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71)

각자의 천막과 침낭을 치우고 새벽 수련을 하던 기사들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식사 준비에 한창이던 요리사들,이제 막 일어나던 학생들과 선생들까지 섬뜩하게 한 비명소리.아니,차라리 울부

짖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가깝겠다.

"단장님!"

놀란 기사들이 기사단장의 개인 천막 안으로 우르르 몰려갔다.천막 안에 있는 거라야 간이침대와 의자 정도가 전부였다.

"크흑!"

기사단장은 자신의 짐을 풀어헤친 채 엎드려 오열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문제의 원인을 알아낸 것은 부단장 쿠퍼였다.단장은 항상 천막 한쪽에 갑옷을 가지런히 벗어놓았는데 그 갑옷이 있어야 할 자리가 휑했다.

"헛!단장님의 갑옷이......"

부단장 쿠퍼가 신음처럼 말을 내뱉자 기사단장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는 두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갑옷만이 아냐!검은 물론이고 가방 안에 있던 돈까지 모두 없어졌어!가장 끔찍한 건 전하께서 친히 내려주신 내 단장 위임패가 없어졌단 말이다아!이익!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냐

.그래,당장......당장 수색조를 짜라!그리고 어서 내 위임패를 찾아와!"

"다,단장님!그건......"

위임패 하나 찾자고 수색조를 짤 수는 없었다.최소한으로 줄여진 인원이었기에 더 이상 빼고 자시고 할 기사도 없었다.

하지만 단장이 평소 위임패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알고 있는 부단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땡땡땡

아침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기사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 찾아오지 못하면 너희들 모두 모가지......!"

잔뜩 흥분한 단장이 손가락을 뻗고 핏대를 세우며 말하는데 술렁이는 기사들 사이를 뚫고 디넬 선생이 나타났다.그는 매우 당황한 얼굴이었다.

"크,큰일이오!내 건틀릿은 물론이고 돈이며 심지어는 타고있던 마차의 바퀴까지 몽땅 도둑맞았소!"

"뭐,뭐요?댁도 말입니까?"

단장과 디넬 선생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둘은 잠시 침묵하다 디넬 선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설마......그럼 단장님도?"

"......정말 도둑이라도 들었단 말인가?이런 숲에서?"

"그게 말이나 됩니까?대체 이게 무슨 해괴한 일입니까!"

다시 잠시 침묵이 흘렀다.혹여 불똥이 튈까 기사들이 하나같이 숨을 죽였다.

단장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는데 또 누군가 기사들 사이를 헤집고 나타났다.

허름한 옷차림의 마부였다.기사며 기사단장,디넬 선생까지 그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마부 주제에 내 천막에 함부로 들어오다니?죽고 싶은가 보지?"

가뜩이나 기분 나쁜 단장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 없었다.이에 마부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마부는 떨리는 입을 겨우 열어 말했다.

"죄,죄송합니다.하지만 아가씨가 없어지셔서......"

"......아가씨?학생 말인가?"

단장의 얼굴이 더 깊게 찡그려졌다.

"예,예에!아침식사를 알리는데 도통 나오질 않으셔서 문을 열었더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찾아는 봤나?어디 근처에 있는 것 아닌가?"

"나,나가시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게다가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왔지만......어디에도 안 계셨습니다."

"뭐요?그게 정말이오?"

디넬 선생이 놀라 소리쳤다.단장의 얼굴은 더없이 파리해졌다.

학생이 사라지다니!그건 모두 기사단장 자신의 책임이 된다.

이번 대표팀의 아이 하나하나는 드미트리 왕국의 미래를 짊어진 인재라고 봐도 무관했다.

게다가 이미 짜여 있는 대표생 중 하나라도 비게 되면 윈칸축제에도 여파가 미치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 엘란 제국에 나쁜 인상이라도 주게 된다면 모가지는 물론이고,자칫 드미트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명목으로 목이 피를 뿌리며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그렇습니다."

마부의 대답에 디넬 선생과 기사단장은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누가......?사라진 아이는 누구요?"

디넬 선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일단 가장 큰 책임은 기사단장이 지게 되겠지만 인솔 교사인 그도 결코 그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자세히는 모르겠고,정령반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지니......크로웰!"

신음 같은 이름이 디넬 선생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이,레오를 밀어내고 대표팀으로 선발된 것도 모자라 건방지기 짝이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지니 크로웰은 왕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이가 아닌가?그렇기에 더욱 미워할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이번 대표팀만 해도 그랬다.본래 유례없는 일이라며 정령반은 대표팀에 거론되지도 못했다.

하지만 보고서를 확인한 왕이 지니 크로웰을 반드시 대표팀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노성을 질렀다는 학장의 말에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지니 크로웰을 대표팀에 포함시켜야 했다.

