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71)

[저것,그냥 두면 깨어날 텐데요.내버려 두는 건가요?]

라이가 긴 몸을 흔들며 딴에는 걱정스럽게 물었고 나는 그 질문에 입가를 씰룩이며 오우거에게 눈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오우거의 몸이 들썩이고 있었다.커컥,커컥 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쳇,그럼 그렇지.오크도 겨우 기절시켰는데 천하의 오우거가 나한테 죽겠어?

"아넬 언니,오우거 아직 살아 있어요."

"헛!"

나의 심드렁한 말에 아넬이 퍼뜩 놀라 오우거를 바라보았다.

주변의 용병들도 오우거에게 시선을 돌렸다.아직 오우가 살아 있음을 인지한 그들은 오우거의 숨통을 끊어놓을 요량인지 무기를 치켜들었다.

어깨를 으쓱한 나는 침낭을 주워들었다.과도한 마나 소모 때문인지 피곤이 밀려왔다.

나는 침낭을 질질 끌고 그나마 으슥해 보이는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라이,새벽에 깨워줘.내일은 껍질 바꿔줄게.]

[정말요?무슨 색으로요?]

라이가 머리 위로 올라가며 기대에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머리에 재가 묻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라이도 힘 좀 썼으니 그냥 지나가련다.

[음......금강석이니까,흰색일걸.]

[흰색요?그러면 완전히 백사가 아닙니까?그렇지 않아도 인간들이 정력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저더러 백사가 아닌 게 아쉽다고 하던데,무늬 좀 넣어주시면 안 될까요?]

[아,무늬?좋지 어떤 무늬?]

무늬라......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음,호랑의 무늬?아니면 표범 무늬는 어때요?아무튼 마스터,전 카리스마 있는 게 좋습니다.사실 원래 검은 몸에 노란 줄무늬였는데......사실 좀 촌스러웠잖습니까.]

[으음......아,나 좋아하는 무늬 있는데,그걸로 하자.]

난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단아한 무늬를 좋아했다.규칙적인 느낌이 드는 무늬는 더 좋았다.

[뭐죠?마스터가 좋아하는 무늬라......저도 기대가 되는군요.]

[땡땡이무늬,맘에 들어?나는 개인적으로 빨간 땡땡이가 제일 좋지만,뭐 색은 네가 고르도록 해.바탕이 흰색이라는 건 잘 유의하고.]

땡땡이!그 얼마나 멋진 무늬인가.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땡땡이무늬를 거의 보지 못했다.

[땡땡이가 뭡니까 마스터?왠지 저를 두렵게 만드는 단어군요.](이젠 적응했나 보군..)

[아이 참,그것도 몰라?물방울무늬잖아.]

[......]

수레와 수레 사이에 적당한 자리를 찾아낸 나는 그 틈에 침낭을 억지로 끼워 넣었다.

몬스터가 또 나타나도 날 찾지 못하길 바라며.그런데 어째 라이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왜 그래?]

[마스터,땡땡이라고 하심은......동그라미가 반복적으로 매치되어 있는 그것 말입니까?]

라이가 머리를 내려 내 눈을 마주보며 물었고 나는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래,그거 물방울무늬라고도 하잖아.]

난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 위의 라이를 끄집어 내렸다.그리곤 침낭 속에 몸을 넣었다.

[마스터,일생일대의 부탁입니다만......그냥 민무늬 백사로 하면 안 될까요?]

[뭐?네가 무늬 넣어 달라며?]

침낭 속으로 몸을 꾸겨 넣는데 라이가 그새 밖으로 기어나와서는 말했다.

[그건......농담입니다,농담.전 민무늬가 가장 좋습니다,마스터.]

[너 말이야,전에도 쥐로 하자니까 싫다고 하더니!아돌도 그래,애칭으로 찌리!얼마나 좋아?그런데 싫다고만 하고,다들 내 센스를 의심하는 거야 뭐야?]

내가 조금 화를 내며 말하자 라이가 조용해졌다.잠시 침묵하던 라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마스터,전 오늘 세삼 마스터의 위대함을 깨달아버렸습니다.]

[......?]

나는 라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무슨 말이지?(후훗,독자분들의 센스를 최대한 살려보세요~)

[마스터,아무튼 저는 꼭 백사이고 싶습니다.순수한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백사 말입니다.]

[하지만 백사는 네가 싫다며?]

[아닙니다.그냥 앙탈 좀 부려봤습니다,마스터.원래 좋으면 더 튕기는 게 예의 아닙니까?그렇죠?]

라이가 얼굴을 들이밀며 간절히 말했고 나는 본인의 의사도 가끔은 존중해줘야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던가.땡땡이는 나중에 또 망가지면 하지 뭐.]

[이번 껍질은 목숨 걸고 사수하겠습니다,마스터.]

라이가 심각한 어조로 비장하게 말했고 나는 너무 힘을 쓴 탓인지 쏟아지는 졸음에 눈을 감았다.

