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71)

구출 파트가 끝났습니다!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로군요!지니 크로웰의 성장 과정!

음......에쉬와 지니 크로웰의 러브씬을 기대한 분이 과연 몇분이나 계실까요?후후후......

**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에요

"뭐하니 진이야?"

"응?"

"뭐하는 거야?얘가 멍하니 앉아서?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나 하랬지!"

조금 길어서인지 뒤로 넘겨 묶은 파마머리와 푸짐한 볼 살이 평범한 아줌마.누구더라?

"누구......?"

"얘가!"

"아얏!"

내 등을 강타하는 강렬한 손바닥.으아야야,아파!멍드는 거 아냐,이거?

갑작스러운 상대의 일격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이어 들려온 대답에 나는 또다시 멍해졌다.

"엄마잖아,엄마!앉아서 졸았니?"

"엄마......?"

엄마라고?나는 빤히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아,그래.나이에 비해 흰머리가 많아서 항상 염색을 하고 손에 유난히 주름이 많은 우리 엄마.이런......내가 왜 엄마를 잊고 있었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두 손을 뻗어 엄마를 꼭 붙잡았다.

"엄머머,얘가 갑자기 왜이래?"

"엄마아,엄마아~.흐윽......"

놀란 표정의 엄마를 더욱 꼭 붙잡고 나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어,나 울지 않겠다고 누군가한테 약속했던 것 같은데?누구한테 했지?

"진이,너 왜 그래?"

"엄마......"

가만히 엄마의 가슴에 기대자니 머릿속이 다시 아득해지는게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래,엄마야 엄마.얘가 왜 이럴까?"

아아,좋다.이대로 여기서 평생 있고 싶어.

품속으로 더욱 파고드는데 문득 엄마가 나를 밀어내며 일어났다.

"엄마?"

"진이야,우리 진이......이제 다 컸지?"

"아니,아니야.나 아직 하나도 안 컸는걸."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내가 다 크면 왠지 엄마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난 크지 않을 거야,엄마!

"아냐,우리 진이는 다 컸어.보렴,이렇게나 컸잖니?"

순간 엄마와 나 사이로 물결이 일더니 이내 그 물결은 맑고 선명한 거울이 되었다.

마치 투명한 물처럼 푸른빛을 내는 거울속에 비친 것은 반짝이는 금발을 허리께까지 기른 푸른 눈을 한 여성이었다.

새하얀 피부라든가 분홍빛 도는 입술과 곧고 오뚝한 코를 가진,더없이 이국적인 그런 사람이었다.

"......난 이사람 몰라,엄마!난 저렇게 눈이 크지도 않고 눈초리가 올라가지도 않았는걸."

"이게 너란다,진이야."

"아니야!난......"

다시 고개를 내젓는데 문득 내 볼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머리가 길었던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머리칼을 집어 올렸는데 그것은 더없이 화려한 황금빛 머리카락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을 들고 있는 하얗고 긴 손가락.이건 누구의 손이야?난 이렇게 손이 예쁘지 않은걸.

다시 거울을 바라보는데 거울 속의 여자가 나와 똑같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쥔 채 나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달리 온몸에서 넘치는 자신감이라든가 당당함이 있었고,그것이 나를 움츠리게 했다.

"진이야,엄마 말 잘 들으렴.너는 그녀고,그녀는 너야.진이와 지니는 하나란다."

"지니?그게 누군데?"

"또 하나의 너란다.너도 내 하나뿐인 딸이고 지니도 내 하나뿐인 딸인걸.그러니 하나지."

"지니도......엄마 딸이야?"

내 물음에 엄마가 싱긋 웃었다.눈가의 잔주름이 왜 이다지도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지.

"그럼,둘 다 엄마 딸이지."

"그렇구나.응,그럼 난 지니와 하나가 될게.지니 같은 여성이......될게."

아아,울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건 지니였던가?아니,지니가 나고 내가 지니니까 나한테 한 약속일까?

왠지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왔다.안 되는데.엄마랑 조금 더 있어야 하는데.

"지니야,행복해야 한다."

응,엄마.나......행복해.

입을 열어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그대로 눈을 감았다.아득해졌다.

[마스터!마스터~.]

아아,질린다,질려!이놈의 레파토리 바뀌지도 않아요.나를 깨우는 라이의 목소리.

나는 손을 들어 눈앞을 가리며 몸을 뒤척였다.

"좀만......더......"

[마스터~오늘은 그걸 다 만들었단 말이에요!새벽에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라이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정말?완벽하게 만들었어?"

[네!마스터.완벽해요!시키신 대로 여러 번 쓸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요.]

자신만만한 라이의 대답에 나는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좋아!오늘에야말로 기필코!

"좋아,좋아.가자!"

[마스터,옷은 갈아입으시고 가시는 게......]

"아참!"

문득 지금의 내 차림을 인지한 나는 서둘러 옷장을 열었다.