왕은 물론이요,학장의 눈이 지니 크로웰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하필 지니 크로웰이 실종이라니!대체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디넬 선생과 생각이 다를 바 없는 기사단장의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상식 밖의 사건이 연달아 터지자 단장은 그야말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쉬울 줄만 알았던 이번 임무에는 마가끼어도 단단히 끼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그 모든 마의 원인이 지니 크로웰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다만 대표팀은 매우 소란스러운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엣취!"

[마스터,감긴가요?]

새벽같이 출발한 샤벨 용병단의 짐수레를 얻어 탄 나는 연신 재채기를 하며 코를 훌쩍였다.

"킁!누가 내 얘기하나 봐."

[무슨 얘기요?]

"글쎄,칭찬일까?"

아침이 밝았다.화창하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

드디어......드디어......이탈 파트가 끝났습니다!그것도 매우 안정적으로!

오타가 있는 부분은 지적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email protected] <-- 으로 보내주세요 ~

타이핑은 계속 됩니다.

**

샤벨 희생단

"......니?......지니?"

심하게 덜컹거리는 마차에 어느 정도 적용된 나는 조금,정말 조금 졸고 있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했고 주변 소리가 점점 멀게 들렸지만 잠든 건 아니었다.그러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네?네,아넬 언니.왜요?"

만난 지 이제 하루가 지난 아넬리아.자신을 아넬이라고 불러달라고 한 그녀는 밤의 달빛에 바스러질 듯한 은빛 머리와 낮의 태양과 어울리는 건강한 구릿빛 피부가 멋진 쌍검사였다.또한 그

녀는 샤벨 용병단의 용병으로 나를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다.

거기다 마침 베일란으로 운송의뢰 중이라며 나를 태워주겠다는 호의를 베푼,내 짧은 10년 인생 역사상 드물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이런 데서 잠들면 안 돼.조금만 더 가면 야영을 할테니까 참아보렴."

"네,언니."

고개를 끄덕인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멍하니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았다.

샤벨 용병단에 합류한 지 이제 하루.드미트리의 수도 샤란에서 베일란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드미트리와 베일란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드래고니아 산맥을 우회하는 방법.

그리고 험하긴 하지만 드래고니아 산맥을 가로질러 가는 방법.

우회해서 갈 경우 약 13일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대표팀은 속도가 느리다 보니 도착 예정일을 20일 정도로 잡은 것 같았다.

산맥을 가로지르게 되면 7일 정도가 소요되는데 급한 운송의뢰를 맡은 경우에는 험하긴 하지만 산맥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산맥의 끝자락이라 몬스터의 수도 비교적 적어 노련한 용병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7일 안에 베일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앞으로 나흘 정도면 베일란에 도착한다니......그럼 나는 거기에서 열흘 이상을 대표단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된다.

다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그러려면 그 두 길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인 판헬 계곡의 다리가 있는 반대쪽으로 가야 했고,나를 그 다리까지 데려다줄 정도로 샤벨 용병단은 한가하지 못했다.

그나마 수레라도 얻어 탄 것에 감사해야 했다.

욱신거리는 엉덩이가 편안한 내 마차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했지만,어쩌랴?이대로 가는 수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레가 멈추고 사람들이 짐을 풀기 시작했다.

야영을 준비하는 것이다.샤벨 용병단의 수는 20명 정도.그중 절반은 짐꾼이었다.

아넬의 말로는 짐이 가장 중요한 호위대상이라고 했다.

산맥을 우회하는 운송의뢰라면 짐 다음으로 말이 호위대상이 됐겠지만 산맥을 가로지르다 보니 말은 짐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따라온 것이 수레를 끌게 되는 짐꾼.

그들은 샤벨 용병단의 하급용병으로 전투력보다는 노동력을 보고 운송의뢰에 포함되었다.

아넬은 중상급 용병이었고,켄타는 상급용병이라고 한다.

"아도르!"

[흠?흠?흠?흡!난 돌아가겠네.]

아도르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지 이리저리 몸을 돌리더니 돌연 돌아간다는 말을 내뱉았다.

"뭐?네가?왠일로?"

[또 라이트 상태로 가만히 있으라고 하려는 것 아닌가?난 그런 일은 좀이 쑤셔서 못해먹겠네.]

어쭈,이게 좀 컸다 이거냐?사실 샤벨 용병단의 단장은 나를 버려두고 가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정령사니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내 말에 용병단장은 '한 번 두고 보겠다.만약 짐이 되면 당장......' 이라며 검을 들어 보였다.

아니꼽긴 했지만 길도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분발하는 것뿐이었다.

"겨우 어제 딱 한 번 해본 것뿐이잖아.앞으로 그걸 나흘 정도만 하면 매일 하루에 한 번씩 소환해서 자유 시간을 줄게.어때?"

[......정말?]

"그래,정말!너 주인을 그렇게 못 믿어?"

한 1분 정도씩?충분하겠지 뭐.

