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71)

"지니 크로웰!"

"네,학장님."

오랜만에 마주선 학장은 처음 만났던 그날에 비하면 많이 늙어 있었다.일주일 전보다도 더욱 말이다.

그 짧은 시간에 팍삭 삭으신 걸 보니 누가 고생을 꽤나 시킨 모양이었다.

"후우,자네는 항상 나를 고생만 시키는군 그래."

나였나?나는 학장을 찾아가 이번에 왕의 수행원으로 따라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학장은 이미 정해진 수행원이 있다며 거부했지만 나는 한 시간 꼴로 학장을 찾아가 들들 볶았다.

그러길 일주일째 결국 나는 허락을 얻어냈다.인간 승리지,후훗.

"너무 그러지 마세요,학장님!저 같은 중급정령사 정도면 국왕 전하의 수행원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충분하고 모자라고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수행원을 밀어냈으니 그러는 거네!바리보프 경이 마침 사정이 생겨 자리를 양보했으니 망정이지.그렇지 않았으면 자네는 나를 남은 2주일

내내 따라다녔을 것 아닌가?"

"설마요!"

나는 전혀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학장은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휴우,수행원은 보통 기사들의 자리인데......파티까지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매우 난처했다네.전하께서 흔쾌히 허락해주셨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도록!"

"물론이지요."

"아무튼 전하와 함께 파티에 참가하게 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드레스를 준비하도록 하게."

드레스?파티에 참가해서 에쉬를 만날 생각에 들떠 있던 나는 의문을 표해야 했다.수행원은 따로 제복이 있다고 들었는데?

"드레스요?"

"수행원용 제복이 있지만 모두 남성용이라서......이례적으로 여성인 자네가 수행원으로 발탁되었다고 여성용 제복을 만들 수는 없지 않나.그러니 드레스를 착용하도록.마침 백작 영애이니 그 정도

는 괜찮네."

괜찮긴 누구 맘대로 괜찮아!드레스 안 입어본 게 벌써 10년도 더 된 것 같은데.선물 받은 드레스야 잔뜩 있지만.

"그,그건......"

"음?혹시 드레스가 없어서 그러나?"

"아니요!있긴 하지만......"

"그럼 됐네.이만 가보도록."

학장이 서류를 뒤적이며 펜을 들었다.나가보라는 뜻이었다.

이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학장실을 나선 나는 서둘러 내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벌컥 열고 안에 들어서니 라이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다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오셨어요,마스터!일은 잘 됐나요?]

"그래,내가 가기로 했어.문제가 또 생겼지만."

옷장을 열어젖힌 나는 그 안에 있는 드레스를 몽땅 꺼내들었다.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를.

손도 대지 않았으니 당연히 새것들이었다.

[마스터,그건 왜요?]

뭘 가져가지?짜증이 살며시 밀려왔다.그래도 가장 덜 화려한 푸른색 드레스를 추려서 침대 위에 던져놓았다.

다음은 보석.문득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보석상자 하나가 보였다.받는 대로 쌓아두기만 했어도,누가 준 것인지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헌데 그중 유달리 작은 보석상자 하나.

주먹만 한 상자였는데 이런 걸 선물 받았던가?그것만 출처가 기억나지 않았다.다른걸 젖혀두고 그 상자를 집어들었다.

"이건......"

상자를 여니 그 위에 가지런히 놓인 가공되지 않은 푸른 원석이 보였다.

[얼음의 정령 소환 정령석!]

"알아."

아아,맞다.이거 여기에 박아뒀었지,상급정령과 계약하면 그때 써야겠다며.조심스레 푸른 정령석을 집어 들었다.

지금 이걸 발견한 건 계약하라는 하늘의 계시겠지?안 되면 다 하늘 탓이야.

나는 왠지 지금 이 순간에 얼음의 정령을 소환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에 휩싸였다.

