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71)

시장 구경

"안 됩니다!"

쳇,최근 들어 나한테 설설 기던 토넬답지 않은 단호한 일갈에 나는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릴 뻔했다.

이런 안 되지 안 돼.이미지 관리해야지.내 컨셉은 어디까지나 귀엽고 여린 소녀니까 말이야.(이미 그 이미지는 붕괴되었습니다만?..)

"어째서요?잠시 시장 구경 좀 하겠다는 건데 굳이 기사를 대동할 필요가 있나요?"

"이곳은 외지이고 우리가 외부인인 만큼 주의가 필요합니다."

날로 기사단장을 해먹는 것은 아닌지 토넬이 제법 강단 있게 나왔다.쓸데없이 이럴 때만 이름값하기는!

"우우,그 말은 곧 네이칼의 방범이 허접해서 믿을 수 없으니 안 된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그,그런 건 아니지만......"

내 말을 수긍했다가는 일명 대제국이라 불리는 엘란의 치안을 부정하는 처사이기에 토넬은 말끝을 얼버무렸다.

물론 그런 그의 태도는 꽤나 정중했다.나한테 밉보이면 그만큼 손해라는 걸 알았나 보지?

"우리의 외출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는 건 네이칼의 치안을 믿지 못한다는 거잖아요!"

"외출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기사를 대동하고......"

"싫어요!기사들을 데려가면 보나마나 시선이 집중될 테고 돌아다니기에도 불편하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학생들끼리의 외출은 위험합니다.그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본국에서 당장에 불호령이 떨어질......아무튼 위험해서 안 됩니다!"

정말이지 기사들을 데려가면 몬스터 시장을 구경할 수 없잖아!브라이트나 쟈이맘은 어느 정도 따돌려보겠지만 기사들까지는 무리였다.으음,어쩔 수 없지.조금 타협해볼까?

"좋아요.그러면 이렇게 하죠.학생이 4명이니 원래대로라면 4명의 기사 분들이 대동하겠죠?"

"지니 양은 한센과 필로 두 명이니 5명이겠죠."

아참,난 두 명이지?바꿔준다고 했던 것을 내가 굳이 고집했던 걸 잊고 있었다.

"어쨌든 원래라면 5명일 테지만 지금은 가볍게 나들이 가는 것이니 조금 타협해서 동행하는 기사분의 숫자를 줄여보죠.어때요?"

"하지만 기사들은 그냥 붙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저도 나름대로 제 몸 하나 지킬 정도는 되고,브라이트 선배도 그 정도 능력은 있지 않나요?그러니 굳이 많은 기사 분들은 필요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이 사람,정말 질기네!내가 그렇게 못미덥다는 거야?내가 얼마나 모범적인 학생인데,가끔 길을 잃기는 하지만.발렌에서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그건 단지 사소한 과거일 뿐이었다.

어떻게 빠져나간다지?아!

"좋아요.그럼 차라리 저랑 싸워서 이기는 사람만 데리고 갈까요?"

"에?"

"원래 동행해야 할 기사 5명 중에 저와 싸워서 이기는 사람만 동행시키면 되잖아요.저도 못이기는 사람은 저를 보호할 자격이 없는걸요."

내 제안에 토넬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내가 현역 기사 5명과 싸워서 모두 이길 리는 없지만 그들 모두에게 질 것 같지도 않았다.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한두 명 정도는 이길 테고,토넬도 그 점을 알고 있으니 섣불리 그러자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학생과 싸워서 혹여 기사가 지기라도 하면 그런 망신이 또 어디 있겠는가?보호하기 위해 그 보호 대상과 겨루는 경우도 거의 없겠지만.

"끄응,좋습니다.합의를 보죠.최대한 줄여서 3명!"

예상대로 결국 항복한 토넬은 한껏 인상을 쓰면서 손가락 3개를 펼쳐 보였다.

그에 나는 고개를 흔들며 손가락 한 개를 펼쳤다.

"한 명!"

"두 명!그 이하는 절대 안 됩니다.4명을 어떻게 한 명이 호위합니까?"

"한 명!"

"절대 안 될 말씀!"

한 명도 따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두 명을 데려가!

처음으로 아침 명상까지 포기하고 가는 나들인데 이렇게 토넬과 말씨름만 하다가 새벽이 가버리겠다 싶었다.

나는 잠시 고심했다.내가 두 명을 따돌릴 수 있을까,머리를 돌돌돌 굴려보니 나름 해결책이 나왔다.

"좋아요,두 명!대신 제가 지목하죠."

"뭐 그 정도야.그렇다면 누구를 데려가시겠습니까?"

"한센과 필로!"

그들이야말로 내게 제일 만만한 상대지.

토넬과의 합의 끝에 나는 한센과 필로를 대동한 채 여관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토넬은 끝까지 못미덥다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지만 나는 마침내 새벽길을 밟았고 그 사실이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히히!기대된다,지니."

"나도 이루제.정말 즐거운 시장 구경이 될 거야!"

나와 이루제가 서로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고,그 속을 모르는 브라이트와 쟈이맘은 본인들도 나름 들뜬 듯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 뒤에선 새벽에 영문도 모르고 불려나온 한센과 필로가 눈을 데룩데룩 굴리고 있었다.