[주인이 좀처럼 믿음직스럽지 못한 걸 낸들 어쩌겠나?]

"그래서 안 하겠다는 거야?그럼 어쩔수 없지,뭐.돌아가."

나는 슬쩍 아도르에게 향하는 마나의 양을 줄였다.그러자 아도르의 몸이 흐릿해졌다.

[......하겠네.한다니까,이보게 주인!]

"진작 그럴 것이지."

아도르가 공중으로 올라가며 궁시렁거렸다.

[내가 말이지......이런 거나 하려고 말이지......주인이 되어 가지고 말이지......]

"닥쳐!"

아도르가 라이트를 시전하자 주위가 온통 환해졌다.

그 빛 아래서 용병단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짐을 한가운데로 몰고 그 주위로 자신들의 잠자리를 꾸렸다.

작은 모닥불이 군데군데 켜졌다.

"아도르,그만 쉬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도르는 숲 저편으로 사라졌다.대체 어딜 저렇게 쏘다니는 거야?

아도르는 특별히 내 명령이 없으면 어디론가 휑하니 날아갔다가 휑하니 돌아오곤 했다.

내 목소리가 닿는 영역 안에 있었기에 필요할 땐 부르면 그만이지만.

나는 저녁 준비를 하는 쪽으로 다가가서 운디네를 불렀다.

"운디네."

[네,주인님.안녕하세요?]

"우오오!"

싱긋 웃으며 말하는 운디네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몇몇이 다가와 운디네를 만져보려 했지만 운디네를 자유롭게 만질 수 있는 건 소환주뿐이었다.

그 외의 사람이 만지려면 탁월한 친화력을 보이거나 아니면 소환주가 마나로 운디네에게 물리력을 행사해줘야 했다.

"운디네,여기 있는 솥단지 안에 물을 가득 채워주렴."

[네에.]

운디네가 작은 꼬리를 파닥거리며 다섯 개의 솥단지 안에 물을 가득 채웠다.

솥단지 가득 물을 채워주고 나니 이제 마나가 반 정도 남아 있었다.

"운디네,나랑 조금 더 있다가 갈래?"

[저,정말요?그럼 주인님이랑 조금 더 있어도 되는 건가요?]

"물론."

아도르와 똑같은 단어를 쓰건만 왜 느낌이 이다지도 다를까?

운디네가 내 어깨로 날아와 앉았다.역시 둘을 소환하고 있자니 마나의 소모가 심했다.

이제 아도르를 불러들이려는데 켄타가 다가왔다.

웬만한 사람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덩치.처음엔 나를 꼬마라고 불렀고,정령사라는 사실을 알자 정령꼬마라는 해괴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이봐,정령꼬마.부탁이 있는데."

"부탁이요?"

켄타가 내 머리보다 큰 손을 내밀며 말했다.

"뱀 좀 빌려주라."

[샤악!]

"네?그러죠,뭐."

의아하긴 했지만 난 주저하지 않고 허리께에서 라이를 뽑아냈다.

라이가 심하게 펄떡대는 바람에 놓칠 뻔했지만 켄타의 손에 잡히자 금세 추욱 늘어졌다.

[흐흑,여우를 피했더니 웬 곰이 나를 괴롭히는구나.크흐흑.]

나는 멀어지는 라이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아넬이 빌려준 침낭을 정리했다.

[아돌!어디 있어?이만 돌아갈 시간이다.]

[헛!아돌 없다.]

......그냥 마나를 끊어버렸다.내 마나는 땅에 퍼오는 줄 아나?

샤벨 용병단에 합류하고 나서 깨달은 것이지만 우리 대표팀은 매우 굼떴다는 사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는 데 2시간은 걸린다.하지만 샤벨 용병단은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하고 출발하는 데까지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건 밤에 야영을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다.조금이라도 더 자기위해 불침번을 제외하고는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잠이 든다.

그리고 그런 주위 분위기에 취해 나도 금세 잠이 들어버린다.

딱히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는 없었지만 음식 냄새가 나자 사람들은 하나둘 발걸음을 옮겼다.

"지니,같이 가자."

"네!"

아넬의 그릇을 빌려 그 뒤를 따라 걸어가는데 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아악!이 못된 인간들!네놈들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말 테다!]

독기 어린 라이의 목소리.어느새 식사를 배급해주는 곳까지 왔지만 라이는 목소리만 선명할 뿐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곁에 있던 아넬이 식사 담당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배급을 안 하는 거지?"

"아아,잠시만 기다려봐.아직 고기가 안 익어서 말이야."

이마와 입가를 가르는 흉터에 어울리지 않게 요리 담당자는 친절하게 대꾸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한 손으로 누르고 있는 솥단지의 뚜껑이 살아 있는 것처럼 철컹 소리를 내며 열리려 하고 있었다.

[이것들이!크아악!]

저건가?난 슬쩍 켄타에게 눈길을 주었다.켄타가 내 시선을 피해 딴청을 피웠다.