[그러든가......으음,나는 잔다.]

꼬르르륵

이번 실험대상은 요리 담당이자 라이의 원수 중 하나인 커크였다.

한창 요리준비를 하던 커크는 솥단지 안의 물이 넘실넘실 공중으로 떠오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신기한 현상을 동료에게 알리려는 듯했지만 이내 그 물 덩어리가 자신을 덮치자 놀라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상반신을 완전히 뒤덮은 물에 커크는 숨이 막혀오는지 꼬르륵 소리를 냈다.

물이 상체만 덮고 있어서 커크는 피할 방법으로 땅바닥에 엎어지는 것을 선택했지만 물 덩어리는 커크의 상체를 따라 움직였다.

결국 하체까지 몽땅 물 속에 잠겨버린 커크가 그 상태로 헤엄을 쳤다.

물결이 일렁이면서 커크의 머리가 조금 물 밖으로 나왔지만 이내 다시 잠겨버렸다.

커크가 목을 부여잡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푸훗!"

[푸헤헤헷!저 덩치가 맨땅에서 헤엄치는 꼴이 아주 우습군요,마스터.]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반은 하얗고 반은 검은 우스운 모양새의 라이 역시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크크크.운디네,그만!"

[네.]

운디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벌렸던 두 손을 내리자 운디네의 제어에서 벗어난 물이 모양을 잃고 흩어졌다.

촤아악

당장이라도 숨 막혀 죽을 듯하던 커크는 질척해진 진흙 땅 위에서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이상하다?쿨럭!분명......크으응,물속이었는데?"

기침을 내뱉으며 축 젖은 자신의 옷을 쥐어짜는 커크를 뒤로하고 나는 이번 실험에 대한 보완점 몇 가지를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 숨을 못 쉬게 하는 데 상체까지 전부 감쌀 필요는 없다.→최소한의 물로 얼굴만 감싼다.

* 심한 저항을 할 경우 물속에서 빠져나가기도 한다.→수압을 높인다.압축해보자.

* 물속에 있는 상대가 숨이 찬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1분 정도만 하자.

* 상대가 추한 꼴이 된다.콧물도 흘린다.→보완불가.

"으음......이 정돈가?운디네."

[네,주인님?]

"주변에 물이 없으면 물을 만들어서 기술을 쓸 것 아냐?"

[네.]

"그렇게 되면 물을 적게 만들수록 마나가 적게 들어가는 거지?"

펜을 치켜들며 묻자 운디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주인님.물의 양과 마나의 양은 비례합니다.]

"그럼,물을 꼭 저렇게 많이 튀어야 해?조금만은 안 되는 거야?"

내 지적에 운디네가 고개를 흔들며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뇨,제가 세심한 컨트롤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다음에는 양을 줄여볼게요,주인님.]

"그래?연습하면 된다 이거지?그럼 됐고.이번에는 아돌도 불러서 아쿠아 볼이랑 쇼크를 합치는 걸 연습해보자."

[네!]

오우거나 나타난 뒤로 우리는 편하게 산을 내려왔다.

아마도 오우거보다 약한 몬스터들이 오우거의 출현에 몸을 사리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제 베일란까지 2일,몬스터 출현지대는 모두 지났고 남은 것은 편하게 산을 내려가는 것뿐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라이의 몸도 반 정도 변색을 이뤄냈고,넘치는 실험 대상들로 인해 새로운 마법도 개발 중이었다.

갑작스레 별 해괴한 일을 당한 용병들은 당연히 범인이 나라는 걸 알고 하나같이 아우성쳤지만 그래봤자 자신을 통한 실험의 양이 늘어날 뿐이라는 걸 깨닫고는 곧 조용해졌다.

내 목표는 아넬을 제외한 모든 용병들을 참패시키는 것.

"크크큭."

넘치는 실험 대상들이 나를 즐겁게 만들었다.

나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희생하는 샤벨 용병단 일동에게 묵념.

**

음..드디어 제 5장 파트도 끝났군요.이제 1권의 마지막 파트인 나름 아쉬운 이별!

즐겁게 읽어주세요~

**

나름 아쉬운 이별

온통 나무들로 에워싸여 있던 산맥의 하층을 빠져나오자,주변을 감싼 수풀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그리고 저 멀리 베일란의 수도 발렌의 성벽이 보였다.

드미트리의 수도 샤란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하늘을 찌를 듯한 웅장한 성벽에 비하면 다소 초라한 모습이었다.(한번 진짜로 보고 싶어지는..1人)

"지니,저기가 베일란의 수도 발렌이야."

아넬이 손가락으로 아직은 조금 멀리 있는 발렌의 수도를 가리켰다.

"네,보여요.그런데 샤란의 성벽에 비하면 조금 작은 것 같아요."

"후훗,하지만 우습게보면 안 돼.샤란의 성벽은 높고 굳건하지만 발렌의 성벽은 그것들을 메울 만큼 강력한 결계마법들이 잔뜩 새겨져 있거든."