얼마 걷지 않아 우리 여섯은 네이칼의 새벽시장에서도 그 중심에 존재하는 중앙 분수대에 도착했다.

하늘은 아직도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새벽이었는데 중앙 분수대 주변은 환하고 시끌벅적해서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저것 봐,지니!굉장히 멋진 분수대야!"

"역시 소문대로 엄청난 분수대야."

이루제와 브라이트가 중앙 분수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네이칼의 중앙 분수대에는 크고 작은 동상들이 조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크란시아 대륙을 수호해준다는 신성한 창조의 신 아기오티타와 예언의 신 프로피티아,그리고 주신 중 유일한 여신이자 가장 순수하며 자비롭고 성스럽다는 평화의 신 헤이오스 조

각이 자리했다.

그 주위로는 주신들을 섬기며 천계와 중간계의 이로움을 살핀다는 일곱 성신들의 동상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자잘한 천사의 동상들.일곱의 성신과 천사들도 각기 이름과 그 뜻을 지녔는데 내가 알고 있는 건 주신들뿐이었다.

실제로 신전에서 모시는 것도 주신들 정도였고 그 외에 성신이나 천사들은 부가적으로 모시는 것에 불과했다.

뭐 성신 외에 마신들도 있지만 그들에 대한 언급은 금지되고 있었다.

사실 주신을 모두 모시면서 그들 휘하의 신들 중 일곱의 성신만 섬기는 것은 조금 우스운 일이다.

주신들도 정확히 말하자면 아기오티타는 창조와 파괴의 신이 었고 프로피티아는 예언과 재앙의 신,헤이오스는 평화와 불행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부분까지 알고 있는 시민은 별로 없었다.나 또한 우연히 고서를 통해 알게 된 신들의 뒷면이었으니 말이다.

"저 분수대는 일명 '신들의 잔치' 라고 하는데 저 분수대의 조각 하나하나가 웬만한 성 한 채와 맞먹는 가격이라더군요."

쟈이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에 내가 물었다.

"그렇게 비싼가요?그런 물건들을 누군가 훔쳐가면 어쩌려고 저렇게 방치하죠?"

"그건 말이야,저 조각상 하나하나에는 보호마법이 걸려 있거든!그 보호마법은 발렌의 성벽 시그나티에도 뒤지지 않는데."

내 물음에 대답한 것은 쟈이맘이 아닌 브라이트였다.뭔가 아는 척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로서는 누가 대답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았기에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대단하네요.조각상 하나하나에 보호마법을 걸다니.마법 열등국인 우리 드미트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아가씨,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지 않으시는 게......"

문득 내가 말한 '마법 열등국' 이라는 단어가 걸렸는지 한센이 지적했다.

뭐,사실이잖아.그러니 학생들을 한 번에 워프시킬 능력이 안 되어 발렌까지 원정을 보내지.

그 대신 막강한 기사단들을 갖고 있으니 다른 나라들과 균형을 이루는 셈인가?

"그러네요.제가 실언을 했군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법사가 모자라면 정령사로 채우면 되고,그 정령사들의 선두에는 내가 설 테니까 두고 보라고.

"자자......어서 들어가자,지니!우린 들를 데가 있잖아?"

"아참,그래!어서 서두르자."

내가 나름의 포부를 다질 때 분위기가 조금 어색하다고 느꼈는지 이루제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어서 이 짐덩어리들을 떼어 놓고 몬스터 시장을 구경 가야지,후훗.

끝없이 늘어진 가판들과 그 위에 쌓이고 쌓인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과연 그 나름의 유명한 이유가 있었다.

몬스터 시장이라는 목표가 있는 나도 한눈을 팔았으니 말이다.

"와아!이것 봐.어라?이것도 신기해!"

"이건 어떻고?봐봐,쌀을 빻아 만든 빵을 고추라는 것과 섞어 만든 거래.굉장히 쫀득해!"

"고추?고춧가루 말이야?그건 향신료잖아.어디 줘봐."

그중 단연 시선이 집중된 것은 낯선 먹을거리들이었다.

나와 이루제의 손이 연신 움직였고 그 덕에 브라이트의 지갑은 항상 열려 있어야 했다.

"맛있어,지니?"

"네!맛있어요.먹다 보니 생각나는 건데 나 이것과 비슷한 걸 전에 먹은 적 있거든요."

"전에?"

"네!아주 오래전에.맛은 조금 다르지만."

내 말에 케니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솔직히 이젠 그 맛도 기억나지 않는 갖가지 음식들.여기 오니 새삼 과거가 떠오르는군.어딜 가나 시장은 비슷한가 봐.

"지니."

연신 입에 먹을 것을 잔뜩 구겨 넣는데 이루제가 작은 목소리로 신호를 보냈다.드디어 때가 왔군!

"음~선배,저 목이 마른데......"

"목이 마르다고?물 줄까?"

"아니요.100프로 과즙 딸기주스가 먹고 싶어요."

"전 88프로 키위 주스!"(멍미..)

잠깐 이루제,아무리 따돌리려고 하는 거지만 88프로도 있니?

내가 문득 떠오른 이 생각을 이루제에게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브라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100프로 딸기 주스란 말이지?맡겨만 둬.내가 냉동마법을 걸어서 가지고 올 테니까!"

