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출
"까르르,정말이야?"
"응,정말이야.가짜 뱀이었는데도 그 음악선생은 잔뜩 놀라서 '꽤애액!' 하고 소리 지르며 도망갔어.평소에 교양 있는 척은 다했는데 말이야."
음침한 지하감옥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들의 이야기 소리가 내 신경을 자극했다.
"히히히힛! '꽤애액' 이라니......정말 무슨 돼지 멱따는 소리 같은걸."
"그렇지?그리고 말이야,다른 선생......"
"당장 아가리들 닥치지 않으면 둘 다 이 자리에서 멱을 따버릴 테다."
"......"
결국 명상을 중지한 나의 우아한 경고에 둘은 단박에 조용해졌다.
이것들 때문에 명상이고 나발이고 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이제 남은 마나는 겨우 60......응?
"됐다!"
"응?뭐가,지니?"
나는 잠자코 순간 급격히 빠져나간 마나의 양을 가늠했다.
10퍼센트 정도?이제 남은 마나량은 50퍼센트.이 정도면 운디네가 돌아올 때까지 버틸 수 있겠어!
내 생각이 옳다면 운디네는 지금쯤 여관에 도착해서 내 말을 전했을 터였다.
원래 소환주에게만 들리는 운디네의 목소리를 무리하게 물질계에 이입시켰기 때문에 마나가 소모된 걸 테니 말이다.
"운디네가 누군가에게 내 말을 전했어!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
"정말?언제 오는데?"
"그건......모르겠지만 운디네가 생각보다 빨리 간 걸 보면 여관이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나 봐."
"흐응,그렇구나.근데......"
이제는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진 눈에 바로 곁에 있는 이루제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보였다.
"왜?"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디야?"
"......"
이거 정말 천재 맞아?모르는 척하는 건가?
"왜에?나 천재 맞아,지니."
"아아,그러냐?궁금한 건 새로 사귄 친구에게 물어보렴.자칭 황자한테!나는 다시 명상이나 해야겠다."
또다시 독심술을 발휘하는 이루제를 외면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내가 말을 말아야지.
"응?지니,질투하는구나?내가 에쉬하고만 말해서."
아니거든.
"쉿!누가 온다."
문득 자칭 황자 에쉬가 말했다.뭐?누가 온다고?난 아무것도 안 느껴지......
덜컹!
"나와라,시끄러운 꼬맹이들!"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두꺼운 철문을 열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열린 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나는 그제야 에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과 그에 대조되는 선명한 황금빛 눈동자.
나로서는 이곳에서 처음 보는 검은 머리칼이니만큼 순간이나마 그리운 과거를 떠올리게 되었다.
"안 나와?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이봐,끌어내!"
이크,남의 얼굴 쳐다볼 때가 아닌데!제발 운디네,빨리 와줘!
끌어내라는 말에 그의 뒤에서 나온 두 명의 험상궂은 덩치들.
그들은 문을 연 사내보다는 작았지만 어린 우리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에 험상궂은 얼굴,그들은 에쉬와 이루제를 끌어내려 했고 문을 열었던 사내는 나를 끌어내려는 듯 다가왔다.
왜 하필 제일 산만 한 녀석이 나를 맡는 거얏!반항을 해야 할지 일단 순순히 끌려가야 할지 고민하는데 문득 에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물러서!다가오지 마!"
뒷걸음치며 말하는 에쉬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어이쿠!오지 말라면 안 갈 줄 아냐?반항하지 말고 어서 이리 와!"
에쉬가 우악스러워 보이는 사내의 손을 용케 피했다.
사내의 손길을 요리조리 피하는 모양새가 검술을 배웠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잔뜩 겁먹어서는 잡히는 건 시간문제에다가 저런 건 시간 끌기도 되지 않을 터였다.
마나도 아껴야 되는데 일단 순순히 잡혀가는 게 나으려나?
"잡았다!"
"이익!놔!놓으라고!"
내 생각대로 금세 사내의 손에 잡힌 에쉬가 죽어라 발버둥치는 것이 보였다.
저런 바보,쓸데없는 짓을.
나는 일단 그냥 잡혀가는 것이 현명하리라고 결론을 내렸고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항복한다는 뜻으로 두 손을 드는데 돌연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악!끄악!"
깜짝 놀라 쳐다보니 자신을 잡은 사내의 팔뚝을 죽어라 물어 뜯고 있는 에쉬가 보였다.
조그만 녀석이 깡다구는!얼마나 꽉 깨물고 있는지 사내의 팔뚝에 핏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가 난 사내가 주먹을 들어 에쉬를 내려치려는데 나를 잡으려던 사내가 말했다.
