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을 앙다물었다.녀석을......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지?
[마스터어~흐아아아.]
이루제의 손에 잡혀 멀어지는 라이의 목소리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얼핏 넓은 통로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정말이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마치 오늘이 축제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에 더욱 힘을 얻었는지 나와 함께 열을 맞추고 있는 대표단 아이들의 들뜬 분위기가 통로 안을 가득 메웠다.
"정말 괜찮겠니,지니?"
문득 염려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이리토 선생이었다.
아마도 내가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대회에 참가하려는게 심히 걱정되는 모양이다.
"물론이에요.걱정 마세요,선생님."
"이렇게 아픈데 괜찮겠어?원래 대회에 참가하기 싫다고 했었잖아.지금이라도......"
"괜찮아요!저는 꼭 황제 폐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걸요."
내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하지만 그런 점을 무시하면서 나는 이뤄야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이 거대한 제국의 황자이자 나의 생명의 은인인 에쉬를 만나는 것,그리고 최소한 감사의 말이라도 건네지 않으면 빚을 진 듯한 이 기분에서 나는 평생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토너먼트에서 우승해야 했다.기필코.
피유우우
퍼펑 펑펑퍼엉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 38회 윈칸 축제의 개막식을 시작합니다!각 아카데미의 대표단은 돔의 중앙으로 입장해주시기 바랍니다."
커다란 폭죽소리와 사회자의 목소리가 대표단이 대기 중이던 통로 안까지 선명히 들려왔다.
드리케 아카데미의 선두에 선 것은 운동반 아이들이었고 그 뒤를 내가 포함된 종합반 아이들이었다.
질서정연하게 아이들과 열을 맞추어 걸음을 옮겼다.통로를 나선 나는 잠시 밝은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고 그런 하늘을 가득 수놓은 선명한 폭죽 자국에 입을 벌렸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돔과 그런 돔을 빙 둘러싼 관객들의 귀를 가득 울리는 함성에 절로 가슴이 설레었다.
조금만 기다려,에쉬!저 많은 관중들이 모두 나를 바라볼 때 너를 만나러 갈 테니까!
윈칸 축제는 그 명성만큼이나 화려하고 웅장하게 시작되었다.
"승자는?역시나 일격필살!드리케 아카데미의 지니 크로웰양 입니다.이로써 지니 크로웰 양은 결승에 진출합니다!이야,정말이지 부상 중임에도 저런 솜씨라니 그야말로 탁월한 솜씨 아닙니까?보
통 검사와 마법사,아니 정령사라면 반대의 양상이 나와야 하는데 말입니다."
와아아아
삐이익
과연 대제국이라 불리는 엘란답게 토너먼트가 이뤄지는 돔은 넓고 끝이 없었다.
그리고 많은 소란과 위협 끝에 이 자리에 서게 된 나는 우승하겠다는 강한 일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일주일이라는 치료 기간이 채 되지도 않아 이 경기장에 서게 한 이유였다.
그날로 닷새째인 오늘,나는 이틀간 경기를 치르면서 한 가지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는데 내상이란 것이 결코 만만히 볼 상처가 아니라는 것이다.
7일의 휴식기간을 반도 채우지 않고 출전한 경기.
그렇다 보니 마나를 운용할 때마다 강렬한 복통과 두통이 찾아왔고,그 결과 나에게는 일격필살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샌가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듯했다.
진행자는 예의 증폭마법이 걸린 마이크를 내게 내밀며 물어왔다.
"크로웰 양,어떻습니까?다음 결승전 상대는 윈티드 아카데미의 기대주로 유명한 랏샤무 페드리 군인데,떨리진 않나요?"
"......그게 누구죠?"
나의 되물음에 진행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엘란을 대표하는 상급 소드 마스터 페드리 공작 각하의 셋째 아드님으로도 유명하죠.정말 모르시나요?"
"아아,들어본 것 같네요.떨리진 않지만 대회가 너무 길어지니 슬슬 지겨워지는군요."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그렇습니까?하하하!대답 감사합니다.그렇다면 서둘러 다음 순서로 넘어가죠.다음 순서는 청소년부의 준결승전입니다!"
경기장에서 내려온 나는 이리토 선생의 부축을 받았다.
역시나 몸에 무리가 오는 건지 또 핏물이 울컥 올라올 것 같았다.
토너먼트의 우승자에게는 두 가지 상품과 한 가지 특권이 주어진다.
첫 번째 상품은 우승 트로피,두 번째는 우승 상금,그리고 특권은 엘란 제국의 황제를 만나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는 특권.
그 소원은 부당한 것만 아니라면 대개 이루어진다고 한다.
전대 우승자들 같은 경우,지위나 더 많은 상금,혹은 최고의 아카데미라는 윈티드 아카데미로의 편입을 원했다는데 나는 단지 황제를 만나 에쉬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일개 학생인 내가 제국의 황자에게 알현을 신청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허락된다고 해도 여러 절차를 거치다 보면 몇 주일은 기다려야 할 터였으니 윈칸 축제의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물론,우승 트로피를 국왕에게 바치는 것도 좋겠지?미리미리 줄을 서놔야 되지 않겠어?이거야말로 진정한 일석이조지.후훗.
지겹던 대회도 이제 막바지,오늘은 이 넓은 돔에서 단 두 개의 경기만이 치러진다.
유아부와 청소년부의 결승전.
그 때문에 오늘의 관중석은 유난히 들끓었다.윈칸 축제의 꽃이라 불리는 토너먼트 경기의 결승전다웠다.
오늘 이 자리에는 드미트리의 왕 디켈 3세도 있었는데 그는 왕이라는 바쁜 직책상 결승전인 오늘만 참석했다.
만약 드리케 학생이 결승에 없었다면 참석도 안 했겠지만 말이다.물론,오늘 가장 중요한 인물은 화려한 관중석에 앉아 있는 엘란의 황제겠지?그리고 그 곁에 앉아 있는 게 황후인가?
"선생님,저분이 황후인가요?"
"응?그래,저분이 제 1황후시란다."
이리토 선생이 평소 질문과는 담을 쌓기로 소문난 내 질문에 기쁜 듯 대답했다.