정령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파스스슷

정령석에 마나를 주입하기 무섭게 9년 전과 같은 현상이 눈앞에서 일어났다.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바닥을 잠식했다.그 모습은 언뜻 투명한 꽃 같았다.

[마스터!]

갑작스레 얼음의 정령을 소환하자 라이가 놀라 소리쳤다.

파스슥 파슥

어렴풋하던 그날의 기억이 눈앞에 또렷하게 펼쳐졌다.

정령석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솟아오르는 얼음기둥.얼핏 만개한 꽃같아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얼음송곳 사이에서 이내 기다리던 얼음의 정령이 스르륵 솟아올랐다.

연신 바스라지고 다시 얼기를 반복하는 얼음체.이번에는 기필코......

[안녕......하세요?]

"응?"

그때와 달리 빠져나가는 마나의 양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는 그때와는 명백히 다른 정령의 태도에 얼굴을 찡그렸다.

[제 소환자는......당신인가요?저와의 계약을 원하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확실히 그때와는 뭔가 달랐다.

이건......그 녀석이 아니야!

"라이!이 아이,전에......전에 그 녀석이 아니지?"

[네,그때 그 녀석이 아니에요.마스터,명백히 기운이 다릅니다.]

그런가?나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음의 정령이 나를 거부했던 그 녀석 하나일 리가 없는데!낭패였다.어쩐다?

잠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나는 소환된 얼음의 정령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너한테는 볼일이 없어!돌아가 줘."

[네?그런......]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는 얼음의 정령.나는 일단 마나를 끊어버렸다.

그리곤 얼음이 사그라진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정령석을 주워들었다.

"라이......"

[네,마스터!]

"너......그때 그 녀석을 수많은 얼음의 정령 중에서 찾을 수 있어?"

[가능하기는 하지만......어쩌시려고요?]

이왕 이렇게 된 것 그 녀석이 나올 때까지 소환하고 말 테다.

하지만 이미 몇 천 년을 버텨온 정령석이 몇 번이나 더 소환을 견뎌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돌 녀석을 소환한 정령석은 그 자리에서 부서지지 않았던가.이들이 무리하게 저 혼자 튀어나오려다 정령석에 무리가 갔다고는 하지만.

"그 녀석이 나올 때까지 소환을 반복할 생각이야.하지만 이 정령석이 그걸 버틸 수 있을까?"

[음,마스터도 참......제가 누굽니까?]

"너?라이잖아.맞을 짓만 골라 하는."

내 시큰둥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라이가 뱀 주제에 볼을 잔뜩 부풀리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저는 금속의 정령이라구요!더 나아가서 광물의 정령!]

"그게 뭐 어쨋......아!너 그럼 이 정령석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거야?"

나는 문득 라이가 마나석도 흡수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마나석이 가능하다면 정령석이라고 안 될 이유는 없었다.

[에헴!일반 금속이 아닌 마법이 깃든 물건이라 조금 어렵지만 마스터의 마나만 있으면 해볼 만하죠.]

"호오,그래?그렇단 말이지?"

기다려라!이 시건방진 얼음의 정령.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나는 손에 들린 정령석을 빤히 바라보았다.네가 안 나오고 버텨?

엘란으로 떠날 때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그리고 내가 정령석에 매달린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드레스와 장신구 몇 가지를 준비해둔 나는 곧바로 식량을 바리바리 챙겨서 다시 수련실에 틀어박혔다.

정령석을 단단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하루에 세 번 이상 정령을 소환할 수는 없었다.

영구적이라고는 하지만 정령석에 새겨진 정령진 자체가 하루 세 번의 소환으로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파스스슷

수련실 바닥을 타고 얼음기둥이 넘실넘실 자라났다.처음에는 그렇게나 신비로워 보이던 모습이지만 이제는 질려버렸다.

"라이?"

[아니에요.]

라이가 고개를 도리질 치자마자 나는 얼음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마나를 끊어버렸다.

"방금 그게 몇 번째였지?"

[스무 번째예요.오늘은 한 번 남았어요,마스터.]