"안 보이게 적당히 패.오늘의 메인 상품이니까 말이야."
"으윽,이 자식!이 자식!"
퍼억 퍽 퍼퍽
얼굴이 벌게진 사내는 잠시 멈칫했던 손을 다시 들더니 에쉬의 머리를 휘갈겼다.
한 대,두 대,세 대.
그때까지도 팔뚝을 꽉 물고 있던 에쉬가 세 대째에서 신음을 흘렸다.
"끄으윽!"
나도 모르게 눈을 찔끔할 만큼 사내는 무자비하게 에쉬를 내려쳤고,이내 신음 흘리는 에쉬의 모습에 나는 그만 울컥해서 입을 열고 말았다.
"그만!"
하지만 작은 내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난 사내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다만 나를 잡으려던 사내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을 뿐이었다.
남은 마나는 45퍼센트 정도일까?운디네가 여관까지 가는 데 든 마나가 30퍼센트,그러니 돌아오는 데 30퍼센트를 잡는다면,15퍼센트 정도가 남는다.
그렇다면 쓸 수 있는 마나는 얼마 되지 않았다.어쩌지?라이만 있었다면.
퍽!
"끅!"
또다시 이어진 네 번째 주먹질에 에쉬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을 흘렸다.
정말 싫다,싫어!내가 왜 이런 꼴을 보고 있어야 되는 거야.
기어코 참았던 눈물이 찔끔 흐르려고 했지만 꾸욱 참아냈다.
아돌을 불러야 할까?하지만 최소한 10퍼센트는 남겨놓지 않으면 나도 멀쩡하진 못할 테고,쓸 수 있는 마나는 5퍼센트 정도인데 그걸로 뭘 할 수 있겠어?
나에겐 없다고 생각했던 정의감 같은 것이 꿈틀거리기라도 하는지 나는 당장이라도 입을 열어 아돌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머릿속에서는 소용없는 짓이라고 정보를 울려댔다.
그때였다.
"에쉬 때리지 마!이 바보 똥 돼지야!"
"쿨럭!"
"뭐,뭐얏?"
초장부터 순순히 노예상의 손에 잡혀 있던 이루제가 돌연 빽 소리를 질렀고,그에 나는 헛바람을 들이켜야 했다.
저게 간이 뿌리째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놀란 건 나만이 아닌 듯 이루제를 잡고 있던 덩치는 물론이고 에쉬를 때리던 사내까지 그녀를 쳐다보았다.
에쉬는 여전히 그 사내의 팔뚝을 물고 있었다.
사내는 때려도 안 되자 자신의 팔뚝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에쉬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에쉬를 때리지 말라구!이 바보 똥개야!왜 때려,왜?"
"이,이년이......!"
팔뚝에 피를 뚝뚝 흘리던 사내가 이루제에게 다가갔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이루제를 잡고 있던 사내가 그녀를 던지듯 밀어냈다.
방금 전까지 에쉬의 머리를 잡아당기던 사내는 이루제의 핑크빛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아얏!"
"오호라,이년이 맞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얼굴에 상처 내면 안 돼!"
이루제를 잡고 있던 사내는 팔짱을 낀 채 뒤로 물러났다.
그건 나를 잡으려던 사내도 마찬가지였다.그는 짧은 충고를 했을 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이루제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들어올렸다.
"꺄악,아파!아프다고!놔앗!"
이루제의 새된 목소리가 좁은 공간을 울렸다.
내 머릿속은 나서서 말리라고 자극하는 감정과 나서봤자 똑 같은 꼴이 될 거라는 냉랭한 이성이 팽팽하게 마주쳤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악!피!피이이이!이 쌍것들을 그냥......!"
"끼아악!"
퍼벅
이어지는 비명소리에 나는 울상을 한 채 눈을 떠야 했다.
사내의 팔뚝에서 입을 뗀 에쉬가 뭔가를 퉤하고 뱉어냈는데 살점인것 같았다.
사내는 팔뚝을 붙들고 괴성을 지르고 있었고 이루제는 그에게서 던져진 듯 벽 밑으로 털썩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젠장,아돌!아도올!"
[응?뭔가,주인?]
결국 나는 이번에도 감정이란 녀석을 이기지 못했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돌을 불러내야 했다.
그 결과 소환만 했을 뿐인데도 5프로가량의 마나가 날아갔다.
어두웠던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소환되자마자 아돌은 좁은 방 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히잉,저 자식들 몽땅......죽여 버려.저런 것들은 죄다 죽여 버려야 돼.흐아아앙"
[응?왜 우나,주인?그보다 몽땅 죽이는 건 무린데?마나가 없잖아,마나가!밥을 줘야 일을 하지.]