"어?다 익었나 보다."

"오옷!오랜만에 뱀 고기를 먹겠군."

"흐흐,질길수록 정력에 좋다던데."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솥단지는 그대로 있었다.

흥,보나마나 죽은 척 내지는 자는 척이겠지.이내 커다란 솥뚜껑이 천천히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솥 안으로 모여들었다.나도 슬쩍 동참했다.

"흠?고기가 없는데?"

요리 담당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데 부글부글 끓고 있는 수프 안에서 무언가 새까만 것이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날아가 수프 안을 바라보던 켄타의 목에 매달렸다.

[샤아앗!죽여 버리겠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켄타의 목으로 향했다.

돌연 목을 휘감은 그것에 켄타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목과 라이 사이에 손을 끼어 넣었다.켄타의 어깨와 이마에 불끈 힘줄이 돋았다.

굵은 근육이 움찔거렸지만 라이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 제지에 당하기만 하던 라이가 이번엔 제대로 열 받았나 보다.

[스톱,라이.그만해!]

켄타의 얼굴이 조금씩 당황에 물들던 찰나,내가 제지하자 라이가 스르륵 힘을 풀고는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더니 분노한 듯 온몸을 배배 꼬며 데굴데굴 땅바닥을 굴렀다.

[샤악!이 곰 같은 놈.반드시 네놈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라이가 꼬리로 철썩철썩 바닥을 때렸다.땅이 움푹움푹 파였다.

결국 라이는 분에 못 이겨 사방을 굴러다녔다.라이의 몸통박치기에 커다란 솥이 찌그러졌다.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라이를 피해 달아났다.나는 볼을 긁적였다.

식사를 마치고 억울하다며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라이를 내버려둔 채 나는 아넬의 곁에서 침낭을 펴고 누웠다.

나도 그동안 제법 고급으로 살았는지 침낭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라든가 답답한 느낌이 거치적거려 잠이 오질 않았다.

불침번이 피어놓은 모닥불이 눈앞에 아른거려 더욱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연신 몸을 뒤척거리는데 어느새 라이가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 오는 게 느껴졌다.

[라이!]

[왜요?]

딴에는 삐졌다는 표시인가 보다.말이 짧았다.

[말이 짧다?]

[......왜 그러십니까,마스터?]

[너 화났구나,참으라고만 해서?]

[아뇨,그냥......마스터가 저만 안 예뻐하시고 또......그 곰탱이 같은 인간 놈이 괴롭히는데 아무 말도 안 하시고......그리고 저만 때리고,쓸모없는 운디네 고것만 예뻐하고......만날 저

보고 닥치라고만 하시고......어흑.]

......아니라면서 그 뒤에 붙는 말들은 대체 뭐냐?라이는 은근히 속이 좁았다.만년 넘게 묵은 것이 왜 이리 속이 좁은 건지?도통 나잇값을 못한다니까.

[아냐,라이.내가 라이를 얼마나 예뻐하는데,그래.그리고 켄타한테 거역하면 이 주인님이 괴롭잖니?난 길 모른다.그리고 내가 때릴 수 있는 게 너밖에 더 있어?아돌은 때려봐야 나만 아프고,

운디네 그 조그만 애가 어디 때릴 데가 있니?그게 다아 이 주인님의 애정표현 아니겠어?운디네는 애잖아.당연히 예뻐해줘야지.그리고 '닥쳐' 는 아돌한테도 써.]

[......운디네는 애 아닌데......]

좀 달래줄 심산으로 한참 어르는데 라이가 불만인지 작게 말했다.

나는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뜻으로 되물었다.

[운디네 애잖아.딱 보면 몰라?]

[운디네 고것,올해로 서른은 됐을걸요.]

뭐?몇 살?

[몇 살?세 살?]

[서른!삼십이요.10곱하기 3말입니다.]

내가 잘못 들었나?사실 요즘 귀를 안 파긴 했지.나는 새끼손가락을 들어 잠시 귀를 후볐다.

[에이,그게 말이 돼?]

[모르셨습니까?정령계에서 중간계로 소환되려면 기본적으로 30살 이상으로서 정신이 안정된 녀석들만 가능합니다.너무 어린 정령은 소환이 되도 중간계의 탁한 자연에 적응도 못할 뿐 더러,

기술을 쓰는 데도 미숙하거든요.게다가 갓 태어난 하급정령이 숙련된 하급정령을 제치고 계약이 가능할 것 같습니까?보나마나 운디네 그 녀석도 나이 좀 먹었을 겁니다.그러니 마스터,겉모습

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제가 제일 낫다니까요?]

헉,세상이 나를 속였어!이럴 수가!운디네가 서른 살?아니,서른이 넘는다고?

[저,정말?]

대체 이엘 선생이 가르쳐준 것 중 쓸모 있는 게 뭐야?내 3년을 돌려줘!

