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왠지 로맨스 씬이 나올꺼 같은 그런 분위기 였습니다 ㅋ.ㅋ
오타가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 이상 klogesu30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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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나는 재회
"운다인,힐!"
"마나여,상처 입은 이를 감싸라.큐어 크리티컬!"
내가 왜 지금 이름도 모르는 이 늙은 마법사한테 없는 마나를 쥐어짜서 힐을 써줘야 하지?
그리고 내 옆에서 나를 죽어라 노려보는 이 계집애는 뭐야?고깔모를 쓴 걸 보니 궁중 보조마법사인가?망토에 그려진 황금 새......맞는 것 같은데?
"뭘 봐요?"
초면이라 반말도 못하겠고,나는 조금 짜증스럽게 물었다.
여자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조금 너무하신 것 같아서요!"
내가 뭘 너무해?
"이 노마법사가 다친 건 제 탓이 아닌데요?전 힐까지 써드리고 있답니다."
"그,그게 아니라 브라이트님에 대한 처사 말이에요!"
흐흥,그 말에 큐어 크리티컬을 쓰고 있는 브라이트에게 눈길을 주었다.
문득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브라이트가 배시시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다.쌍코피를 흘리며.
"쌍코피를 말하시나요?제가 때린 곳은 복부인걸요.그리고 오른 뺨과 등,옆구리뿐이랍니다.저 코피와는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그 복부와 뺨,등......등등 때린 부분 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댁이 나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그리고 오히려 상대가 비명을 지른다면?코피까지 뿜는다면?그럴 때 당신은 '어머!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하고 오히려 사과를 하나 보죠?"
"브,브라이트님이 상대라면......"
얼굴을 붉히는 여마법사는 브라이트에게 흑심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오우,잘 어울리는 한 쌍인걸.변태 커플의 탄생인가?
"저도 기분이 마침 좋았던 데다가 그나마 아는 사람이라 그 정도로 봐준 거랍니다.만약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사지를 열 두조각 냈을걸요.아니,라이가 있었다면 목을 분질러버렸겠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자신의 연인을 저런 꼴로 만들다니 너무하신 것 아니에요?"
그래,그래.넌 떠들어라 난......응?자신의......뭐?"
"다시 한 번 말해주실래요?"
"자신의 연인한테 너무 심한 처사......우웁!"
나한테서 어떤 징조를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큐어를 멈춘 브라이트가 다가와 다급히 여마법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만 늦었다면 그 여자는 오늘이 제삿날이었을 거야,브라이트!
"......선배,이게 무슨 운디네 물에 빠져 죽는 소리죠?"
"하하핫.그,그게 말이야,지니!이,이 여자가 잘못 알고 떠드는 거야.나는 전혀 모르는 얘기인걸."
잠시 미심쩍은 눈으로 브라이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른 뺨은 손바닥 모양으로 붉게 달아올랐고 대충 훔친 코피가 볼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이 녀석 얼굴은 말끔한데,하는 짓이 쫌......여하튼 오늘은 때릴 만큼 때렸으니 더 이상 추궁하지 말아야겠다.
"그래요?그런데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응?아,그게......7클래스 급의 마나유동을 쫓아왔는데 마침 블론디가 보여서 말이야."
7클래스 급의 마나유동?엔다이론을 소환하고 시험을 받을때인가?쳇,마법사들은 쓸데없이 그런 데 예민하단 말이야.
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그보다 이쪽으로 내려올 때 뱀 한 마리가 길을 막진 않던가요?하얀 백사인데."
"아니,못 봤는데."
흐음......라이,이 녀석.도망갔나?블론디를 지키고 있으라고 했는데.
"내가 봤소,아가씨."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지만 간발의 차로 플라이를 쓰는 바람에 약간의 타박상만 입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왠지 저 음흉한 눈길에서 브라이트의 향기가 느껴지는걸.
"아,저도 봤어요!"
"어디서?그 뱀이 이쪽으로 내려오는 걸 막지 않던가요?"
"아뇨,저 위에서 봤는데 하얀 말 주변을 빙빙 돌면서 발굽을 피하던데요?"
발굽을 피해?
"그래,브라이트 때문에 흥분한 말이 날뛰는 걸 진정시키려고 다가갔는데 그 뱀이 접근을 막더군.하지만 뱀 때문에 오히려 말이 더 흥분하기에 그냥 내버려두고 왔지."
아아,그러고 보니 누가 숲에 못 들어오게 하라는 말은 안 했군.블론디를 지키고 있으라고만 했던가?
쯧,하나를 시키면 둘을 해야 하건만......나는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근데 지니는 여기 무슨 일로?"
"그냥 수영하러 왔어요."
"그럼 저 마법진은 뭐야?"
이 녀석이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물어!반대 뺨도 맞아볼 테냐?
조금 짜증이 일긴 했지만 나는 내 특기인 잔머리로 적당히 넘어갔다.
"정령진이에요.다른 운다인과 계약을 해볼까 해서요."
"아아,정령진?어쩐지 처음 보는 형태더라니......"
