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71)

"후훗,우리 운디네가 유난히 귀엽고 사랑스럽긴 해.말은 또 얼마나 잘 듣는 줄 아니?"

"정말,부럽다.하지만 정령사는 약하다고 하던데?그래도 취미로 하기엔 딱이겠는걸."

......약해?취미로?정령사가 얼마나 힘든 직업인데!그거 매우 듣기 거북하군 그래.

"정령사가 약하다고?감히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거야?"

"음?디넬 선생님이 기사단장님과 얘기하는 걸 들었어. '비실비실한 정령 따윌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건지?정령사 따윈 약해빠졌단 말입니다.도대체 학장님도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차

라리 레오가 와주었으면 든든할 텐데.그렇지 않습니까?' 라고 디넬 선생님이 말하니까 기사단장님이 '하핫!그러게 말입니다!정령사들은 그저 희귀한 것 빼고는 별 볼일 없는 족속들 아닙니까

?듣기로는 겁이 많아서 조금만 피가 튀어도 도망가기 바쁘다고 하더군요.혹여 드리케 아카데미의 위상에 흠집이나 내는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더군."

대사만으로도 충분히 그때의 상황이 상상이 갔다.

그나저나 역시 이루제 넌 천재구나.어쩜 그렇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워 왔니?나는 미약하나마 이루제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냈다.

[주인님,라이님을 찾았어요.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창문으로 날아 들어온 운디네가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오라니까 순순히 온다고 해?]

[아뇨,아직 그 소녀가 있냐고 물어봐요.그래서 늦으시면 목을 분지른대요,라고 했어요.]

[잘했어.역시 우리 운디네,학습능력도 뛰어나구나.]

운디네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에헤헷.정말요?]

"앗,운디네,맞지?역시 귀엽다!지니,한 번만 안아보면 안 될까?"

"좋아,한 번 만이다."

이루제는 호들갑을 떨었고 운디네는 내 손짓에 따라 이루제에게 날아갔다.

"우와아!차갑네?굉장하다."

"그렇지?우리 운디네가 얼마나......라이이!"

창문 구석으로 슬그머니 기어들어오는 라이를 나는 잽싸게 낚아챘다.

[후에엑!]

[이 자식!감히 주인님 허락도 없이 지 할 말만 하고 가출을 해?]

[하,하지만 마스터!저 소녀는 너무 무시무시해요.그 굉장한 집념!도망가도,도망가도 따라와서 칼로 무지막지하게 내리치고,내리치던......흐어어.]

라이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라이 녀석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이루제에게 흘깃 눈길을 보냈다.

마침 이루제가 라이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앗!금강사!"

[쿠에엑!마스터,살려주세요!]

라이가 순식간에 내 팔을 휘감더니 옷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가 버렸다.

[뭐야?너 원래 남한테는 막나가잖아?]

[흐흑,마스터 말씀만 없었다면 목을 수백 번도 더 분질러버렸을 겁니다.하지만 차마 마스터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죠.저 소녀는 계속 따라와서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저를 괴롭혔습니

다.흐흑......칼로 내려치고,도끼로 내려찍고,한 번은 통째로 삶으려 하고.그 사무치는 원한을......어흐흑.]

그 정도였냐?하긴 내가 절대로 남들 앞에서는 액체화되지도 말고,누굴 물거나 다치게 해서도 안 되고,절대로 보통 뱀인 척 하라고 하긴 했다.

뭐 애초에 보통 뱀치곤 상식을 뛰어넘는 강도와 지능을 보이긴 했지만.

"아아,웬일이니?그 엄청난 스피드!역시 금강사야.지니,나 라이 좀 만져보면 안 될까?"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는 이루제.

[마스터어,제발 절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어쩐다?

"음,이루제.라이가 말야,지금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이럴땐 물릴지도 모르니까 그만두는 게......"

"그럼 지니가 들고 있으면 내가 구경할게.그럼 되지?"

미안,라이.나는 왠지 얘가 어렵단다.옷 속에서 발버둥치는 라이를 쭈욱 빼들었다.

[흐어어어.]

"자,여기.보기만 해.건들면 얘 기절하겠다."

라이는 포기한 듯 축 쳐져 있었다.

[라이,그거 자는 척이야?]

[아뇨,죽은 척인데요?어때요?리얼한가요?]

......라이,너 역시 바보다.라이에게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는데 이루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응,역시 굉장한 광택이다.그 강도며,스피드,지능,모든게 다 완벽한데.흠,한 가지 걸리는 건 전설 속의 금강사는 새하얀 빛이었다는데 라이는 검은색이잖아?그래서 조금 헷갈려.변종일까?

그럼 굉장히 희귀한 건데 말이야."

"그래?"