"헤에,결계마법?그렇군요."

초라해 보이던 발렌의 성벽이 왠지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건 내 귀가 얇기 때문일까?

내가 드리케에서 가장 처음에 배운 역사 중 하나는 본래 드미트리와 베일란이 하나의 나라였다는 사실이다.

현재 대륙을 양분하는 거대한 세력의 두 대제국,신성제국 엘란과 암흑제국 코이렌의 사이를 조율하던 나라는 중립제국 드미란.

헌데 한쪽의 손을 들어줘 대륙을 통일하자는 무인 측과 중립을 유지하자는 문인 측의 싸움이 내란으로 번져 종국에는 드래고니아 산맥을 기준으로 두 개의 왕국으로 갈라져버렸다.

한때 대륙을 호령하던 세 개의 제국 중 하나가 맥없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게 갈라진 두 개의 왕국을 두 제국이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었다.

결국 드미트리는 엘란 왕국의 동맹국이 되게 이른다.끝까지 중립을 지키겠다고 외치던 베일란.

하지만 자신의 편이 되지 않으면 적국으로 간주하겠다는 코이렌의 뜻에 베일란은 차라리 신성제국인 엘란을 지지하겠다고 나섰다.

그로써 베일란과 드미트리와의 사이는 더욱 틀어져버렸다.

"지니,일단 성에 들어가면 말을 조심해야 해.알았니?"

"왜요?"

"대륙 공통어를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억양차이가 있으니까.지니는 드미트리의 억양이 강하거든.베일란 사람과 드미트리 사람이 앙숙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잖니?큰 도시일수록

그건 더 심하단다."

"흐음,그래요?"

굳이 앙숙인 베일란으로 가고 있는 이유는 텔레포트를 이용하라는 전갈 때문이었다.

드미트리에서 엘란까지의 거리는 마차로 약 넉 달 반이 걸린다.그런 먼 거리를 이십여 명의 아이들과 가기는 당연 무리가 따랐다.

간다고 해도 아이들의 사기만 떨어질 거라는 생각에 왕은 결국 그 방법을 택해야 했다.

"자,이제 심한 내리막길이니까 지니는 날 잡으렴."

아넬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나는 깎아지른 듯한 길을 보곤 아넬의 구릿빛 손을 잡았다.문득 진한 피부와 반짝이는 은발이 어울리는 아넬의 출신이 궁금해졌다.

"아넬 언니,언니는 어느 나라 출신인가요?"

"나?난 따지자면 코란 왕국 출신이긴 하지.그렇지만 내가 자란 검은 정글이 코란에 포함됐을 뿐이기에 딱히 고국이라는 생각 안 해.내 고향은 우리 용맹한 실버 울프족이 살아가는 드넓은 정

글이란다."

"실버 울프?아!나 들어봤어요.부족연합 국가인 코란에서도 손꼽히는 뛰어난 소수민족이라면서요?특징은 은빛 머리와 일족 모두가 쌍검사라는 것."

그러고 보니 아넬의 모습은 언뜻 스치듯 배웠던 실버 울프족과 매우 유사했다.수업을 제대로 듣질 않았으니 이제야 떠오를수밖에.

"어머,잘 아는구나?그렇게 유명한가?"

아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어왔다.

사실 어느 나라에 어느 부족의 특징이 어떻다,정도는 매우 세부적인 지식에 들어간다.

나는 광범위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수업을 받는 드리케 종합반의 학생이다 보니 필요 이상의 지식을 쌓고 있는 셈이다.

산을 내려와서 조금 더 걷자 우리는 성문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용병단장인 샤벨이 문지기를 향해 아는 척을 했다.그러자 그 역시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그런가?요즘 일거리가 없기는 했지."

"그럼 잘 아시겠지만 운송허가증과 용병패,운송목록을 보여주십시오."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뒤 샤벨이 품속에서 종이 두 장과 용병패를 문지기에게 건넸다.

"흐음,석고포대가 2대,조각본 1대,금박액자가 1대,귀중품에 속하는 조각품과 미술품이 1대,총 5수레로 달프 예술관으로 배달되는 물건들이군요."

"그래,까다로운 운송이었지.그리고 거기에는 용병이 총 23명이라고 기입되어 있지?용병은 아니지만 일행이 한 명 더 있네."

샤벨의 말에 문지기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나는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에 당연히 신분증은 고사하고 내가 드리케 학생이라는 표시인 학생패도 없었다.

"저 아이군요.샤벨 씨께서 저 아이가 안에서 일으키는 문제를 모두 책임지시겠다는 서류만 작성해주시면 출입이 가능합니다."

문지기의 담담한 말에 샤벨이 요상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저 녀석이 문제를 안 일으킨다는 보장은 못하는데......만약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 건가?"

"쉽게 말해서 샤벨 씨가 저 소녀의 보증인이 되는 거니 대신 감옥을 가든가 벌금을 물든가 하셔야 됩니다."