내가 이래봬도 한 끈기 하거든.

나는 잠시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하고 과일 하나를 집어 먹었다.

곧 빠져나갔던 마나가 차오르자 다시 정령석에 마나를 주입했다.왠지 이번에는 될 것 같았다.

파스스슥

정령석 주위가 빠르게 얼어갔다.

정령석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얼음기둥이 솟아올랐다.그리고 쏟아져오는 한기.

"어때 라이?"

[으음......조금만 더요.]

라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정령석에 시선을 집중했다.

나는 그놈이 그놈 같았는데 라이는 같은 속성의 정령이라도 미세한 파동이나 기운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라이는 그 미세한 차이를 느꼈다.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 얼음 사이에서 정령이 떠올랐다.

[누구냐......나를......깨우는......]

[녀석입니다,마스터!]

그래,나도 저 대사 들어본 것 같아!

"나다!계약하자,얼음의 정령."

[......거절한다.]

또냐?나는 억울하기만 했던 그때와 달리 묘하게 화가 치밀었다.

상급정령과도 계약했는데 아직도 모자라단 말이야?그럼 네 녀석은 무슨 드래곤이랑 계약할 셈이냐?

"왜?"

[내......주인이 되기에는......부족하......]

"너 그 소리 9년 전에도 했어!"

[내,내가......언제......?]

이 녀석이 시치미 떼네.

"9년 전 나보고 네 녀석이 그랬지.내가 형편없어서 계약을 거부한다고!"

[그때 그 어린아이?]

이제 좀 안정이 됐는지 녀석이 또렷하게 말했다.

"그래,그때 그 어린아이다."

[......인간은 너무 금방 큰단 말이지.]

"너희들이 시간 감각이 없는 거야!그보다 딴소리 말고 계약이나 하자고!네 녀석을 찾느라 일주일 내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요즘 얼음의 정령을 불렀다가 중간계에 나가기 무섭게 바로 역소환한다는 소문의 주인공이......너냐?]

나는 녀석의 질문에 잠시 말을 멈췄다.내가 그렇게 유명해?하핫,별로 한 일도 없는데.

"그럴걸.나와 계약해!나는 상급 물의 정령과도 계약했단 말이야!이 정도면 인간 정령사 중에는 몇 손가락 안에 꼽는 실력이라고!"

물론 대외적으로는 중급정령사지만 말이다.

[귀찮아아......]

"뭐?"

[귀찮단 말이다.잠도 자야 하고,잠도 자야 하고,잠도 자야 하는데......]

이 녀석,혹시 그딴 이유로......

"너,나를 거부한 이유가......"

[졸려서.]

젠장,별 웃기는 정령이 다 있네?라이도 웃기긴 하지만.아돌도 웃기지.응?정령은 다 웃긴가?아니야,녀석들이 특이한 걸 거야!아무렴,운디네는 정상인걸!

나는 살며시 내 정령들의 특이함을 외면했다.

"아무튼 네놈은 나랑 계약해야 돼.안 그러면 매일같이 얼음의 정령을 소환할 테다!죽을 때까지 쭈욱!"

[뭐어?그런 귀찮은 일을 왜 해?]

"그러니까 지금 계약하자고.나,마나 많다.너 정도는 반나절은 소환 상태로 있을 수 있어.전처럼 멋대로 돌아가지는 못할걸!"

사실 상급정령은 10분도 소환 못하지만.

[......다른 녀석 불러주면 안 될까?]

"안 돼!"

[별 해괴한 인간을 다 보겠네,정말.]

"미 투(Me too)다!"

사돈 남 말하고 있네.정령이 계약 안 할 거면 왜 소환되는 거야?

[정말이지......소환되고 싶다는 녀석들이나 시켜줄 것이지......]

"너도 계약하고 싶으니까 나온 것 아냐?"

[아니,우린 누군가 부르면 랜덤으로 끌려나온다.본령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야.대부분의 정령이 그렇다.아주 강해서 스스로 주인을 고를 정도가 되지 않으면 그걸 거부할 수는 없지.]