이루제나 미아가 선물한 드레스나 집에서 보내온 화려한 드레스 몇 벌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밑에 있는 보석함에도 여기저기서 받은 보석이 가득했는데 그것들은 대게 드리케 아카데미의 졸업선물로 받은 것이었다.개중에는 왕에게 하사받은 것도 있었다.

화려한 물건들에 잠시 눈길이 갔지만 그뿐,나는 즐겨 입는 경장을 꺼내 들었다.흥얼거리며 옷을 꺼내 입고 화장대 앞에 앉아서 빗을 들었다.

[마스터,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요?]

"응?그러게.뭔가 좋은 꿈을 꿨던 것 같기는 한데......기억이 안 나."

[꿈이요?그게 뭔가요,마스터?]

내 머리는 곱슬곱슬한 기가 있어 매일 빗어주지 않으면 금세 엉켰다.그래서 좋든 싫든 아침마다 머리를 빗어야 했다.어렸을 때야 그냥 있었지만 이 나이 먹고도 그럴 수는 없었다.

"음,잘 때 꾸는 꿈 말이야."

[호오,전 잠을 자지 않으니까 모르겠는걸요.]

"뭐,꼭 꿈 때문이 아니라 그걸 완성해서 일지도 모르지."

[푸헤헤헷!마스터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제가 마스터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거든요.]

빗을 내려놓은 나는 이번에도 머리를 땋았다.풀어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움직이기도 불편하고 아무리 빗어놔도 잘 엉키니 어쩔 수 없었다.

"다 됐다.가자,라이!"

말을 타고 산으로 올랐다.승마야 진작에 배웠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 않았다.오히려 최근에는 말을 타는 것을 즐길 정도였다.

19살이 되고 드리케를 졸업한 지금,나는 이엘 선생을 대신해 정령반의 선생 자리를 맡았다.

하지만 정령반에는 학생이 없었기에 선생은 그저 유명무실한 자리였다.그렇다 보니 시간이 남아돌았고,나는 그 시간들을 오로지 수련에 쏟아부었다.

이엘 선생은 다시 궁중 정령사의 자리로 돌아가 상급정령을 소환하는 데 전력을 쏟고 있다.하지만,스승님!그건 제가 먼저랍니다.

"후훗!"

[마스터,왜 웃으세요?]

"글쎄,오늘은 왠지 예감이 좋아.너도 그렇지 블론디?"

"푸르르."

내가 타고 있는 하얀 말의 이름은 블론디.

분명 털 색은 하얀색인데 얼핏 금색 털이 섞여 있어 내가 생각난다며 나의 드리케 졸업 선물로 브라이트가 준 것이었다.

블론디는 매우 순한 말로 좋은 종자라서 그런지 머리도 좋았다.내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을 아는지 투레질을 했다.

아,브라이트는 지금 드리케를 졸업하고 왕궁 보조마법사로 일하고 있는데 주로 하는 일은 워프진에 마나를 채우는 것이라고 한다.

나 또한 드리케를 졸업했을 때 왕궁 보조정령사를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왕궁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다.

뭐,드리케의 선생이라는 직책도 반쯤은 얽매인 거지만 그 정도야 괜찮다 싶었다.

블론디를 타고 얼마나 산을 올랐을까?저 멀리 나무 사이로 호수가 보였다.

저곳 어딘가에는 라이가 새긴 물의 상급정령 엔다이론을 소환하기 위한 정령진이 있으리라.

14살에 물의 중급정령 운다인과 계약을 맺었다.하지만 그 사실을 밝힌 것은 18살 때였고 19살인 지금의 내 목표는 상급정령 엔다이론이었다.

벌써 두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오늘은 왠지 잘 될 것만 같았다.장소도 좋고 말이다.

그동안의 지독했던 수련이 오늘 결실을 맺기를!

매일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한계에 다다르는 수련을 한 건 순전히 이날을 위해서가 아니겠는가?상급정령과 계약을 위해!

엔다이론을 차지하면,그땐 가장 먼저 로베닌 페드리......네놈을 찾아가 그날의 복수를 할 테다.기필코!

[아참!가는 길을 안 만들었네......어쩌죠,마스터?숲을 뚫고 가야......]

파칵!

"푸히히잉."

어깨에 있던 라이를 냅다 블론디의 앞으로 던져주었다.블론디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앞밥을 치켜들고는 그대로 라이를 밟고는 찢어발기려는 듯 다리를 사납게 비틀었다.

그래,찢어버려.블론디!

[흐에엑!마스터!헬프 미!](여전히 귀여운......)

"워워,진정해,블론디."

"푸르르르,푸르릉."

길고 단단한 블론디의 목을 쓰다듬으며 진정시켜주자니 문득 라이가 땅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훗,블론디의 편자를 다이아몬드로 만든 보람이 있는걸.마나는 조금 들었지만.

"네 죄를 네가 알 테니 불만은 없겠지,라이?"