저런 쓸모없는 것.하라면 일단 하면 좀 좋아.나도 쓸데없다는 거 알아.그래도 불러봤어!애들이 쥐어터지잖아.
"어떻게든 해봐.흐잉......"
[못해,못해.한 놈도 죽일까 말깐데?]
아돌의 등장에 눈을 휘둥그레 뜬 덩치들의 시선이 이번엔 나한테 쏠렸다.
자신들을 죽이네 살리네 하는 말이 많이 아니꼬웠던 모양이다.당연한 건가?
가뜩이나 험상궂은 표정의 그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오지 마아.흐아앙.라이이,라이!이 바보야,어디 있어?흐엉엉.라이이이!"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난 어째서인지 위기를 많이 겪는 것 같았다.
전생에는 불에 타죽었지,다시 살아서는 물에 빠져 죽을 뻔했지,이번에는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어째서인지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것은 라이였고 나는 앙앙대며 죽어라 라이를 불렀다.하지만 어느새 내 앞에 다가온 사내들은 인정이 없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꼴값을 떠네!대체 무슨 수작이야!"
퍽!
"꺅!"
솥뚜껑만한 사내의 손이 제대로 내 오른쪽 뺨을 강타했다.
얼굴 오른쪽이 죄다 얼얼했다.이곳에서는 거의 처음이다 싶은 강렬한 고통이었다.
에쉬는 이런 걸 몇 대나 맞은 거야,대체?
익숙치 않은 고통에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나에게 이번에는 발길질이 날아오려는 듯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꼭 감았다.
"으악!이,이게 뭐야?"
훌쩍,왜 안 날아오지?
고통이 찾아들지 않자 나는 슬쩍 한쪽 눈을 떴다.
[앗!마스터,부르셨어요?]
나를 차려던 사내의 발에는 얇고 긴 뱀 한 마리가 칭칭 감겨 있었는데,그건 지겨운 데다가 얄밉고 웬수 같은 라이가 분명했다.
이씽......벌써 한 대 맞았어,이놈아!
찔끔
눈물이 흘렀다.
"라이~!"
라이의 등장에 나는 당장에 아돌을 역소환시켰다.쓸모없는 것!
[잠깐!이보게 주인......]
역소환의 기미를 느꼈는지 뭔가 말하려던 아돌이었지만 이미 늦었어.넌 나중에 두고 보자.
"음?웬 뱀이지?"
"그러게.백사 같은데?술 담그면 딱 좋겠군."
두 명의 사내가 돌연 등장한 라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방금 전 나를 무식하게 후려친 사내는 자신의 오른 다리를 칭칭 감고 있는 라이를 떼어내려는 듯했지만 라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으윽!이게 뭐야?안 떨어지잖아!"
[마스터!마스터!이 다리 분질러도 되는 다린가요?]
라이의 질문에 나는 이루제와 에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과 충돌한 이루제는 기절한 것 같았고 에쉬 역시 기절은 안 했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상처 내지 말라던 다른 사내의 경고는 먹히지 않은 듯 벽에 처박힌 이루제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에쉬 역시 입 안이 터졌는지 입가가 빨갛게 물들었다.
얼굴 또한 말이 아니었다.둘 모두 하나같이 쌍코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에게 행하기에는 도가 지나친 폭력이었다.
나는 다시 라이를 돌아보았다.
죽음 뒤에는 환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다른 이보다 비교적 죽음에 덤덤한 것 같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죽는 것은 썩 좋은 일이 아니었고 그중에서도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은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물론 다치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분질러버려.셋 다."
[오오,좋아요.좋아,으잇차!]
빠칵 까그극
"끅,끄아아악!아악!"
저런 유의 인간을 굳이 사람 취급해줄 필요야 없지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멀쩡했던 다리가 비틀어져 사방으로 피가 튀는 장면은 썩 유쾌하지 못했기에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뭐,뭐야?잡아!저 뱀 떼어내라고!"
단박에 두꺼운 다리 하나를 핏덩이로 만들어낸 라이의 괴력 탓인지 나를 잡으려 했던 사내가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이루제를 잡으려 했던 사내는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며 방에서 나가려 했다.
할 일 하나를 끝낸 라이가 휙 하고 허공으로 점프하더니 그 길쭉한 몸으로 단번에 뒷걸음질 치는 사내의 목을 쉬릭 감아버렸다.
"잠깐!목은 안 돼,목은!죽잖아."
[에이이~.]