그 말에 나는 힐끔 라이를 쳐다보았다.그럼 저 녀석은 아주 강한 녀석이란 말이야?

[푸힛!마스터,제가 자랑스럽지 않습니까요?](난 라이를 사랑스러워 하는데~.)

"전혀."

그동안 네 녀석이 저질러온 만행을 다 잊은 모양이지,라이?

[저건......상위 정령인데.저런 정령이 있으면서 왜 나와 계약 하려는 거지?]

"응?나는 말이야,너 외에도 숨겨진 일곱 개의 정령을 찾아서 모조리 계약할 생각인걸.네 녀석의 그 게으른 버릇도 고쳐주고 싶고."

내가 찾은 두 개를 제외하고,불완전한 일곱 개의 정령석이 대륙 어딘가에 숨겨져 있으리라.

이 사실을 나만 알고 있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될 수 있다면 많은 수의 비속성 정령과 계약하고 싶었다.

그걸 위해 나는 4대 속성 중에서 오로지 물의 정령과만 계약한 것이다.

[그럼......이렇게 하자.]

"음?어떻게?"

[소환은 1년에 한 번만 하는 걸로.그럼 계약하지.]

왠지 이 녀석은 아돌과는 앙숙이 될 것 같았다.말하는 모양 새나 하는 짓이 정반대인 걸 보니.

"장난해?적어도 하루에 열 번은 부를 거야."

[한 달에 한 번은?]

"하루에 열 번."

[너무하는군,정말.정령에게도 사생활이 있는 법인데.]

나도 조금 부르고 싶지만 서로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사생활?평소에 뭐하는데?"

[......잔다.]

그럴 것 같더라.나는 왠지 벌써 이 녀석에 대한 선입견이 생길 것 같았다.잠퉁이.

"네놈 때문에 내가 그렇게 울어댄 걸 생각하면......일단 너는 개조가 필요하겠다.우선 계약해!"

[......싫은데.]

아,주먹이 운다,울어!때려봤자 나만 손해날 게 분명하니 지금은 참는다만......

"이렇게 하자.한 달 중에 2주는 빡세게 부르고,나머지 2주는 절대 안 부를게."

[정말?]

"정말."

[......좋다,이름을 다오!]

마침내 녀석이 항복했고 나는 한껏 웃음 지었다.

정령에 관한 고서를 모조리 뒤지고 뒤져서 과거 얼음의 정령이 뭐라고 불렸는지를 미리 찾아놨기 때문이다.

"그류페인!마음에 들어?너희는 고대에 그렇게 불렸다며?"

[너무 긴 것 같은데?]

이게 길어?아돌 녀석이 제 이름이 너무 짧다고 투덜대기에 애써 긴 이름으로 찾은 건데.

"그럼?"

[한 글자나 두 글자가 좋겠는데.간편하게.]

"그럼 으음......그류......류페......페인......으음,페인해라 페인!입에 쫙쫙 붙네."

딱 좋네.잠자는 데 목숨 거는 녀석 같으니까,잠퉁이 페인!

[좋다,내 이름은 페인.자네 이름은 뭔가?]

"내 이름은 지니 크로웰.될 수 있으면 진이 크로웰이라고 불러도 좋고."

[지니?지니?똑같은 이름 아닌가?]

역시 이쪽에서 진이를 바라는 건 무린가?'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달라."

[뭐 좋아,좋아.그럼 잘 부탁하네,지니.]

"어쭈?이름 부르냐?"

[그럼 뭐라고 부르나?]

그렇게 물으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내 입으로 주인이나 마스터라고 부르게 하자니 조금 민망했다.

"그냥 그렇게 불러."

[그러지.그럼......이제 제발 나 좀 보내주게나.]

"그래,페인.내일 보자."

[안 불러도 되는......]

녀석은 사라지는 순간까지 될 수 있으면 부르지 말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냈다.