앞으로 만약 누가 라이가 무슨 종류의 뱀이냐고 물으면 변종 금강사라고 해야겠군.

"저기......지니."

"응?"

"있잖아,라이가 허물을 벗거나 하면 그거 나한테 주면 안돼?"

허물?허물이라면 뱀들이 가끔가다 벗어내는 그것?그거 라이한테서는 절대 안 나올 텐데?

"그걸 왜?"

"실험에 쓰려고!만약 안 되면 지금 여기서 라이의 비늘 한 20개 정도만 뽑아줘도 되는데."

[크아아악!]

순간 라이가 미친 듯 발광했다.

온몸을 비비 꼬며 거세게 움직이던 라이가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꺄악!"

이루제가 놀란 듯 뒤로 콰당 넘어져 마차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라이가 잽싸게 마차 밖으로 도망쳤다.뭐야,라이?설마 내가 뽑아줄 거라고 생각한 거냐?이런 괘씸한......

"아,미안.놀랐어?일어나."

난 이루제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한 이루제가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땀을 훔쳐냈다.

"우아,역시 금강사는 굉장해!지니,꼭 부탁해.허물이 안 되면 비늘이라도 뽑아줘.응?"

"그건 좀 어렵......"

"아까 그 초콜릿 열 상자 줄게.응?"

조금 구미가 당겼지만,라이의 비늘 이래봤자 금속 성분밖에 안 나올 테고,그러면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할 텐데......

"미안,안 되겠다.라이가 저렇게 싫어해서 말이야."

"그럼 일 년분은 어때?우리 아빠가 그 초콜릿 회사 사장이거든.나 약속은 잘 지켜!"

"일,일 년분?"

꼴깍

침이 넘어갔다.어,어쩐다?

"안 되겠어?"

"하,으음......라이 비늘을 조사해서 뭐하려는 건데?"

"응,금강사의 비늘은 순수한 금강석으로 이루어졌다고 들었거든.만약 라이가 금강사라면 라이의 비늘은 금강석일 것이고,보통 금강석이 새하얀 색이라서 금강사의 비늘도 하얀색으로 이루어

져 있지.헌데 라이가 금강사라면 라이의 비늘은 검은 금강석이라는 것 아냐?그건 굉장한 거라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금강석을 만들면 된다 이거지?

"일 년분?"

"적으면 3년분까지는......"

"좋아,이루제.아버지가 굉장하시구나.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후훗."

"응!고마워,지니!"

"별 말씀을......"

크크큭.앞으로 초콜릿은 배터지게 먹겠군.라이는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 지니......"

"응?"

"라이 말야,굉장히 귀엽게 생겼다.나 라이를 그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어!"

이루제의 말에 순간 나는 귀를 잠시 후벼야 했다.요즘 귀를 안 팠던가?

"......누가 귀엽게 생겼다고?"

"응?라이 말야."

역시 이루제,상상을 초월하는구나.

"그럼 운디네는?"

"운디네도 귀여워!"

[헛!]

운디네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라이와 동급으로 취급받은 운디네는 커다란 정신적 데미지를 입었다.

"그,그럼 운디네랑 라이랑 누가 더 귀여워?"

"으음......그거 매우 어려운 질문인데?하지만 굳이 따지라면 라이일까?그 매력적인 입매가 환상적이잖아."

[후에에엥.주인님!저 너무 슬퍼요!후엥!]

나는 순간 굉장한 정신적 충격에 몸이 부르르 떨었다.

만약 이 소리를 라이가 들었다면 '푸헤헤' 하고 승리의 웃음을 지었을지도......

**

음..드디어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파트가 끝났군요.

지금 시각은 4시 21분 물론 새벽입니다!으하하하하!

**

이탈

산속이라서 그런지 밤은 빠르게 찾아왔다.

주위에 어둠이 내려앉자 이내 마차가 멈추고 취침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앗!벌써 밤이네?지니,난 이만 내 마차로 돌아가 볼게!엘리자베스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것 참,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그런데 엘리자베스?

이름이 거창했다.친군가?그럼 여태껏 걔는 혼자 내버려두고 나랑 있었던 건가?

"엘리자베스?"

"응?아아,내 전용 실크레이스 베개야.정확히는 엘리자베스 3세.그전의 엘리자베스들은 슬프게도 저세상으로 떠나버렸지."

"그,그러니?그래,잘 가!"

도통 천재들 머릿속은 알 수가 없다니까?손을 흔들며 마차에서 내리는 이루제를 배웅해주고는 편안한 숙면을 위해 자리를 잡았다.

사실,드리케가 천재들이 모인 곳이라고는 하지만 그중 정말 천재는 채 열 명도 되지 못할 거다.나머지는 영재 정도?

드리케 종합반의 인원은 약 백 명인데,설마 천재가 그렇게 많겠는가?뭐,영재나 천재나 한 끗 차이지만.