샤벨의 눈빛이 짙어졌다.나는 그 달갑자 않다는 시선을 슬쩍 피해버렸다.요 며칠 문제를 좀 많이 일으키긴 했지.

"저 녀석 일행이 열흘 후면 도착할 텐데 어떻게 안 되겠나?"

"일행이요?"

문지기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묻자 샤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저 아인 그 유명한 드리케의 학생이라네.이번에 윈칸 축제에 가는 길이었는데 일행과 헤어지는 바람에 우리와 합류하게 됐지."

"......드리케 따위보다 저희 바렌티노 아카데미가 더 유명합니다.게다가 드리케 학생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죠?"

드리케 따위?저 아저씨가 사람 무시하네?

"그럼,그럼,바렌티노가 더 유명하고말고.그나저나 저 아이 어떻게 안 되겠나?한 명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샤벨 단장,네가 감히......내가 눈을 부라리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샤벨은 문지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안 됩니다.하필이면 드미트리인이라니......문제를 일으킬게 뻔하니 절대 안 됩니다."

"흐음,그렇다면 내가 꼭 보증을 서야 되는 건가?"

내가 문제 일으키는 걸 네가 봤냐!봤냐고!나는 왠지 상당히 아니꼽게 느껴지는 문지기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뻗은 뒤 그를 향해 들어주었다.

"......저 소녀가 지금 뭐하는 거죠?"

"음?아,아주 반갑다는 인사 아닐까?"

"그건 아닌 것 같군요.어쨌든 보증서를 작성하지 않으시면 저 소녀는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나더러 성 밖에서 서 있으라는 거냐?이 여린 소녀가!

[마스터,제가 콱 물어줄까요?]

이제 꼬리 쪽에서 한 마디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금강석으로 도배를 완료한 라이가 그새 밖으로 나와서는 검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말했다.

[이따가 밤에.지금 물면 네가 한 짓이라는 걸 알 것 아냐.]

[그럼 밤에는 물어도 되나요?]

최근 누군가를 무는 것에 맛들려버린 라이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곰탱이도?]

얘가 켄타랑 웬수졌......구나.하지만 최근에는 라이가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가느라 둘은 충돌할 일이 없었다.

[걘 왜?]

[재수 없어서요.]

[그렇긴 하다.그럼 가는 길에 단장도 한 번 물어줘.]

[넵!저만 믿으세요,마스터.]

얘기가 대충 끝났는지 샤벨이 초소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잠시 뒤 나는 고된 원정(?)끝에 베일란의 수도 발렌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샤란과는 다른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도열한 발렌은 나의 탐구심을 자극했다.

베일란 하면 유명한건 그 면적이 천 평에 다다른다는 거대 공립도서관.일단 그곳에 한번 들러줄 생각이었다.

드리케 일행이 오기까지 약 열흘 정도,시간은 남아돌았다.그럼 나는 그동안 뭘 해야 할까나......

"크큭."

[헛,마스터 뭔가 재밌는 일이라도?]

바람이 쉬어가는 곳

용병단을 따라 나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여관 앞에 섰다.단골 여관이란다.

일행에서 떨어져 용병단에 합류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설 여관에 나는 살짝 흥분했다.

우선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그 다음 물은 있는데 들어갈 목욕통이 없는 관계로 목욕을 못한 몸을 씻고,자기 전에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시겠다는 소박한 포부를 다졌다.

하지만 나는 여관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코를 막으며 잽싸게 한걸음 뒤로 물러서야 했다.

"어쿠!뭐야,꼬마?안 들어가냐?"

내가 멈추자 뒤따라 들어오던 용병들이 멈칫하며 외쳤다.

"......여길?"

"그럼 밖에 있을 테냐?"

여관은 밖에서 보기보다는 훨씬 넓었다.문제는 그 넓은 내부를 험상궂은 덩치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하나같이 여관에 들어서는 우리,정확히는 유난히 일행 중 튀는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도 아니었다.

난 얼굴 두꺼운 게 자랑이니까!문제는 여관 안을 그득 채우고 있는 희뿌연 연기들.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보일 정도니 말 다했다.

저건 분명 담배연기다.그런데 뭐가 이리 독하냔 말이다!(담배 피면 몸에 해로워요!)

"콜록!콜록!코올록!"

난 연기는 딱 질색이었다.

시야를 막을 정도라면 더욱 싫었다.나를 밀어내는 듯한 진득한 연기에 잠시 주춤거렸다.

나는 결국 이십여 명의 용병들에게 떠밀려 여관 안으로 들어서야 했다.여관 안은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이 정도 연기면 담배 안 피우고 숨만 쉬어 연기를 재활용해도 되겠다 싶었다.

아넬의 옷자락을 꼭 쥔 나는 나름 불쾌하다는 뜻으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샤벨이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그 곁에 아넬과 내가 섰다.주위의 모든 시선이 내 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저 사람들 왜 이쪽을 보는 거죠?]

[글쎄,내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게 아니면 이곳에서 어린애는 처음 봤거나......