"그보다 젖은 옷을 그냥 입었더니 조금 춥네요.이제 그만 돌아가죠,선배."
브라이트가 뭔가를 더 묻기 전에 나는 서둘러 일어났다.
노마법사의 행색을 보자니 아마도 궁중마법사인 것 같은데 뭔가를 알아내면 곤란했다.
내가 몸을 휙 돌려 절벽으로 다가가자 브라이트가 서둘러 쫓아왔고,그 뒤를 노인과 여자가 따라왔다.
브라이트의 도움을 받아 플라이로 절벽을 가뿐하게 올랐다.
그리고 성난 블론디의 발길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라이를 발견했다.자포자기한 듯한 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밟아라,밟아.]
"......너 뭐하냐?"
[앗!마스터어~.이 녀석 좀 어떻게 해주세요.흐흑.]
이 웬수덩어리 같으니라고.도움이 안 돼요,도움이!
나는 인상을 팍팍 쓰면서 블론디를 진정시켰다.라이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혹여 블론디가 부상을 입을까 하는 마음이 더 컸다.
라이야 방어력에 한해서는 무적을 자랑하니 그다지 걱정은 없었다.
"헉!지니?헤엑!엄청 빨리 올라가네?에고,에고!"
때마침 가쁜 숨을 내쉬며 숲을 헤치고 나오는 브라이트.
아무리 마법사들 체력이 돼지꼬리만도 못하다지만 내 앞에서 허리 두들기지는 말아줄래,브라이트?미운 정도 떨어지겠다.
[라이,넌 다시 내려가서 정령진을 파괴해.]
[예에?그 정령진 만들 때 제가 수맥 찾으랴,여러 번 쓸 수 있게 깊게 그리랴 얼마나 힘들었는데요그걸 부수라니......너무 하세요,마스터!]
[수맥?그런 건 왜 찾아?]
[수맥 위에 그려진 정령진은 소환하기 쉽게 해주거든요.물론 물의 정령에 한해서지만요.]
아아,수맥.절벽 밑에 그린 이유가 그건가?가끔 쓸모 있는 짓도 하는구나,라이.사실 그 부분에 대해 조금 괴롭혀줄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그래?하지만 계약에 성공했으니 이제 정령진은 필요 없어.자칫 들키면 골치만 아파질 테니,어서 파괴하고 와!]
[네에에에.]
내키지 않는다는 티는 줄줄이 내며 숲으로 내려가는 라이.
수맥이라......그런 방법이 있단 말이지?수맥이 물의 정령과 계약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바람의 정령은 계곡,불의 정령은 화산지대,땅의 정령은 광맥 속에서......
이렇게 관련된 지역에서 계약하면 조금 더 용이한 걸까?그렇다면 얼음의 정령은?
"지니!"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라이와 말하고 있자면 부득이하게 멍한 상태가 되는데 브라이트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물어왔다.
"아뇨,아무것도."
"아,그보다 어때?함께 우리 마차를 타고 돌아......"
콰콰쾅
그때였다.돌연 지축이 울리는 굉음과 함께 산 쪽에서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뭐야?
피유웅 퍼펑
깜짝 놀라 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신호탄 하나가 솟았다.짙은 붉은색의 연기가 허공을 선명하게 물들였다.
신호탄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 붉은색은 귀족계급이 쓰고,보라색은 용병들이 쓴다.
파랑색은 주로 상단에서 쓰는데 지금 저 신호는 귀족계급이 보내는 것이었다.
근처에 도시가 있다 보니 신호탄을 터뜨린 것 같았는데 나로서는 그 신호를 외면하고 싶었다.
"사,삼촌!저거 구조요청,맞죠?네?"
"그래,그런 것 같구나.그것도 귀족계급의......"
아아,어쩐지 둘이 닮았다 했더니 삼촌과 조카 관계셨세여?(이거 오타 아니에요 ㅠ.ㅠ 오해 삼가염.)
문득 바람에 흩날리는 노마법사의 세 가닥 남은 머리카락.가슴 깊은 곳에서 몰려오는 이 씁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 봐요!도와야지요!"
여마법사가 신호탄을 바라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썩 정의감이 투철하지 못했기에 은근슬쩍 빠져서 도시로 갈 계획을 세웠다.
"나는 도시로 가서 사람을 불러......"
"지니도 가야지!"
장래 대머리가 될 것 같은 브라이트가 정의감에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나는 사람을 불러......"
"자!모두 마차에 타!"
세 명의 마법사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일사분란하게 마차에 올랐다.그리고 곧바로 산으로 올라가는 한 대의 왕궁 소속 마차를 보며 나는 인상을 구겼다.
"씨잉."
"푸힝?"
우거지상을 하고 블론디에 오른 나는 잠시 성으로 향하는 쪽과 산으로 향하는 길 사이에서 갈등했다.
결국 매우 내키지 않는 심정을 억지로 달래며 산을 향해 내달려야 했다.
"이럇!"
