울먹이며 외치는 페로.

가만히 그런 둘을 쳐다보던 뱀이 휙 몸을 돌려 순식간에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더니 이로가 입을 열었다.

"오빠,왜 하얀데 똥뱀이야?똥은 누런데?"

"......하얀 똥도 있어!"

"아,그랬지!개똥."

"응,개똥."(이 부분 쓰면서 엄청 웃었던 1人......)

아이들 특유의 더럽다면 더러운 대화를 나누면서 허망하게 뱀이 사라진 수풀로 발을 디뎠다.

화가 난 뱀이 혼자 가버린 것이다.뱀이 사라진 길을 걷다가 숲에 들어섰다.

"오빠,나 무서워."

"괜찮아.뱀만 찾으면 돌아갈 수 있잖아!"

아이들은 터벅터벅 나뭇잎을 헤치며 걸었다.

숲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서니 나무 몇 개를 지나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회색의 크고 동그란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얼핏 불이 새어나왔다.

"오빠야,저게 뭐야?"

"우움......화장실?"

"왜 저렇게 커?"

"공중화장실인가?"

불쌍한 남매는 화장실(?)로 보이는 건물에 다가갔다.

타원형의 건물이었는데 그 꼭대기에 조그맣게 창문이 나 있어서 키가 작은 페로와 이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오빠,나 마려워."

"그럼,여기 들어가자."

동생의 말에 페로와 이로는 동그란 건물을 한차례 빙 돌았다.

문은 찾았지만 손잡이가 너무 높이 있어서 손이 닿지 않았다.

"오빠......"

"으음,기다려 봐!자,밟고 올라가서 문 열어."

페로가 문 앞에 엎드리며 말했다.이로는 잠시 망설였지만 화장실이 급했기에 페로의 등을 밟고 올라갔다.그리고 문을 열려는 순간......

끼이익

문이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것이 아닌가!

"우와!오빠,자동문인가 봐."

이로가 감탄하는데 문 앞에 엎드린 페로에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열린 문 안에서 웬 사람이 걸어 나왔다.

열린 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빛이 반사되어 더욱 화려하게 빛나는 황금빛 머리카락의 누나였다.

미아라는 누나와 언뜻 닮았지만 한층 강렬한 이미지를 가졌는데 그 누나는 문 앞에 널브러진 페로와 이로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희들......"

"아......그,그게......!"

화장실이 아니었네,하는 건 아무래도 좋다 싶을 만큼 예쁜누나라 페로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그런 누나의 어깨 위로 예의 그 하얀 뱀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거냐,라이?쫓아온다는 게?"

"똥뱀!"

"개똥뱀!"

페로와 이로가 약속이나 한 듯 뱀을 가리키며 말했다.

순간 누나의 얼굴이 묘하게 바뀌더니 한 손으로 뱀을 낚아채 흔들며 말했다.

"똥......푸핫!푸하하핫!라이,네놈은 뭐하고 다니기에 똥뱀이 됬냐?그것도 개똥뱀......푸훗!"

"......누나!"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웃던 누나가 페로의 부름에 내려다보았다.여전히 입가에 웃음이 남아 있었는데 과연 예쁜 누나구나 싶었다.

"푸히히.응?그래,그래.뭐냐 꼬맹이들?"

"누나가 지니 크로웰이에요?"

"응?그런데?"

"그럼 우리 기숙사 좀 가르쳐주세요!"

페로의 부탁에 누나는 잠시 페로와 이로를 훑어보았다.

"교복을 입고 다녀야지 꼬맹이들아!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교복이요?"

"그래,거기에는 추적마법이 걸려 있거든.아마 지금쯤 유아부 기숙사에 난리가 났겠는걸."

예쁜 누나는 연신 키득키득 웃었는데 페로의 옷을 꼭 잡고 있던 이로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순간 이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로!"

"미안,오빠!"

"푸하하핫!푸핫!이것들 귀엽네.아하핫!들어와!들어와!얼마 없지만 먹을 걸 줄게."