[......그건 절대 아니라고 보는데요,마스터!]

[절대?네가 감히 주인님 말씀에 토를 다는 거냐?]

[아뇨,설마요.]

라이의 부정 어린 목소리.

나는 방을 잡았는지 계산을 하는 샤벨을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럼 너는 사람들이 왜 이쪽을 보는 것 같은데?]

[음,아마도 제가 너무 아름다워......]

[닥쳐.]

누가 보면 그 주인에 그 정령이라 그럴까 봐 겁난다.

[어흑,으흑흑흑.]

라이의 서럽게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밖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난 흥하고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흥!흥이란다.거 꼬마가 아주 귀엽군,그래.흐흐흣."

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귀에 거슬리다 못해 신경까지 거슬리게 하는 듣기에 심히 거북한 목소리.

내 눈길이 도착한 곳에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보이는,켄타보다는 못하지만 충분히 거구의 남자가 나를 향해 뜨거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두꺼운 입술에 반쯤 감은 눈이 두꺼비 같은 그 남자는 그 크고 두꺼운 입술로 진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손을 천천히 흔들어 보였다.그러면서 하는 말......

"흐흐,잔뜩 겁먹은 표정이 더 귀엽군."

[으흑흑,흐흐,으웨엑.마스터,저 아까 먹은 마나석이 넘어올 것 같아요.](마나석 엄청 비싼거 아니던가요?!제가 알기론 천문학적인 액수라 하던데!)

"구겨 넣어."

울던 라이도 그치게 만드는 저 강력한 느끼함!난 그만 눈길을 돌려버렸다.

못생긴 건 용서해도 느끼한 건 용서할 수 없다는 나의 신조를 저 남자가 알 리 없지.

나는 아넬의 옷깃을 더욱 꼭 쥐었다.아넬을 따라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가는데 알 수 없는 오싹함에 몸이 떨렸다.

흘깃 두꺼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으흐흐.무서워서 떠는 모양이군.다들 나만큼만 생겼어도 겁을 안 먹었을 텐데 말이야."

제발 웃지 마.

"......지랄염병을 해요."

[맞아,맞아!염병을 해요!염병을!]

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내 말을 못 들었는지 여전히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눈길을 보내는 남자.

아무리 비위 좋은 나도 저 웃음은 도저히 수용 불가능이었다.다시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떠는데 아넬의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지니!"

그 목소리에 내포된 불신에서 순간 나는 소리를 내서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잽싸게 필살기 중 하나인 해맑은 웃음을 선보였다.

"네?아넬 언니."

용병들에게 실험을 실시한 뒤에 그들이 간혹 따지러 오곤 할때도 사용한,나는 몰라요,라는 웃음.

"방금......아니,아니다.내가 잘못 들었나 봐."

"헤헷,그래요?어서 가요!"

"지니,언니 먼저 내려갈 테니 귀 뒤까지 깨끗이 씻고 내려오렴."

아넬이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말했다.

"네에~."

각자 알아서 목욕을 한 후,식사를 하기로 했다.

나는 계획과는 약간 다르지만 아넬을 따라 목욕을 먼저 했다.물은 역시 운디네가 받아주었다.

머리에 비누칠을 하며 아넬이 나가는 것을 지켜본 나는 다시 욕조 속에 몸을 담갔다.

나도 빨리 씻고 나가서 식사를 해야겠다.그런데 그 느끼한 남자는 아직도 있으려나?

그 웃음이 떠오르자 다시 몸이 떨려왔다.

[주인님,뜨거운 물을 더 부을까요?]

"음,아니 괜찮아."

익숙한 자세로 욕조 위에 걸터앉은 운디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물 위로 금발이 잠겨 있었다.허리께까지 자란 머리카락이다 보니 금색이 내 어깨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워낙 강하게 곱슬거려 그런지 물에 젖었는데도 곱슬기가 남아 있었다.음,머리카락은 이곳에서의 아빠를 닮은 것 같았다.눈은 엄마를 닮았다.

거기까지 떠올리자 전형적인 귀족의 생김새라며 날더러 귀족의 모범이 되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하는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생긴 할아버지,아주 전형적인 귀족 노인이었다.

1년에 한 번 보는 나에게 항상, '귀족은' 으로 서두를 여는 할아버지는 나에게 드물게 두려운 존재다.

내가 절대 거역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을 들어보라면 할아버지,드미트리의 왕 디켈 3세,그리고 이루제,아넬 정도?이루제는 왠지 모르게 대하기가 어려웠다.

아넬은 나를 구해주고 돌봐준 은인이고......켄타는 빼도록 하자.

따뜻한 물에 몸이 노곤해지더니 이내 졸음이 오려고 할 때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대충 물기를 닦아내고 운디네를 시켜 빨아놓은 옷을 입었다.

이 한 벌로 버틴 지 벌써 닷새째였다.그나마도 빨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하긴,씻지도 못했는데 옷을 빨 새가 어디 있었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머리 감는 정도가 전부였다.뭐,산중인데 그게 어디냐 만은......