"제 1황후?그렇다면 제 2황후는 누구죠?"
"제 2황후 자리는 현재 공석이란다.얼마 전에 황제께서 그 자리에 에스티아 스포드로라는 후궁을 올리려 했지만 그녀의 출신이 비천하다는 이유로 무산되었지."
"에스티아 스포드로?어떤 출신인데요?성이 있는 걸 보니 귀족가 아닌가요?"
"그래,귀족가이긴 하지만 고작 자작가인 데다가 후궁의 자리에 있는 것도 신기한 여성이었어.본래 황궁의 로열 기사단에 있던 여기사였거든."
에스티아 스포드로,그녀다.그녀가 에쉬의 어머니야.그런데 자작가가 고작이면,남작가인 나는 뭐지.
"그녀에게는......에스티아 후궁 전하에게는 아들이 있지 않아요?황제와의 사이에!"
"어머,그건 어떻게 아니?그래,있어.아니,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게 정확할까?이건 어디까지나 소문인데,에스티아 스포드로는 황제의 사랑을 받았지만 황후의 질투도 한 몸에 받았지.그리고 그걸
참다못해 어느 날 황궁에서 사라졌다고 해.그로부터 13년 뒤 12살짜리 남자아이를 데리고 와서는 황제의 아들이라고 했다지?
그게 지금의 제 2황자 에론 드 폰 에피로스.그런데 그녀는 황궁으로 돌아오고 1년이 되지 않아 죽었어.그리고 세간의 사람들이 추측하기를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그전에 황자의 존재를 알
리기 위해 궁으로 돌아온 거라고 하지.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다른 사내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 사실이 알려질까 봐 두려워 궁을 나갔지만 화려하던 궁 생활이 그리워서 돌아왔다고 해.하지만 내가 보기에 제 2황자 에피로스는 분명 황제
의 친아들이야.엘란 제국 황가에 전해오는 검은머리는 명백한 유전이거든."
역시나 경제학반의 선생답게 그녀의 설명은 길고 길었다.하지만 알고 싶은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좋은건가?
"그렇군요.그렇다면 지금 에쉬......에피로스 황자는 궁에서 인정을 못 받고 있나요?"
"그래,에스티아 후궁이 황자와 함께 궁으로 돌아왔을 때 황자의 존재를 내세워 그녀를 황후에 자리에 올리려고 했던 황제와 달리 귀족들이나 제 1황후는 거세게 반대했지.정말 저 아이가 황제의 아
들인지도 알 수 없고,에스티아가 궁 밖에서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제국의 후궁으로서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멋대로 출궁해서 제국의 이름을 실추시켰다는 이유에서였지."
"그런......에스티아 후궁은 어째서 출궁했던 거죠?왜요?"
"글쎄,그 부분은 많은 추측이 난무하기 때문에 뭐라고 정확히 말해줄 수가 없단다.하지만 황후의 질투에 못 이겨서라는 설이 가장 유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에쉬,불쌍한 녀석이구나.
그런 어머니에게 배운 검술을 못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이젠 알았겠지?상처 받지는 않았을까?
문득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하지만 죄책감과는 약간 다른 감정이었다.
"유아부의 결승전을 시작합니다!윈티드 아카데미 대표 랏샤무 페드리 군과 드리케 아카데미 대표 지니 크로웰 양!경기장으로 올라와주세요."
"응?"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벌써......지니,준비하렴!잘해야 해!오늘은 어제와 달라.디켈 3세께서 지켜보고 계신단다."
"네,맡겨주세요!우승 트로피를 전하에게 바치겠어요."
그리고 에쉬를 만나서 말해야지.미안하고,고맙다고.
"우선 양측 선수 간에 인사가 있겠습니다."
시합 전에 이루어지는 인사는 사실상 기선 제압을 위한 절차라고 봐도 무방했다.
나와 마주서 있는 랏샤무 페드리라는 소년은 겉모습은 15살은 되어 보이는 건장한 붉은색 머리의 소년이었다.혹시 청소년부로 가야 되는데 잘못 온 것 아냐?
"내 이름은 랏샤무 페리드.잘 부탁한다,꼬맹이."
"제 이름은 지니 크로웰.엄연한 숙녀랍니다.꼬맹이라는 무례한 발언을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별로 잘 봐주고 싶지 않군요."
"......어디가 숙녀라는 건지?"
그러는 넌 어딜 봐서 13살이야?아무리 검술을 한다지만 체격이 너무 좋잖아.
같은 13살인 에쉬는 10살인 내 또래로 보였는데 말이다.
목소리도 굵직한 게 도저히 유아부에 어울리는 녀석이 아니었지만 저런 치기 넘치는 모습이라니,애는 애였다.
그렇다고 감히 나한테 비아냥거리다니,네 수영솜씨를 봐주지.
"양측 선수 결투준비!"
"운디네."
결투에 앞서 검사는 미리 칼을 빼들고,격투가는 미리 건틀릿을 끼고 있듯,마법사는 메모리즈를 해둔다.
그런 것을 본다면 정령사인 내가 미리 운디네를 소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셋,둘,하나,시작!"
"운디네,언......쳇!"
쉬이익
내가 채 언브리딩을 외치기도 전에 페드리의 목검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검술의 기본이라는 가로베기.
말 그대로 가로로 검을 그어내는 기술이다.가장 보편적이지만 허점이 많은 기술.
하지만 달려오면서 가해진 공격이었기에 나는 주문을 외우다 말고 서둘러 몸을 뒤로 빼야 했다.이 정도 쯤이야!제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일단 주문만 외우면......
"언 워터......"
"이야아!"
내가 몸을 뒤로 빼기 무섭게 페드리의 목검이 곧장 나를 향해 뻗어왔다.
나는 또다시 입을 다물고 옆으로 몸을 틀었다.
바로 공격을 가해오는 녀석을 보며 문득 깨달았는데 저 녀석은 나를 정신없이 공격함으로써 내가 입을 열지 못하게 할 심산인 것 같았다.
내 경기를 보았다면 알겠지만 나는 공격을 피하는 것에는 제법 자신이 있었다.