인파 속으로 사라지려는 브라이트의 뒤통수에 대고 이루제가 말했다.

"선배,잊지 마세요!저는 88프로 키위 주스요.그리고 아까 오면서 먹었던 닭 꼬치 세 개랑 솜사탕 두 개 추가요."

"에......"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의 브라이트.이루제,단단히 보내버릴 생각이구나.일단 도와야겠지?

"부탁해요,선배.저도 먹고 싶어요.짐이 많을 테니 한센과 필로도 같이 가는 게 어때요?"

"뭐,지니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브라이트.

브라이트가 간다면 쟈이맘은 당연히 따라갈 테고 한센과 필로 둘 중에 한 명은 남겠지?이왕이면 필로가 수월할 텐데.

"잠깐,아가씨.제가 도련님을 따라가죠.필로.너는 여기서 아가씨들을 호위해."

"그래,우걱우걱.아그작."(표현방법이 적당하지가 않구만!)

다행히도 한센은 이것저것 집어 먹느라 정신이 없는 필로에게 나와 이루제를 맡기고 자신은 브라이트를 따라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물론 쟈이맘 또한 그들을 따라나섰다.

후훗,이로써 남은 것은 필로뿐!

나는 정신없이 먹고 있는 필로를 흘깃 보고서 이루제를 툭 치곤 소곤거렸다.(2권은 나름 오타가 많은 것 같더군요.표현방법도 좋지가 않았구요.)

"가자,이루제."

"응."

다른 것을 구경하는 척하며 노상에서 조금씩 멀어진 나와 이루제는 필로의 모습이 사람들 사이에 가려지자 이내 서둘러 몸을 돌렸다.미리 준비해온 단색의 망토를 두르고.

얼마나 달렸을까?주변의 인파가 조금 줄어들었다.체력이 딸리는 나와 이루제는 이내 뜀박질을 멈췄다.

"하아,너무 달렸나 봐.여기가 맞아,이루제?"

"응,조금만 더 가면 돼!말이 암거래지 나라에서도 묵인해주기 때문에 꽤나 대놓고 장사한다나 봐.지나가는 용병이나 모험가들도 들를 수 있다고 했어!"

이루제의 정보는 정확한 편이었고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제지당하면 어떡해?"

"그런 걱정은 말라니까!출입문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외진 광장에서 열리는 거래.지도까지 받았는걸!"

"지도가 어디 있는데?"

"내 머릿속에!"

이루제에게서 지도를 찾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루제는 드리케에서도 진짜 천재 중의 천재였기에 그런 이루제의 머리라면 믿을 만했다.

이루제를 따라 시장을 조금씩 벗어나며 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주변에 사람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었다.

문득 하늘을 보니 푸르스름한 기가 많이 가셔 있었다.

이루제와 조잘거리며 길을 가는데 문득 이질적인 느낌에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가 느껴졌는데?한센이랑 필로,브라이트에게 괜히 미안해서 그런 건가?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잠깐 구경만 하고 돌아갈 생각인 데다가 여관으로 돌아가서 길을 잃었다고 적당히 둘러대면 될 일이었다.

"왜 그래,지니?"

"응,그냥 왠지 뒤통수가 따갑기도 하고 귀도 간질간질한 게 한센이랑 필로가 엄청 우리를 찾는가 봐."

돌연 멈춰선 내가 이상했는지 이루제가 물었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보다 한두 발자국 앞서 있던 이루제는 다시 발길을 옮기며 말했다.

"아아,그래?히힛,지니는 예민한가?지닛,뒤에......"

순간 뒤를 가리키며 비명을 지르는 이루제의 목소리에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응?뭐......으읍!"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껍고 까칠한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으윽,냄새!뭐지?누군가 뒤에서 나를 휙 들어올렸다.

입을 틀어막은 채였는데 그 손이 어찌나 무식하게 큰지 얼굴의 반을 감싸고,한쪽 눈까지 가려졌을 정도였다.

뭐야,이손은?

가려지지 않은 한쪽 눈으로 웬 험상궂은 사내의 손에 잡힌 이루제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이것들은?

이루제가 죽어라 발버둥치고 있었다.

"우으으읍!으으윽!"

"그렇지 않아도 오늘 괜찮은 상품이 없던 차에 잘 됐는걸!"

"그러게.마스터가 좋아하시겠군."

마스터?상품?나를 잡은 녀석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루제를 잡은 녀석의 얼굴은 똑똑히 보였다.

샤벨 일행이 순박한 면이 있는 험상궂은 얼굴이라면 그 녀석은 위험한 냄새가 솔솔 풍기다 못해 구린 얼굴이었다.

"오늘 개시 상품을 낚았으니 보너스는 주시겠지?"

"좋지!저녁에는 남는 녀석들로 회포를 풀자고."

"으우우웁!우웅웅!"

입이 막혀서도 여전히 시끄러운 이루제는 연신 고개를 비틀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라이가 있었으면 이런 녀석들은 접근도 못 했을걸,하는 생각을 하며 아돌을 소환해서 이 험악한 녀석들을 당장에 통구이로 만들어주려고 했다.

그때 뭔가가 퍽하고 내 뒤통수를 강타했다.