금세 브라이트 일행의 마차를 추월한 나는 일단 상황을 보고 시간이라도 벌어줄 생각으로 서둘러 말을 달렸다.이왕 이렇게 가는 것 빨리 끝내버리려는 심산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블론디는 조금 가파른 산길이 나왔음에도 가볍고 안정적으로 달렸고,나는 머릿속으로 남은 마나로 쓸 수 있는 기술을 헤아렸다.
조금 회복됐다고는 하지만 엔다이론과 계약하고 노마법사에게 힐을 써주었기에 남은 마나는 15퍼센트 정도?포그나 써주면 되겠지.
급격히 휘는 산길을 지나니 저 멀리서 칼 부딪치는 소리와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음성이 들렸다.저쪽인가?
라이도 없으니 몸을 사리고자 나는 속도를 줄이며 외곽으로 움직였다.
멀찍이 떨어져 마차의 색으로 보자니 자작 가문 같았다.
습격한 것은 오크무리였다.최근 베일란에서 드미트리 쪽으로 몬스터들이 넘어온다더니 그중 일부 같았다.
이미 몇몇 시체가 마차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남은 기사의 수는 다섯 명,오크는 열예닐곱 마리인가?기사 하나가 오크 두 마리 정도를 상대한다고 볼 때 턱없는 숫자였다.
"쯧,운디네."
[네,주인......응?주인님!엔다이론님과 계약하셨군요?]
이제는 능숙하게 언어를 구사하는 운디네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잉,운디네.그걸 또 한눈에 알아보고 그러니......
"오호홋.그렇게 됐어!"
[와아,역시 우리 주인님 대단하세요!스무 살도 안 되셨는데 상급정령이라니!정말 정령왕을 소환하실지도 모르겠어요!]
"에헴!"
당연하지 지난 9년간 아카데미 안에서 죽어라 수련한 이유가 뭔데.오로지......로베닌!
그 녀석보다 먼저 상급정령과 계약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수련만 했단 말이다.
그러고 보니 국왕이 섭섭하게 생각할 것 없다면서 집안에 백작 작위와 새로이 세금이 많이 나오는 좋은 성을 하사했다고 하던데,한 번도 안 가봤네?계약도 했겠다,한 번 가볼까?
그동안 너무 무리하게 훈련에 파고들었다는 생각에 조금 쉴 계획을 세우는데 문득 마차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덜커덩
카르랑 카르랑
내 곁을 쉭 지나가는 브라이트의 마차.아참,여기 도우러 온거였지!
나는 마차를 따라 다시 말을 달렸다.
이내 나름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곳에서 열 걸음 정도로 가까워졌다.포그를 쓰자니 오크와 기사들이 여기저기 얽혀 있어서 별 도움이 안 될것 같았다.
"나의 적을 향해 쏘아져라,더블 매직 에로우!"
브라이트가 쏘아낸 매직 에로우 두 발이 쏜살같이 날아가 하나는 오크의 무릎에 명중했고 다른 하나는 빗나가 땅에 박혔다.
무릎 한쪽이 부서진 오크가 풀썩 넘어졌다.그런 오크의 목을 맞서던 기사의 검이 꿰뚫었다.
"번개는 섬광이 되어 나의 적을 전율시킨다!라이트닝 에로우!"
"분노한 전격은 살아 숨 쉰다.번쩍이는 손과 발이 거센 춤이 되어 단죄를 내리니!댄싱 라이트닝!"
여마법사와 노마법사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전격마법을 썼다.
둘의 공격에 오크 세 마리가 털썩 쓰러졌다.
댄싱 라이트닝이란 마법은 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눈이라도 달린 건지 기사들은 건드리지 않고 오크들 사이만을 이동하며 번쩍번쩍 공격했다.
하지만 다수를 공격하기 위한 마법인지 공격력은 조금 약했다.
댄싱 라이트닝에 쓰러진 것은 단 두 마리,다음에 아돌에게 가르쳐볼까?
가만있자니 조금 민망해진 나는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기사들은 이쪽으로!"
한창 치고 박던 기사들은 내 외침이 꽤나 반가웠는지 서둘러 우리 쪽으로 빠져나왔다.
"지니 양?무얼 하려고......"
"운디네,포그!마법사 분들은 저쪽을 향해 전격마법을 부탁해요."
운디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이내 '후우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순간 그 숨은 짙은 안개로 화해 오크들을 감쌌다.노마법사가 내 생각을 알았다는 듯 가장 먼저 주문을 외웠다.
"분노한 전격은 살아 숨 쉰다.전격의 손과 발이 거센 춤이 되어 단죄를 내리니!댄싱 라이트닝!"
"번개는 섬광이 되어 나의 적을 전율시킨다!더블 라이트닝 에로우!"
"번개는 섬광이 되어 나의 적을 전율시킨다!라이트닝 에로우!"
노마법사의 뒤를 이어 펼쳐진 브라이트와 여마법사의 전격마법이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안개 속에서 황금빛이 '퍼퍼펑' 하고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제대로 맞아줬는지 오크들의 비명소리가 얼핏 안개 너머에서 들려왔다.