누나가 문 안으로 들어서며 웃음기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페로와 이로는 망설였지만 길도 물어본 사이(?)에 이 정도야 괜찮겠다 싶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쾅!

페로와 이로가 건물 안에 들어서자 하얀 뱀이 알아서 문을 닫았다.

"......것 봐!자동문이지?"

이로가 페로에게 속삭였다.페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한쪽에는 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구석에 침대 매트가 보였다.

그리고 여기저기 뭔가에 그을린 자국과 파인 자국이 잔뜩 있었고,바닥에는 수많은 동그라미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이곳이 수련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아까 그 엉아의 말대로라면 말이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2년을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안이 제법 따뜻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쁜 누나는 친절한 듯하지만 조금 짓궂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헤매면 유아부에서 이리로 와?시켜도 못하겠다.말썽쟁이 꼬맹이들 같으니라고."

그렇게 말하며 누나는 이로와 페로의 앞으로 조금 큰 상자를 열어 보였다.

열린 상자 안에서는 약간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그리고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과일들과 말린 육포.

"먹어도......돼요?"

"그래,다 먹어도 돼."

누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기에 페로는 상자 안에서 큰 과일 몇 개를 꺼내 황급히 입에 넣었다.

아그작

차가운 과일즙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먹보인 페로는 꽤 오래 전부터 배가 고팠다.

헌데 오히려 배고프다고 징징대던 이로는 꺼낸 과일을 들여다보기만 할 뿐 입에 대지 않았다.

"저......언니!이 상자는 뭐예요?속이 차가워요."

"이거?아는 선배가 만들어준 거야.보존마법보다는 쉬운 거지만......냉장마법이라는 게 걸려 있어.반영구적인 거지."

"우와아.이런 건 어떻게 만들어요?"

"으음,글쎄.브라이트 선배에게 물어보렴."

브라이트?

이로는 좀 전의 남자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마법반 수석 졸업이라는 오빠요?언니를 쫓아다녔다는?"

"수석?그건 모르겠는걸."

이로의 눈에 싱긋 웃으며 말하는 언니의 모습은 마치 여신 같았다.

이로는 '아아,이 언니처럼 되고 싶다.그러면 마법반 수석 오빠가 자신에게도 이런 걸 만들어줄까?' 하고 생각했다.

"어으 머으,이오!"

입 안의 과일을 한껏 으적거리며 페로가 말했다.

이로는 배가 고팠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었다.목을 타고 과즙이 흐르는 순간,이로는 깨달았다.

"아참!언니,화장실이 어디예요?"

"응?나가서 오른쪽!"

이로는 황급히 문을 나섰다.하얀 뱀이 이번에도 문을 열어주었다.이로가 저 언니처럼 되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차가운 상자에,자동으로 문을 열어주는 뱀!

이로가 나가고 페로는 여전히 과일을 우적거렸다.단지 눈으로 이로의 뒤를 잠시 쫓았을 뿐이었다.

"맛있어?"

"으에!"

침묵이 어색했던 건지 누나가 말을 걸었고,그런 누나에게 한껏 고개를 끄덕인 페로는 누나의 눈 밑으로 얼핏 비치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저게 소문으로만 듣던 다크서클?

잠시 웃음 짓나 싶던 누나는 피곤했는지 어느 순간 졸고 있었다.페로는 굳이 깨우지 않고 과일을 먹었다.

"오빠!"

문이 벌컥 열리며 이로가 들어왔다.이로는 우선 먹던 과일을 허겁지겁 마저 먹었다.

이로가 들어오는 소리에 예쁜 누나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는 걸신들린 듯 과일과 육포를 먹는 둘을 턱을 괸 채 마냥 바라보았다.

금세 상자 안은 텅텅 비었고 아이들도 배가 불렀기에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다 먹었어?"

"네!"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래?기숙사 돌아가는 길을 물었었지?나는 조금 바쁘니까 저 뱀을 쫓아가.길을 알려줄 거야."