드래곤 로드의 몸이 굳어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 드래고니아.

그중 일부에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마나가 밀집되어 있는데 바로 내가 가로질러온 부근이 그런 경우였다.

당연히 그곳은 마나훈련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그곳은 그 최고의 장점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몬스터들이 득실거린다.마나는 사람뿐 아니라 몬스터들에게도 강력한 힘을 주었다.

용병단과 내가 산을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정상쯤에서 해치웠던 오우거 때문이었다.

우린 오우거의 피를 수레 주위에 뿌리고 일행 중 몇몇은 핏물을 담은 주머니를 메고 다녔다.

이 방법은 오우거보다 약한 몬스터들의 접근을 막아주었다.

확실히 마나 밀집도가 높은 곳에서 훈련을 하니 짧은 시간에 훨씬 많은 마나를 모을 수 있었다.

평소보다 약 30퍼센트 정도의 마나가 더 쌓였던 것이다.마나의 양이 늘어간다는 건 꽤나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이제는 라이의 몸도 거의 다 바뀌었으니 돈을 만들어서 옷을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 이래봬도 고급이거든.

운디네가 머리에 맺힌 물방울을 모조리 흡수했다.한결 상쾌해진 기분으로 방을 나서는데 라이가 잽싸게 기어와서 허리에 매달리자 은근한 묵직함이 전해져온다.

조만간 라이 전용 가방을 하나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1층으로 내려갔다.

"으음......"

눈을 돌려 하나같이 고약한 인상들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한쪽 식탁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켄타가 보였다.과연 덩치가 크다 보니 단연 튀는군.

용병단 일행이 자리 잡은 식탁으로 다가가자 나를 흘깃 본 용병 하나가 옆 자리의 빈 의자를 빼내 앉으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음......내 의자 어디 갔어?"

"......"

막 앉으려는데 거품 가득한 맥주잔을 들고 나타난 한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의자 주인인가 보다.

"뭐해,꼬마?어서 앉아."

"네!"

잠시 예의상 뜸들여준 나는 재촉하는 용병의 말에 두 번 사양하지 않고 냉큼 앉았다.

식탁 가득 넘쳐나는 음식들.대부분이 고기류였고,그 외에는 술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뭘 먹어야 하나 식탁 위를 살피는데 내 앞으로 큼지막한 고깃덩이가 내려졌다. ......설마?

"내 거예요?"

그동안 내 실험 대상이 되었던 사실을 잊었는지 나에게 귀한 고기를 건네는 헐큰지,할큰지 하는 용병.

난 그를 향해 두 눈을 껌벅였다.그가 뭐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흠,물론 꼬마 네 녀석 거다."

"에......고마워요.헤헤."

최근 든 생각이지만 샤벨 용병단은 인상과 달리 좋은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바보스러울 정도로.뭐 굳이 고기를 줘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마스터,이 남자 저번에 콧구멍으로 물을 역류시키는 기술 실험했던 남자죠?]

라이의 물음에 나는 잠시 아마도 '할크' 라고 했던 남자를 쳐다보았다.그랬나?

[아마 그랬던 것 같다.왜?]

[아뇨,미쳤나 해서요.]

[미쳐?왜?멀쩡한데?]

난 흑맥주를 들이켜는 할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당해놓고 마스터한테 고기를 양보하는 걸 보니 미쳤거나,아니면 그때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부분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아서요.]

라이의 말은 상당히 거슬렸지만 왠지 모르게 옳은 말 같았다.하지만 순순히 인정할 순 없었다.

[흥!그게 아니라 나의 매력에 무릎을 꿇은 거란다.]

[......]

대답 없는 라이를 뒤로 하고 나는 고기를 뜯었다.

일단 배가 고팠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음식이었기에 예의고 나발이고 없이 두 손으로 잡고 뜯었다.

그렇기 고기에 코를 박고 있는데 돌연 샤벨과 아넬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우구우가우가?"

아넬과 샤벨의 행방을 물을 생각으로 입을 열었는데 고깃덩어리가 말의 진로를 방해했다.

하지만 그 말을 용케 알아들었는지 곁에 앉아 있던 켄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가우가우구가아가가우가앙."(......할말이 없어지는......)

난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내가 뭐라 그런지도 헷갈리는 마당에 남의 말을 해석할 능력은 없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요량으로 고기를 삼키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 위에 얹어졌다.

스윽,어깨 위를 보았다.양쪽에 앉은 켄타와 할크를 둘러보았다.둘 다 아닌데?

"흐흐흐.거참 귀엽네."

기분 나쁜 숨결에 나는 고개를 돌릴 용기도 내지 못하고 물고있던 고기를 뱉어냈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추할 거다.

이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앉아 있던 의자가 스윽 하고 돌아갔다.그러자 나를 향해 두꺼비 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예의 그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푸웃!"