[흑흑,너무하십니다,마스터~.단지 정령진을 너무 열심히 만들다보니 잠시 잊은 것뿐인데.]

"흥!"

말은 잘하지.피식.

나는 블론디에서 내려 바닥을 디디고 섰다.여전히 땅 속에 반쯤 묻힌 라이를 빤히 보다가 그 위에 흙을 덮어주었다.

[마,마스터?]

"겨울잠을 자지 않았으니 봄잠이라도 자야 하지 않겠어,라이?여기서 얌전히 자고 있어!"

[너무하십니다.마스터~!]

흙 묻은 손을 탁탁 털어낸 나는 수풀 속으로 들어섰다.물론 라이에게 경고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녀올 테니까 블론디를 지키고 있도록."

[네에......]

기운 빠진 라이의 대답을 뒤로 하고 숲 속으로 발을 디뎠다.

심한 내리막인 데다가 크고 작은 돌이 비탈길 위에 가득해서 걷기가 용이치 않았다.

라이를 시켜 정령진을 그리게 한 곳은 바레사 호수의 뒤쪽,깎아지는 바위산 때문에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었다.

물론 호수의 앞쪽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경치를 즐기러 오지만 말이다.

지형상 호수 뒤쪽은 앞쪽에서 잘 보이지도 않았기에 정령 소환진을 그리기에는 더없이 완벽했다.

"아얏!"

물론 그 덕에 길이 험하긴 했다.내가 밀어낸 반동 그대로 돌아온 나뭇가지 하나가 이마를 강타했다.

운다인을 부러서 싹 쓸어버릴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엔다이론과의 계약을 위해서는 마나를 비축해둬야 했으니 이내 마음을 접었다.

정령을 소환하는 데에 있어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마나였다.친화력이야 늘 라이와 붙어 있으니 자연스럽게 상승되었고 이 넘치는 정신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단 하나,마나!그것만이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운다인과 계약했을 때는 남아도는 친화력으로 생각보다 쉽게 계약을 이루었다.하지만 엔다이론은 그것만으로는 어찌 구슬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사실 정령을 소환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친화력이다.

친화력이 높으면 정령을 소환하거나 정령마법을 쓸 때 필요한 마나의 양도 비례하여 줄어든다.

또한 친화력이 받쳐준다면 실력에 맞지 않는 정령과도 계약이 가능하다.내가 운다인과 계약한 것이 그런 경우였다.

마나가 부족하지만 그 마나를 채워줄 친화력이 있으니 계약만 완료하면 마나에 대한 걱정은 덜 수 있다.일단 계약만 하면 말이다.

차르륵

"우앗!"

발을 헛디딘 탓에 나뭇잎 위를 타고 주르륵 미끄러진 나는 엉덩이에 느껴지는 지독한 아픔에 일어나지도 못한 채 고통을 호소했다.

"아야야.정말이지!"

길이 이렇게 험하니 나중에 다시 올라갈 때가 더 걱정이었다.

라이 그 녀석이 다듬어놓기만 했어도 이보다 배는 쉽게 내려올것 아닌가?라이야 뱀의 몸을 가지고 있으니 기는 곳이 길이고 눕는 곳이 집이지만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이 커다란 몸으로 산을 타는 게 얼마나 힘든 지 그 녀석이 알아야 했다.

후훗,다음 몸은 큼직하게 만들어줄 테다!

엉덩이를 문지르며 겨우 산을 내려오니 울퉁불퉁한 바위 절벽에 다다랐다.

기껏 땋아놓은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옷 여기저기에는 흙먼지가 너저분했다.특히 엉덩이 부근이!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분명 이 근처에 만들었을 텐데?산과 바위절벽의 경계를 두리번거리며 정령진을 찾아다니는데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내가 분명 이쯤에 만들라고...... 

"라이,넌 죽었어......"

바위 절벽 밑에서 정령진을 발견한 나는 눈이 돌아갈 것만 같았다.저길 어떻게 내려가라는 거야?내가 바위절벽 위쪽에 만들라고 했지 아래에 만들라고 했냐?

"쳇,운다인!"

결국 운다인을 불러내야 했다.호수에서 물컹물컹 솟아오른 물이 푸른 돌고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매끈한 몸매와 한없이 투명하지만 푸른색을 가진 돌고래,물의 중급정령 운다인이었다.

운다인이 허공을 날아 내게 다가왔다.

[부르셨나요,주인님?]

지극히 여성스럽고 상냥한 목소리.

"나를 저 밑에까지 태워다줘,운다인."

[타세요,주인님.]

등을 돌리며 타라는 시늉을 하는 운다인의 등에 올라 지느러미를 붙잡으니 차갑고 물컹하지만 손바닥에 착 붙는 감각이 전해졌다.하지만 물이 묻어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운다인은 지극히 유려하고 부드럽게 허공을 헤엄쳐 금세 절벽 밑에 다다랐다.

"수고했어.이만 돌아가,운다인."