[마스터!제가 돌아왔습니다.]

막 눈을 감으려는데 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아차,중요한걸 깜빡했네.

[라이!]

[넵?]

[내가 분명 단장의 갑옷이랑 칼,그 외에 금속으로 이루어진 모든 걸 흡수해버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했어?]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라이를 노려보았다.그러자 라이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몸을 휙 돌렸다.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네가 그럼 그렇지.

[가는 길에 디넬 선생 것도.누군지 알지?격투반의 선생 말이야.]

[네,저만 믿으세요!]

넌 신용이 안 간다는거.마차 밖으로 흐물흐물해져서 빠져나가는 라이를 보다가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또 한 가지 잊고 있던 게 퍼뜩 생각났다.

"아차,아도르!"

어두웠던 마차 안에 빛 덩이가 생겨났다.마차 안이 조금은 환해졌다.소환된 아도르가 정신없이 마차 안을 날아다녔다.

[크하핫!역시 좋군,좋아!그......응?주인,무슨 일인가?]

돌연 의아한 듯한 아도르의 목소리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너......뭐하다 나오는 거냐?"

[그냥 조금 거슬리는 녀석이 있기에 태워버리고 오는 길이네만?]

그러냐?장하구나.잠시 입맛을 다신 나는 본론을 꺼냈다.

"너,네가 소환되었던 정령석 어떻게 됐는지 알아?방을 옮겨가면서 잃어버려서 말이야."

나도 요즘 건망증이 늘었단 말이지.하지만 보석인데다가 그 방에 누가 묵었는지 기록이 남으니까 누군가 줍는다면 다시 보내올지도......

[그거 말인가?내가 막 나오는데 부서지더군.]

"뭐,뭐야?이 바보!그거 비싼 거란 말이야!"

그러게 얌전히 좀 나오지 그 난리를 피우니 뭐가 남아나겠어?

[그건 내 탓이 아니네!본래 너무 오래되어 제 구실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물건인데다가 어차피 한 번 정도만 더 소환의 매개물이 되면 부서질 운명이었네!]

하긴 원래 좀 불안한 물건이라고 하긴 했지,쩝.아쉽긴 하지만 나는 계약에 성공했으니 그 정도면 적자는 아니었다.

"그래?그럼 이만 돌아가 봐."

[벌써?방금 막 소환됐는데?뭔가 태울 것 없는가?]

태울 것?태울 게 어디......아하,그래.마침 밤인데다가 다들 잠들 시간이니까,머릿속에 번쩍하고 떠오른 생각.

나는 당장 실행에 옮기기 위해 마차의 의자 밑에 있는 가방에서 외투를 꺼내들었다.

태워먹은 가방에 있는 것은 돈이랑 펜,종이,자주 사용하는 가벼운 물건 정도였고 그 외 옷 등은 따로 보관하고 있었기에 화를 면했다.

이 무거운 걸 매일 옮기긴 그렇지 않은가?

"후훗!아도르?넌 이만 돌아가.내가 조금 있다 부를게."

[엥?벌써 가라고?정말 다시 부를 텐가?언제?믿어도 돼?]

이 녀석도 은근히 말이 많단 말이지.마나를 끊어버린 나는 슬그머니 마차의 문을 열었다.

멀찍이 마차 앞쪽에 기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불침번을 서는가 보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작은 소리를 냈지만 이쪽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사람들과 멀어지는 뒤쪽으로 몸을 옮겼다.

내 마차는 뒤쪽에 있었기에 뒤로 몸을 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마차가 지나온 길로 냅다 뛰었다.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보이지 않자 슬쩍 저편의 눈치를 살피며 맞은편 숲 속으로 들어갔다.

몇 발자국 옮긴 나는 '젠장' 을 연발해야 했다.머리며 옷을 마구 때리는 나뭇가지와 웃자란 풀들로 앞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겨우겨우 풀을 헤치며 숲으로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자 이제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조금 불안했지만 나중에 길을 찾을 때는 운디네를 부르면 된다고 생각하며 조금 더 나아가자 마침내 조그마한 공터를 발견했다.빙고.

"운디네,아도르!"

[네,주인님?]

[이보게,주인!정확히 10분 걸렸네!10분!이렇게 오래 걸리면 어떡하나?]

작은 빛 덩어리와 운디네가 모습을 드러냈다.아기 인어 형상의 운디네는 잠시 어두운 주위를 불안한 듯 살피더니 나에게 날아왔다.

아도르가 있기 때문에 공터는 생각보다 밝았다.

"아도르,계속 불만을 토로한다면 널 다시는 소환하지 않을거야."

[헙!]