입에 물려 있던 고기조각이 날아가 남자의 얼굴 위에 찰싹 붙었다.남자가 순간 눈을 찔끔 감았다.조금,아주 쪼금,미안했다.

[앗,디러!]

디,디러?라이,네 죄를 네가 알렸다!

라이에 대한 분노와 눈앞의 남자에 대한 부담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으흐......이런,놀랐나 보군.하긴 내가 워낙 잘 생겼어야지 말이야.푸헤헤헷!"

이보셔,거울이라곤 본 적이 없나 보지?난 심히 부담스러운 이 남자를 피해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켄타 곁에 서서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우가각?"

켄타는 여전히 입 안 가득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돌린 켄타와 느끼한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순간 정적이 흐르고......

"푸우우웃!"

그 정적을 깬 건 방금 내가 선보였던 음식물 튀기기와는 차원이 다른 거의 뱉어내기 수준의 디러움을 보여준 켄타였다.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여준 켄타에게 나는 새록새록 동질감이 생겨남을 느꼈다.

"크아아악!"

양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그 음식을 씹어대던 사람의 차이인지는 몰라도 남자가 별안간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 위로 덕지덕지 내려앉은 음식물을 마구 털어냈다.그 털어낸 음식 중 하나가 퐁당 경쾌하기 그지없는 소리를 내며 왠 남자의 맥주잔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악!"

그 남자 또한 괴성을 지르며 불행의 원인으로 보이는 우리를 노려보았다.다소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런......난 슬쩍 몸을 낮춰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마스터,숨는 겁니까?]

[관전하는 거야!]

테이블 밖으로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느끼한 남자는 부하로 보이는 사람이 건넨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고 켄타는 그 남자를 노려보다가 다시 고기를 뜯었다.저런 먹보 같으니.

"아무리 내 미모가 부럽기로서니,감히 더럽게 먹던 걸 튀겨?이 겁쟁이 켄타 녀석이 그새 간덩이가 팅팅 부은 모양이지?"

엥?켄타와 그 남자는 아는 사이였나 보다.

느끼한 남자의 말에 켄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이 불치병 환자가 감히 누구더러 겁쟁이래?너야말로 그 역겨운 얼굴을 어따 들이미는 거냐?괜히 아까운 음식만 뱉어냈잖아!"

"여,역겨워?이 운송의뢰만 하는 겁쟁이 용병단이!"

점점 그들의 목소리가 높여졌다.이내 용병단까지 들먹이는 두꺼비 남자 덕분에 앉아 있던 용병 일행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돌연 누군가가 두꺼비 남자의 머리 위로 맥주를 쏟아 부었다.

"이 개구리 같은 놈이 감히 내 맥주를 망쳐놓다니......죽어볼테냐?"

맥주 속에 음식물이 튀겼던 그 남자였다.그의 뒤로는 역시 일행으로 보이는 험상궂은 사내가 몇 명이 서 있었다.

"푸훗,물에 젖은 개구리군.크카카캇!"

"이,이놈들!"

두꺼비에 비하면 개구리는 귀여운 것 같지만 충분히 기분이 나빴는지 느끼한 남자는 어울리지 않게 작은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

"긴말할 것 없다!덤벼라 이 개구리 왕자야."

켄타의 도발에 남자가 자신의 무기로 보이는 창을 집어 들었다.

"이 근육바보가!오늘 그 면상을 짓이겨 주마!"

"누가 할 소리!"

"내 맥주는 어쩔 테냐!"

정말 싸울 심산인지 셋은 문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그들이 멀어지자 일단 식탁 밑에서 나왔다.그리고 몸을 일으켜 서로 문을 열겠다고 옥신각신하는 그들을 보고는 어째 싸움의 원인이 나 때문인 것 같아 입맛을 다셨다.

이내 켄타가 문을 열겠다고 몸으로 두 남자를 밀며 문 앞에 섰다.그리고 켄타가 막 문을 열려는데......

"컥!"

누군가에 의해 먼저 문이 열렸고 문에 정면으로 머리를 들이박은 켄타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문을 밀고 들어오는 또 다른 사람.혹시 이제는 아예 네 명이 치고 박고 싸우는 게 아닌가 하고 불안감이 스쳤다.

"어라!켄타?"

다행히도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은 아넬과 샤벨 단장이었다.

잠시 켄타에게 시선을 준 아넬이 이번에는 눈을 돌려 다른 두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허억!이거......아넬리아 누님 아니십니까?"

"에?"

맥주에 음식이 빠졌던 남자가 아넬을 보고는 반색했다.

그러더니 덥석 아넬의 손을 잡는 게 아닌가?아넬이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이야,오늘 일진이 좋군요!아넬리아 누님을 다 뵙고 말입니다.이 검은 피부에 은발 머리,쌍검까지,아넬리아 누님 맞으시죠?"

그새 맥주에 퐁당한 사건은 잊었는지 오늘 일진이 좋다는 남자,기억력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네,맞는데......이 손 좀 놔주시겠어요?"