[네,주인님.부디 다음에 또 불러주세요.]

운다인이 물로 화했다.운다인을 이루고 있던 물들은 바위를 타고 호수로 돌아갔다.

바닥은 온통 울퉁불퉁한 바위였는데 라이가 정령진을 새겨놓은 곳만이 바르고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었다.라이가 열심히 문댔겠지?

소모한 마나도 있고,마침 오늘 아침 명상을 하지 않았기에 나는 다듬어진 정령진 위쪽에 앉았다.

등을 기댈 곳은 없었지만 개의치 않고 자세를 잡았다.두 다리를 곧게 펴고 그 위에 두 손을 올린 채 눈을 감았다.곧 명상에 돌입했다.

주변에 흐르던 마나들이 내 의지에 따라 다가왔다.그리고 이내 내 전신의 피부를 타고 몸속으로 서서히 흘러들어왔다.그 마나들을 의지로 조종하려니 강하게 반발했다.

흘러들어왔던 마나들은 다시 나가려고 했지만 쉽게 놔줄쏘냐?

마나를 강하게 옭아매어 몸 깊숙한 곳으로 끌어왔다.그리고 조금은 얌전해진 마나들을 이끌어 몸속을 순회했다.

배꼽에서부터 다리를 타고 내려가 발가락 끝까지,그리고 다시 배꼽을 지나 등을 타고 올라와 팔을 지나쳐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그 끝에 부딪쳐 다시 올라온다.목을 타고 올라가 머릿속을 한 바퀴 돌고 돌아 다시 목을 타고 내려온다.

그대로 몇 차례의 반복이 이루어지면 이내 순한 양처럼 길들여지는 마나를 가슴과 배꼽 사이,명치보다 약간 아래에 위치한 마나홀로 이끈다.

내가 모아온 마나들이 연신 소용돌이치는 곳,내 몸속의 마나는 쉴 새 없이 움직인다.마나홀 밖으로 나가고 싶은 듯 한시도 쉬지 않고 그 안을 휘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새로 들어온 마나를 쉽게 수용하게 만들어준다.

새로 끌어온 마나들은 반발할 새도 없이 나의 지배하에 있는 마나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함께 돌고 돌다가 반 정도는 그대로 소용돌이에 융화되고 반은 자연에 있을 때의 자유를 찾아 몸밖으로 흘러나간다.

이때 흘러나가는 마나를 나는 막지 않는다.아주 조금,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적은 양의 마나가 더 차올랐다.지금은 느껴지지 않지만 언젠가 쌓이고 쌓여 도움이 될 나의 마나들.

"후우~."

새로 입은 경장이 온통 땀에 젖었다.눈앞에 호수가 있으니 씻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의 상쾌한 기분이 가시기 전에 엔다이론을 부르고 싶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배낭 안에서 미리 준비해온 마나농축액과 요정가루를 꺼내들었다.

마나농축액의 양은 상당했는데,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급정령을 소환하는 소환진은 하급정령의 소환진에 비해 그 크기가 네 배에 다다른다.웬만한 방 하나 크기인 것이다.

그런 소환진을 채우려니 당연 필요한 마나농축액의 양도 많아지게 된다.이만큼의 양이면 일반인의 한 달 생활비는 될 터였다.

나야 미아를 통해 입수한 것이라 가격을 정확히 모르지만.

용액을 붓기에 앞서 나는 물의 상급정령 소환진을 베껴 그린 종이를 들고 라이가 혹시 틀리게 파놓지는 않았나,꼼꼼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틀린 곳은 없었다.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용액을 부었다.

선을 따라 움직이며 조금씩 붓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었지만 이런 일이 벌써 세 번째.용케 잘 참아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에 사용했던 소환진은 소환에 실패한 뒤 파기했다.

지금 나는 대외적으로 1년 전에 갓 중급정령과 계약을 맺은 걸로 되어 있으니 자칫 소환진을 들키면 골치 아파질 터였다.나로서는 될 수 있는 한 감출 수 있는 것은 감추고 싶었다.

"됐다!"

테그르르 퐁

마나용액을 다 부은 나는 용액을 담고 있던 통을 미련 없이 내던졌다.통이 물에 빠졌는지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무거워 죽는 줄 알았네.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나는 요정가루가 든 융단주머니를 들었다.

두 손으로 들고 있어야 할 만큼 제법 양이 많았는데 이곳은 밀실이 아니니 바람에 날아갈 것도 대비해서 많이 가지고 온 것이었다.

이건 순전히 내 자비로 산 물건.한 5골드 정도 줬던가?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가루를 만지작거리며 얼마나 뿌릴까 잠시 고민했다.하지만 이내 가벼운 마음으로 한 움큼 꺼내들었다.

까짓 다 뿌리지 뭐.나에겐 기어 다니는 전용 은행이 있으니까!(전용 은행이 어떤 것 인지는 다들 알 거라 짐작..)