[그럼요.제가 거짓말하는 거 보셨습니까?]

[많이 봤지.]

[흠흠......아무튼 운디네 보기보단 나이가 많다,이 말입니다.]

운디네의 얼굴과 30이라는 숫자가 도통 매치가 되지 않았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세상이 나를 놀리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라이만 해도 만 살이 넘는데 운디네는 그 정도면 애기지,암.

[그 정도는 용서할 수 있어.운디네는 귀여우니까.]

[마스터,그거 차별 아닙니까!저 보고는 늙은이라고 하셨잖아요?샤앗!]

라이의 머리가 순간 침낭 밖으로 튀어나오며 내 눈앞에 시위하듯 아른거렸다.하지만 서른 살이랑 만 살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험하게 생긴 것이 어디서 감히 머리를 들이밀어?캭!]

[너무하십니다!전 뭐 이렇게 생기고 싶어서 이렇게 생겼습니까?다 마스터 때문 아닙니까!책임지세요!으흐흑.]

좀 너무한 것 같아서 기분 좀 풀어주려고 했더니 도통 도와주지 않는다.

라이를 어떻게 패줘야 잘 패줬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는데 문득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유난히 커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라이,저것 봐.달이 굉장히 커다래.]

그 말에 라이가 몸을 침낭 밖으로 빼냈다.침낭 위에 똬리를 튼 라이는 고개를 들어 보랏빛 휘황찬란한 달을 올려다보았다.

라이의 까만 몸이 보랏빛으로 번들거렸다.

[그야......여기는 산맥의 정상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아넬이 조금만 더 가면 산의 정상이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힘들다는 아넬의 말에 나는 의문을 표했었다.

헌데 그 이유는 베일란 쪽은 마나가 충만해서 그런지 몬스터의 수가 더욱 많고 성질이 매우 포악하다는 것이었다.

[흐음,그런데 산 속인데 몬스터가 안 나오네?]

[몬스터요?마스터,몬스터 좋아하십니까?]

뜬금없이 몬스터를 좋아하냐고 묻는 라이.

세상에 몬스터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나는 달빛을 받아 보랏빛으로 빛나는 라이의 눈을 마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웬 드래곤 풀 뜯어먹는 소리?]

[안 좋아하세요?]

[그야......몬스터가 나타나면 피 튀길 것 아냐?별론데?]

내가 고개를 저으며 별로라는 뜻을 보이자 라이가 자신의 꼬리를 들어 머리를 긁었다.뱀도 머리 긁나?

[그래요?마침 한 마리 오기에 마스터가 좋아하시나 해서 그냥 뒀는데요.]

"......뭐?"

순간 나는 소리를 질렀다.라이가 꼬리를 들어 주위를 둘러싼 숲의 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뭔가 옵니다.덩치에 비해 육중한 힘을 가진 녀석이요.땅을 쿵쿵 울리는 것이 귀가 다 멍멍하군요.]

"......몬스터?"

[네,아마......아,저걸 오우거라고 하더군요.]

이런 니조랄.내가 채 입 밖으로 욕을 내뱉기도 전에 라이의 꼬리가 가리키고 있는 숲 한 쪽에서 새들이 후드득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 근처에 있던 불침번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몬스터다!비상!모두 일어나!"

그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불침번 근처에 있던 몇몇이 재빠르게 일어났지만 내가 있는 쪽에서는 아직 침낭 속에서 단잠에 빠진 용병들이 보였다.

아넬도 마찬가지.침낭에서 빠져나온 나는 바로 옆에 누운 아넬을 흔들어 깨웠다.

"아넬 언니!언니!"

"으음......"

아넬은 한 손을 들어 내 손을 밀어냈다.

그때 어두운 숲을 뚫고 무언가가 나왔다.검고 긴 팔이 한 번 휙 휘둘러지자 그 근처에 있던 용병 둘이 허공으로 날았다.

"몬스터요!오우거예요!"

"뭐얏!"

그래도 용병이라고 튕기듯 일어난 아넬은 자신의 쌍검을 꺼내들었다.달빛을 받아 검이 음산하게 빛났다.

"지니,넌 숨어 있어!"

아넬은 그 말을 남기고는 오우거 쪽으로 뛰어갔다.

이제 대부분의 용병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뒤쪽의 둔한 몇몇은 여전히 일어날 줄 몰랐다.거기에는 근육이 귀까지 막은 건지 코까지 골며 자는 켄타도 있었다.이럴 땐......

[라이,아직도 자고 있는 녀석들 피 안 날만큼만 물어주고 와라.]

[정말요?곰탱이도?]

[그래,곰탱이도!]

[우헤헷!샤랄랄라~.]

라이가 듣기 거북한 노래를 부르며 근처의 다른 사람들을 지나 켄타가 자고 있는 가장 뒤 쪽의 침낭 쪽으로 빠르게 기어갔다.