너무 늦게 불렀다며 투덜대던 아도르가 입을 딱 다물었다.내가 굳이 공터를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운디네와 아도르의 힘을 실험해보기 위해서.

운디네가 물 공격을 하고 그 위에 아도르가 전기 공격을 더했을 때의 효과를 확실히 알아둬야 했다.

그 덕에 돌연 달밤에 체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도르,너를 이용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뭐가 있지?"

그러고 보니 나는 아도르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다.

[흠,어디보자.주인 정도라면......라이트?](헐..)

딱 듣기에도 불을 켜는 것 빼고는 별것 없을 것 같은 마법이다.하지만 쓰기 나름이겠지,크큭.

"다른 건?"

[글쎄,그 정도뿐인 걸로 아네만.]

"......장난해?너 다시 돌아갈래?"

[헉!자,잠깐만 기다려보게나.사실 내가 8천 년만이다 보니 좀 가물가물하다네.]

기껏 계약했더니 라이트뿐?사람 맥 빠지게 하는 소리였다.

"뭔가 공격용으로 말이야!그다지 강하지 않아도 돼.운디네가 있으니까 그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어."

[으음......아!그게 있군.쇼크!순간적으로 전기 충격을 주는 정령마법이지.]

쇼크?괜찮아 보였다.하긴 그 정도는 있어줘야 계약한 보람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그것 말곤?더 털어봐!"

[더......더 말인가?]

"그래,더!"

[흐음,접촉한 상대에게 전기 충격을 주어 접근을 방지하는 쇼킹 그레이습이나 전기 에너지로 이루어진 전압체를 날리는 라이트닝 애로우,조금 더 위인 강한 번개가 내려치게 하는 라이트닝

볼트가 있지만......모두 주인에게는 무리네.]

제법 공격용 마법이 있는 것 같지만......모두 무리라고?흥!내가 조금 아는 사람 사전에 나온다더군,불가능은 없다고.

"무리?그럼 불가능은 아니라는 소리야?"

[그렇지.하지만 마나와 정신력 소모가 극심할 것으로 보이네만......]

그 정도면 충분해!나는 의욕이 솟는 것을 느꼈다.

쇼크를 기본으로,쇼킹 그레이습이나 라이틍 애로우를 마스터한 뒤,가능하다면 라이트닝 볼트까지!그렇게 되면 건방진 운동반 녀석들의 콧대를 모조리......크큭.

"크큭,좋아.그럼 오늘부터 그것들을 쓸 수 있게 훈련에 들어간다!아돌,분발하자!"

[오오,자주 불러준다니 좋긴 하지만......아돌은 또 뭔가,주인?]

"응?아도르를 줄인 거야.애칭이지.아도르는 발음하기 불편하잖아."

아도르,아도르,하다 보면 혀가 꼬일 것만 같았다.

[아돌?조금 상스럽지 않나?난 좀 더 고급스러......]

"상스러워?그럼 애칭은 귀엽게 찌리로 할까?"

[아돌!아주 좋군.내가 말했던가?난 상스러운 걸 아주 좋아하네,주인!]

"그거 다행이군.그럼 운디네?아쿠아 볼,할 수 있겠지?"

[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운디네 앞으로 물방울이 빠르게 모여 이내 사람 머리 만해지더니 점점 줄어들어 주먹만큼 작아졌다.

조금이라도 공격력을 높이기 위해 압축한 것 같았다.저걸 더 압축하면 그만큼 수압이 강해지는 건가?

[주인님!어디로 쏠까요?위치를 지정해주세요.]

"음,운디네."

[네,주인님!]

"그거 더 압축할 수 있어?"

[더요?그건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흐음,그렇다면 일단 불가능하진 않다는 건가?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아돌과 운디네가 얼마나 서로를 잘 보조할 수 있느냐 하는 거니까,그 실험은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좋아,그럼 정면에 있는 나무를 향해 발사!"

츄아아앙

파앙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아쿠아 볼이 나무에 맞고 산산히 흩어졌다.

아쿠아 볼의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지만 나무의 껍질이 약간 벗겨졌을 뿐 그 이상의 파괴력은 보이지 않았다.

"아돌,쇼크!"

치지지직

물에 흥건히 젖은 나무 위로 스파크가 튀었다.

물이 증발되어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나무껍질이 일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하지만 나무에 실험한 결과만 가지고는 정확한 파괴력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물은 전기가 더 잘 통하게 해주면서,불이 나지 않도록 막아준다.그 탓에 전기의 폭발력이 다소 약해졌다.

"......저건 몇 볼트야?"

[볼트?그게 뭔가?]

내 질문에 아돌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사용되는 전기의 양은 어떻게 표현하지?"

[양이라......딱히 정해져 있지 않네만?쇼크는 일순 놀랄 정도면 충분하니까 말이네.]