"꾸에에엑!"
"쿠르락!꾸엑!"
조금 구리지만 고기 타는 냄새가 스멀스멀 풍겨오자 나는 슬쩍 코를 막았다.
촤르르륵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리던 그때,나무가 듬성듬성 자란 산의 위쪽에서 경사를 타고 회색 로브 차림의 누군가가 빠르게 내려오더니 그 속도 그대로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
지원군인가 해서 빤히 바라보던 나는 그가 안개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자 크게 당황했다.
안개 속은 한창 전기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황급히 운디네를 역소환하자 안개는 순식간에 사그라졌다.그 속에서 그새 칼을 빼든 인영이 보였다.
늦게 온 주제에 제멋대로 끼어들다니 예의가 없어도 제대로 없는걸.
"오오!"
"어머어머!"
내가 뭐라 불만을 토하기도 전에 그는 빠른 속도로 아직 서있는 오크들을 베어버렸다.
칼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오크들의 목이 허공을 휙휙 날았는데 그의 검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게다가 내 눈에는 칼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늦은 지원군의 검 솜씨에 살아남은 기사들은 감탄소리와 여마법사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쳇,저깟 게 뭐 대단하다고.내가 마나만 조금 더 있었어도 저런 검쟁이한테는 안 진다,이거야!
"꾸르륵!"
마지막 오크가 돼지 멱 따는 소리와 함께 털썩 쓰러졌다.
의문의 지원군은 그에 멈추지 않고 묵묵히 검으로 이미 쓰러져 있던 오크들의 목을 확인 사살하듯 따버리더니 피가 조금 묻어버린 검을 휙 하고 허공에 털었다.
그래,조금 멋있는 것 같기......
"윽!"
나는 절실히 바란다.
지금 내 왼쪽 눈가에 떨어진 이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부디 저 칼에서 날아온 돼지 피가 아니기를!
하지만 그 기대는 손을 들어 의문의 액체를 문지른 순간 처참히 깨졌다.짙은 초록색의 끈적이는 이 액체는 분명 몬스터의 피!그것도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뛰어난 검 솜씨를 보여준 이에게 감사 인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브라이트 일행에게도 감사인사를 했는데 나에게는 하지 않았다.
그래,그래.겨우 포그 하나 썼다고 나를 무시한다 이거지?어쩐지 오기 싫더라니!
사람들의 무시 속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문득 내 얼굴에 오크 피를 튀긴 이가 자신의 로브를 벗으려는 듯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그래,얼굴이나 보자!
"지니!얼굴에 그게 뭐......"
그제야 내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브라이트가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나는 그런 브라이트를 한 손으로 밀어내며 후드를 벗어낸 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엥?"
"왜 그래,지니?"
나는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선명한 붉은 머리칼은 그렇다 치자.도저히 잊을 수 없는 저 냉랭한 금색 눈동자도 그렇다 쳐!
하지만 전혀 변하지 않은 저 생김새라니!내 기억이 옳다면 녀석은 분명 올해로 브라이트와 같은 25살이 되는,내 일생일대의 라이벌이자 천하의 원수,로베닌 페드리!
나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손을 치켜들어 녀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너어......!"
"......?"
그제야 나에게 눈길을 주는 녀석.말없이 의문을 표하는 모습이 어쩜 이다지도 그대로냐!
"로베닌 페드리!네놈이 왜 여기에?"
녀석의 눈이 조금 움찔했지만 그뿐,예의 그 무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
녀석의 입에서 나온 짧은 단어가 내 심장을 분노로 들끓게 했다.
눈에 불이 붙는 듯했고 머리카락이 뿌리째 곤두서는 것 같았다.엔다이론 때와는 다른 의미로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이 자식,이 자식!이 자시익~!
"나 몰라?나!감히 나 지니 크로웰을 잊었단 말이야?"
"지니......크로웰?"
너무 화가 난 나는 분에 못 이겨 온몸을 파들파들 떨며 한쪽 발로 거칠게 땅을 내려치기를 몇 차례,녀석이 나에게 조금 반응을 보였다.
"그래,지니 크로웰!이제 알겠냐?"
"......"
도리도리
입술을 굳게 다문 녀석이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매정하게 허공을 가로 젓는 그 목을 분질러버리고만 싶었다.
"좋아!그렇다면 기억나게 해주지.그날의 복수를 해주마!재 시합......아니,지금은 안 되고 내일쯤?"
마나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급히 말을 수정했다.
잠시 멀뚱멀뚱 나를 마주보던 녀석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도리도리
"거,거부하는 거야?"
"......싸울 이유가 없고,너랑 싸운 적도 없다."
처음으로 녀석의 입에서 나온 완성된 문장이 나를 무참히 짓밟았다.
9년 전,레오의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다.이렇게 지독한 모욕이 따로 없다 싶었다.
"왜 없어?너!정말 나 기억 안 나?윈칸 축제 때 너랑 나랑 우승자끼리 겨뤘잖아!"
"아,그때 그......"