몸이 날래지는 못했지만 감당 못할 속도만 아니라면 상대가 어디로 공격할지 예측하고 미리 피하는 것이 가능했다.
드리케 종합반의 분석 능력을 우습게보지 말라 이거야!물론 샤벨 용병단의 눈물 나는 희생이 뒤에 있었지만.
쉬시식!
잠시 생각을 했을 뿐인데 또다시 녀석의 검이 눈앞을 정신없이 흩뜨려놓았다.
빠르게 찔러오는 검이 연신 바람 가르는 소리를 냈지만 곧장 찌를 줄밖에 모르는 정직한 검로라니.우습다,야!오른쪽,왼쪽,아래,왼쪽,위!다 보여!
"이익!"
검을 피하느라 입을 열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공격이 계속 헛나가자 녀석이 짜증스러운 듯 이를 가는 소리는 정확히 들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검을 멈추지 않은 모양을 보고 있자니 내 생각은 확실히 굳었다.
녀석은 내가 입을 열지 못하면 운디네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할 테니 운디네는 단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마법사가 아닌걸.물론 기사도 아니라 슬슬 피하는 것도 힘들지만 말이다.
[운디네,언 워터 브리딩!]
"우왁,그르르르."
"휴우~."
페드리의 몸을 중심으로 빠르게 물이 모여들었고 그 물은 순식간에 페드리의 전신을 감쌌다.
내 의지대로 머리뿐이 아니라 페드리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커다란 물방울.
바쁘게 움직이던 몸을 겨우 멈춘 나는 흐르지도 않는 땀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그런 나를 보는 페드리의 눈은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불신에 휩싸여 있었다.명령이야 머릿속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마나가 조금 더 소모되긴 하지만.
"콰그르르."
늘 하는 말이지만 물속에서 아무리 외쳐도 안 들린단다.
대체 어떻게 기술을 사용한 거냐고 묻는 것이 뻔하지만 대답해줄 의무는 없지!
나는 잠시 물방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페드리를 보다가 이내 그가 수영을 할 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운디네,치워버려."
[네,주인님.]
페드리를 감싸 안은 물방울은 아주 천천히 경기장 위를 데구르르 구르더니 이내 경기장 밖으로 떨어지자 퐁하는 소리를 내며 한순간에 터져버렸다.
평소라면 머리만 감싸서 컴프렉션을 쏘겠지만 결승전쯤 되면 보나마나 그에 대한 대비책 정도는 세워놨을 터였다.
그러니 아예 전신을 감싸서 치워버리는 편이 간단했다.
"네!랏샤무 페드리 군,경기 시작 10초 만에 장외!승자는 드리케 아카데미의 지니 크로웰!또한 이로써 크로웰 양은 이번 유아부 토너먼트의 우승자가 되겠습니다.이야,이번 경기는 크로웰 양이 초반
에 조금 고전하는 듯했지만 결국 한 방에 끝내버리는군요.말도 안 된다 싶을 정도의 크로웰 양의 독주는 결국 페드릭 가의 검술로도 막지 못했네요."
진행자의 말이 쩌렁쩌렁 울리는 돔 안에서 유아부의 우승자는 결국 나로 결정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유아부 아니겠는가?결국 애들인 것을.
감성이 조금 과할 뿐 성인의 정신연령을 가진 나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내가 사용한 것은 운디네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내 힘은 또래 사이에선 독보적이었다.
물론 가장 독보적인 것은 뛰어난 잔머리에서 나온 치사한 기술이겠지만.
나는 주위를 빙 둘러보다 디켈 3세가 자리한 관중석을 찾아냈다.
주변에 있는 것은 다른 왕국의 왕들과 수행원들인 듯했다.
잠시 그쪽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인 나는 이내 홀가분한 기분으로 경기장을 내려갔다.
그러던 중 문득 여전히 물방울이 터진 그 자리에서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페드리가 보였다.저 꼴을 보고 그냥 갈 수야 없지!
"훗,수영도 못하고 검술도 못하고......페드리 군은 레오만도 못하군요.에쉬보다는 더더욱 못하고 말이죠."
내 비아냥에 경기장 밖에서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페드리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악에 받친 듯 빽 소리를 질렀다.
"고작 드미트리 촌놈 주제에 감히......"
뭐야?드미트리 촌놈?
"......죽고 싶어?"
"내가 할 소리다!치사한 수나 쓰는 주제에!드미트리 따위 우리 속곡 중에서도 열등국......"
까드득
나는 그 순간 승리에 젖어 가뿐해졌던 머릿속에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는 감각과 진득하게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느껴야 했다.네 녀석 몸속에 있는 수분을 몽땅 뽑아주마!
"남의 조국을 함부로 모욕하다니.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아니 배 밖으로 꺼내주지!운디네,워터 리무......"
내가 지독한 내상에 한 달을 앓아눕더라도 저 녀석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적의에 가득 차 입을 여는데 문득 뒤에서 섬뜩하리만치 낮은 남성의 음성이 들렸다.
"그만둬."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나는 화들짝 놀라야 했다.
뒤를 돌아보니 그 자리에는 언뜻 랏샤무 페드리와 닮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날카로운,생김새가 날카롭다기보다는 그 분위기가 날카로운 붉은 머리의 청년이 서 있었다.
"혀,혀엉!"
닮았다 했더니 페드리 가 사람인가?붉은 머리카락도 그렇고.
저 꼴 보기 싫은 녀석의 말을 듣자니 확실한 듯했다.
동생과 달리 형이란 녀석은 매우 위험해 보였는데 그는 나를 향해 살기와 언뜻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경고 비슷한 투기도,살기도 아닌 묘한 기운을 뿜어냈다.
"쳇,동생이라 이건가?흥!좋아요,좋아.이만 물러가죠.하지만,한 번 더 입을 잘못 놀리다 걸리면......네놈,그땐 각오해야 할 거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와 싸워봤자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고 아쉬운 대로 자리를 피했다.
평소보다 단번에 많은 물을 불러내는 바람에 몸 상태가 더욱 좋지 않았다.
경기장에서 내려와 이리토 선생에게 다가가니 그녀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지니,장하다.장해!폐하께서 흡족해 하시는 모습 봤니?"