전기가 전문적으로 쓰이는 부분이 거의 전무한 세상이다 보니 전압이니,볼트니,하는 단어는 없었다.

형광등이 아닌 횃불을 사용하고,부싯돌을 이용해 불을 켠다.

내가 있던 곳보다는 현저히 떨어지는 과학 수준.

아니,이곳은 애초에 과학이라는 것이 통용되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래,좋아.그럼 아돌,다른 정령들이 어떨지는 몰라도 너와 나는 한 가지 기준을 만들자."

[기준?무슨 말인가,주인?]

"각 정령마법에 사용되는 전기의 양을 임의로 정하는 거야.별말 없을 때는 기준량을 사용하고,따로 지시가 있을 때는 많든 적든 전기의 양을 조절하는 거다.할 수 있지?"

[......못한다.]

아무튼 이놈의 정령은 협조를 안 한다니까!

"그래?그럼 돌아가."

[자,잠깐!이보게 주인,기다려보게.간단하면 해보도록 하지.]

흥,난 잘 알고 있다.아돌은 돌아가라는 말에 약하다는 사실.외롭기 때문인가?하긴 8천 년 만에 처음 만난 사람인데 당연한걸지도 모른다.

"좋아,그럼 잘......잠깐,운디네.이만 돌아가렴."

[네,주인님.안녕히 계세요.]

꾸벅 인사를 한 운디네가 퐁하고 터지더니 사라져버렸다.

겨우 5분 정도 지나고 약간의 기술을 쓴 것만으로 마나가 30퍼센트 정도 닳아버렸다.

하지만 자지 않고 몰래 나와 훈련한 성과는 있었다.문제점을 하나 찾아냈으니까.

나는 다시 아돌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 들어.우리 간단하게 정하자.1볼트는 사람이 순간 충격을 느낄 정도로 하자.이건 쇼크의 기준에 해당돼.2볼트는 사람이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이건 쇼킹 그레이습.3볼트는 사람이 기절

할 정도로 라이트닝 애로우.그리고 4볼트,이건 죽진 않지만 후유증이 남을 만큼의 강도로 라이트닝 볼트의 기준이다.한 마디로 1단게부터 4단계까지 있는 거지.알아들어?"

[......하지만 주인,라이트닝 볼트는 중범위 공격인데?그럼 라이트닝 볼트의 영역 안의 모든 사람에게는 후유증이 남을 정도의 강도,그러니까 4볼트의 공격력을 내면 되는 건가?]

천 볼트니 만 볼트니 정하게 되면 나조차도 헷갈리게 되기 때문에 나는 간단하게 단계를 나누었다.

"그래,하지만 웬만해선 3볼트 정도로 고정할 거야.그리고 공격할 때 운디네가 함께한다면 지정해준 볼트에서 한 단계씩 내려야 해.물이 흐르게 되면 전류는 두 배 이상의 살상력을 가지게 되

니까."

[간단하군.그럼 4볼트까지가 다인가?]

"아니,두 단계 더 있어.5볼트는 상대를 죽일 정도."

[죽인다?그렇다면 두 단계 더 있다고 했으니......6볼트는 뭔가?]

"6단계?그러니까 6볼트는 일격필살,네가 나를 통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아 붓는 거야. '이 정도면 죽겠지' 하고 판단했다고 상대가 꼭 죽는다는 법은 없으니까.알아들어,아돌?

아돌이 공중에서 팽그르르 돌았다.

[알아는 들었네만......그거 꼭 해야 하나?귀찮군,그래.]

"......그래?그럼 그냥 돌......"

[잠깐!나 머리 좋다네,주인.그 정도야 이 몸에겐 쉽지.암,쉽고말고!](ㅋ.ㅋ아돌은 이 점이 귀여워요.)

"그래?고맙다,아돌.난 너를 믿고 있어.라이 녀석보다 더."

내 말에 공중을 빙글빙글 돌던 아도르가 순간 멈칫했다.

[그,그런가?크카카캇!당연한 것 아니겠나!나만 믿게!크케케켓!]

왜 내 주위 사람,아니 주위 생물들은 하나같이 웃음소리가 저 따위지?나는 아주 우아하게 웃는데 말이야.

내가 고개를 으쓱거리는데 공터 한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돼지 멱따는 소리?

"......잠깐!아돌,닥쳐봐!"

끝없이 웃어댈 것 같은 아도르의 웃음을 저지한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잘못 들었나?

[왜 그러나,주인?]

"무슨......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렸는데?"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풀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내 몸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덩치에,뿜어져 나오는 믿을 수 없는 악취!

숲의 그림자에 가려졌지만 달빛에 어르슴히 보이는 그것은......

"취이이익!감히 누구더러 취힉!돼지,취익,라는 거냐?꾸에엑!"

"꺄아악!"