라이는 매우 아쉬운 듯 몸을 풀어내더니 이번에는 목과 가까운 어깨와 팔뚝을 단번에 휘감았다.그럴 때는 유난히 동작이 잽싼 녀석이었다.
"으아악!시,싫어!도와줘,이 뱀 좀......"
사내가 기겁하며 라이를 떼어내려 했지만 역시나 소용없는 짓.
라이는 사내의 손길에는 조금의 구애도 받지 않고 역시나 단박에 사내의 팔을 쥐어짜버렸다.
콰가각,카깍,끄드드득
"크아아악!흐아아아.내,내 팔이......커,꺼거억......"
어깨와 팔뚝이 아스라진 사내가 비명을 내지르나 싶더니 거품을 몰며 쓰러졌다.온몸에 피칠을 하고 있는 라이.
전과 달리 새하얀 라이의 몸에 핏 자국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어느새 좁은 방 안엔 혈향이 가득했고 지금 이 방 안에서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나와 라이 그리고 한 명의 사내뿐이었다.
"라이,저 녀석은 죽여도 돼."
[알겠습니다!]
나는 아직도 얼얼한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숙녀의 뺨을 때리다니,죽여 버릴까 보다.아니,죽여야지.그러고 보니 뒤통수에 혹도 있네?
나는 언젠가 느껴봤던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머릿속이 싸늘하게 식고 심장이 차갑게 굳어가는 느낌.
라이가 재차 허공을 휙 날았다.그 길쭉한 몸으로 잘도 난다.너는 날다람쥐가 아니라 뱀이야,라이.너는 바닥을 기는 게 정상이란다.
"크윽!"
사내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라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하지만 라이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꼬리를 움직여 사내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얼결에 이루제의 복수를 해주고 있는 라이.뭐 라이 본인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꼬리로 사내의 머리채를 잡은 라이는 그 반동을 이용해 그대로 사내의 머리를 감쌌다.
"으으으."
"끄흐."
널브러진 사내들이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하지만 이내 그 소리는 라이가 몸에 힘을 주자 남자의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에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파칵
"크하악!"
사내의 코가 가장 먼저 깨져나갔다.사내의 눈에 얼핏 두려움이 휩싸였다.
그의 시선이 라이에게 당한 다른 사내들의 다리며 팔에 머물렀다.
쥐어짠 듯 터지고 사방으로 뼛조각이 튀어나온,한 덩이 고깃덩이에 불과한,이미 다리며 팔 그 어떤 구실도 불가능할 것이 분명한 신체의 일부였던 것에.
두려움 가득했던 그의 떨리는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라이가 순전히 내 명령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된 듯했다.
"사,살려줘.제발......"
떨리는 사내의 목소리.
라이는 잠시 몸을 굳히고 나를 바라보았다.'어쩔까요?' 라는 뜻이리라.
사내는 이미 몇 분 전까지 에쉬와 이루제를 대할 때의 사납고 야만스러운 태도가 아니라 절실하게 용서를 빌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생에는 부디 인간으로 태어나지 말기를."
저런 인간 하나쯤 없어도 이 세상에 해로울 것은 없지.오히려 이롭지 않을까?
이내 다시 라이가 몸에 힘을 주었고,사내의 눈이 절망과 고통으로 범벅이 되는 순간이었다.
"멈춰!"
[왜요,마스터?]
라이가 의문을 표하며 물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어느새 방안에 들어와 문가 벽에 널브러져 있던 이루제를 안아들고 목에 단검을 들이대고 있는 의문의 여자에게 향했다.
"어머나,멈춰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멈춰주다니......이거 고마운걸."
"고마워할 필요 없을걸."
곧 일행이 올 테니까.
"퉤!"
나는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냈다.
운디네가 지척인 듯 빠져나가는 마나의 양은 적었지만 명상을 하지 않고 있는데다가 아돌을 소환해 쓸데없이 마나를 쓰는 통에 현재 남은 마나는 10퍼센트를 겨우 넘었다.
운디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퍼센트의 마나는 더 빠져나갈 터였다.
"왜 그렇게 여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내 부하를 놔주실까?"
그 여자는 붉은 머리칼과 주황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는데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거기다 한눈에도 더없이 섹시해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나한테는 그런 것보다는 위험하다는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싫다면?"
"어머나,그렇게는 안 되지.이쪽에는 네 친구가 있는걸."
"우리를 납치한 건 너희들이지?"
젠장,5분......아니,3분이면 일행이 도착할 것 같은데!일단 시간을 벌어야 해.
"알면서 뭘 묻고 그러시나?"
"우리를......왜 납치했지?"