파스스슷

손에 잡히는 대로 가루를 뿌린 나는 주머니 채로 정령진 위에 탈탈 털었다.

정령진이 크니 당연 요정가루도 많이 필요하다.게다가 많아서 나쁘단 소리는 못 들었으니 듬뿍 흩뿌렸다.전에는 이것의 반 정도만 썼던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내 요정가루가 마나용액 위에 내려앉고 융합된 두 재료가 빛을 뿜어냈다.그 양만큼이나 강렬한 마나의 배열을 일으키는 정령진.

"푸른 물의 정령이여,그 강대하고 굳센 치유의 힘이여,지금 이 자리에 자연의 힘을 빌려 그 위대한 힘과 함께하고자 하오니,태초부터 전해오는 굳은 맹약에 따라 나의 부름에 답하라!"

주문과 동시에 몸속의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그 순간,정령진 위로 빛이 폭사되어 나왔다.뭔가 거대한 형상이 정령진 위로 서서히 떠올랐다.심장이 거세게 요동쳤고 갑작스레 목이 말랐다.

지난 두 번의 시도는 바로 이 찰나에 정령이 나올 듯하다가 나오지 않고 사라지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 실패의 원인을 찾아 정령에 관련된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었지만 이유는 하나같이 마나부족.

그걸 타파할 방법이 친화력,그리고 넘치는 물의 기운!바다는 아니지만 이 거대한 호수라면 엔다이론을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

"나와라,엔다이론!"

제발!나는 강렬히 염원했다,엔다이론이 나와 주기를.그 염원이 통한 걸까?아니면 저 거대한 호수의 넘치는 물의 기운이 도움을 준 걸까?

정령진의 빛이 사그라지며 그 위로 거대한 수룡이 나타났다.

바다를 닮은 짙은 푸른색!입이 쩍 벌어질 만큼 거대한 몸집!굽이 접혀 있지만 곧게 편다면 족히 20미터는 되어 보였다.

보통 책에 묘사된 엔다이론은 써펜트의 모습이었는데 막상 눈앞에 나타난 엔다이론의 느낌은 차라리 과거의 기억에 있는 동양의 용과 흡사했다.비록 여의주는 없었지만.

엔다이론의 등장에 호수가 거칠게 출렁거렸고 자잘한 돌멩이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나를......부르는 자......]

엔다이론의 모습은 마치 당장이라도 없어져버릴 것처럼 흐릿해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남은 마나는 이제 반절.겨우겨우 소환을 이뤘을 뿐인데 이렇다니......그동안의 노력이 헛짓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나다!너와 계약하기 위해 겨우 이 자리에 섰다,엔다이론!"

[시험을......치르리라.]

"시험?"

상급정령에 대한 정보는 극히 희박하다.상급정령의 생김새도 정확하지 않을 만큼.

현재 대륙에는 13명의 소드 마스터가 있고 5명의 7클래스 마법사가 있다.

그리고 세간에 알려진 상급정령사는 단 한 명!매우 희박한 숫자인 것이다.그렇다 보니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상급정령의 시험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표해야 했다.

의문을 표하는 나에게는 아랑곳하지 않은 엔다이론이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젠장,눈 하나가 내 몸집 만하잖아!뭘 하려는 거지?

내가 엔다이론의 의중을 헤아려보기도 전에 흡사 고양이의 것처럼 길고 가느다란 엔다이론의 눈이 부릅떠지며 나를 마주 노려보았다.

흐릿한 몸과 달리 엔다이론의 두 눈동자만은 지극히 선명했다.

그 두 눈을 보고 있자니 내가 깊은 바닷 속으로 빨려드는 기분이 들었다.숨이 막혔다.왠지 모르게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드래곤 피어가 이런 것일까?온몸이 터져나갈 것같이 긴장되었다.

왜 이러지?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딱딱하게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온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니,정말이지 끔찍한 느낌이었기에 나는 악이란 악을 모조리 끌어다 몸을 움직였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겨우 붙잡았을 뿐인데도 손목이 떨어질 듯 아파왔다.억지로 몸을 움직이려 하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이름이 뭐냐?]

문득 엔다이론이 이름을 물어왔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강한 압박 속에 있는 느낌.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내......이름은......"

[이름은?]

겨우 겨우 입술을 뗐는데 그마저도 힘이 부쳤다.

이익!젠장......

"아악!짜증나아.이거......풀어라......당장......"

마음 같아서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짜증이 치밀어 올라 죽을 것만 같았다.

[이름은?]

이게 사람 말을 씹네?지가 상급정령이면 다냐아!말하면 되잖아 말하면!

"지니......크로웰......이다.풀어라,네놈......!"

[좋다.지니 크로웰.주인으로 인정하마.]

"알았으니......꺼져!"

[그러지.]

거칠게 뛰던 심장이 굳어가는 듯했다.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온몸을 옭아매던 답답한 감각은 엔다이론이 사라지자 바람이 지나가듯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털썩

"하아!하아!"