훗,넌 내일부터 죽었어.

"우후후훗."

[푸헤헤헷.]

"우후......응,라이?근데 너는 잠을 자지 않잖아?페인은 왜 자?"

[네?그야 개성이죠.]

으음,역시 정령학은 깊고 심오해.

**

눈물 나는 재회 파트가 끝났어요! 정말 열심히 타이핑 쳤어욤 ㅠ.ㅠ 

3권 제작때는 느긋느긋하게 제작 할래요오~솔직히 이번에도 일주일이나 걸렸지만 ㅋ.ㅋ

타이핑 제작 원하시는 분은 [email protected]으로 스캔본 보내주세요오~

아,맞다 술탄의여기사 2권 스캔본 소장하고 계신 분?보내주시면 감사!

**

엘란으로

쾅쾅쾅

"크로웰 양!크로웰 양!"

찰싹찰싹

[마스터!마스터!]

"크거거걱.크커컥."(엄연히 코고는 소리입니다!)

찰싹찰싹

"크로웰 양?제발 대답 좀 해주시오!"

"으으응."

한참 단잠에 빠져 있던 나는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린다는 사실과 라이가 꼬리로 내 볼을 거칠게 후려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어나야겠는데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모처럼 숙제를 모두 마치고 밀린 일기까지 써낸 유아부 학생의 마음으로 잠들었던 탓인지 잠기운이 더욱 나를 진득하게 감쌌다.

"크로웰 양!국왕 전하보다 늦게 도착할 셈이오?"

[마스터어~.]

"크커거.커걱!"

국왕 전하라는 말에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이런 젠장!오늘이 엘란으로 가는 날이었지!창밖으로 환하게 떠오른 태양이 보였다.

"크로웰야아아아앙!"

[마스터어~.아,안녕히 주무셨어요,마스터?]

안녕 못해!

벌컥!

"가요!"

"에?이......?"

황급히 채비를 마친 나는 어제 미리 싸둔 짐 가방을 마중 나온 기사에게 건네고 냅다 뛰었다.

기사가 조금 황당해하는 것 같았지만 여성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 무릇 기사의 도리 아니겠는가?

다행히도 아카데미를 나오니 입구에는 성에서 나온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내 짐 가방을 들고도 나보다 앞서 뛰어간 기사가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서로 입으로는 예의를 지켰지만 바로 5분 전까지만 해도 늘어지게 잠들어 있던 내 실태를 알기 때문인지 기사의 눈길은 조금 묘했다.

하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마차 안에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나는 황급히 짐 가방을 열고 빗을 꺼내들었다.

채 매만지지 못한 머리가 볼썽사납게 허공으로 뻗쳐 있었다.나는 허리에 매달려 있던 라이에게 외쳤다.

"라이,거울!"

[네,마스터.]

내 허리에 매달려 있던 라이가 금세 기어 나와 거울을 만들어 냈다.머리를 빗을 겸 거울을 들여다본 나는 경악했다.

"이,이게 뭐야?"

내가 이러고 아카데미를 뛰어다녔단 말이야?산발한 머리에 탱탱 부은 볼과 눈두덩!어쩐지 기사의 눈길이 묘하더라니......젠장!

[왜요,마스터?]

"너......이거 어쩔 거야?"

[마스터가 아무리 불러도 안 일어나시기에......저는 잘못 없어요.]

어쭈,라이는 슬쩍 내 시선을 외면하는 베테랑 정령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나랑 9년쯤 함께 지내다 보니 맞는 데도 도가 트고,그 어떤 구박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경지에 다다랐다.

"뒈지게 맞을래,먼지 나게 맞을래?"

[안 맞으면 안 돼용?]

"안 돼용."

어림없는 소리지.숙녀의 볼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살길 바래?

빠드득

본격적인 타작을 위해 목과 손을 풀어냈다.그래도 내가 늦게 일어난 잘못도 있으니......

"가볍게 맞자,라이."

[후에엑!]