"아뇨,인사는 올렸지만 페드리 녀석이 열 받게 하는 바람에......"
"어떻게 했기에 그러니?"
"녀석은 드미......아니,아무것도 아니에요.그냥 저한테 진게 분했나 봐요."
사실대로 말해봤자 이리토 선생의 기분만 나빠질 터였다.
드리케의 선생이나 학생 대부분은 왕가에 지대한 충성심을 보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유년시절부터 귀에 박히게 들어오는 왕에게 충성하라는 세뇌에 가까운 교육 때문일까?
그 탓이 아니더라도 나 같은 경우는 왕에게 꽤나 신세를 졌고,일단 나의 부모가 드미트리의 귀족이기에 왕가에 대한 호의는 어쩔 수 없었다.
왕의 원조가 없었다면 정령사가 되지 못했을 거라는 이유가 가장 크긴 했지만.
"그래?이런 말은 나도 자존심 상하지만......이곳은 엘란이야,지니.엘란 사람들을 너무 자극해서는 안 돼."
"알고 있어요."
아까는 죽일 뻔했지만.아이의 몸인데도 이 욱하는 성질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어차피 그 기술을 사람한테 쓰기에는 마나가 턱 없이 모자라잖아?
내상이고 뭐고 각오 할 것 없이 마나가 안 받쳐주는군.쓴다면 한쪽 손이나 다리에나 써야 할까?
"근데 그와 무슨 얘기를 했니?"
"그?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까 너한테 다가가서 말을 걸었던 로베닌 페드리 군 말이야."
"그게 누군데요?"
페드리?아,그 녀석의 형 말하는 건가?형은 쓸 만해 보이던데.
나의 되물음에 이리토 선생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지니!로베닌 페드리 군을 모른단 말이야?올해로 나이 열여섯!하지만 벌써 소드 유저의 경지에 올라서 이대로라면 그의 아버지인 페드리 공작을 넘어 30대에 소드 마스터가 될 거라는 기대를 한 몸
에 받고 있는 대륙 최고의 무재라고!그런 그를 몰라?수업시간에 뭐했니?"
소드 유저?미약하지만 검기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경지?
분명 16세에 올랐다고 보기에는 턱없이 높은 경지다.
보통의 기사들이 30대에 소드 유저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30대에 소드 마스터라니.그런 터무니없는......
"에이,이리토 선생님도 참.어떻게 30대에 소드 마스터가 돼요?적어도 마흔은 되어야......"
손을 내저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하려던 나는 문득 로베닌 페드리라는 사람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확실히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렬한 사람이기는 했지만,역대의 기록이나 최근의 기록을 보더라도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대개 40대 후반,빨라야 초반이었다.
물론,크란시아 대륙 최고의 영웅으로 기록된 미토스 대제는 고작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건 전설이니 과장일 터.
"정말이라니까.그는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무재야.그런 무재가 우리 드미트리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란다.휴우......"
"아아."
난 그 사람 싫다,뭐.흥!드미트리에는 내가 있잖아.
입을 삐죽이는 나를 보며 이리토 선생이 피식 웃었다.또 내 표정에서 내 생각을 읽어낸 것일까?
"훗,물론 우리에게는 지니가 있으니 괜찮단다."
"정말......?"
"물론이지.자,가자,지니.전하를 만나러 가야지."
"네!"
그나저나 라이는 이루제에게 잘 볶이고 있으려나?그 녀석은 가끔 다져준 다음에 볶아줘야 하는데.안 그러면 기어오른단 말이지?
각국의 기사들로 인해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는 왕들의 관중석.
기사들 중에는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드미트리의 기사들도 있었다.
황금빛 새가 다리에 방패를 쥐고 있는 모양이 양각된 갑옷,그들은 왕실직속 호위기사단으로 왕의 친위대들이었다.
황금 새는 드미트리의 상징이었고 그중에서도 그 새가 검을 물고 있는 것이 근위대,방패를 들고 있는 것은 친위대였다.
입에 검을 물고 방패를 든 황금 새는 실질적으로 전투에서 활약하는 일반 기사단들을 뜻한다.예를 들면 토넬이 단장으로 있는 제 5기사단 같은.
"멈추시오.검문이 있겠소."
엘란의 기사로 보이는 이가 나와 이리토 선생을 검문하겠다며 다가왔다.
간단한 소지품 검사를 하고 무기의 소지 여부를 물었다.
여성인 이리토 선생이나 아직 어린 나였기에 일일이 더듬어보지는 않는 단순히 형식적인 검문이었다.
우리는 쉽게 관중석으로 들어섰는데 관중석의 내부는 관중석이라기보다는 어느 왕궁의 응접실이라도 되는 듯 화려했다.
나는 잠시 주춤했다.이거,이 융단 밟아도 되는 거야?나중에 돈 내라고 하는 거 아냐!
마침 청소년부의 결승전이 시작됐는지 사람들은 온통 시합장을 응시하고 있었다.단 한 사람,디켈 3세만이 주춤거리는 나를 반겨주었다.
"오오,자랑스러운 드미트리의 백성이여,이리로 오라."
그리고 순식간에 나에게 집중되는 한눈에도 높아 보이는 사람들의 눈동자.다들 왕,아니면 수행원일까?
그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호오,저 아이가?"
"아까의 그......?"
"귀여운 소녀네요."
그래,내가 바로 이 대회의 우승자시다 이거야.
그새 으쓱해지는 어깨를 느끼며 왕에게 다가간 나는 치맛단을 들어 올리고 우아하게 인사하려 했다.
헌데 지금의 나는 결투용 경장을 하고 있었기에 조금 푸짐한 바지 차림이었다.치마가 없다!
나는 당황해서 몸을 굳혔다.치마가 아니니까 바짓단을 올려야 하나?어떻게 하지?
"인사는 되었다.인사라면 자랑스러운 오늘의 우승 자리에서 이미 받았으니 말이다."
아까 밑에서 인사한 것을 말하는 걸까?왕의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얼굴이 벌게졌다.
저번에도 그렇고,나는 왜 인사만 하려면 되는 일이 없지?