뭐야,뭐?

그와 동시에 맨땅 위로 철퍼덕 주저앉은 나는 한동안 멍하니 있어야 했다.

내가 방금 뭘 한 거지?계약한 건가?그게 시험이었나?마나의 양을 보니 10퍼센트가 조금 넘는 양이 남아 있었다.

남은 마나로 보건대 분명 몇 십 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느낀 시간은 족히 몇 십 분,아니 한 시간은 된 듯했다.

숨도 못 쉴 만큼 사납고 거친 기세 속에서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몸은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혹시 꿈이었나?

겨우 숨을 돌린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조금 뻐근하기는 했지만 분명 움직였다.

여전히 마나홀도 텅 비어 있었다.꿈은 아닌 것 같은데?그럼......나,계약한 거야?

아아,했구나.그제야 내가 엔다이론과의 계약을 해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하지만 기쁘다는 감정이 떠오르기보다는 마치 '그가 그랬다.그녀는 그랬다' 하는 글을 읽은 기분이었다.

엔다이론이 내 상상 이상으로 크고 사나웠으며 강압적이었기 때문일까?

왠지 아직도 머릿속이 선명하질 못해서 나는 멍하니 호수만 바라보았다.

잔잔하기 그지없는 호수.그래,수영이나 할까?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이 나는 썩 마음에 들었다.마침 물도 깨끗하고 맑았다.

게다가 명상과 엔다이론 덕분에 경장이 땀이 잔뜩 절어 있었다.

벌떡 일어나 젖은 경장을 벗자 맨살에 서늘한 바람이 와 닿았다.문득 머릿속이 맑아졌다.

찰팍

물가에 발을 디디자 온몸에 시원한 기운이 차올랐다.이제야 무거웠던 몸도 꺠어난 것 같았다.그래,난 해냈어!

"끼야호!"

첨벙

갑작스레 기분이 좋아진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목까지 물이 차올랐는데 물속에 퐁 하고 얼굴을 담갔다.전신의 피부를 통해 차갑게 일렁이는 물살이 느껴졌다.머릿속까지 물이 젖어들었다.

상쾌해라.아아,온 세상이 내 것인 것같아.

행복한 기분에 잔뜩 젖어 있는데 얼핏 뒤쪽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뒤에는 옷이 있는데?이 산에 고블린이 있던가?

혹시 하는 생각에 물 밖으로 나온 나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엉?나는 잠시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저놈이 왜 여기 있지?

내가 옷을 마구잡이로 벗어둔 정령진 위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정령진을 빤히 바라보며 그게 무엇인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는데 그런 그의 손에는 내 것이 분명한 속옷이 들려 있었다.

잠깐,나 지금 밑에는 입고 있는데?그럼 저건......위......

나는 눈가에 경련이 이는 것을 느끼며 이 사태를 어떻게 타파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 순간 정령진 위에 서 있던 인영이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햇빛에 옅게 반짝이는 갈색머리와 나를 빤히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여전히 뽀얀 피부!

"지,지니?"

"......"

오냐,브라이트.정령진이나 보련?그리고 내 속옷 내놔,이 변태야!

찰박

"끼,끼아아악!"

내가 질러야 할 비명이거든?

브라이트의 굵직한 비명소리가 호수를 울렸다.

마치 봄을 맞아 날씨는 화창했고 나들이 가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그리고 이런 좋은 날에 어울리지 않는 구린 얼굴로 마차 밖을 내다보는 한 명의 마법사가 있으니......

"브라이트님!"

바로 브라이트였다.그는 드미트리의 궁정 보조마법사로서 스물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5클래스 유저라는 경지에 오른 촉망받는 인재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뭐가 언짢은지 모처럼 나들이 나온 마차 안에서도 표정이 밝지 못했다.

그런 그를 발그레한 발그레한 얼굴로 부른 이가 있었다.

"뭐냐?"

"밖에 뭐 볼 것이 있나요?왜 창밖만 보시나요?저와 마법이론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시끄러!"

브라이트의 매몰찬 대답에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는 브라이트보다 세 살 어린,그와 함께 워프진을 담당하는 어여쁜 22살 아가씨였다.

4서클 유저인 그녀는 나이에 비해 썩 괜찮은 실력을 가진 마법사였다.

"이봐,브라이트.너무하는 것 아닌가?레이디는 부드럽게 대해야 하는 건데 말이야."

5서클 마스터로서 워프진 소속 마법사들을 총괄하는 그의 이름은 로어드 케니얀.

브라이트 케니얀의 숙부,그러니까 삼촌 되시겠다.그의 말에 여마법사가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씀 마세요,삼촌!우리는 마법사지 기사가 아니니까요.전 칼 휘두르는 것들은 딱 질색이란 말입니다."

"녀석,까칠하기는......기사든 아니든 남자라면 무릇 여자에게 부드럽게 대해야 하는 거다.내가 네 숙모를 낚은 것처럼 말이야."