가볍게 아침운동을 끝낸 나는 거울로 변신한 라이를 비춰보며 머리를 땋아 내렸다.

대충 땋고 거울에 비친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얼굴이 조금 부어 있었지만 이제는 진정이 됐는지 딱히 문제점은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간밤에 있던 다크 서클이 없어져 있었다.

내가 푹 자긴 잔 모양이다.너무 푹 잔게 문제지.

"휴우~."

긴장이 풀린 나는 쿠션 깊숙이 몸을 묻었다.라이도 뱀으로 돌아와 쿠션 위에서 똬리를 틀었다.딴에는 억울했는지 처량 맞게 곡소리를 내며.

[흑흑흑.친정으로 돌아갈 테예요.]

"가버려."

[마스터,너무하십니다.잡아주셔야죠!흐흑.]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것들만 잔뜩 배워온 라이.자기가 친정이 어디 있다고.

"계속 장난하면 놓고 간다."

그 협박에 라이는 금세 입을 꾹 다물었다.

라이가 조용해지자 편안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왕궁에서 나온 마차답게 부드럽게 움직였고 충격도 곧잘 흡수해서 더없이 편안했다.이대로 마차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왕궁의 마탑에 도착하겠지?

듣기로는 왕궁 안에 있는 마법사의 탑은 드미트리에선 유일한 것으로 그 마법사의 탑 안에 워프진이 있고,드미트리 소속 마법사들이 모두 모여 있다고 했다.

보통 마탑이 왕궁 외부에 있는 타국과는 확연히 달랐는데,우리나라는 마법사가 매우 귀하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마법 열등국 드미트리라는 오명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심신이 편안해지자 슬슬 졸음이 밀려왔다.나는 밀려오는 졸음에 잠시 반항을 시도하다가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의식이 옅은 상태에서 주위가 흔들린다는 느낌과 때때로 멈추기도 한다는 사실만을 인지했다.

그러던 중 문득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자 뭔가가 스르륵 하고 내 손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라이인가?

짧은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그 생각은 무언가가 내 목을 조여 오는 불쾌한 감각에 멀찍이 달아났다.

"으......쿨럭.너......!"

[앗!일어 나셨어요,마스터?]

눈을 뜨자 라이가 목 언저리를 휘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이게 미쳤나?

[비켜!]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조였기 때문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결국 나는 의식을 통해 말을 전해야 했다.눈에 불을 켜고.

[넵!]

"하아!콜록,콜록!너어!"

[아니,궁에 도착해서......그게 마스터가 꼬리 찰싹은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다른 방법을......]

"그렇다고 주인 목을 조르는 정령이 어디 있어?"

나는 당장에 라이의 목을 움켜쥐고 거칠게 흔들었다.

그에 라이가 몸을 축 늘어뜨리고 '나 잡아 잡수' 하는 태도로 설설 기었지만 용서가 되질 않았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바로 이 뱀의 몸이렷다?그러니 꼬리로 찰싹대고 몸으로 목을 조르는 게지?

[후에엑.잘못했어요,마스터.제발 용서를......]

"좋아,다시 드미트리로 돌아오는 대로 네 몸을 바꾼다!"

[저,정말요,마스터?뭐로요,뭐로?]

라이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심히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냈다.그러고 보니 뭐로 해야 할까?

"글쎄,팔다리가 있고......"

[팔다리?]

"파충류가 아닌 것."

[으으음?]

너무 광범위한가?내가 팔다리가 있으면서 파충류가 아닌 동물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누군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크로웰 양,도착했습니다."

벌써?힐끔 창밖을 보니 처음 운디네와 계약했을 때 봤던 성내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여전하네?성 안은 어딜 가나 비슷한 분위기인가?

[아까 그 기산데요.]

가방을 들고 문을 열었다.마침 기사가 손을 건넸기에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안쪽에서 수행원 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두요?'

"예!모두요.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자신의 할 일을 마친 기사는 다시 마차로 오르더니 곧바로 출발시켰다.여긴가?