"그래!이제 기억 나냐?"
"......진 녀석?"
아아,나 지금 쓰러져도 되려나?혈압이 너무 올라서 더 이상 못 서 있겠다.흑흑!
나는 지난 9년 동안 저놈 얼굴을 악착같이 되새기며 수련,수련,수련,또 수련만 해왔건만.
저놈은 나를 잊고 있었던 데다가 그저 '진 녀석' 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이거지?정신을 놓고 싶어지는걸.
"우후후훗.으흐흐흣.로베닌......네놈!"
반쯤 자포자기 상태가 된 내 입에서는 그야말로 마음속 깊은 수렁에서 우러나오는 저주의 웃음이 흘러나왔다.그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과 브라이트 일행이 술렁였다.
"히익!미친년인가 봐~."
"지,지니!진정해!"
"어머어머!브라이트님,피해요."
미친년?심히 거슬리는 단어였기에 나는 버럭 소리 질렀다.
"시꾸라!"(대충 '시끄러'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0^;;)
저 녀석에게 한 방 먹여줄 마나가 없다는 사실이 이다지도 답답할 줄이야!지난 9년간 수련에 파고들 동안에도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다.
벌컥!
"어이쿠!"
쿠당탕
내가 주체 못할 답답함에 한창 가슴을 쥐어뜯고 있을 떄였다.
몬스터의 습격을 받은 자작가의 마차가 벌컥 열리더니 그 안에서 웬 중년남성이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화려한 옷차림.자작인가?마차에서부터 시작해 몇 차례인가 땅바닥을 구른 자작은 황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휙 하고 주위를 훑었다.
기사들을 지나 나와 브라이트를 순식간에 훑은 그의 시선은 이내 로베닌에게서 멈췄다.
"아이쿠!귀공이 정말 로베닌 페드리 공자십니까?"
그는 라이를 연상시킬 만큼 빠른 걸음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더니 로베닌의 손을 덥석 잡았다.뭐야,저건?
"......"
끄덕
자작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슥 빼낸 로베닌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작의 표정이 순식간에 펴지면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 유명한 로베닌 공자의 도움을 받다니,이런 굉장한 인연이 또 있겠습니까?제 이름은 아블로스 칼라미,드미트리의 자작입니다.이런 지저분한 꼴로 실례인 줄 알지만 괜찮으시다면 제 마차에 오르
시죠.저희 집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칼라미......요즘 수련만 해서 기억이 안 나네.들어본 것 같은데.뭐하는 집안이더라?
땅바닥을 구른 덕에 흙투성이가 된 자신의 옷을 털어내는 자작에게 나는 시큰둥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베닌이 한 일이라고는 마무리뿐이었으니 말이다.
도리도리
"바빠서......"
역시나 매정하게 고개를 내젓는 로베닌.
자작의 얼굴은 금세 '아아,아까운 봉' 이라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페드리 공작가라면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가이니 인연을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페드리 가와 굳이 따지자면 악연으로 물들어 있지 않을까?
"아니,아무리 그래도 은혜를 입었으니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지가 다한 것처럼 말하고 있네,저 짜식이!
"아이고,그러시면 제 체면이 서질 않습니다.공자!부디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제법 어여쁜 딸도 있으니 소개시켜드리고 싶습니다."
도리도리
"......"
"그러지 마시고,저희 집 가보로 내려오는 보검이 있사온데 한 번 구경 차 오십시오,네?"
도리도리
"......"
왜 자작과 로베닌의 행동을 보는데 밥 안 먹는다는 유아반 학생과 그걸 달래는 선생이 떠오를까?아무래도 아카데미 생활을 너무 오래했나 봐.
"그,그러시면 무슨 일로 바쁘신지 말씀해주시면 제가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갈로틴......공작."
계속해 도리질 칠 것 같던 로베닌 아가가 이번에는 잠시 고민하나 싶더니 입을 열었다.
갈로틴 공작이라면 드미트리의 백전 노장 소드 마스터로 명성이 높은 이였다.
대륙에 존재하는 13명의 소드 마스터.
그중 세 명이 제국 엘란 소속이었고 두 명은 드미트리 그리고 코란,헤이드리케에 각각 한 명의 소드 마스터가 있다.베일란에는 소드 마스터가 단 한 명도 없다.
여하튼 엘란 동맹국은 총 일곱 명의 소드 마스터를 보유했다.
나머지 여섯 명은 암흑제국 코이렌 연합국에 있었다.현재로서는 엘란 쪽이 한 명 더 많은 소드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5명의 7클래스 마법사 중 세 명이 코이렌 소속이니 여기까지는 거의 비등한 전력이라고 봐야 했다.
마지막 단 한 명의 상급정령사는 조화의 왕국이라는 헤이드리케 소속이라 엘란 연합국이 약간 앞선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이렌 제국과 그 연합국은 흑마법사를 인정하기 때문에 같은 7클래스 마법사라도 코이렌의 7클래스 마법사들의 공격력이 월등했다.