"낚아요?표현이 썩 좋지 않군요.그 얘기 숙모한테 해도 됩니까?"

"흥,맘대로!대신 나도 네 아버지에게 그 얘기를 해줄 테다."

브라이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하지만 이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무슨 얘기요?"

"네가 그 백마를 여자에게 준 얘기!"

로어드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조금 음흉스레 말했다.브라이트가 펄쩍 뛰며 입을 열었다.

"그,그건!그 말이 저를 따르지 않으니 그런 거지요!"

"푸훗!네가 정령사는 그 여자한테 푹 빠졌다는 것,다 안다 이놈아!그렇지 않고서야 제 아비가 준 생일 선물을 날름 여자한테 갖다 바치는 놈이 어디 있느냐!"

"이놈이라니요!제 나이가 벌써 25살입니다.삼촌!그,그리고 빠진 건 사실이지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브라이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리고 그런 브라이트의 반응에 여마법사가 놀란 듯 물었다.

"정령사?그게 누군데요?이름은?클래스는?"

"......건방지긴!네가 알아서 뭐하려고?"

여마법사의 물음에 브라이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명백히 화가 났다는 표시였다.역시나 이번에도 중재에 나선 것은 로어드였다.

"뭐 어떠냐?라이벌이 될지도 모르니 알려줘서 나쁠 것은 없지.우리 가문은 마법사 가문이니 네 아버지도 정령사 며느리보다는 마법사 며느리가 좋을 것 아니냐.그리고 아르웬,정령사는 클래스로

표현하지 않는단다."

"그,그럼요?"

여마법사의 이름이 아르웬인 모양이었다.며느리 어쩌고 하는 말에 브라이트의 얼굴은 머리꼭대기까지 터질 듯 붉어졌다.

"글쎄.브라이트,그 정령사 뭘 소환할 수 있냐?"

화를 내려던 브라이트는 로어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녀의 훌륭함을 알리려는 듯 서둘러 말했다.

"그녀는 훌륭한 정령사예요!19살인데 벌써 중급 물의 정령을 소환한단 말입니다!계약을 맺은 것은 작년이구요."

"중급 물의 정령?높은 경지인가요,로어드님?"

"음,물의 정령이 소환하기 가장 까다롭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지.그리고......아,중급이라면 마법사로 치면 5클래스 유저 정도일까?브라이트 너와 비슷하겠구나."

"그럼요!그녀는 훌륭해요!멋진 여성인걸요."

화를 내려던 것을 잊었는지 브라이트가 반색을 하며 외쳤다.

"그래도 그 말은......음?"

뭔가 충고하려던 로어드가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몇 초인가 밖을 향해 눈을 빛내던 로어드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마차 의자에 몸을 묻었다.

"왜요,삼촌?"

"왜 그러세요,로어드님?"

로어드가 다시 마차에 앉자 브라이트와 아르웬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그게 말이다.얼핏 바레사 호수 뒤쪽에서 뭔가 강렬한 마나의 유동이 일었던 것 같은데.워낙 멀어서 정확히는 모르겠구나."

"바레사 호수라면 지금 저희가 가는 곳 아닌가요?"

아르웬이 조금 두려운 듯 물었다.

"그렇지.하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앞쪽이란다.뒤쪽은 내려가는 길도 없을 뿐더러 가려면 이번에 나오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쪽은 산을 넘어가는 길이라 사람이 잘 가지 않는단다."

"바네사 호수 뒤쪽이라면 바위산 아닙니까?삼촌,강렬한 마나의 유동이라면 어느 정도의?"

"음,굳이 말하자면 7클래스 마법을 쓸 때일까?내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그 정도겠지?"

7클래스라는 말에 브라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흥분한 듯 입을 열었다.

"가 봐요!가요,삼촌!나들이 따위보다 갈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이,이놈아!나는 쉬러 온 거야!"

"삼촌!마법사라면 무릇 탐구실에 살고 탐구심에 죽는다지 않습니까?가보자구요!올라가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내려오면 되잖아요!"

"으음,하지만 아르웬에게도 허락을 구해야......"

로어드가 신음을 삼키며 말하자 브라이트가 아르웬을 돌아보았다.

'갈 거지?간다고 말해!' 라는 강한 염원이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떠올랐다.

"저......저도 가보고 싶어요,로어드님."

브라이트에게 연심이 있는 것이 분명한 아르웬은 거부하지 못했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브라이트가 뭔가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면서.하지만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브라이트는 곧장 마부에게 통하는 창문을 열고 말했다.

"목적지를 바꾼다.바레사 호수의 뒤쪽으로!"

"예에?그쪽은 산길인데요?"

놀란 마부가 되물었다.

"가라면 가!다음번 갈림길에서 오른쪽이다!"

타악

마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창문을 닫은 브라이트는 그새 기분이 좋아져서 창밖을 보며 흥얼거렸다.