눈앞에는 높다란 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얼마나 높은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탑은 곧은 타원형 모양이 아니라 여기저기 기괴하게 튀어나오고 돌출된 모양이었다.다 마법으로 고정시켜놓은 것이겠지?몇 층쯤 될까?

탑의 끝을 찾아 목을 깊게 뺀 탓인지 뒷목이 당겨올 즈음......

"지니~!"

[브라이트!]

"응,선배!"

마침 잘 만났다!나는 나를 향해 뛰어오는 브라이트를 반갑게 맞았다.

"지니!지금 온 거야?전하도 곧 도착하신다고 하던데."

"조금 늦었네요.그보다 선배......"

내가 평소와 달리 자신을 반긴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브라이트도 조금 들떠 보였다.

그에 나는 한껏 웃으며 브라이트에게 짐 가방을 내밀었다.

"응?"

"자,들어가 볼까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방을 받아든 브라이트를 뒤로 하고 먼저 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엘란에 가서 에쉬를 만나기만 하면 된다!그럼 이제 걸리는 건 로베닌,그놈뿐이겠지?

그렇게 되면 놈에게 복수하는 데 전력을 쏟을 수 있을 터였다.

한참 즐거운 상상 중이었는데 문득 브라이트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어......지니!"

"왜요,선배?"

"나도 오늘 아침에 알게 된 건데 말이야......"

"......뭔데요?"

브라이트답지 않게 뜸을 뜰이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조금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브라이트.

"......에피로스 황자는 지금 엘란에 없다나 봐."

"무슨 소리예요,그게?황자가 황궁에 안 있고 어디 있다는 거예요?"

에쉬가 궁에 없다니?그럼 내가 엘란에 갈 이유가 없잖아.

난 뜬금없는 브라이트의 말에 인상을 구겼다.이게 똥개 훈련 시키나.

"지금 에피로스 황자는 제 1황자와 함께 시험의 길에 올라 있대.최근 조용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래."

"시험의 길?"

"왜,그거 있잖아.엘란의 건국 당시부터 내려온다는......"

"아아!그......?"

나는 비로소 시험의 길이 무엇인지 떠올랐다.

엘란 특유의 황태자 선발 방법이라고 해야 할까?

황태자 후보가 둘 이상 있을 경우,그리고 그들의 기량이 비등해서 어느 한쪽이 우세한 세력을 점하지 못하는 상황이 장기간 이어질 경우,황제는 황태자 후보들에게 '시험의 길' 을 명한다.

황태자 후보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동료를 모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황태자 후보가 모아온 동료들을 일명 '가디언' 이라고 명했다.

시험의 길의 요지는 누가 더 뛰어난 동료를 모아오는가 하는 데 있었다.

시험의 길에 오르게 될 경우 황자는 얼굴과 머리색 눈동자색 등 모든 것을 바꾸고 그를 감시,보호할 한 명의 수행원과 길을 떠나게 된다.

수행원은 황태자 후보가 동료를 모을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동시에 세상 물정 모르는 황자들을 인도하는 역활을 한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단지 본인의 기량만으로 뛰어난 인재를 영입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개인의 역량,카리스마,가진 바 실력이 뛰어나지 않는면 어려운 일이다.

황자들은 시험의 길에 오르면 2년 동안 대륙의 곳곳에 미리 지정된 신전이나 마법사의 탑을 일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안에서 동료를 포섭해야 하는데 그들에게 정체를 밝힐 수 있는 것은 시험의 길이 끝나는 2년 후이다.

본인의 정체를 밝힌 뒤 시합을 치러줄 것을 부탁해 동료들이 승낙한다면 시합이 진행되고,만약 거부한다면 황자의 포용력 및 카리스마,리더십 결여로 보고 그 순간 황태자 후보에서 떨어진다.

2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 정도 친분도 쌓지 못했다면 황태자의 자리에 실격이라는 것이다.