"노예상이니 노예로 팔아먹으려고 그러지.분홍머리 소녀와 귀족스러운 금발소녀라니......괜찮은 상품이잖아?게다가 요즘은 남색도 유행이니 검은머리 소년도 일품이지."
"우릴 놔줄......쿨럭,생각은 없는 건가?"
"당연하지!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 부하나 풀어줘!"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나는 욱신거리는 뱃속과 핏물이 역류해 죽을 맛이었다.
한계 이상의 마나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뭔가 더 말해야 되는데,당장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루제를......놔줘."
"잠깐,너 뭔가 꾸미고 있지?"
젠장,어떻게 알았지?
"아니,아무것도!"
저 여자는 어디서 튀어나와서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거야,대체!
라이를 보내려고 해도 여자가 라이를 연신 주시하고 있었기에 방법이 없었다.
이 짐 덩이 이루제!느려터진 일행!나 피 토하고 죽는 꼴이 보고 싶은 거야?빨리 좀 오란 말이다.
속으로 연신 불만을 토해냈다.젠장,내가 다음부터 약해빠진 것들 데리고 밖으로 돌아다니면 인간이 아니다,인간이!
"......뭔가 있지?"
여자의 되물음에 나는 크게 뜨끔 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급히 입을 열었다.
"아......아니,전혀."
[마스터,표정에 다 나오는데요?]
[많이?]
[아주 많이요.]
표정관리 연습이 필요하겠군.무리한 마나운용이라든가 쌓인 피로 덕도 있겠지만 이루제도 항상 내 속마음을 아는 걸 보면 내가 표정관리가 안 되긴 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에는 인질이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잊고 싶어 죽겠다.
얼마 남지 않은 마나는 더욱 급격히 줄어들었다.
빨리 와라,빨리!나는 혹시 도망갈 구멍이 있을까 싶어 문 쪽을 쳐다봤는데 문가에는 언제 몰려들었는지 하나같이 험악해 보이는 덩치들로 그득했다.
"콜록!하아......"
어느새 저렇게 몰려 든 거야?아까까지는 분명 없었는데.그보다 기척 잡아내는 게 특기인 라이가 왜 몰랐던 거지?
나는 이제 뱉어내기에도 무리가 따를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피를 꾸역꾸역 손으로 막아내며 라이를 쳐다보았다.
[라이,저 여자가 접근하는 걸 못 느꼈어?그건 네 녀석 특기잖아!]
[죄송합니다,마스터.곰탱이 켄타 녀석을 닮은 녀석들이라 조금 흥분했더니......]
[이 바보자식!]
닮긴 어디가 닮아,어디가?비슷한 건 덩치뿐이잖아,이 뱀 대가리야!
내가 라이를 원망하며 피눈물 대신 피를 토하는데 문가에 밀집해 있던 덩치들이 돌연 술렁거렸다.그리고 그중 하나가 방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뭐야?위험하니까 들어오지 말랬잖아!"
여자의 신경질적인 질책에 덩치는 잠시 찔끔했지만 결국 여자의 곁으로 다가가 뭔가를 속닥거렸다.
['입구에 기사들이 들이닥쳤다.강제수색에 돌입했다.비밀 문이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다.그 덕에 지하 경매장의 손님들이 난리가 났다' 이런 내용이에요,마스터.저 잘했죠?네?마스터~.]
지금 내가 매우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라이가 알아서 정보를 제공하며 비위를 맞추려 했다.
라이의 말이 정확했는지 여자의 얼굴에 파랗게 핏기가 가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이내 이 소동의 원인이 나라는 것을 눈치 챘는지 도끼눈을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풋,쌤통이다."
내 진심이 우러난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침착했던 여자는 잔뜩 흥분해서 외쳤다.
"이년이!무슨 수를 쓴 거야,대체?"
"이년 저년 하지 마시지,듣는 년 기분 나쁘거든!"
"이익!죽여 버릴 테다!"
어쩐지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 되어버렸다.여자가 벌떡 일어나 나에게 한걸음 걸어오자......
파트득
"크하아악!카아악!"
비명을 내지른 것은 가운데 있던 사내였다.
그의 머리는 여전히 라이의 몸 안에 있었고 그런 사내의 머리를 비틀어버리는 거야 간단하겠지만 라이는 협박용이라는 생각인지 단번에 죽이지 않았다.
다만 남자의 귀 한쪽을 떼어냈을 뿐이었다.라이는 자신의 입에 물린 사내의 귀를 보란 듯이 팔락였다.
여자가 놀라 발길을 멈췄다.
[마스터,잘했죠?네?]
[......아예 먹지 그러냐?]
[전 이런 거 못 먹어요,마스터.]