"크아아악!"

"히익!"

"우어어억!"

"대형을 짜라!"

"크악!"

켄타가 돌연 침낭에서 튕겨 나오며 뭔가 소리를 지른 것 같기는 한데 반대쪽의 소란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난 켄타가 일어난 걸 확인하고는 시선을 돌려 오우거 쪽을 바라보았다.

오우거의 손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사람들이 휙휙 힘없이 날아갔다.그새 돌아온 라이가 내 다리를 타고 목으로 올라왔다.

[마스터!확실하게 물어줬씁니다.칭찬해주세요!]

"그래,잘했어.어디 물어줬니?"

[엉덩이요.우헤헤헷!]

"장하다,우리 라이."

라이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주었다.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생각으로 손을 들었는데 내 곁으로 휙 하고 누군가가 뛰어갔다.

아마 라이가 오면서 깨웠는지 뒤쪽에서 있던 몇몇이 오우거와 전투가 벌어지는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켄타는 엉덩이를 부여잡고 엎드려 있었다.문 데 또 물리면 아프지.

그나저나 난 역시 숨어 있어야 되나?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는데 오우거가 돌연 공중으로 점프했다.

얼마나 높이 뛰었는지 달 한가운데 오우거의 새까만 모습이 떠올랐다.왠지 불길한 느낌.그리고 예감은 적중했다.

오우거의 몸이 땅 위로 떨어졌을 때 난 육식 몬스터 특유의 역한 노린내를 맡아야 했다.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쿵하고 내려앉았다.붉은빛을 뿜어내는 소름끼치는 눈동자,상어처럼 겹겹이 돋아 번뜩이는 날카로운 이빨들.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언젠가 경험해봤던 현상이 또다시 일어났다.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난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오우거의 손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머릿속이 순간 아득해졌다.

그리고 그 손이 휘이이익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젠장!'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3초나 지났을까.아무런 느낌도 없자 살짝 눈을 떴다.

[샤아앗!어디서 감히!]

오우거의 손목에 라이가 감겨 있었다.켄타의 팔뚝보다 두꺼운 오우거의 손목.

오우거가 귀찮은지 라이가 휘감긴 손을 마구 허공에 휘둘렀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오우거는 라이가 별 피해를 안 준다고 느꼈는지 사람 머리만한 손을 다시 내쪽으로 휘둘렀다.

콰아앙

오우거의 손이 맨 땅을 강타했다.땅이 동그랗게 움푹 파였다.이번에는 피했다.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땅바닥을 구른 탓에 머리며 옷에서 흙이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오우거는 공격에 실패한 것이 열 받았는지 이번에는 발을 들어올렸다.

그때 어느새 다가온 용병들이 오우거를 향해 창과 칼을 들이댔다.

[마스터가 모처럼 머리 쓰다듬어주시려는 걸 방해하다니!이 괘씸한 것!]

......고작 그 이유냐?네가 그러면 그렇지......

"지니!"

놀란 아넬이 다가와서는 나를 부둥켜안았다.

아넬이 나보다 더 놀랐는지 심장이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아,그렇군.순간 머릿속이 맑게 개었다.오우거가 나를 공격하다니.근데 왜 하필 나야?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왜 난 항상 기습을 당하는 거지?나처럼 선량한 인간이 또 어디 있다고?

"우씨."

"지니,괜찮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래봤자 조그만 어린애의 주먹이었지만.

[크아악!이놈들아,좀 보고 때려라!비늘 벗겨져!]

라이의 고함소리가 들렸다.여전히 오우거의 손목에 매달려있는 라이.

"라이이!"

[샤앗......네,마스터!]

자신을 향해 찔러오는 창과 검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던 라이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곰탱이를 향한 원한을 담아서 분질러버려라!"

[알겠습니다!]

이내 당찬 라이의 대답과 함께 언젠가 들었던,그것에 비하면 다소 굵직한 소리가 들렸다.

우득,우드드득

"우어,우어어억!우커어억!"

껍질이 두꺼워서인지 손목이 얇아진 것을 빼곤 별로 부서진 것 같지 않았지만 오우거는 충분히 괴로워했다.

쳇,모처럼 피볼 각오를 했더니만......조금 아쉬웠다.

여전히 손목에 매달려있던 라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헤헷!마스터,저 잘했죠?이번에는 조금 힘들었어요.]

"잘했어."

"으아아악!다리가......!"

"우악!찔러라!눈을 찔러!"

"힉!내 검이 부러졌어!"

내 칭찬소리가 비명에 묻혀버렸지만 뭐 어떠랴.용병들은 라이의 괴력에 감탄할 틈도 없었다.

오우거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더욱 사납게 날뛰었으니까.

나는 일단 뒤로 물러서서 상황을 살폈다.