눈에 핏발이 선 오크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뭐야?뭐야아!별안간 나타난 오크.전에 봤던 놈들보다 더 큰 것 같아!

난 마구 숲을 내달렸다.

조금만 더 가면 길이 있을 거라고 믿으며.

풀숲을 용케 넘어지지 않고 달렸지만 오크는 나보다 빨랐다.이상했다.오크는 느리다고 했단 말이야!아니,나도 느리구나.

오크의 누런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다가왔을 때 나는 그제야 내 옆에 둥둥 떠서 따라오는 아도르를 보았다.

"야아!이 웬수야!공격을 해!공격을!"

숨이 차올랐지만 난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흠!주인의 명령 없이는 힘을 쓸 수 없다네.]

"쇼크 써!쇼크!"

지지직

작은 스파크 소리와 함께 오크가 동작을 멈추었다.혹시해서 따라 멈춘 나는 오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크는 멀쩡히 움직이며 겨드랑이를 긁는 게 아닌가.게다가 오크가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뭐라는 거야?

"취익?겨우 취익,씻은 지 취익,1년밖에 취이익,안 됐는데.취익?왜 정전기 나냐,취익?씻으라는 취익,하늘의 계시냐,취이익?"

"......저런 등신!"

나는 냅다 다시 뛰기 시작했다.그러자 오크가 따라 뛰었다.

땅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렸다.

[이보게,주인!난 분명 1볼트로 했다네.]

"야!3......4......아니,5볼트를 써봐!"

정말이지 이제는 숨이 턱턱 막혀오고 다리가 욱신거렸다.시장에서 도망갈 때도 이렇게는 안 달렸단 말이다!

[흐음?주인 힘으로는 3볼트가 한계네.]

"그런 건......진작 말해야지!그럼 3볼트!"

치지지직

많은 양의 마나가 빠져나갔다.남은 마나는 50퍼센트 정도.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났다.

힐끔 뒤를 돌아보자 털을 홀라당 태워먹은 오크가 기절은커녕,오히려 광분해서 더욱 날뛰고 있었다.

[흠,사람이 아니라 그런가?효과가 별로 없군,주인.]

"이 웬수야!이......아,운디네에!"

[네에,어머!주인님!]

소환된 운디네가 그 자리에서 인사를 하려다가 달음질치는 나를 보고 날아왔다.

"운디네!저기......오크에게 아쿠아 볼!허억!"

숨이 차서 이젠 말하기도 힘들었다.순간 빠르게 날아간 아쿠아 볼이 오크의 얼굴에 맞고는 터져나갔다.

설마 이렇게 빨리 아쿠아 볼을 실전에서 사용하게 될 줄이야!그나저나 이 웬수같은 기사들은 다 어디로 간거야!길은 점점 험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왠지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명중이에요!]

기쁨에 찬 운디네의 한마디.이런 운디네,너도 눈치가 조금 없구나.넌 귀여우니까 봐준다.

"아돌!3볼트!"

이내 역한 노린내가 탄내와 함께 풍겨왔다.

그리고 육중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나는 달리던 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허억,허억.죽었나?아돌!가서 보고 와."

[엑?왜 난가,주인?]

"닥치고 얼른 가!"

투덜거리며 날아가는 아도르를 보며 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조금씩 뒷걸음쳤다.

이내 아도르가 오크에게 다가가서 머리 위를 한 바퀴 휭 돌더니 그야말로 보기만 하고 돌아왔다.

[주인!숨은 쉬는데......기절한 것 같네만?]

"저,정말?"

그 말에 나는 쏟아지는 안도감에 털썩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내가 뭐하다 이런 상황이 된 거더라?그러니까,훈련 겸 나왔다가 오크가 나타나서......그래서......이긴 건가,지금?진짜?

[주인?]

[주인님?]

쿠르르릉

"하아!오크,우하!우리가 오크를 쓰러뜨렸......엥?"

승리감에 취해 일어나려는데 문득 발밑을 굳건히 지켜주던 땅이 무너져 내리나 싶더니 동시에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휘청거림을 느끼는 것도 잠시,이내 몸이 밑으로 꺼지는 감각과 서늘한 바람결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제야 내가 주저앉아 있던 자리가 벼랑 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필이면!황급히 고개를 돌려 밑을 내려다보니 나와 함께 떨어져 내리는 돌덩이들.

촤아아악

"꺄아아악!"

벼랑 아래로 흐르는 우렁찬 물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하필!하필!하필!10살짜리 여자애가 뭐 그리 무겁다고 벼랑이 무너진단 말인가!아무리 벼랑 끝이었지만 해도 너무했다.

나는 또다시 비명을 질러야 했다.