그와 동시에 이루제 또한 뭔가에 머리를 맞는 장면이 뿌연 시야로 얼핏 보였다.

이런,젠장......

뒤통수에서 시작된 둔탁한 고통이 점차 눈앞을 잠식하는 느낌이었다.

아돌을 불러야 하는데......

아릿한 고통과 온몸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듯한 차가운 냉기에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주위는 온통 어두웠다.다만 문 위쪽에 달린 작은 창문에서 미약한 불빛이 새어 들어올 뿐이었다.

그 작은 창문마저도 창살이 빽빽이 달려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상황을 보건대 일명 노예상인들에게 납치된 것 같았다.

어린아이 둘을 잡아온 걸 보니 뻔한 상황이었다.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나는 몬스터 시장을 구경하고 싶었을 뿐이지,노예시장 경매에 참가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다.그것도 상품으로.

"이루제!이루제!어디 있어?"

작은 목소리로 이루제를 찾아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옆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조금 들렸을 뿐이었다.

누군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 모습이 명확하지 않았다.이루제일까?

"이루제,거기 있어?"

눈을 가늘게 뜨며 시야를 확보하려는데 누군가 말을 했다.

"그 근처에 있을 거야."

"......뭐?"

아이의 것인 듯 앳된 목소리였다.남자아이인 것 같았다.

"너와 함께 잡혀온 여자애 말이야."

"아,그래?너도 잡혀온 거야?"

내가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단 나는 내 곁에 있다는 이루제를 찾아 주변을 더듬었다.차갑고 까칠한 맨바닥.

꽤나 더러운 듯 손에 텁텁한 먼지가 느껴졌다.이곳은 아마도 지하이거나 아니면 건물 깊숙한 곳인 것 같았다.

아마도 지하겠지?그나저나 이 근처......아!찾았다.옷자락이 손에 잡혔다.

조금 더 더듬어보니 풀어진 듯했지만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이 손에 닿았다.이루제가 분명했다.

"우음......"

내가 더듬는 것에 깨어난 건지 이루제가 몸을 뒤척이는 것이 느껴졌다.나는 서둘러 이루제의 몸을 흔들었다.

"이루제,일어나 이루제!"

"끄응......"

다소 거칠게 흔들어봤지만 이루제는 작은 신음을 내뱉더니 다시 몸을 늘어뜨렸다.

정말이지,이 상황에서 잠이 오냐 넌?

이루제를 깨워야 도망을 가든 대첵을 세우든 할 텐데 말이다.

다시금 드는 생각이라고는 라이가 있었으면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하는 것이었다.

이루제를 피해 도망가던 라이가 떠올랐다.두고 보자,라이.

어둠 속이라 분명치는 않지만 탈출 방법을 생각하는 동안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다.

하지만 도통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아~."

이제 어쩐다.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동안 드리케에서 생활하면서 나 또한 너무 온실 속 화초로만 살아온 것 같았다.

이렇게 쉽게 잡히다니!주변에서 오냐오냐 떠받들어주니 내가 정말 잘난 줄 알았던 모양이다.

얼음의 정령에게 단칼에 계약을 거부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아무리 날고뛴다고 자만해봤자 지금의 나는 힘없는 어린아이일 뿐인데.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쯤 대표단 일행은 난리가 났겠지 싶었다.한센과 필로가 크게 혼나면 어쩐다?

아니지,아니야.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우선 몸을 일으켰다.내가 처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자세히 알아내기 위해서.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왠지 덜컥 겁이 나 울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아직 감수성 예민한 10세 소녀였고,내 의지와 상관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자신이 없었다.

일단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봐야 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탓에 조금은 주변의 실루엣이 보였다.

더듬더듬 벽을 타고 한 바퀴 돌고 나니 대충 방의 상태를 알 것 같았다.

정사각형의 방,사방은 벽돌로 빽빽이 싸였고 문은 철로 만든 듯 크고 단단했다.

문에 달린 작은 창문은 키도 닿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

문은 단단하기는 했지만 이깟 문 라이만 있으면 한 방에 삼켜버릴 텐데.또다시 라이가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뭐하는 거야?"

"응,나갈 방법을 찾아보려고."

아까의 소년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저놈은 뭐 저렇게 태연해?아니면 단순히 인생 포기한 건가?

"소용없을걸.힘 빼지 말고 앉아."

"흥,인생 포기한 꼬맹이는 가만있으라고.운디네!"

내 의지에 따라 운디네가 소리 없이 허공에 떠올랐다.

푸르스름한 빛이 방 안을 옅게 밝혔다.소환된 운디네가 뽀르르 날아와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운디네 자체가 빛을 발했기 때문에 어두운 방 안에서 운디네의 모습은 너무도 또렷했고 그런 운디네의 모습에 놀란 소년의 목소리가 재차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그게......뭐야?"

"내 정령이야.좀 조용히 해줄래?그러다 사람이 오면 어쩌려고 그러니?"

"정령?"

"쉿!운디네,네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어?최대한 투명하게!"

[네,주인님.]

고개를 끄덕인 운디네에게서 푸른빛이 사그라졌다.

그리고 이내 운디네의 모습이 점점 투명해지더니 허공에 약간의 일렁임만을 남기고 모습을 감추었다.