오우거의 가죽을 뚫지 못한 검이나 창이 부러져 나갔고 오우거의 눈먼 손에 맞은 몇몇이 또다시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현재 오우거에게 붙어 있는 용병의 수는 대략 열 명 정도.여기저기 널브러진 용병의 수는 다섯 명 안팎.대부분 하급용병 같았다.

"젠장!정령사!그 꼬마 어디 갔나?"

그때 어디선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눈을 돌리자 용병단장인 샤벨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그는 부상을 입었는지 피가 뚝뚝 흘리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었다.일단 그에게 다가갔다.

"저는 왜요?"

"가서 싸워라."

그가 오우거 쪽으로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미쳤어요?"

난 일단 열 살짜리 여자애거든?

"미치지 않았다.너도 밥값은 해야 할 것 아니냐!오우거에게 물리공격은 오러가 아니면 거의 먹히지 않아.그러니 너라도 정령인지 뭔지로 도와라!마법보단 못해도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왜 이렇게 세상에는 정령을 무시하는 인간이 많은 거야?

뭐 라이 같은 무개념 정령도 있고 아도르 같은 예의미달의 정령도......음,그러고 보니 나에게 소환된 정령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왜 그 모양이지?

운디네만 정상인가?흠,그게 바로 내가 운디네를 예뻐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니까.

"뭔가,꼬마?역시 겁먹은 거냐!왜 얼어 있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샤벨이 발로 툭 치며 물었다.다 죽어가는 주제에 말은 많았다.

"겁먹지 않았어요!다만......우리 계약을 하죠.내가 저 녀석을 쓰러뜨리는 데 공헌하면 나한테도 보수를 줘야 해요."

"뭐,뭐야?몬스터 먹이가 될 걸 살려줬더니......건방지긴!"

이번엔 누군가가 오우거의 발에 깔려 울컥 피를 토했다.힐끔보니 남은 건 아넬과 켄타,그 외에 실력 있어 보이는 네 명뿐이었다.

오우거의 괴력은 무시무시해서 켄타조차도 이리저리 피해 다니고 있었다.

오우거는 맨손으로 말의 목뼈도 분지른다는데,인간이 그걸 맨손으로 어떻게 받아내겠는가.스치기만 해도 기본이 사망일 텐데.

"나도 효과를 장담할 수 없어요.그러니까 공헌하면 돈을 달라는 거잖아요!할 거야 말 거야!"

점점 줄어가는 용병의 수에 나도 위기감을 느꼈다.버럭 소리를 지르며 반말을 했지만 단장은 그에 신경 쓰지 않았다.

"좋다,공헌한다면 아넬과 같은 보수를 주지.알았으면 어서가서 힘을 보태!용병에게 동료는 생명이란 말이다,이 벌거숭이 꼬맹아!"

나를 싸구려로 팔 순 없지,흥!난 비싼 몸이라고.사실 안 준다고 해도 나는 공격을 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이왕 하는 것 챙길 건 챙기자고.나는 서둘러 소환을 시도했다.

"운디네!아도르!"

[네,주인님.]

[오늘은 자주 부르는군,주인.처음으로 마음에 든다.]

아도르가 나타나자 주위가 조금 환해졌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운디네,나이가 무색하구나!난 오우거에게 눈을 돌렸다.

사실 나무와 오크에게 두 번 실험해본 것뿐이지만,왠지 공격이 먹힐 것 같았다.

게다가 오크에 이어 오우거까지 꺾어본다면 까짓 윈칸 축제쯤은 자신 있었다.

"운디네!오우거에게 아쿠아 볼!"

추아아악

허공에 잔 물방울을 남기며 빠르게 날아가는 아쿠아 볼.

아쿠아 볼은 정확히 오우거의 이마에 명중했다.하지만 오우거는 아쿠아 볼이 주는 작은 충격 따윈 귀찮다는 듯 덜렁거리는 손목을 휘저었다.

어차피 목표는 온몸을 적시는 것.

하지만 오우거의 몸을 적시기에는 한 발로는 양이 턱없이 모자랐다.

갑작스런 운디네의 아쿠아 볼에 놀란 용병들이 뒤로 물러섰다.

"운디네,다시!이번에는 다연발 아쿠아 볼!가능해?"

[음......현재 세 개까진 가능합니다,주인님!]

"좋아,오우거를 적셔버리는 거다.3연발 아쿠아 볼!"

운디네 앞에 생겨난 세 개의 아쿠아 볼이 빠르게 날아갔다.

별로 위협이 안 된다고 생각한 오우거는 아쿠아 볼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았다.흥건한 물이 오우거의 상반신을 적셨다.

축축한 물기에 오우거가 몸을 마구 털어댔다.

"모두 물러서!"

"......?"

아쿠아 볼에 놀라 물러섰던 용병들이 다시 오우거에게 무기를 들이대려다 순간 동작을 멈췄다.

"아돌!6볼트 쇼크!"