누나가 문 앞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을 가리키며 말했다.

뱀이 화들짝 놀라 몸을 세우더니 잠시 누나와 눈싸움을 했다.그러더니 이내 몸을 축 늘어뜨렸다.

"저 뱀을요?"

"그래,저래 보여도 꽤 똑똑하단다."

"저 뱀은 무서운데.아까도 '샤악!' 이랬어요.그치 오빠?"

"응!"

잠시 누나의 시선이 뱀에게 향했다.

뱀이 누나의 시선을 슬쩍 피하는 걸 보며 이로와 페로는 저 뱀이 누나한테 잡혀 사는구나,생각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밤길이 어두우니까.운디네!"

챠르르릉

누나가 허공에 대고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허공에 자잘한 물방울이 모여들어 물결치는 소리를 내며 작은 인어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와아!와아!오빠,저것 봐!"

"우와아.요정인가 봐!"

작은 인어는 푸르스름한 빛을 흩뿌렸는데 굉장히 귀여운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은 누나는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뱀이 문 밖으로 나갔다.

"운디네,아이들을 따라가.길을 밝게 비춰주렴.아이들이 기숙사로 들어가면 돌아가고."

작은 요정이 입을 뻐끔뻐끔 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요정을 따라 문으로 나갔다.

"누나는 안 가요?"

"언니,같이 가요."

"나는 바빠서 말이야.명상도 해야 하고......할 것이 많단다.모처럼 쉬었으니 다시 수련해야지."

누나가 문가에 기대어 페로와 이로를 마중했다.

아이들은 새하얀 뱀과 요정을 따라 수풀 위에 서서 양손을 높이 들어 크게 흔들었다.

"예쁜 누나,안녕!"

"언니,또 올게요!"

아쉬움 담긴 아이들의 말에 누나가 싱긋 웃으며 한 손을 흔들어주었다.그리고 말했다.

"또 오면 혼난다."

낭랑하고 예쁜 목소리였다.

<외전 끝.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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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편 까지 읽어주시느라 수고하셨구요! 3권에서 또 뵈요 ㅎ.ㅎ 

오타 있으면 지적해주세요~ 그럼 안녕히~   by.klogesu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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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의 정령사 3권

나한테는 생소하다면 생소한 화려한 방 안에서 나는 반쯤 얼이 빠져 중얼거렸다.

"워프 울렁증은...... 워프한 거리에 비례해서 울렁거리는구나."

[마스터,기운내세요.]

그렇다고 기절까지 할 줄이야. 9년만에 워프를 한 탓인지 나는 워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잠시 잊었던 것 같다.

그래도 딴에는 혹시 효과가 있을까 해서 숨까지 참았는데!

멀미약도 먹었는데!

덜 울렁거리기는 커녕 숨이 넘어가 버리다니,젠장!

"으흐흐흐."

머릿속으로는 '우후후후'라고 하고 싶은데 입에서는 작대기 하나가 빠진 채 흘러나왔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긴 한 모양이었다.

똑똑

한창 자책의 길로 빠져드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너무 넓어서 방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다 싶을 정도였지만.

[시녀 같은데요,마스터.]

내가 기절한 뒤 혹여 누군가 '백사다!' 라며 눈을 빛낼까 봐 내 팔목에 빙빙 매달려 팔찌인 척했다는 라이는 충실히 인터폰 역할을 했다

대답할 기운도 없던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시녀가 그냥 가주길 바랐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커다란 문이 스르륵, 열리면서 시녀가 들어왔다.

"어머! 죄송합니다. 주무시고 계신 줄 알고......"

문을 열고 들어선 시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에 놀란 시녀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양해를 구했지만 나는 도통 화낼 기운도 없었다.

"......뭐죠?"

"아,저는 토파즈 궁 소속 시녀 첼시라고 합니다. 오늘 밤에 있을 건국천주년기념 파티에 참가하셔야 하니 준비를 도와드리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만......"