결국 두 연합국은 무서우리만치 비등비등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갈로틴 공작 각하를 말씀하십니까?"
끄덕끄덕
"각하를......만나 뵙고 싶소."
"갈로틴 공작 각하를 무슨 일로 만나시려는지......?"
그러게?자작의 질문에 나도 절도 로베닌의 말에 귀 기울였다.
엘란의 주목받는 무재라는 녀석이,그것도 명문 공작가 장남이라는 녀석이 동맹국이라고는 하지만 남의 나라에 혼자 와서 갈로틴 공작을 만나려는 이유가 뭐지?
"가르침을 받고자......"
"가르침?페드리 공작 각하 또한 훌륭한 소드 마스터가 아니십니까?귀공의 아버님 되시니 공작님께 가르침을 받지 않으시고요?"
도리도리
"연합국을 돌고 있소."
가르침을 받고자 연합국을 돌고 있다?나는 녀석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아카데미에 처박혀 수련하는 동안 로베닌 저 놈은 각국의 소드 마스터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청하고 실전경험을 쌓았다,이거지?실전경험.그렇군,죽어라 마나만 쌓아봤자 실전경험이 없으
면 무용지물.나는 집으로 돌아갈까,하던 생각은 깨끗이 지워버렸다.아직은 못 가겠군.
"오오!훌륭한 생각이군요,공자.과연 대륙 최고의 무재답습니다."
"......무재라는 말은 조금 거슬리는군."
어째 말이 짧다 싶었지만 엘란의 공작가 장남이라면 분명 드미트리 자작보다 높은 서열이다.
준 왕족이라고도 평가되는 공작.그 나라에 왕위를 이어받은 왕족이 없다면 다음 왕으로도 거론되는 자가 공작이다.
왕족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자리이니 만큼 제국은 최대 3개의 공작가를 둘 수 있고,그 외의 왕국은 단 하나의 공작가만이 존재할 수 있다.
"그,그렇습니까?제가 실례했군요.헌데......지금으로선 갈로틴 공작 각하를 만나 뵐 수 없으실 겁니다."
"......어째서?"
녀석이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감정을 드러냈다.아주 약간이긴 했지만.
"으음......사실 외국에는 조금 쉬쉬하는 일이지만 갈로틴 공작 각하꼐서는 현재 폐관수련 중이십니다."
"폐관수련?"
"그렇습니다.5년의 폐관수련을 갖는다고 하신 것이 약 4년 전이니,1년은 더 있어야 나오실 겁니다.폐관수련에 들어가시면서 하신 말씀이 단 세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수련 중간에 자신을 찾지 말라
고 하셨답니다."
"어떤?"
폐관수련이라......내가 한 것도 폐관수련으로 쳐줄려나?그나저나 쌤통이다,로베닌!날 까맣게 잊어버린 죄라고!후훗.
"첫째,조국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둘째 가족 중 누군가 사망했을 때,셋째 가문의 존망이 걸린 위기가 다가왔을 때.이 세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 자신을 찾지 말라는 것이 갈로틴 공작 각하의 뜻
입니다."
"그렇군."
내가 로베닌을 향해 한껏 비웃음을 날리는데 문득 녀석이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이만 자리를 뜨겠다는 표시였다.
"공자!"
"그렇다면 샤란에는 볼일이 없소.헤이드리케로 가겠소."
"아니,그렇게 서두르실 필요야......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 아니겠습니까?만찬에 꼭 공자를 초대하고 싶습니다.부디 함께 가시지요."
도리도리
"실례."
그 말을 끝으로 로베닌은 몸을 휙 돌리더니 왔던 길을 올라갔다.저쪽 산을 넘으면 베일란이 있다.내가 과거 윈칸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떠났던 길이었다.
베일란에서 남쪽으로 가면 드미트리가,북쪽으로 가면 헤이드리케가 나온다.그리고 동쪽으로 가면 엘란이.엘란에서 또 동쪽으로 가면 코란이 있다.
로베닌은 베일란으로 가서 헤이드리케로 들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
"어?잠깐!야!"
나는 문득 녀석을 이대로 보내기에는 뭔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나랑 겨뤄야지!"
갈로틴 공작의 부재로 낭패를 본 녀석을 쌤통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덕에 녀석이 곧바로 떠나게 되면 나로서는 녀석과 겨룰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후......"
"하루만 기다려!아니 하다못해 세 시간 정도만!"
명상을 하고 마나를 얼추 채우는 데 필요한 시간은 3시간.
나는 떠나려는 녀석을 다급히 불러 세웠다.녀석이 나를 두고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는 건 급한 마음에 적당히 넘겨버렸다.
하지만 나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녀석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저......자식!
"지니!어딜 가려고?"
녀석을 쫓아가려는데 브라이트가 황급히 말렸다.뿌리치려했지만 그래도 다 큰 사내 녀석이라 쉽지 않았다.
"야!이리 안 와!"
터벅터벅 산을 걸어 올라가는 로베닌의 뒤통수에 대고 악을 썼다.
그러자 녀석이 힐끔 뒤돌아보더니 타다닥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산 너머로 사라졌다.