시키지도 않은 일을 알아서 한 라이를 질책해야 할지 여자의 접근을 막았으니 칭찬해줘야 할지 고민하는데 여자가 입술을 앙다물며 외쳤다.
"내 부하를 놔줘!그만하라고!애 죽겠어."
여자의 눈가에는 눈물까지 조금 맺혀 있었는데 그것이 부하에 대한 감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과하다 싶었다.
내 의문은 라이에게 잡힌 사내의 말에 금세 풀렸다.
"누,누나.크흑......"
"이......조용히 해!이 바보가......?"
아하,동생이 더 늙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관계란 말이지?
나는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멍청한 동생 같으니,그런 좋은 정보를 알려주면 어떡하니?
"푸훗,어쩐지......부하 하나 구하려고 용을 쓴다 했지!푸후훗.쿨럭!퉤!자,우리 협상을 다시 할까?당신에게 묻지.동생과 친구,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
"젠장......"
금세 상황은 역전되었다.
아까와 달리 지금의 상황은 어느 모로 보나 내게 유리했다.
위층에는 일행,그중에서도 기사단이 몰려온 듯했고,나는 상대방의 동생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 말이다.
남매가 쌍으로 노예상에서 일을 한단 말이야?쌍으로 죽여버릴까 보다.
[마스터,이것 죽일까요?네?]
몸이 근질거리는지 라이가 가만있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나도 저쪽에 인질이 있으니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협상을 위한 약간의 자극은 괜찮겠지.
"이봐,고민하는 거야?지금 고민할 때가 아닐 텐데?그렇게 고민된다면 내가 당신이 빨리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그런 도움 따위 필요 없어!"
"어라,있을 텐데?라이,귀가 한쪽만 없으면 이상하잖아.아예 다른 쪽도 마저 찢어주는 게 어떨까?"
[과연 마스터!탁월한 선택이십니다!]
트드득
"캬아아악!끄아악!아아아악!"
다시 느끼는 거지만 이럴 때는 잽싼 라이다.
라이의 입에 뜯겨 나온 귀 한쪽이 또다시 바닥에 버려졌다.사내는 자신의 귀가 있던 자리를 잡고 바닥을 굴렀다.
고통도 일정 수치가 지나면 느껴지지 않는다던데,그렇지도 않은가 봐.
"그라크!이익,그라크를 놔줘!안 그러면 네 친구도 똑 같은 꼴을......"
여자가 이를 갈며 말했다.
"괜찮겠어?그랬다간 동생의 뇌수라는 걸 보게 될 텐데?"
남은 마나는 6프로 정도.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고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에 다시 입을 틀어막는데 문 앞의 사내들이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문으로 들어온 운디네.아아,나의 운디네야~
[주인님!]
"기특하다.수고했어,운디네."
[네,헤헷.문을 찾느라 조금 늦었어요.]
"그래,우선 돌아가 있어."
그 말에 운디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그와 동시에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도 멈췄다.
정말로 마나가 조금만 더 나갔으면 난 죽었을지도......
"정령사인가?잡아와도 저딴 걸 잡아오다니.쓸모없는 것들.아무튼 좋다.네 친구를 풀어주지.대신 그라크를 놔줘!"
여자가 이미 도망간 덩치들을 질책하며 협상을 해왔는데 나는 문득 어차피 기사들이 코앞에 와 있는 마당에 협상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음......"
"뭐야?그세 마음이 바뀐 거야?내 가게를 빼앗았으니 됐잖아!그라크를 놔달라고!안 그러면 나도 이판사판이야!이년을 죽여버릴 거라고!"
쳇,여하튼 이루제가 걸리는군.나는 하는 수 없이 협상에 응해야 했다.
"좋아,우리 동시에 놓자.나는 당신 동생들,당신은 내 친구를."
여자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타다닥
그와 동시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뛰어오는 소리와 나와 이루제를 부르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이곳은 아마도 미로 같은 구조인지 그 소리는 뒤편에서 들려왔다.
"크로웰 양!페이루 양!어디 있습니까?대답하세요!"
나와 마주친 여자가 이루제의 목에 겨눈 칼을 치웠다.그리고는 이루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도 입을 열었다.
"이리 와 라이.그 자식을 놔줘.그리고 이루제를 보호해."
[네에......]
라이가 김센다는 듯 몸을 풀어냈다.그리고 내키지 않는 것이 분명한 몸짓으로 이루제에게 다가갔다.
라이에게서 풀린 사내가 여자에게 다가갔다.코가 내려앉았고 양쪽 귀가 찢겨나간 채라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카흐흐.누,누나......"
"그라크!"