그 옆자리의 아르웬은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거렸고 그런 둘을 보며 로어드가 허허 웃음을 지었다.

얼마나 올랐을까?길이 조금 험하기는 했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아 올라갈 만했다.산을 조금 더 오르자 저 멀리 바네사 호수의 경치가 얼핏 보였다.

연신 창밖을 주시하던 브라이트의 눈이 돌연 휘둥그레졌다.

바로 조금 앞쪽에 웬 익숙한 백마 한 마리가 나무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그의 눈이 틀리지 않다면 그 말은 자신이 지니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이내 마차가 말의 곁으로 다가섰고 브라이트는 서둘러 마차를 세웠다.

"브라이트?"

"어딜 가세요,브라이트님?"

그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차 안의 두 사람이 따라 내렸다.

그들을 뒤로 한 브라이트가 말에게 다가갔는데 그의 접근을 경계하던 말이 돌연 앞발을 휙 들어 올리며 날뛰기 시작했다.

"푸히이잉.푸르르르!"

"이,이건......블론디?"

백마가 자신을 극도로 꺼리는 모습에 브라이트는 확신했다.

이 말은 자신이 지니에게 선물한 말이 분명하다고.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은 신경도 안 쓰면서 브라이트가 접근하면 사납게 바뀌는 블론디.

그 모습이 왠지 얼핏 지니를 닮아 지니에게 선물한 말이었다.그렇다는 건 이 근처에 지니가 있다는 사실.

브라이트는 두리번거리며 지니의 행적을 찾다가 문득 숲 쪽으로 누군가 지나간 것을 발견했다.한달음에 숲으로 들어서는 브라이트.

파칵

뭔가 동그란 것을 밟았는지 미끄러졌지만 개의치 않고 흔적을 따라 숲으로 내려가는 브라이트의 뒤로 아르웬의 비명이 들려왔다.

"꺄악!뱀이다아!뱀이다아!"

"오오,몸에 좋고 맛도 좋은 뱀이군."(뱀이다아 뱀이다아~맛도 좋고 영양좋은 뱀이다아~)

질겁하는 아르웬가 반색하는 로어드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서둘러 숲길을 따라 내려갔다.

여기저기 누군가 미끄러지고 빠진 흔적이 보였다.혹여 지니의 흔적일까?

브라이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더 내려가니 바위산이 나왔다.흙과 바위의 경계선.하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절벽 밑을 내려다보니 난생 처음보는 형태의 진과 그 주변으로 버려진 천 조각이 눈에 띄었다.

"허공을 지배한다.플라이!"

비행주문으로 가뿐하게 절벽 밑으로 내려온 브라이트는 천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울퉁불퉁하고 긴 천 조각.브라이트는 다만 이 천이 매우 부드러운 것으로 주로 여성의 옷에 쓰이는 것이라는 것 정도만 알수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린 브라이트는 곧바로 바위를 깎아 그 위에 새겨진 마법진에 다가갔다.

"룬어?아니야.뭐지,이게?"

얼핏 룬어와 닮았지만 그보다 더욱 기괴했다.

아름다운 글자들이 바위 깊이 새겨져 있었다.그리고 미약하지만 분명 주변에서 나는 이 냄새는 마나용액,아니 마나농축액!

냄새의 정체를 짐작해낸 브라이트는 바위에 새겨진 마법진 위를 더듬었다.깊고 깔끔하게 파져 있었는데 뭐로 파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게 왜 여기 있는지,이 천 조각들은 뭔지,아까 자신의 삼촌이 느낀 마나의 유동과 이 마법진은 관련이 있는지.

브라이트가 마법사 특유의 끝없는 의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참방

뒤쪽의 호수에서 뭔가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법진에 신경 쓰느라 잊고 있었지만 이쪽이 호숫가라는 사실을 떠올린 브라이트는 뒤로 돌아 호수를 바라보았다.뭔가 큰 물고기 라도......

"지,지니?"

"......"

저 번쩍이는 금발이나 선명한 푸른 눈동자는 자신의 사랑 지니가 분명했다.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는데 희고 둥근 어깨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응?희고,둥근......맨 어깨?

찰박

"끼,끼아아악!"

지니 주변의 물이 한차례 일렁였다.길고 긴 금발이 수면 위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아쉽다면 매우 아쉬운 점이었다.

브라이트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황급히 몸을 돌리니 어느새 절벽 위에는 로어드와 아르웬이 서 있었다.

그들은 지니를 발견한 듯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는데,문득 로어드가 입을 열었다.

그는 브라이트가 지니를 부르는 대목에서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과연......머,멋진 여성이구나."

"삼촌!이익......불의 힘이여,그 분노를!파이어 볼!"

콰콰쾅!

빠르게 배열된 파이어 볼 하나가 로어드의 발밑을 강타했다.

그와 동시에 로어드가 서 있던 절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에휴......"

브라이트의 귓가에 누군가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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