"우아악!지니!진정해!"
"야!이 바보 똥개야!"
으아아악!로베닌 녀석은 순식간에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다.
인간이 뭘 배우면 저렇게 빨라지는 거야?우리 아카데미는 나한테 저런 거 안 가르쳐주고 뭐한 거야 대체!
이미 점으로 보일 정도로 멀어진 녀석을 보며 나는 분에 못 이겨 씨근덕거렸다.
브라이트의 손을 벗어나보려고 한차례 발광을 했지만 어느새 구석에 몰려 있던 기사들까지 다가와 나를 옭아맸다.
"지니!더 이상 올라가면 위험해!"
"미친년이 공자를 따라가지 못하게 해야 해!꽉 잡아!"
녀석은 나에게 더한 분노와 복수심,미친년이라는 오명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얼굴 한쪽에 딱딱하게 말라붙은 오크 피딱지를 선사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넘치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데 문득......
[마스터,꼬라지가 왜 그래요?]
정령진을 다 부쉈는지 뒤늦게 도착한 라이.말도 예쁘게 해요,우리 라이!우후훗.
"잘 왔다,라이!"
일단 좀 맞자!
최근 수련보다는 명상으로 시간을 보낸 나는 다시 수련실에 틀어박혔다.
딱히 내가 아카데미에서 할 일은 없었기에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나는 수련실에 들어서자마자 아돌을 소환,가장 먼저 그 노마법사가 썼던 댄싱 라이트닝을 가리키기에 여념이 없었다.헌데 이 게으른 정령이 좀처럼 협력해주지 않았다.
"그게 아니잖아,이 멍청아!"
[이보게 주인,꼭 이런 걸 해야 하나?]
"하기 싫으면 돌아가든가!"
[아니네,주인.열심히 해보겠네!]
아돌은 비실거리면서도 곧잘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정해준 표적을 태웠다.
속도가 매우 마음에 안 들지만 그거야 차차 고치면 될 터였다.전격을 이용하는 것보다 정령 본체를 움직이면 훨씬 타격이 클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옳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스터,누가 옵니다.]
"응?누가 와?"
[브라이트와 쟈이맘.]
이제는 지긋지긋한 얼굴들을 떠올리자니 없는 척할까,하는 생각이 나를 유혹했다.
똑똑
어쩔까?그냥 없는 척이나......
똑똑똑
"지니!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왔어!문 열어줘!"
쳇,브라이트는 곧잘 쟈이맘과 수련실을 찾아왔는데 혼자 왔을 때는 내가 들여보내주지 않기에 쟈이맘과 오곤 했다.
아돌을 역소환시키고 문을 열어 그들을 맞이했다.
"뭔데요,선배?"
여전히 남성스러운 쟈이맘 선배와 최근 들어 더욱 자주 보이는 브라이트.
나는 매우 귀찮다는 기운을 한껏 풍겨주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쪽으로는 익숙해진 브라이트는 뻔뻔스레 수련실로 들어섰다.
"재미있는 소식이 있거든!"
"뭔데요?"
브라이트는 곧잘 조금 크다 싶은 소문들을 물어오곤 했다.쓸모 있는 것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1년 전쯤에는 엘란의 제 2황자가 에쉬,그러니까 에피로스 황자가 독살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소식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 범인으로는 제 1황자가 거론되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그 사건 자체가 백지화됐다던가?
여하튼 간혹 흥미 있는 사건을 물어왔기에 나는 일단 브라이트의 말에 귀 기울였다.
"로베닌 페드리에 관한 거야!"
브라이트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로베닌?그 녀석이 뭘 어쨌는데요?"
"그 녀석 헤이드리케로 떠났던 것 기억해?"
"당연하죠!쫓아갈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었는데!"
나는 석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나에게 미친년이라는 오명을 씌워준 놈.
내가 녀석이 떠난 자리에서 라이를 마구잡이로 휘두른 일로 인해 지니 크로웰은 미친년이라는 사실이 굳어지기도 했다.
석 달여가 지났지만 아직도 이가 갈리는 사건이었다.
"헤이드리케로 가서 트랜페 백작에게 도전했다나 봐!"
"트랜페 백작이라면......헤이드리케의 소드 마스터?괴팍하기로 유명한 자잖아요?"
"그래!그런데 그 트랜페 백작에게 도전했다가 패한 건 물론이고 된통 걸려서 늑골이 잔뜩 나가고 다리가 부러졌다나 봐!적어도 다섯 달은 요양해야 하는데 상처가 심해서 현재 헤이드리케에서 요양
중이래!"
패했다?당연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조금 반갑지 않았다.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녀석의 참패 소식이기 때문일까?트랜페 백작도 너무하잖아.
가르침 받겠다고 찾아간 녀석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놔?한동안 구설수에 오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럼......요양하면 완쾌는 된대요?"
"음,모르겠는걸.되지 않을까?소드 익스퍼트쯤 되는 녀석이니 자체 회복력이 엄청날 것 아냐."