신경 써서 찾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을 작은 공간의 일그러짐.이 정도면 될 것도 같은데?

새로운 기술 하나가 생겼지만 거기에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좋아,우선 저 창문을 통해 밖에 나가 봐.그리고 뭐가 있는지 알려줘.여기가 어딘지도!"

[네!]

대답소리가 들렸다.

운디네가 창문 밖으로 나간 것 같기는 했지만 그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다.

처음 쓰는 기술 덕에 마나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문득 잠자코 있던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디네?물의 정령?"

"응,알고 있네.그래,운디네는 물의 하급정령이야."

"저런 걸 어떻게 사용해?"

"저런 거?그 표현 매우 기분이 나쁜걸.운디네도 나름의 인격이 있......"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퍽 좋지 않은 소리를 듣자 그렇지 않아도 저조하던 기분에 금세 짜증이 치밀었다.

문득 화를 내려는데 운디네가 돌아왔다.

[주인님!]

"운디네,어디 있어?"

[여기요.주인님 어깨에요.]

"그래?이제 원래대로 돌아와.밖에는 어땠어?"

다시 스르륵 운디네가 나타났다.마나가 주는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문 밖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있어요.하나같이 크고 더러워요.그리고 이런 방이 여러 개 있어요.이 방에만 사람이 조금이에요.다른 방에는 사람이 가득해요.사람이 아닌 것도 있어요.여긴 지하 3층이

에요.위에는 무지 넓어요.]

"이 방에만 사람이 적다고?"

[네,다른 방에는 사람이 이만큼 있어요.]

운디네가 작은 손가락 열 개를 펴 보이며 말했다.입을 연 지 얼마 되지 않는 운디네였기에 언어소통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

그랬기에 때론 제스처를 취하곤 했는데 그 모습이 끔찍하게 귀여웠다.상황이 상황이라 표현해주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그래?밖에 있는 사람들......이길 수 있겠니?"

나는 혹시 하는 마음에 물었다.운디네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더니 이내 도리질을 쳤다.

[아뇨.하나,둘,이길 수 있지만,셋,넷은 무리예요.저기,다섯 명 있어요.]

역시 무린가?지하라는 점은 대충 예상했지만......나는 잠시 고민했다.

운디네에게 라이를 찾아오라고 해야 할까?아니면 차라리 아돌까지 소환해서 지금 당장 정면으로 부딪쳐볼까?

하지만 결론은 '둘 다 무리' 였다.위로 다른 층이 있으니 사람이 더 있을 테고 아직 잠들어 있는 이루제 또한 문제였다.

지금 최선의 방법은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래?결국 강행돌파는 무린가?운디네,잘 들어!지금부터 다시 투명화되어서 이 건물을 나가는 거야.그리고 나가자마자 바로 투명화를 풀고 원래대로 돌아가!그런 다음 될 수 있는 한 빠른 속도로

내가 있던 여관으로 돌아가서 여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 '지니 크로웰과 이루제 페이루가 노예상에게 납치되었다.위급한 상황이다'라고.그리고 그들을 이리로 인도해오는 거야.할 수 있겠어?"

잠자코 듣고 있던 운디네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딴에도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할 수 있어요!]

"혹시 내 마나가 10퍼센트까지 내려가더라도 돌아가지 말고,내가 마나를 끊기 전까지는 무조건 남아 있어!아,혹시 가다가 라이를 발견하면 함께 데려와!알겠지,운디네?"

[네!]

"그럼,어서 가!"

애초에 통신용으로 유용한 바람의 정령이라면 빠르게 날아가 말을 전하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겠지만 운디네는 물의 정령이었다.

빠르게 날아가는 것도 무리일 뿐더러 타인에게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선 극심한 마나가 소모된다.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뿐이었다.

운디네의 모습이 흐려짐과 동시에 나는 자세를 편하게 가다듬었다.

될 수 있는 한 마나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는 흘러나가는 마나를 가다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봤자 아주 조금 더 지속되는 정도겠지만 여관까지의 거리를 모르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흘러나가는 마나를 가다듬으며 명상에 들어가려는데 소년이 나를 불렀다.

"이봐!"

"......"

"이봐!"

"......"

나는 눈을 감고 흘러나가는 마나를 조절해야 했기에 소년의 불음에 답하지 않았다.

마나를 가다듬으며 명상하는 것은 사실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내가 살아야 너도 사는 거야,이 꼬맹아!조용히 좀 해.

"야!"

"......왜?'

거참 시끄러운 녀석이네.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되나?언제 끌려 나가서 팔려갈지 모르는 상황이구만.

지금 내가 가다듬는 마나가 네 녀석의 생명줄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구나.

녀석에게 짧은 대답을 해준 나는 다시 명상에 들어갔다.마나를 가다듬는 동시에 주위의 마나를 끌어와......

"뭐하는 거야?"

"......"

나에겐 소년에게 친절히 대답해줄 여유가 없었다.나는 팔려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까 그 녀석이 정말 사람을 데려와?"

나는 녀석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흘러나가던 마나의 양이 줄어들었다.건물을 나간 모양이었다.