웃기는 일이지만 4,5단계는 불가능하면서 6단계는 가능했다.

그 이유는 6단계는 내 마나 중 10퍼센트를 제외하고는 몽땅 쏟아 붓는,테크닉은 전혀 상관없는 무대포 공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지금 내 마나는 아까의 라이트와 식사용 물 채우기로 약 70퍼센트 정도만 남아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실패해도 용병들이 뒤를 받쳐줄 터였다.

6볼트 쇼크가 발사되자 오우거의 몸에 물기를 타고 번쩍이는 황금빛 스파크가 튀었다.

"우콰아악!"

쿠우웅

크게 휘청거린 오우거가 힘없이 땅으로 무너졌다.성공인가?

순식간에 마나가 몽땅 빠져나가면서 운디네와 아도르가 역소환 되었다.살이 타는 노린내가 역하게 풍겨왔다.

오크 때와 비슷한 냄새에 코를 콱 막아버렸다.

강한 빛에 눈을 찡그린 채 오우거를 바라보는데 검게 변한 오우거가 나를 향해 분노의 눈길을 보냈다.

젠장,난 줄 어떻게 알았지?갑작스런 전기 공격에 당황해서 멈춰 있는 용병들.

오우거가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이내 힘이 빠졌는지 육중한 몸이 다시 땅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나도 역시 다리에 힘이 빠져버려 털썩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주위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용병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오오오!"

"지니!너 대단하구나!"

아넬이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용병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거친 손이 내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머리가 마구 흔들려서 정신이 없었지만 헤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정말......됐잖아?"

주위 사람들이 놀란 듯했지만 정작 나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을까?마나가 몽땅 빠져나가서 텅 빈 느낌이 들었다.

그 빈자리를 기분 좋은 승리감이 채워주었다.

나는 어느새 켄타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는데 시야가 높아져서인지 땅바닥에 쓰러진 오우거가 조금 작아 보였다.

정복감이랄까?승리감?나는 왠지 앞으로도 이런 느낌이 좋아질 것 같았다.주위의 환호소리가 나를 만족스럽게 했다.

[마스터어어......절 잊으시다니,크흐흑.]

"라이?"

그러고 보니 라이는?라이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여전히 오우거의 손목에 매달려 있는 라이를 발견했다.

그 윤기 좌르르르 흐르던 비늘이 누렇게 그을리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해서 그 모습이 추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그러게 비키라니까?

켄타의 어깨에서 내려와 라이를 집어 들었다.숯 검둥이가 된 라이 덕에 손에 새까만 재가 묻었다.

"으악!너 이게 뭐야?껍질이 녹은 거야?"

[아니오.부식된 겁니다.뱀의 형체만 따라했지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은 모두 금속이니까요.그중 껍질은 흔한 금속인 강철로 만들었는데......너무 얇았나 보군요.이렇게 그을린 걸 보니 물에

전기에......아무래도 강철이 버티기에는 무리였나 봅니다.속은 멀쩡한데 겉만 이렇게 되다니.녹진 않았지만 이렇게 망가져서야......새로 만들어야겠군요.]

뱀에게 말을 거는 나를 용병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 정도의 눈빛에는 익숙했기에 무시해버렸다.흠,이왕 이렇게 된 것......

[그래?그럼 껍질을 금강석으로도 만들 수 있어?]

이참에 진짜 금강사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흐흐,3년분 먹거리가 나를 기다리는구나.

[금강석?다이아몬드 말씀이시군요.]

......금강석이 다이아몬드구나.몰랐네.

[그래,껍질을 온통 다이아로 만들 수 있어?]

[물론입니다.하지만......]

라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부식된 쇳덩이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알아,알아.마나가 부족하다고?]

[네,만약 마스터의 마나가 풀 상태라면 겉껍질을 바꾼다는 전제하에 머리 정도는 가능하겠군요.]

흐음,내 마나가 10퍼센트만 남아 있을 때 다시 풀로 차기까지는 약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심신을 안정시키고 마나가 차기를 기다려야 한다.조금 더 빨리 채우기 위해서는 명상을 하면 되지만 그렇더라도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마나를 많이 모으는 것.

하지만 하루에 두세 번 이상 명상을 하게 되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부담이 와서 오히려 마나폭주가 일어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한 번에 많은 마나를 끌어 모으는 것인데,아무리 오래 한다고 해도 내가 명상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0분.

비록 충분히 뛰어나다는 이엘 선생의 말이 있었지만 도통 이엘 선생은 믿음이 가질 않았다.쓸모없는 것만 가르쳐주고 말이지.

라이를 들어 올려 대충 몸길이를 쟀다.1미터 정도일까?

마나가 차는 대로 라이의 몸을 조금씩 바꾸면,이틀 정도면 완전히 하얗게 변할 것 같았다.

눈대중을 하는데 라이가 오우거를 힐끔거렸다.

[그런데 마스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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