손을 휘저어 운디네를 잡으려 했지만 허망하게 통과해버렸고 전기 덩어리 아도르는 잡고 싶지 않았다.이런 젠장.

"운디네,워......워터 브리딩!"

생각나지 않던 기술의 이름이 발에 물이 닿은 순간 번쩍하고 떠올랐다.

후우웅

물이 진동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내 주위를 동그란 원 모양의 보호막이 감쌌다.

워터 브리딩,수중에서도 호흡할 수 있도록 하는 마법.평생 쓸 일이 없을 것만 같던 운디네의 마법이 빛을 발했다.

"하아......"

놀라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나는 주위를 감싼 투명한 보호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호막에 손을 살짝 대자 서늘한 느낌이 손에 착 감겨들었다.대단해,역시.이 세상은 신비로워.

난 갑작스런 지금의 상황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 급한건 급격하게 빠져나가는 마나였다.

일단 나는 아도르에게 가는 마나를 차단했다.이로써 아도르는 역소환되었을 테고,지금 마나가 빠져나가는 속도로 보건대,이 상태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2분 정도.

난 보호막의 바깥을 바라보았다.보호막은 현재 점점 강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 마나가 소실되면 낭패였다.나는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운디네!"

[네,주인님!]

"이 보호막을 위로 밀어줘!수면 위로.할 수 있어?"

[조,조금 어렵겠지만......저 힘낼게요!]

운디네가 작은 꼬리를 파닥이며 두 손으로 보호막을 밀어냈다.

물속이라는 하지만 이렇게 물살이 거세서야......단지 보호막을 밀고 있을 뿐인데도 마나가 빠져나갔다.

"그래!장하다,운디네.부탁해!될 수 있는 한 빨리!"

[네!]

투명한 보호막 밖으로 강한 물살이 몰아치는 것이 보였다.보호막은 다소 느리게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아직 많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인지 보호막은 곧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운디네!이번에는 워터 워킹."

보호막이 없어지고 대신 참방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순간 무릎 밑으로 물이 흐르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흐르는 물살에 정신없이 발을 놀려야 했다.하지만 어린아이의 몸으로 이 거센 물갈을 역행하기는 무리였다.

결국 나는 생각을 바꿔먹고 물이 흐르는 쪽으로 내달렸다.

이제 남은 마나는 20퍼센트.마나가 10퍼센트 정도 남게 되면 더 이상 마법을 써서는 안 된다.

그 이상 쓰게 되면 육체 밸런스가 무너져,흔히 말하는 내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주인님!조금만 더 가면 폭포예요!]

이런 젠장,되는 일이 없으려니 악운이 겹쳐온다.

결국 나는 달리던 발을 멈췄다.

이제 어떡하지?더 이상 쓸 수 있는 마법은 없었다.

다급해진 나는 몸을 돌려 무작정 가장 낮아 보이는 곳을 향해 달렸다.하지만 물살이 거세서 쉽지 않았다.

겨우겨우 가장자리에 다다랐으나 절벽 표면에 튀어나온 돌부리에 손이 닿지 않았다.

"운디네!나 좀 도와줘!물로 나를 튕기는 거야.할 수 있어?"

[네!]

발밑의 물이 일렁였다.점점 거세진다 싶은 순간 나는 발을 굴러 돌부리를 움켜쥐었다.

그 찰나,마나의 양이 아슬아슬해졌다.결국 나는 운디네를 역소환시켜야 했다.

"후아아!"

다시금 쏟아지는 안도의 한숨.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내 키의 열 배는 되어 보이는 높이.내가 저기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몸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발을 디딜 곳이 있다는 정도였다.

일단 나는 잠시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주위엔 어둠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머릿속을 정리해보자.다시 마나가 차려면 약 세 시간이 필요하다.하지만 풀로 찰 필요는 없으니 한 시간 정도만 이 상태로 버티면 된다.

과연 버틸 수 있을까?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저 아래는 폭포,결국 위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뜻인데,그러려면 마나가 풀이어도 모자랐다.

어쩐다?결국 이대로 죽는 건가?꽃다운 10세의 나이에?나는 원래 단명할 운명인가?왠지 서러워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고,나는 결국 버틸 때까지 버텨볼 심산으로 절벽에 더 찰싹 달라붙었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나는 이제 겨우 30퍼센트 정도 차올랐다.주위는 그야말로 암흑,짙은 어둠이 시야를 가렸다.

달빛이 있긴 했지만 너무나도 미약했다.손끝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냥 손을 놔버려?그때 뭔가가 내 손을 타고 스르륵 내려왔다.묵직한 무언가가 손을 휘감아 내려오는 이 익숙한 감각은.

"라이!"

너무 긴장하고 있던 탓인지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고개를 들자 어스름한 달빛에 새까만 라이의 얼굴이 번들거리며 광택을 냈다.상상이 갔다.아마도 혀를 날름거리며 꼬리를 연신 흔들고 있겠지.