현재 남은 마나는 90퍼센트 정도.명상으로 마나를 조금 모은다고 하더라도 되지 않게 두 가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양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늘어봤자 전체의 10퍼센트 정도일까?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나와 운디네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빠져나가는 마나의 양은 급격히 늘어날 테니까.

"정말?"

재차 묻는 소년을 나는 아예 무시해버렸다.

지금 내 정신이 말이 아니거덩?너랑 말할 여유 따윈 없단다,꼬마야.

"......난 뭐 도울 것 없어?"

조금은 시무룩해진 소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말해줄까 말까.

"그래?에휴,정령이라는 게 정말 있구나.넌 어쩌다 그런 녀석을 조종하는 거야?너 정령사가 되려고?넌 삶의 목표가 뭐야?"

"쿨럭!"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던 소년이 돌연 삶의 목표를 언급하자 나는 자칫 잘 가다듬던 마나를 놓치는 건 물론이고 헤집을 뻔했다.저 녀석이 나를 죽이려고......너 팔려가고 싶냐?

"하긴 너 같은 애가 뭐가 있겠어?"

있거든!최연소 중급정령사에 상급정령사를 넘어서 정령왕을 소환하겠다는 장대한 목표가!더불어 드미트리를 부흥시키고 싶다는 커다란 꿈을 품고 있단다,이 빌어먹을 꼬맹아.

명상 중이었기에 나는 차마 입을 열지는 못했다.

"아드득."

"나는 말이야......사실 가출했거든."

내가 자신을 향해 이를 갈았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멋대로 말을 이었다.궁금하지 않거든.

그리고 이런 데 잡혀온 걸 보면 뻔한 꼬맹이지 뭐!아,내가 할 말은 아닌가?

"난 그냥 어머님이랑 아버님이 좋았을 뿐인데 말이야......그것 때문에 형님이 나를 싫어해."

아아,그래 형제 다툼이냐?정말이지 어린애다운 고민이군.고작 그것 때문에 가출이라니......어떠냐?집 나오니 고생이지?

"그리고 동생들이 생겼는데 동생들도 나를 싫어해.형님은 나더러 천박한  녀석이라고 했어."

으음,부모님이 동생을 낳았나?관심 받고 싶어서 가출한 건가?형이란 녀석은 별 소리를......잠깐,지금 저 녀석 얘기에 귀 기울일 때가 아닌데!

"나를 좋아해주는 건 아버님이랑 어머님뿐이야.그 집에서 일한다는 형이랑 누나들도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

귀족집안인가?그러게 가출은 대책 있게 해야지!나도 대첵 없긴 하지만.

"그래도......난 형님이랑 동생들이 많이 생기고 아버님이 생겨서 행복했는데.그런데 얼마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그런데 아버님은 어머님이 아플 때 한 번도 와주시지 않으셨어.내가 찾아가서 한

번만 어머님을 봐달라고 했는데 싫다고 하셨어.형님들도,동생들도......아무도......흐윽......"

자,잠깐!정신 사나워.울지 말란 말이야.나까지 울고 싶어지잖아.안 되긴 했지만 지금은 당장 살아 나가야 하지 않겠니?

말로 하고 싶었지만 급격히 빠져나가는 마나의 양이 늘었기에 나는 허겁지겁 마나를 가다듬어야 했다.최대한 가늘고 길게 마나를 뽑아내야 하는데......

"흑,어머님......훌쩍,나......그런 큰 집도 필요 없었어.매일 길만 잃었는걸.방에서는 나 혼자 자야되고.매일 지겨운 공부만 시키고.어머님도 없는 그런 집은 싫었어.아버님도 싫어졌어.어머님을 혼자 내

버려두셨어.마지막에는 우셨단 말이야.히잉......"

야야,난 감수성 예민한 열 살 소녀야!좀 울지 마!덩달아 울고 싶어진다니까~.그렇지 않아도 참고 있구만.

내가 입가를 씰룩이며 끝내 입을 열려는데 옆에서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됐다.그래서 가출한 거니?"

이루제에!이 계집애가 언제 꺠어난 거야!너 때문에......

"빠득!"

내가 재차 이를 갈며 분을 삭였지만 아무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난 감고 있던 눈을 더욱 꼭 감았다.

자자,진정하자 진정.이제 남은 마나는 70퍼센트.

"응,그래서 예전에 입던 옷을 입고 몰래 나와 버렸어.옷을 바꾸니까 아무도 못 알아보던걸."

"호오,집이 어딘데?"

"전에 살던 집은 산속에 있어.거기서 어머님한테 검술을 배웠지!"

이것들이......누구는 생고생하는데 지들끼리 이야기꽃을 피워?안 팔릴 자신 있나 보지?

"그럼 아버지가 있다는 집은?"

"그 집은 이 도시에 있어.굉장히 커."

"그래?아,그보다 우리 서로 자기소개나 하자.내 이름은 이루제 페이루야!드리케 아카데미 연금술반 유아부.음......그리고 자신 있는 것은 책 한 번 읽고 외우기!"

"나,난 자신 있는 것은 검술이야!이름은 에피로스.어머님은 에쉬라고 부르셨어."

아......그지 같은 것들이......모두 죽여 버릴까 보다!아아악!