남매가 감동의 재회를 했지만 나는 그 모양새가 왜 그리 아니꼬운지 모르겠다.
일단 풀어달라는 걸 보니 어디 탈출할 구멍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동생을 데리고 문가로 간 여자는 바로 나가지 않고 동생을 먼저 문 밖으로 밀어내더니 돌연 몸을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뭐......"
"죽어라 계집!"
순간 여자의 손에서 뭔가 번뜩하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를 던진 모양이었다.이루제를 위협하던 칼인가?라이는 너무 멀어!젠장,이번에는 눈도 감지 못했다.너무 놀란 탓일까?
눈가를 찡그리는 것이 최선이었다.결국 이렇게 죽는 건가?
"아악!"
죽는구나 생각한 순간 뭔가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작은 사람의 손이었다.내 것이 아닌 비명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동시에 그 손을 뚫고 나오는 칼날이 보였다.검은 머리칼......
"에쉬!"
나와 비교적 가까이에 있던 에쉬가 어느새 다가왔는지 그 순간 몸을 날려 검을 막아냈다.
에쉬의 몸은 뛰어오른 반동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고 칼이 관통된 자신의 손바닥을 쥐고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야!왜 그랬......아니,괜찮아?응?"
놀라 에쉬에게 다가갔다.에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칼을 뽑으려고 했다.
"으으으......"
"야아!안 돼,뽑지 마!"
에쉬의 손을 막으며 나는 또다시 왈칵 눈물이 흘렀다.
아까는 죽을 위기에 처해서 눈물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살아난 안도감에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오늘 처음 본 나를 구하려 몸을 던진 녀석에 대한 넘치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함께 흘렀다.
칼을 뽑으려는 에쉬의 손을 저지하며 문가를 보니 여자는 없었다.칼을 던지고 곧바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라이,쫓아가."
[네?이제 발소리가 안 들리는데요?]
"잔말 말고 쫓아가!어느 쪽인지는 알 것 아냐!그 남매의 머리채를 가져오지 못하면......오늘 일은 용서하지 않을 테야!"
[히잉~.갑니다,가요.]
라이가 울먹이며 피범벅이 된 몸으로 기어나갔다.
"저쪽이다!크로웰 양의 뱀이야!"
제 5기사단과 바람의 기사단이라는 엘란 소속의 기사단에 의해 구출된 우리는 여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서둘러 불려온 의원에게 진찰을 받았는데 다행히 이루제는 가벼운 타박상 이었고 나는 내상이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기에 일주일 정도 푹 쉬면 나을 거라고 했다.
문제는......에쉬였다.
"일상 생활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손아귀 힘이 필요한 검술은 무립니다.자칫 신경이 상해서 아예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나는 그런 의사의 말에 또다시 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최근 들어 우는 일이 잦다고 느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나는 한시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렇다면 감성에 치우쳐 쉽게 울지도 않을 테고 오늘처럼 곤혹을 치르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빨리,한시라도 빨리 어른이,강한 어른이 되어야 했다.
물론 그전에......
[지니 크로웰!대체 말입니다.어떻게 하면 그렇게 문제를 몰고 다닐 수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군요.앞으로 크로웰 양은 교복을 입지 않으면 외출금지입니다!알겠습니까?]
이런 잔소리에서 졸업해야겠지만......
"네에......"
나는 입을 삐죽이며 수정구 안의 학장에게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교복을 입고 있었으면 이런 사태까지는 안 왔겠지?교복의 리본에 달린 보석에는 추적마법이 걸려 있으니 말이다.
[이루제 페이루!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공작가의 영애로서 그런 제의를 하다니 제정신입니까?몬스터 시장이라니?그게 얼마나 위험한 줄은 아는 건가요?보세요.바로 이런 사태가 나질 않았습니까
?]
"우웅,잘못했어요."
[페이루 양도 마찬가지,교복을 입지 않으면 외출금집니다!알겠어요?]
"뿌우......"
불만스럽기는 이루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분발하도록!좋은 성적을 낸다면 디켈 3세 전하께서도 친히 가실 테니 말입니다.]
이런,왕이 온단 말이야?사실 적당히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대신 레오나 출전시킬 생각이었는데,조금 곤란할지도......
"치!전하는 나빠요.우리는 열흘 넘게 여행을 시켜놓고 전하는 단박에 오시다니.뿌우......"
[페이루 양!그런 말은 삼가도록 하세요!왕궁에 있는 마법진은 오로지 전하를 위한 것이니까요.]
왕궁에도 워프진이 있다.
하지만 그 워프진은 마법에 취약한 드미트리의 것답게 소수의 사람만 이동시킬 수 있었고 한 번 발동하면 적어도 하루는 재충전이 필요했다.