나는 일딴 허리를 꾸벅 숙이고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전하.하지만 저의 우승은 오로지 전하의 덕 뿐인걸요."
"기특한지고.사람이란 무릇 고개를 숙일지 알아야 하는 법.한 번도 과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그대는 이미 훌륭한 충신이다."
내가 일으킨 소동들은 아직 못 들으신 건가?아니면 잊어주신 걸까?나야 꾸짖지 않는다면야 좋지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영광입니다,전하."
"그래,그래.너와 같은 아이들이 우리 드미트리를 빛내주니 과인은 심히 만족스럽구나."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던 왕의 시선이 문득 관중석 밖으로 향했다.
한 손을 테라스에 얹은 왕은 뚫어져라 밖을 내다보았다.뭘 보고 계시는 거지?
"......전하?"
"음?아아,이리 와 보거라,지니.그리고 잘 봐두거라."
왕의 곁으로 다가선 나는 까치발을 들어 테라스 밖을 내려다보았다.
한창 청소년부의 결승전이 치러지고 있었다.결승전에 올라온 둘은 모두 검사였는데 그중 한 명의 검에는 푸르스름한 오러가 얼핏 서려 있었다.붉은 머리?
"로베닌......페드리!"
"그렇다.로베닌 페드리,엘란의 이름 높은 천재!저 나이에 소드 유저라니......과인이 스물셋의 나이에 소드 유저에 올랐을 때의 뿌듯함은 저이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로다."
검에 검기를 서리게 할 수 있는 경지.자신의 검로를 찾은 검사들에게 주어지는 힘!
나는 로베닌 페드리를 바라보는 왕의 시선에서 같은 검사로서의 부러움과 시기를 느꼈다.그리고 안타까움.
저런 천재가 드미트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일까?
"......전하는 소드 마스터이지 않으십니까?검기로 검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검강의 경지에 이르셨으니 전하가 더 대단하세요!"
"하하.그래,그렇구나.하지만 과인은 겨우 마흔둘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음이다.그것도 훌륭한 스승들과 운 좋게 타고난 좋은 몸 덕분에 말이지.그리고 왕족으로서 얻어낸 전대 소드 마스터들
의 깨달음이 그 바탕이 되었다.과인 같은 범인의 무수한 노력 따위는 저런 노력하는 천재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못 된다.저 아이라면 정말 서른 줄에 소드 마스터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아니에요,아니에요!전하가 범인이라면 그 누구를 천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왕은,어째서 왕은 로베닌 페드리를 저토록 애잔하게 바라보는 것일까?그의 재능이 그렇게 대단한가?일국의 왕으로 하여금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 만큼?그들이 같은 길을 걷기에 그런걸까?
정령사인 나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이런.그렇게 슬퍼할 것 없느니,엘란에 로베닌 페드리라는 천재가 있다면 우리 드미트리에는 지니 크로웰이라는 천재가 있으니 나는 만족한다."
내가 그를 질투한다고 생각한 걸까?
왕은 이리토 선생과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나는 그런 두 사람의 말에 로베닌 페드리를 향한 질투심 같은 것을 느껴야 했다.아니,라이벌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절대 로베닌 페드리라는 인간에게는 밀리고 싶지 않았다.
관중석 밑을 보니 마침 로베닌 페드리의 검 앞에 상대가 항복을 선언했다.순식간에 결정 난 승패.
로베닌 페드리,네 녀석은 어떤 검술을 하지?네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네 놈이 서른 줄에 소드 마스터가 된다면 나는 그 전에 그와 동급이라는 상급정령과 계약하겠어!네놈에게는 결
코 지지 않아!
토너먼트 청년부의 결승전을 끝으로 패회식이 시작되었다.
대회에 참가했던 유아부,청소년부 아이들이 각기 학교별로 질서정연하게 열을 맞췄다.
그 앞에 세워진 화려한 단상,그 위에는 황제가 서 있었다.검은머리,푸른 눈동자!눈동자 색은 다르지만 그의 얼굴은 분명 에쉬와 닮아 있었다.아니,에쉬가 황제를 닮았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겠다.
"대회의 우승자와 준우승자는 앞으로!"
진행자의 목소리에 나는 앞으로 나갔다.
이제야 에쉬를 만나는구나,하는 생각에 조금 들떠 있었다.황제의 앞에 나서는 만큼 옷도 갈아입었다.
드레스를 입히려는 이리토 선생에게 이까지 드러내며 강하게 거부한 나는 결국 깨끗한 새 경장을 꺼내 입기로 타협했다.
단상 앞에 나서자 내 오른쪽으로 랏샤무 페드리가 섰다.
그리고 왼쪽에는 청소년부 우승자인 로베닌 페드리가 섰는데 페드리 가(家)녀석들 사이에 낀 나는 급작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단상 앞에 서는 순서는 미리 정해진 것으로 왼쪽부터 청소년부 준우승자,청소년부 우승자,유아부 우승자,유아부 준우승자가 서게 된다.
우승자들을 가운데 몰아놓은 이유는 아마도 황제가 상품을 내리고 소원을 들을 때 편하라는 취지인 것 같지만,마음에 안 들어.
"쳇!"
나를 빤히 노려보던 랏샤무 페드리가 혀를 차며 불만스러운듯 인상을 찡그렸다.
이 자리에 자기가 서고 싶었던 모양이다.
훗,그건 안 되고말고.페드리 가 녀석들이 나란히 우승하는 꼴이라니,눈 꼴 시려서 못 봐준다 이거야!그렇게 생각하니 이 자리도 나쁘지만은 않군.
"메롱."
나에게 연신 강렬한 눈길을 보내는 랏샤무를 향해 나는 혀를 날름거렸다.
물론 황제가 잠시 로베닌에게 눈길을 돌린 순간 전광석화같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나를 빤히 쳐다보던 랏샤무에게는 분명히 보였는지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후훗,한 번 더 해줄까?
"유아부 토너먼트 우승자 지니 크로웰은 앞으로."
진행자의 목소리에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계단에 올랐다.
상품 수여 순서는 유아부 우승자,준우승자,청소년부 우승자,준우승자,이렇게 이루어진다.