[라이, 나 얼마나 기절해 있었어?]

[하루하고도 반나절 정도?]

오래도 자빠져 있었잖아? 어제 점심때쯤 드미트리에서 워프진에 오른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럼 지금은 그 다음날6시 정도인가?

파티가 8시부터라고 했으니 준비할 때도 되긴 했다.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긴 했지만 내가 자진에서 황을 따라 파티에 가겠다고 했으니 어쩌겠나, 나가야지.

"저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불안했는지 시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었다. 어찌할까요,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혼자 할테니 나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는 이론만으로도 복잡한 파티용 드레스를 실제로 입어본 적은 없었기에 침대와 강한 유대를 형성하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흐느적거리는 몸을 움직여 내 기숙사 방에 있는 것보다 열배는 커 보이는 화장대 앞에 앉았다.

화장대가 어찌나 넓은지 그 위에 누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준비하죠."

"네!"

왠지 기뻐 보이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시녀 첼시의 손에는 네모난 모양의 나무 가방이 들려 있었는데 제법 크기가 컸다.

그리고 이내 화장대 위에서 열린 그 나무 가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은.....

"으윽......"

[마스터,이게 뭐죠? 독약?]

서로 뒤섞여서 이상한 냄새를 풍겨내는 각종 화장품이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명색의 귀족 영애라는 여자가 한 번도 화장을 해본 적이 없었다.

드레스는 3살 때까지는 집에서 입어봤지만 어떤 종류의 드레스를 입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썩 부유한 집안이 아니라 아마도 간단한 평상복 형식의 드레스만 입었을 것이다.

그 후로는 아카데미에만 있었으니 화장할 기회가 더더욱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교양과목으로 춤과 사교,말하는 법,드레스 입는 법 등을 배웠지만 이론뿐이었고 실제로 활용하는 이는 드물었다.

방학 때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녀석들 중에는 실제로 파티에 나가는 녀석도 있겠지만 나는 방학과 개학에 상관 없이 수련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왜 그러세요?"

"아니,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무 가방 안에서 화장품을 꺼내 화장대 위에 늘어놓던 첼시가 한껏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나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물어왔고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애초에 파티에 참가하려면 이런 준비가 필요하다고 예상을 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자 달갑지 않았다.

더군다나 파티에 나가도 에쉬가 없으니 나로서는 의욕이 서질 않았다.

"저......아가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러세요."

"가져오신 드레스가 있으세요? 없으시다면 제가 구해울까요?"

"아아, 드레스라면 가방에......"

입을 떼자마자 첼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침대 밑에 놓여 있던 내 짐가방을 찾아 안에 들어있던 드레스를 꺼내들었다.

고개를 돌려 화장대 위에 늘어진 화장품들을 보았다.

그 엄청난 양에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누워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넓은 화장대 위에 가득 늘어진 화장품이라니......

평생 써도 되겠다!

"이건가요?"

"네,안에 장신구도......"

"음?아! 이거군요?"

"구두도 있을텐데......"

이내 첼시가 드레스와 보석상자,그리고 구두상자를 두 손 가득 안아들었다.

그레스는 아무리 내가 가져왔지만 너무 화려하다 싶었다.

졸업 선물로 집에서 구두와 세트로 보내온 드레스였던가?

하늘색 천에 큼직하고 시원스러운 짙푸른  색의 꽃 모양 자수가 수놓여 있었는데 그나마 보석이 가장 덜 붙은 드레스로 골라온 것이었다.

보석 대신 레이스가 잔뜩 붙어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내 짐가방 속에는 드레스와 구두,보석을 빼면 거의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럼 실례할게요."

첼시의 손이 내가 입고 있던 경장 윗도리를 슥,하고 순식간에 벗겨냈다.

나는 순간 깜짝 놀라 첼시를 제지했다.

"잠깐,내가 벗을게요!"

"네? 아, 그러시면 제가 드레스 준비를 할게요."

[꺄아,마스터! 얼레꼴......켁!]