내가 중급정령과 계약하고 죽어라 폐인처럼 수련실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녀석 또한 소드 유저를 벗어나서 소드 익스퍼트가 되어 있었다.
소드 유저가 단순히 검에 검막을 입히는 경지라면 소드 익스퍼트는 보통의 검막이 아닌 자신의 기운이 깃든,그러니까 검기에 색이 떠오르는 경지다.
로베닌 녀석의 검기는 붉은색 이랬나?드미트리의 왕 디켈 3세는 진초록 검기를 일으킨다.
초록색 계열의 검기는 대부분 방어 성향의 검이라고 한다.그 반대로 붉은 계열의 검기는 공격 계열.
로베닌을 비롯한 녀석의 아버지 페드리 공작 또한 붉은색 검기를 일으킨다던데,그 붉은 검기는 집안 내력인가?(아니 머리색......)
그나저나 다섯 달 동안 요양해야 된다면 대체 얼마나 곤죽을 만들어 놓은 거......아니지,아니야.
"흐흥!녀석이야 뭐 죽든 말든......"
"그렇지?그러니까 재미있는 소식이라는 거야!하핫."
"꽤 재미있네요.그보다 에피로스 전하에 대한 소문은 없어요?"
"음,글쎄.저번의 독살사건 이후로 거의 움직임이 없어.제 1황자도 마찬가지고."
에쉬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신세를 진 바가 있어서 그런지 녀석은 잊을 만하면 떠올랐다.살아 있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9년 전 그날,로베닌 녀석에게 패하고 그나마 원래 빌 수 있었던 한 가지 소원도 취소되어 나는 또다시 그 지독한 워프 신세를 지고 드미트리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의 그 허망함이라니......
주변 사람 모두가 나를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 같아서 더더욱 수련실에 틀어박혔다.
그 덕에 아카데미에서 내 존재를 잊어버린 사람이 꽤 많은 모양이었다.
간혹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라고 해야 미아와 이루제,브라이트,쟈이맘,학장 정도일까?아,이리토 선생도 간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집에서 한 달에 두 번씩 꼬박꼬박 날아오는 편지.
"그렇군요.드미트리에는 한 명의 왕자가 있고 이미 왕태자로 책봉됐지만 그쪽은 사정이 다르죠.네 명의 황자와 그중 황태자 후보로 거론되는 제 1황자와 제 2황자가 대립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제국이니만큼 황태자를 고르는 데도 신중......아!맞다.지니 너 저번에 엘란에 가고 싶다고 했었지?"
"네?아아,에쉬 전하에게 꼭 할 말이 있었거든요.하지만 포기했어요."
제국 황자와의 알현은 백작 영애에 남작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턱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요즘같이 제국이 소란스러운 때에는 더더욱 말이다.제 1황자파와 제 2황자파의 피 끓는 대립이 한창이니 어쩔 수 없었다.요즘 조금 잠잠한 것 같기도 하지만.
"포기 안 해도 될지 몰라!이번에 엘란 제국에서 개국 천 년을 기념하는 건국천주념기념 파티가 성대하게 열릴 모양인데,거기에 디켈 3세 국왕 전하도 가신다나 봐."
건국천주년?오라지게도 오래됐군,그 나라.여하튼 건국천주년 파티면 그 규모도 장난이 아닐 터였다.
엘란쯤 되는 대제국의 건국 파티다 보니 아무리 일국의 왕이라 한들 참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초대되어 오는 손님들도 일국의 왕이나 왕족.그렇다면 그들을 수행할......
"수행원으로 따라가라,이 말인가요?선배!"
"그래,바로 그거야!일국의 왕이 친히 납시는 그런 커다란 파티인데 엘란의 황족들도 총출동하지 않겠어?"
"그런데 확실해요?국왕 전하께서 가신다는 것."
"물론이지.건국천주년 파티가 다음 달이거든.다음 달에 국왕 전하께서 워프를 사용해야 하니까 엘란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도록 워프진을 넉넉히 충전시키라는 명이 떨어졌어."
브라이트가 일하는 부서가 워프진 충전이던가?그렇다면 확실한 정보였다.하지만 이 계획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수행원으로 뽑힌다 해도 그중 한 명만 왕과 함께 파티에 입장이 가능한데,그 한 명에 또 뽑힐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파티 예절에 대한 걱정 또한 전혀 없었다.그 정도야 가뿐히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수업을 오랫동안 받아왔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래 문제는?"
[마스터는~워프 울렁증이래요.푸헤헤헷!]
그래,난 심각한 워프 울렁증......응?나는 문가에 늘어진 라이를 보며 진득하니 웃음 지었다.그리고 나름 상냥하게 말했다.
"라이,이리 온."
[자,잘못했어요,마스터!그냥 웃자고 한 소린데......]
안 웃겨!그러니까 이리 와!
라이는 내 눈에서 분노를 느꼈는지 그 길쭉한 몸을 벽에 쫙 붙이고는 온몸을 덜덜덜 떨었다.저놈은 꼭 맞을 짓을 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