내가 홀로 머릿속으로 괴성을 지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소녀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풀어냈다.조금 있다가 보자......

"에피로스?귀족집안 같은데,성은 없어?"

"성?아아,이름 앞에 붙이는 그거?"

"응,내 성은 페이루야.그래서 풀 네임은 이루제 페이루!아버지 성이 페이루니까."

"내 풀 네임은 에론 드 폰 에피로스야.아버님 성은 에론 드 칸.성함은 메갈로프로피스."

음?성이 좀 길다?뭐라고 했더라,에론 드......폰?에론 드는 엘란의 황족을 뜻하는 성이라고 알고 있는데?그중에서도 폰이 들어가면 직계 혈통......

"쿨럭!히이익~."

놀란 나는 숨을 급히 들이마시다가 마나의 흐름을 놓칠 뻔했다.

급히 다시 추스르기는 했지만 조금 놓쳐버렸고 그 바람에 몸에 약한 충격이 일었다.그와 동시에 입 안에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젠장,정말인가?왕족이나 황족은 개인보다 나라에 가깝다는 뜻으로 이름을 뒤에 쓰고 성을 앞에 쓴다.

그리고 현 황제의 이름을 정확히 말하는 걸 보니 사실인 듯한데......

"히히,구라 즐!"

"응?그라......줄?그라 줄이 뭐야?"

"뻥까지 말라고......힛."

아아,농담이겠지?나도 참 괜히 심각해졌네.

하긴 '에론 드 폰' 이면 엘란의 직계 황족이고 아버지 이름이 '에론 드 칸' 이면 엘란의 현재 황제나 전 황제라는 뜻.

그렇다면 저 혼자 웅얼대던 놈이 황자라는 건데 그럴 리가 있나.

"정말인데?"

뻥치지마,인마.너 때문에 지금 나는 입에 피를 머금고 있어!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내 마음을 아는지 비웃음 섞인 이루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황자면 나는 드래곤이야!"

"너......드래곤이야?"

이 바보 두 마리가 정말?몽땅 운디네로 언브리딩 시켜버리고 싶은 강한 소망이......

지니의 짐작대로 대표단 일행은 난리가 나 있었다.

"이런 병신 같은 것들!"

퍼벅!

머리끝까지 화가 난 토넬의 발길질이 한센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한센의 몸이 크게 흔들렸지만 신음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 곁에는 이미 반쯤 피떡이 된 필로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흐흑..바부지니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캐릭터들이!이런 수모를!!)

한센의 상태도 필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말이지......이래서 평민들은 못 쓴다니까!네놈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면 당장 퇴단이야!알겠어?아으으!"

분에 못 이겨 토넬은 연신 씨근덕거렸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쭉 수색을 했지만 행방은커녕 쥐꼬리만큼의 단서도 찾지 못한 수색조들은 혹여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평화로웠던 대표단 일행이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울며불며 돌아온 브라이트 케니얀으로 인해 산산이 깨졌다.나간 것은 여섯 명인데 돌아온 것은 네 명뿐!

행방이 묘연한 두 명의 학생.

그중 하나는 왕과 학장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현재 대표단 제일의 요주의 대상이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숨은 지배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지니 크로웰.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그 지위보다는 넘치는 재력으로 유명한 페이루 공작가의 외동딸!(공작-백작-후작-자작-남작-준남작 대충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ㅠ?)

분명 그 집안에는 제법 검술에 조예가 있는 장남이 있음에도 공작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소녀이자 드리케 최고의 천재라고 칭송받는 바로 이루제 페이루!

대표단 아이들 중에도 거물급으로 한 손에 꼽히는 아이들 중 둘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니 크로웰의 사망이라는 오보로 본국에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토넬로서는 눈이 돌아갈 만큼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넘치는 화를 주체 못한 토넬의 손이 다시 한 번 한센을 가격하려 할 때였다.잠자코 있던 부단장 쿠퍼가 입을 열었다.

"단장님,우선 엘란의 기사단에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저희만으로는 무리일 듯 싶습니다."

"......엘란에?"

"네,단장님.도움을 청한다는게 조금 수치스럽기는 하지만 두 학생을 잃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학생들이 없어진 곳이 엘란의 수도이니 엘란으로서도 치안에 대한 책임은 있으니까요."

부단장의 말을 잠자코 들으며 단장은 속으로 저울질을 하는 듯했다.

이대로 자력으로 찾을 것인지 아니면 엘란에 도움을 요청할 것인지 말이다.이내 결론은 나왔다.

점심때가 지난 지금까지 수색을 했음에도 행방이 묘연한 둘을 자력으로 찾기란 무리였다.

그녀들을 못 찾는다면 결국 자신은 문책을 받을 수밖에 업었다.차라리 도움을 청하고 그녀들을 찾는 것이 그로서는 최선의 상황일 터였다.

"좋다.제국에 협력을 구한다!쿠퍼!"

"네,단장님!하명하십시오."

"지금 당장 황궁으로 가라.그리고 지니 크로웰과 이루제 페이루에 대한 수색을 요청하라!"

"맡겨주십시오."