대회 순서가 그랬든 유아부 먼저 상을 주는 모양이었는데 나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황제에게 소원을 말하고 싶었으니 반가운 일이었다.
단상에 올라선 나는 황제의 앞에 섰다.양옆으로는 로열 기사단이 무시무시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폐하."
왕국의 왕은 전하라고 칭하고 제국의 황제는 폐하라고 칭한다.
또한 제국의 황자는 전하라고 칭하며 왕국의 왕자는 다만 '님' 자를 붙이는 것이 허락된다.
나는 황제에게 허리를 숙이고 그 상태로 몸을 멈췄다.기다렸다는 듯 황제가 말했다.
"드미트리의 왕립아카데미 드리케 아카데미 소속 지니 크로웰,그대는 제 38회 윈칸 축제의 토너먼트전에 참가,정정당당히 겨뤄 유아부에서 우승을 거뒀으므로 그대에게 나 엘란의 제 17대 황제,에
론 드 칸 메갈로프로피스의 이름으로 이 상을 수여한다."
"감사합니다."
허리를 세워 황제가 건네는 트로피와 봉투 하나를 받아든 나는 트로피의 묵직함을 느끼며 다시 허리를 숙였다.
황제의 허락없이 눈을 마주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함부로 고개를 드는 것은 더욱 안 된다.
황제는 만인지상이라는 법칙에 철저히 따라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귀족이라 해도 감옥행을 면치 못할 터.
곁에 늘어선 로열 기사단은 그것을 감시하기 위한 이들이 아닌가?
"그대는 우승자로서 짐에게 무슨 소원을 빌겠는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찾아왔다.
이번 대회 참가를 결정한 것은 순전히 이를 위함이 아니었는가?아,물론 나중에 겸사겸사 다른 이유가 생겼지만 말이다.
"저는 폐하의 둘째 아드님,에론 드 폰 에피로스 전하의 알현을 원합니다."
미리 생각해뒀던 대로 말했다.헌데 이상하게도 황제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설마 안 되는 건가?
고개를 들어 황제의 얼굴을 볼까도 했지만 곁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기사단들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물론 그 뒤로 나열한 타국의 왕들과 여전히 관중석에 자리한 일반인이라든가 귀족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기도 했지만.
"......고개를 들라."
"예,폐하."
잠시의 침묵 끝에 황제가 말했고 나는 그렇지 않아도 목이 뻐근했기에 지체 없이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봤을 때와 달리 황제의 검은머리에는 얼핏 하얀 머리카락이 보였다.
황제의 나이가 올해 41살이라던가?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 26살 때로 알고 있으니 즉위한 지 이제 15년째.
언젠가 수업시간에 들었던 정보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뛰어난 검사도 아니고 현자도 못 되지만 그는 훌륭한 책략가로 표현되곤 했다.
매우 냉정하며 잔인한 책략가로.
"그대는 어찌하여 그런 소원을 비는가?더 많은 상금이나 작위를 말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저는 지금의 제 상금과 작위에 만족합니다."
"자네의 아비는 무슨 작위에 있지?백작?후작?"
"남작입니다."
내 대답에 황제가 잠시 말을 멈췄다.하지만 그뿐 표정이 변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남작은 세습되지 않는 1대에 한해서만 적용되는 작위이며 귀족 중에는 가장 밑바닥 계급이다 보니 실상 귀족이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흠,그런가?남작가의 영애라......귀족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하군."
"......그것이 황자 전하를 알현하는 데 문제가 되는 건가요?"
작위가 낮아서 알현이 안 된다는 건가?그런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데.
하지만 격식 차리기 좋아하는 황궁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왕실예법이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면 황실예법은 식사 후에도 씻는다고 보면 되니까.
"그렇다.허나 우승자의 소원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하지만......"
"하지만?"
나는 순간 내가 황제에게 대답을 재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곁에 있던 로열 기사단들이 눈을 부릅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허나 황제가 뭐라 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지금 2황자는 침묵의 궁에 있다."
"......침묵의 궁이 무엇입니까?"
"대대로 잘못을 저지른 황족들이 반성의 시간을 갖는 궁이지.외부로의 출입이 일절 불가능 하며 타인을 만나는 것이 금지된다.지금 2황자는 그 침묵의 궁에서 한 달간의 반성 기간을 가져야 한다."
가출했다는 이유로 침묵의 궁에 갇힌 걸까?그렇다면 에쉬를 만날 수 없다는 거야?기껏 우승을 했는데도?
"제......토너먼트 우승자의 소원으로도 만날 수 없는 건가요?"
"그렇다.너의 소원대로 하려면 짐은 한 번 내렸던 명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지."
"그런......!"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당연히 될 거라고만 생각했었기에 나는 강한 혼란에 휩싸였다.
그럼 어떻게 하지?이대로 물러서야 하나?뱃속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이 자리까지 왔는데?
다른 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지금의 내 표정이 매우 복잡미묘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래,그러면 되겠군."
"......?"
무표정하던 황제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떠올랐다.흐릿하지만 그것은 분명 미소였다.
즐거운 것을 찾은 듯한 반가운 미소 말이다.의문을 표하는 나를 보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번 토너먼트는 유아부나 청소년부 양쪽 모두 독보적인 존재가 있었다.그래서인지 영 볼거리가 못 되었어.특히 유아부는 마치 어른과 아이가 싸우는 것만 같았지."
그 말에 나는 크게 뜨끔했다.
"과찬이십니다."
움직이려는 얼굴 근육을 억지로 잡았더니 볼에 어색하게 경련이 일었다.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헌데 그 유아부의 우승자가 비는 소원은 소원 하나를 들어주는 것으로는 조금 과하다.그러니 두 개 분의 소원으로 빈다면 들어줄 수 있지 않겠나?"
"두 개의 소원이라니......무슨 뜻이십니까,폐하?"
나는 도저히 황제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나한테 뭘 더 바라는 거지?
"저쪽의 다른 우승자가 보이는가?"
"청소년부 우승자 로베닌 페드리 공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그에게도 한 가지 소원을 빌 권리가 있지.그러니 그와 겨뤄 자네가 이긴다면 자네에게 두 가지 소원을 빌도록 허락하마.2황자를 침묵의 궁에서 풀어줌과 동시에 자네와의 독대를 마련해주지.