아넬의 말에 남자가 아쉽다는 얼굴로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 뒤로 남겨진 둘이 그런 그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흥,아넬이 뭐가 좋다고 저러는 건지......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으풋!"

오늘 일진이 안 좋은 건 켄타도 마찬가지였다.아넬의 분노의 일격을 그대로 허용한 켄타는 또다시 이마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다.

아넬은 그 모습을 보며 눈 깜짝할 새에 꺼내들었던 검집을 다시 허리에 찼다.

그러면서 느끼한 남자를 향해 '댁은 뭐냐? 라는 눈빛을 보냈다.

"으흐흐흐.아넬리안지 아멜리안지 나는 관심 없다고.무릇 미인이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남자는 어느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소란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에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엥?"

난 수많은 시선을 받아내며 어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두꺼비가 도대체 뭐라는 거야?설마 나는 아니겠지?

"......지니?"

아넬의 입에서 다소 의심스럽다는 말투가 나왔다.

"흐흐,지니라고?이름도 귀엽네.내가 놀아줄까 꼬마야?"

으악!이건 악몽이야.

[마스터,저런 걸 보고 로리 취향이라는 거 맞죠?우헷!저 이래봬도 똑똑하거든요.]

부정하려던 현실을 굳이 꼬집어 말해준 라이를 허리에서 냅다 끄집어낸 나는 저 멀리서 나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내는 남자에게 휘익 던져버렸다.

끼리끼리 논다고 원래 뱀이랑 두꺼비는 워낙 사이가 좋으니 말이다.

나에게 몰려들었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라이에게 집중되었다.

여관 안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고 나는 후회했다.어째 인생이 고달팠다.

본래 정적 뒤의 소란은 더욱 소란스러운 법이다.여관 안의 누군가에게서 터져 나온 한마디.

"백사다!"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앉아 있던 장정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리고 그중 누구보다 빠르게 라이를 움켜쥔 것은......

"내 거야!"

[샤악!내가 왜 네놈 거냐!놔라 이놈아,놔!]

켄타였다.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라이가 추락한 지점은 켄타와 아넬,샤벨,두꺼비 남자,아넬의 팬인 듯한 남자의 한가운데였다.

켄타는 잽싸게 두 손으로 라이를 붙잡고는 소유권을 주장했고 라이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몇몇이 켄타에게 다가갔다.

"쓰읍......이보게,좋은 건 무릇 같이 먹어야 안 쓰겠나?"

"그래,그래.백사가 정력에 그렇게 좋다며?우리 같이 뱀술이나 담가보자고.응?"

두 남자의 말에 켄타가 콧방귀를 뀌더니 라이를 치켜들며 말했다.

"이 사람들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모양인데 좋은 건 모름지기 혼자 먹어야 제 맛이라고!그리고 뱀하면 당연히 뱀구이지!"

"아니 그런 망발을!뱀은 모름지기 술로 담갔을 때 비로소 빛난다는 것도 몰라?"

"어허!네가 진짜 별미를 알려주지.자네들,뱀 샤브샤브라고 들어는 봤나?"

켄타를 중심으로 몇몇 장정들이 투덕거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 정도는 미미했다.

라이의 먹음직스러운 자태에 반한 몇몇의 남자들이 더 합류한 것이다.

"댁들,뱀찜이 얼마나 맛있는 줄 아나?"

"뱀탕의 담백함을 어디에 비유하려고!"

"뱀 꼬치구이는 먹어봤나?"

"음?뱀 꼬치구이나 그냥 구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난 회 쳐서 먹고 싶은데."

어느새 그들은 이 뱀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가,하는 주제로 모여 앉아 회의를 시작했다.

[마스터어,마스터!헬프 미!]

아련히 들려오는 라이의 목소리를 살며시 무시해준 나는 예상과 달리 그다지 큰 소란이 없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아넬과 식사를 함께했다.

역시 꼭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느끼한 남자도 어느 샌가 뱀 요리연구회(?)에 합류했기에 나는 편한 마음으로 고기를 뜯었다.

"좋아!뱀 구이로 결정했다."

결정이 내려졌는지 켄타가 쪼그리고 있던 자세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 구이도 나쁘지 않지,백사를 맛볼 수만 있다면야."

"뼈로는 육수를 우려먹을까?"

다른 사람들이 따라 일어나며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런 그들의 수근거림에 켄타가 돌연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

"이건 내 거라고!누구 맘대로 맛을 보고 육수를 우린다는 거야?"

켄타의 말에 사람들이 돌연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우리 사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우리 요리연구회의 우정을 깨뜨릴 참인가?"

"크윽!그럼 그렇지,먹을 것 앞에 장사 없단 말이 헛말이 아니었군.내 자네를 그렇게 믿었건만!"

"난 껍질만 줘도 되는데."

채 10분이나 됐을까 하는 시간에 어느새 우정이 생겼는지 그들은 웅성거렸다.

한 열 명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은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못 줘!안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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