그렇다 보니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왕이나 왕비,왕족들 정도일까?아주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한다.
물론 드리케 학생들도 귀한 취급을 받기는 했지만 왕궁의 워프진을 이용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이용한다고 해도 한 번에 예닐곱 명이 최대 인원인 워프,그것도 하루 동안의 딜레이가 필요한 워프진으로 대표단을 비롯한 기사단 60여 명을 이동시키기에는 꽤나 무리가 따랐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불만을 입 밖으로 내다니......과연 이루제,대단하긴 하지만 잔소리가 더 길어지겠군.
나와 이루제는 이리토 선생의 감시 하에 통신방에 갇혀 장장 두 시간 동안 학장의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에고,귀가 다 아프네.두 시간이면 통신비도 장난 아니게 나올 텐데 말이야.
학장의 잔소리가 끝나고 통신방을 나온 우리는 각자 이리토 선생의 손을 잡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뒤에는 세 명의 기사가 동행하고 있었다.쳇,앞으로 기사 없는 외출은 무리일 듯싶군.
그러고 보니 한센과 필로의 얼굴도 말이 아니던데.나와 이루제를 잃어버린 죄로 적잖게 터진 것 같던데 미안해서 어쩌나.
사과의 뜻으로 토넬을 한 번 더 털어줄까?
"지니!지니이~.어디 갔다 온 거야?"
막 여관으로 들어서는데 브라이트가 얼굴이 벌게져서는 달려왔다.왠지 이 녀석한테는 별로 안 미안하네.
"잠시 학장님과 마법통신을 좀......"
"무지 혼났어요.히힛,그런데 학장님도 환자한테 너무하시지 않니?"
"우리가 너무했지."
"그런 거야?"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루제는 은근히 뻔뻔하단 말이지.
여전히 뒤집힐 것 같은 뱃속과 쏟아지는 피로,조금이라도 눕고자 방으로 가려는데 브라이트가 다급히 나를 불러세웠다.
"잠깐,지니!오늘 너와 함께 온 그 녀석......아니 그분......응?그님?"
"에쉬 말이에요?"
"아,그래,그래.에쉬 전하."
"전하아?"
나는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는데 브라이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네가 나가 있는 동안 황궁에서 사람이 왔었어.바람의 기사단과 로열 기사단이라던가?갑자기 들이닥쳐서는 싫다는 에쉬전하를 막무가내로 데려가던걸.그들의 말로는 그 소년이 황자라나 봐!엘란
제국의 현 황제 에론 드 칸 메갈로프로피스의 둘째 황자래."
이게 무슨 운디네 물에 빠져 죽는 소리.응?잠깐.
나는 문득 에쉬와 이루제의 대화를 떠올렸다.그럼 그게 사실이란 말이야?
"자,잠깐!그럼 지금 에쉬는 여기 없는 거야?"
"그래,황궁으로 돌아간다고 했어.나중에 보상이 올 거라고......"
"뭐야,그게?"
내가 빽 소리를 지르자 브라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왜,왜 그래,지니?왜 화내는 거야?아,그러고 보니 그 녀석......아니,에쉬 전하가 너한테 전해달랬어!구해줘서 고맙다고."
"뭐야?뭐가 고마워.난 아직 고맙다는 말 안 했단 말이야.흐이잉."
바로 몇 시간 전에 요즘 너무 자주 운다고 생각했건만,나는 또 울먹여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운다' 고 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일까?
그보다 에쉬 이 자식,손에 구멍까지 뚫린 놈이 뭘 그리 급히 간 거야?아직 고맙다고도 못 했는데.이제 검을 못 잡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건가?의사가 안정될 때까지는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나는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손등으로 휙 치워냈다.
"왜 그래 지니?울지 말고 내 품에 안겨.끄아악!"
[쉬이익!]
슬금슬금 나에게 손을 뻗치던 브라이트는 라이의 등장에 기겁하며 번개같이 사라졌다.한 번 물리더니 알아서 가는군.
"꺅!라이~."
[크악!이루제!]
라이를 발견한 이루제가 환호했고,이루제에게 발견당한 라이가 치를 떨었지만 앞으로는 명령 없이 함부로 내 곁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 덕에 도망가지는 못했다.
어디선가 탱자탱자 놀다가 늦게 나타난 데다 그 남매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수행하지도 못했기에 최근 나에게 외면 받는 중이었다.
일단 에쉬를 만나야 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해.나는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걸.내가 구하려던 건 이루제니까.에쉬는 그냥 덤이었단 말이야.게다가 오히려 에쉬가 내 목숨을 구해주지 않
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