경례를 마치고 사라지는 부단장 쿠퍼를 보는 토넬의 눈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한센과 필로를 퇴단시키기 전에 자신이 잘리면 어쩌나 싶었다.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엘란의 수도 네이칼은 여전히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했다.새벽부터 시작한 장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그 시각,엘란의 황궁 근처에 있는 한 고급 여관은 다른 의미로 소란스러웠다.

"이게 뭡니까?믿고 맡기라더니!이게 믿고 맡긴 결과입니까?"

"우리도 최선을 다해 수색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 걸 어쩝니까?차라리 우리가 묻고 싶은 심정이군요.행방불명된 소녀들의 인상착의가 정확한 건지요!"

"뭐요?그럼 우리가 지금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정보가 없을 수 없으니 하는 말입니다!곱슬거리는 금발머리 소녀와 화려한 핑크색 머리의 소녀라면서요?그 정도면 눈에 띌 법도 한데 본 사람이 아무도 없질 않습니까."

드리케 대표단의 요청에 의해 자신만만하게 수색에 나선 바람의 기사단은 엘란의 황궁에서도 세 번째 서열의 기사단으로 단원 한 명 한 명이 뛰어난 수색능력을 지녔고,스피드 위주의 검술을 펼치

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들이 수색을 도와준다고 나섰을 때 토넬은 이미 두 사람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기대는 무참이 무너졌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도시를 쑤시고 다닐 뿐인 그들의 모습은 토넬이 이끄는 제 5기사단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쯧,바람의 기사단이 수색에는 정통하다더니 헛소문인 모양이군요.못 찾겠으니 괜히 저희 탓을 하고 말입니다."

"뭐요?그러는 댁들은 기사의 나라라는 드미트리의 기사단이 맞소?단장이라는 자는 갑옷도 없고 저쪽의 기사 둘은 누구한테 얻어맞았는지 피떡이 되어 있고 말이오!댁의 기사단은 어디서 맞고 다

니는 모양이오?"

"내가 때렸소!내가!뭐 문제 있소?"

"그게 자랑이오!이익!"

토넬로서는 학생들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불안감에 안달이 나 있었다.

바람의 기사단 단장은 드리케 대표단에서 학생들이 행방불명되었다고 도움을 요청했다는 소식에 자신만만하게 찾아주고 오마고 달려온 터였다.

헌데 이대로 찾지 못하고 돌아가면 다른 기사단의 단장들이 뭐라고 이죽거릴지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그렇다 보니 그런 둘 사이에 자연스럽게 불화가 싹트고 말았다.

기사단장들이 투닥거리고 있으니 같은 층에 모여 있던 두 기사단의 기사들 사이에도 적대감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내 부하 내가 때리는데 댁이 뭐 보태줬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어떻게 사람으 피떡으로 만들 수 있소!"(옳소!)

"맞을 만하니 때렸소!왜,댁이 대신 맞아줄......응?"

둘이 한참 입씨름을 벌이며 당장이라도 장갑을 벗어던지고 결투를 벌일 태세였는데 문득 토넬이 말을 멈추고 바람의 기사단장인 카곤의 머리 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에 카곤이 왜 그러나 싶어 슬쩍 자신의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빛이 보였는데 제법 밝은 빛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눈이 부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이게 뭐지?요정?"

자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난생 처음 보는 생물에 카곤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그와 달리 토넬은 그 생물을 알아본 듯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운디네!맙소사!맞아,지니 양은 정령사였지.그래,네 주인은 어디 있지?응?빨리 말해봐!"

토넬이 운디네를 잡으려는 듯 손을 올렸지만 토넬의 손은 허공을 스쳤을 뿐 운디네를 쥐지는 못했다.

토넬의 손짓을 피하듯 조금 더 높이 떠오른 운디네가 입을 열었다.

그 소리는 마치 잔물결이 일듯 잔잔했으나 그 층에 있던 기사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지니 크로웰과 이루제 페이루가 노예상에 납치되었다.위급한 상황이다.]

소란스러웠던 홀이 일순 침묵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이내 술렁이며 깨졌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토넬이 '꽥!' 소리를 질렀다.

"노,노예상?이런 빌어먹을!"

"맙소사!납치라니?그런......!"

카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 정도로 깜짝 놀랐다.

하필 노예상에 납치라니.결코 쉽게 볼 일이 아니었다.친선 차원에서 엘란에 건너온 그녀들이다.

그런 그녀들이 엘란의 수도에서 노예상에 납치되다니!혹여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건 기사단의 차원을 넘어 국가 단위의 소란으로 번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게 어디야?어디에 있어?빨리 말해!"

토넬이 연신 허공을 헤집으며 운디네를 다그쳤다.

하지만 여전히 토넬의 손은 운디네를 잡지 못했고 운디네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다만 손을 들어 여관 문을 가리킬 뿐이었다.

"따라오라는 것 같은데?어쩌죠?"

카곤이 물었다.그 또한 안색이 파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쩌긴?따라가야지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럽게 싸우던 두 기사단장 토넬과 카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입을 열었다.

"긴급사태!모두 무장하라!"

기사들이 가득한 여관의 홀 안으로 팽배한 긴장감이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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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구경 파트가 끝낫어욤! 이건 2권 스캔본은 오타가 너무 많아서 제가 직접 수정한 부분도 있었습니다만..!!

어색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길 바랄께요! 이상 klogesu30 이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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