챙겨온다고 챙겨왔지만 몇 가지 없는 물건이 있었기에 나는 첼시가 어디선가 구해온 코르셋을 입어야 했고 얇은 속옷도 걸쳐야 했다.

그 외에도 자잘한 것이 많지만 떠올리자니 머리가 다 아팠다.

나는 전신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정면으로도 비춰보고 등 뒤로도 비춰보았다.

코르셋의 효과인지 허리께에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어깨 아래로 뻗어 나온 팔이나 목선도 제법 봐줄 만 했다.

역시 옷이 날개군.

나름 내 모습이 만족스러웠기에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누가 뭐래도 드레스는 여자의 로망 아니겠는가.

"잘 어울리세요,아가씨! 이게 요즘 드미트리에서 유행하는 디자인인가요?"

......그건 모르겠는걸.

"유행까진 모르겠고...... 부모님께 선물 받았죠."

"그렇군요! 지금 엘란의 사교계에는 목부터 가슴 중간까지 파인 드레스가 유행이에요. 이런 식으로 어깨를 온통 망사레이스로 감싼 형식은 전에 잠시 유행했지만 어깨가 두꺼워 보인다든가 가슴이 빈약해 보인다는 이유로 금세 지나갔어요. 하지만 아가씨는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이 드레스는 이렇게 입는 거라고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느낌이에요."

"그,그래요?그 정도까진......"

아이참! 쑥스럽긴 했지만 첼시의 칭찬에 나는 또 기분이 좋아졌다.

아부일 수도 있겠지만 듣기 좋은 말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정말이에요! 요즘 유행 포인트는 하얀 피부와 얼마나 더 큰 리본을 다느냐! 그리고 얼마 가슴이 패인 옷을 입느냐 이거든요."

"헤에,그래요? 아, 리본은 안 달래요."

"걱정 마세요! 아가씨 차림에는 리본보다는 자잘한 레이스가 어울리겠어요. 그리고 가져오신 보석도 멋진걸요. 리본은 안 달아도 돼요. 사실 리본은 피부나 미모에 자신 없는 분들이 시선을 분산시키려고 다시는 거에요."

"피부에 자신은 없지만......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리본을 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첼시가 보석을 꺼내들었는데 그건 왕이 선물해준 보석이었다.

졸업선물 겸 중급정령과 계약한 기념으로 말이다.

뭐,어떤 보석을 가져가야 할지 몰라서 적당히 고르기도 했지만.

"이건 무슨 보석이죠? 사파이어는 아닌데......토파즈? 스피넬인가요?"

"에?그러니까......"

물색과 비슷한 옅은 푸른색 보석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집어든 첼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는데 나도 첼시를 따라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저게 뭐였더라?

분명 알았던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서 잠시 뜸을 들이자 팔목에 걸려 있던 라이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아쿠아 마린이에요. 마스터! 바다의 보석이라는......,]

"아쿠아 마린,바다의 보석."

나는 라이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아,듣고 나니 생각나네.

"아아. 들어본 적 있어요. 꽤 값비싼 보석이라던데?실례지만 어느 귀족가의 영애인가요?"

"크로웰 백작가에요."

"그렇군요. 어쩐지 아가씨한테서 깊은 품위가 느껴지더라고요. 나긋나긋한 몸짓이나 부드러운 동작이...... 품위 그 자체에요!"

그건 구냥 워프의 후유증인데.

그냥 흐느적거린 것일 뿐 품위가 있어 저절로 우러나오는 우아함은 아니었다.

온몸에 기운이 빠져서 그랬떤 거지만 굳이 정정해주지는 않았다.

"호홋."

후훗,이라고 웃고 싶었지만 참자.

빨리 파티 준비를 마쳐야겠다.

"자자,이제 앉으세요! 푸른 옷에 푸른 보석이니 푸른 화장...... 아니,금발이시니까 반짝이는 금색 화장을 해드릴께요!"

부디 돌 맞지 않게만 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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