어떠냐?해볼 테냐?로베닌,자네는 어떤가?"
엘란의 황제는 간혹 엉뚱한 사건을 만들어 그 반향을 즐긴다더니 이것이 바로 그것인가?
유아부인 나와 청소년부의 싸움이라니!젠장,누군가 나를 미워하는 것이 분명했다.그렇지 않고서야 하는 일마다 이토록 꼬일 수는 없다!
"저는 좋습니다."
묵묵히 서 있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로베닌,16살의 소드 유저.우리 왕국의 왕조차 탐내는 무재.
그런 그를 내가 이길 수 있을까?나는 이러면서까지 에쉬와의 알현을 이뤄야 하는 걸까?그를 이긴다면 왕은,선생은 나를 더 대단하다 칭해줄까?
의문이 연이어 떠올랐다.복잡한 머릿속과 달리 내 입은 멋대로 말을 받았다.
"저도......좋습니다."
도망가는 것보다야 낫겠다 싶어 좋다고는 했지만 금세 후회가 밀려왔다.
결코 지지 않겠다고는 했지만 그건 적어도 10년뒤의 이야기였다.
"진행관!"
"예,폐하!"
"우승자들 간의 시합을 열겠다.준비하라."
젠장,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일이 이 정도되면 이것은 신의 농락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시합은 빠르게 준비되었다.관객들은 환호했고 황제는 재미있다는 듯 연신 미소를 흘렸다.
"양측 선수 간에 인사가 있겠습니다."
대회 내내 지겹도록 들었던 저 말을 우승한 지금에 와서 또 들어야 하다니.이런 젠장스러울 때가 또 있을까?
관중석은 유례없던 우승자들 간의 대결에 열광했다.지들 일 아니라고 좋단다.
"로베닌 페드리,검사다."
"지니 크로웰,정령사예요.열 살이죠!"
나는 열 살에 힘주어 말했다.열 살짜리랑 싸워서 좋냐?좋아?
"나는 정령사와 싸워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쩌라고요?흥!"
"싸워보고 싶을 뿐,거기에 나이는 상관없다."
"잘됐군요!저도 공자와 싸워보고 싶었답니다."
10년 뒤쯤에 말이야.나는 저 녀석이 굉장한 싸움광이라는 데 라이를 걸 수도 있었다.아돌도.운디네는 안 되지만.
"양측 선수,결투 준비."
"운디네."
허공에서 생겨난 물방울들이 이내 모양을 이뤄 운디네를 만들어냈다.자신의 목검을 빼든 로베닌이 운디네를 빤히 바라보았다.
[운디네,시작과 동시에 투명화,그리고 언 워터 브리딩.]
버거울 것이 분명한 상대이니 나는 미리 명령을 내렸다.
"셋,둘,하나,시작!"
시작과 동시에 운디네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졌다.운디네를 빤히 바라보던 로베닌의 눈가가 얼핏 움찔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그의 몸을 중심으로 커다란 물결이 모여들었다.
탁
로베닌이 가볍게 땅을 밀어내며 앞으로 뛰어나왔다.
물에 휩싸이기 전에 나를 잡으려는 모양이었지만 물은 평소보다 더욱 빠르게 로베닌을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로베닌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기 때문인지 겨우 로베닌의 오른 발목을 붙잡았을 뿐이었다.
물 덩어리에 다리를 잡힌 로베닌은 자신의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물을 목검으로 베었다.하지만 잘려나간 물은 베임과 동시에 금세 달라붙었다.
"놓치지 마!"
"......"
여전히 무표정한 그가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그의 검에 얼핏 푸르스름한 기운이 얽혔다.
검을 중심으로 아지랑이같이 피어오르는 그것,검기였다.
"워터 리무브!"
검기에 베인 물에는 운디네의 지배력이 닿지 않는다.그러니 그전에......주문과 동시에 마나가 급격히 빠져나갔다.
물에 잡힌 한쪽 다리에 시전했을 뿐인데도 막대한 마나가 사라졌다.
워터 리무브,상대의 수분을 빨아낸다.
사실 하급정령인 운디네가 쓰기에는 꽤나 버거운 기술이지만 녀석의 발을 붙잡아 두기 위해선 이것뿐이었다.
그가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나로서는 결코 피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쉬익
그의 다리를 감싸고 있던 물이 순간 붉게 물드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로베닌은 검기로 물을 갈랐다.다리를 감싸고 있던 물이 펑 소리를 내고 터져나갔다.
곧바로 몸을 움직인 로베닌이 나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어느새 검기가 사라졌지만 그래도 위협적인 어른용 목검을 치켜든 채로.
"잡아!"
지금쯤 다리가 저려올 텐데!몸속의 피도 수분.수분을 흡수하다 보면 자연스레 피가 따라나오게 된다.
피를 이루고 있는 것중 수분만을 뽑아내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니.
로베닌을 감싸려다 실패한 물이 그를 다시 잡기 위해 빠르게 쏘아졌다.하지만 이대로는......
"포그."
로베닌의 속도로는 잡을 수 없으니 차라리 시야를 막아보겠다는 심산으로 주문을 외웠다.
안개는 가장 먼저 로베닌을 집어삼켰고 뒤이어 나를 포함해 시합장을 깊게 잠식했다.
"아니,시합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크로웰 양의 정령마법일까요?"
나로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었는데 어찌 된일인지 벌써 내 지척에 다가온 로베닌의 검이 그대로 내게 쏘아져왔다.정교하고 예리한 검.역시 랏샤무의 것과는 달랐다.
직선적이지만 언제라도 방향을 틀어 나를 쫓아올 것이 분명했다.
나는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아도르!"
아슬아슬하게 검이 코앞을 스쳐지나갔고 다시 찔러오는 검앞에 나는 결국 부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아돌을 불러냈다.
마침 안개가 있으니 아무에게도 보이지는 않을 터!
[주인,저번에는 내가 잘못......으캬캬!]
눈앞에 소환된 아돌을 향해 로베닌의 검이 곧바로 찔러왔다.