각기 다섯 명 이상의 가디언을 모아야 하며,그들로 하여금 5:5 형식의 시합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3:2 이상으로 이기는 쪽이 황태자가 된다.

이 시험의 길을 통해 황태자로 인정되면 그에 대해선 아무리 황제라 해도 무를 수 없다.

그 가디언에 한해서 단 한 가지의 제한이 걸릴 뿐이다.

코이렌 연합국 소속이 아닌 사람일 것.그 외에는 황자가 가디언으로 이종족을 데려오든,외국의 기사나 용병을 데려오든 마탑의 수장을 데려오든 소드 마스터를 데려오든 상관없었다.

본인의 정체만 밝히지 않는다면 말이다.

다만 가디언들은 뛰어난 무력을 가지고 있을 것!

그것이 제국이 황태자 후보의 동료들에게 요구하는 단 하나의 조건이다.

아아,에쉬 이 녀석.황태자가 되고 싶긴 했던 모양이구나.

나는 언젠가 수업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떠올렸다.

꽤나 인상적인 내용이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오로지 엘란에만 있는 황태자를 고르는 수단.아마도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엘란이 제국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황자라고 해도 지닌 실력이 없으면 실격.냉정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니,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아니 잠깐......그렇다면 지금 엘란으로 가도 제 2황자는 만날 수 없다는 건가요?"

"그렇겠지?"

젠장!나는 잠시 마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녀석은 왜 하필 만나러 가려니까 궁에 없는 거야?에쉬 녀석을 만날 수도 없는데 워프를 타야 한단 말인가?어쩌지?도망갈까?

심각한 고민에 빠져드는데 저 멀리 화려한 국왕의 마차가 보였다.

선명한 붉은 바탕에 황금 새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고 마차 위에 왕관을 상징하는 모양이 또렷이 보였다.그 주위를 호위하는 다수의 기사들.

"국왕 전하 납시오!"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 하나가 마탑을 향해 소리쳤다.

확성마법이 걸린 매직 아이템을 썼는지 그 목소리는 내게 또렷이 들렸다.

이내 마탑 안에서 색색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과 수행원으로 보이는 하얀 제복 차림의 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도망가긴 너무 늦었다.워프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다.우욱!

워프진 위를 지배했던 눈부신 빛이 사라지고 그 속에서 워프진이 발동하기 전에는 없던 5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려하진 않지만 묵직하고 위엄 있는 차림의 중년사내 한 명과 하얀 제복을 맵시 있게 차려 입은 세 명의 사내,그리고 유독 눈에 띄는 금발의 여인.

이 일행은 엘란의 건국천주년기념 파티에 참가하기 위해 드미트리에서 온 손님으로 드미트리의 국왕 디켈 3세와 그 수행원들이다.

국왕은 당연히 국빈대접을 받고 그 외에 수행원들 또한 명망 있는 귀족이거나 기사로서 하나같이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다.

헌데,워프진의 빛이 가시기 무섭게 사람 하나가 털썩 쓰러졌다.

휘우우웅

털썩

화려한 금발머리를 한 여인이었다.

뒤도 아니고 앞으로 푹 고꾸라진 여인을 사이에 두고 워프진을 발동시킨 마법사들과 드미트리의 국왕,수행원,외국의 왕을 마중 나온 몇몇 귀족들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트린 건 디켈 3세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였다.그는 가장 먼저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황급히 입을 열었다.

"시,신관!신관을 불러주게!어서!"

한창 환영 분위기를 내고 있어야 할 자리가 소란스러워졌다.

워프진 위에 널브러진 금발여인이 그 소란의 중심이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3권에서 계속>(아직 외전편 하나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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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이 끝났습니다!읽어주시느라 수고 하셨어요! ㅠ.ㅠ 저도 수고의 메시지 좀 ㅠ.ㅠ 

[email protected]로 술탄의 여기사 2권 스캔본좀 보내주시면 감사감사!!

아직 외전편 하나 남았으니 보시는 것도 좋을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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