빠르다고는 하지만 목검,검기가 있지도 않았기에 아돌에게는 아무런 데미지도 주지 못했다.오히려 로베닌의 검 끝이 바스라졌다.
"그건......뭐지?"
"비밀!아돌,쇼크!"
너 같으면 알려주겠냐!내 마나는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고 나는 지금 무언가가 뱃속을 헤집는 듯한 고통을 느꼈지만 공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안개가 사라지기 전에 아돌로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해야 했다.자칫 아돌의 존재가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면 골치 아플 터였다.
"큭!"
로베닌이 물을 뒤집어쓰지는 않았지만 안개 속이었기에 쇼크의 효과는 제법 있었다.순간 몸을 굳혔던 로베닌.하지만 금세 회복하고 다시 목검을 움직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연이은 공격을 나는 모두 피하지 못했다.
세 번에 한 번은 그대로 맞았는데 어깨며 허리,정수리 등이 었다.맞은 자리가 욱신거렸고 이제 마나를 쓰는 데도 한계에 다다라 나는 또다시 입 안에 비릿한 맛이 도는 것을 느꼈다.
남은 마나는 25퍼센트 정도?내상 덕분인지 벌써 무리가 오고 있지만,이렇게 되면 일격필살이다!
"아돌,라이트닝 에로우!"
운디네를 이용해 워터 볼이라도 쏜 다음에 사용하는 것이 낫겠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아돌에게서 시작된 길고 번쩍이는 화살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크......으윽!"
두 배까지는 아니어도 1.5배는 뻥 튀겨진 위력의 라이트닝 에로우.
로베닌이 순간 검을 들어 그것을 쳐내려 했지만 목검 속에는 검을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철심이 심어져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 로베닌의 목검이 시꺼멓게 타들어감과 동시에 파스슷 하고 바스러졌다.
텅그렁
손잡이와 철심만 남은 목검이 바닥을 굴렀다.그리고 로베닌이 비명과 함께 털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남은 마나는 15퍼센트 정도.그가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강한 바람이었다.
"콜록!아돌......돌아가."
[오늘은 꽤 재밌었네,주인.]
더 이상 아돌을 감당해낼 수 없었기에 나는 아돌을 역소환했다.또다시 피가 꿇는 것에 짜증을 느끼며 로베닌을 빤히 바라보는데......
[괜찮으세요,주인님?]
운디네의 목소리가 들렸다.느낌으로 보니 머리 위쯤에 있는것 같았다.
"투명화를 풀어,운디네."
남은 마나가 간당간당하니 조금이라도 아껴보고자 투명화를 풀었다.운디네가 뽀르르 날아와 어깨에 앉았다.
그런 운디네에게 잠시 시선을 준 사이 로베닌이 몸을 일으켜 검을 쥐고 있었다.대체 언제?
"하아,후......"
몸을 세운 로베닌이 조금 휘청거렸다.숨을 고르나 싶던 그의 검에 다시 검기가 모여들었다.어쩌지?이제 마나가 없는데!
"이익!"
"끝이다!"
운디네로 쓸 수 있는 기술도 다 쓴 지금 더 이상의 수는 남아있지 않았다.
로베닌이 철심만 남은 검에 검기를 씌워 곧장 내려쳐오는데 그 순간 나는 항복을 외치라는 생각과 죽어도 그럴 수는 없다는 자존심이 팽배하게 맞섰다.
항복이라니......죽어도 싫어!
[주인님!]
항복이라 말하느니 저 검에 죽는 게 낫다는 생각에 눈을 콱 깜는데 얼핏 운디네의 찢어지는 비명에 황급히 눈을 떴다.어느새 운디네는 그 작은 몸으로 내 앞을 막아섰다.
"운디......"
츠치치칫
[끼아악!]
로베닌의 검이 망설임 없이 허공과 함께 운디네를 갈랐다.
푸른 검기가 팟하고 터져나가고,운디네의 몸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난생 처음 듣는 정령이 찢어지는 소리.강한 충격에 의한 운디네의 강제 역소환.
울컥울컥 목을 타고 올라오는 핏물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뱃속이 터져나가는 느낌과 머릿속이 새까맣게 물들어 갔다.
핏,하고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감각에 눈을 감는데 서서히 가시는 안개와 그 옅어지는 안개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로베닌이 보였다.
운디네!에쉬!이 바보들......
"안개가 걷히는군요!네,과연 승자는?역시 우리 제국의 자랑!자,여러분 보십시오.위풍당당한 승자!로베닌 페드리입니다!"
털썩
다리,정확히 무릎에 힘이 쓱 빠지더니 문득 바닥이 눈앞으로 다가왔다.나는 자신의 몸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깨달으면서 눈을 감았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는 내게 이리토 선생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지니,너무 상심하지 마렴.애초에 그건 결과가 정해진 시합이었는걸."
"그래,넌 충분히 능력을 보여줬어,지니!로베닌 공자를 그만큼 몰아붙이다니......대단해!"
브라이트 또한 곁에서 한술 거들었다.하지만 나는 그런 위로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저 나에 대한 책망으로 들려왔다.
"정해지지 않았어요!내가 이길 수도 있는 시합이었다고요!"
하얗고 깨끗한 침대보를 크게 구겨 쥐며 소리쳤다.로베닌에게 패한 지 일주일째.아직도 그때의 내상이 낫지 않았다.
홀로 귀국하지 못한 채 엘란에 남아 뒤집어진 내장을 달래야 했다.
"그,그럼......지니 네가 이길 수도 있었어.다만......아!그래.숙련도의 차이랄까?로베닌은 검술을 지니 네 정령술보다 오래했잖니."
숙련도?그것뿐이 아니야.마나도 부족하고 정령마법도 부족해!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녀석은 더욱 강해질 거라고!
"수련,수련을 해야 해.이리토 선생님,펜과 종이를......전하께 편지를 쓰겠어요."
"응?그,그래."
로베닌,다음에 만나면 그땐 이 치욕을 반드시 갚아주겠어.
지금의 나는 약해빠졌지만 어른이 된 나는 그렇지 않을 거다.
네가 소드 마스터가 되기 전에 내가 먼저 상급정령사가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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