[마스터!어딜 가셨나 한참 찾았습니다.절 버리고 가신 줄 알고 얼마나 놀랐다구요!]

"라이이......네가 이렇게 예뻐 보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우헤헷!이제라도 알아주시니 감격이니다.그런데......거기서 뭐하시는 거죠?]

일단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너의 멍청함은 넘어가도록 하마.

"지금 위급상황이거든?그러니까 날 위로 끌어올려줘!"

마음 같아서는 라이를 붙들고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하지만 손과 발이 자유롭지 않았고 더 이상 버티기에는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어떻게요?]

"어떻게?그야......나를 끌어올려주든가 아니면 내 발밑에 앉을 만한 공간이라도 만들어봐!너 돌도 조정이 가능하다며?"

[흐음,그러기에는 마나가 매우 부족한데요?]

너한테 내가 뭘 바라냐?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난 냅다 소리 질렀다.

"그럼 어떻게든 해봐!나 죽으면 네 손해라고!"

[죽어요?설마 물에 빠졌다고......아하,인간은 죽겠군요!]

그랬다.라이와 나는 가치관 자체가 매우 달랐다.사람 죽는 걸 돌같이 아는 라이가 아닌가.어쩐다?이대로 죽을 수는......아!

"그래,사람!사람을 불러와!"

[사람?사람을 어떻게 불러오죠?친화력이 없다면 제 목소리는 못 들을 텐데요?]

"......아무거나 비싸 보이는 걸 물고 튀어!거지같다 싶으면 냅다 콱 물어버리고 튀던가!"

[옙!맡겨만 주세요.]

라이가 다시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라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착잡해졌다.

사실 라이에게 시킨 일치고 제대로 된 일이 없다는 건 알지만,지금의 나는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제발 부탁한다,라이!"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잠시 잊고 있던 한계가 다시금 찾아왔다.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고 다리 역시 그랬다.종아리며 허벅지가 욱신거렸다.

철썩

물살이 거세게 차올라 발을 건드렸다.그 순간,나는 발을 헛디뎌 한쪽 발이 갈 곳을 잃었다.

발로 바닥을 더듬거렸지만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힐끔 밑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난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젠장,어두운 껀 딱 질색이란 말이다!

[마스터!물고 왔어요.]

"라,라이?"

홀연 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온통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서울 법도 했지만 난 그보다 반가움이 앞섰다.

[물고 오는데 그 둔한 인간들이 모르는 건지 쳐다보지도 않더라구요.그래서 한 번 물어준 뒤 시선을 모으고,가방을 통째로 물고 왔습니다.저 잘했죠,마스터?]

"그,그래!잘했어,라이!사람들은?"

[저 위에서 저를 찾고 있을 겁니다.]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미약하게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허나 물소리가 너무 거세서 잘 들리지 않았다.그렇다면......

"아도르!"

[흠?이보게 주인!갑자기 말도 없이 역소환이라니,그런 몰상식한......]

"닥치고 위로 가서 어떻게든 사람들을 데리고 이쪽으로 와라.응?나 급하다!"

지금 당장 물속으로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아도르가 뭐라 뭐라 궁시렁거리며 위로 올라갔다.

잠시 뒤 환한 빛이 한차례 쏟아지더니 아도르게 내 쪽으로 빠르게 날아왔다.이 자식,마나가 왕창 빠져나갔는데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야!

"앗,켄타!저기 사람이 있어!어서 와봐."

누군가 나를 발견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여자인 듯 목소리는 가늘고 새됐다.흐흑,사람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몰라!안 가!이놈들,어딜 간 거야?찾기만 해봐라!"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나한테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뭐?안 와?널 공격한 빛 덩이랑 네 엉덩이 물고 튄 뱀도 있는데?"

"크아악!내 엉덩이의 원수!"

물어도 하필 엉덩이를 물고 그러냐,너는?그래도 다행히 목소리를 듣자 하니 힘 꽤나 쓸 법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잠시 위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이걸 잡아!"

촤르륵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굵은 넝쿨 같은 것이 떨어졌다.손에 힘이 없었지만 그걸 못 잡으면 죽게 생겼으니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줄을 붙잡았다.

"당긴다!"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내가 잡은 줄이 주욱 딸려 올라갔다.

줄에서 미끄러질 것만 같았기에 아예 손을 감았다.

손등이 욱신거렸지만 손등 좀 까지고 말지 떨어질 순 없었다.그렇게 높게만 보였던 절벽을 순식간에 올라왔다.

힘이 빠진 나는 털썩 땅바닥에 엎어졌다.

"어머,애잖아?너 괜찮니?"

내 손을 잡아 올린 은색 머리카락의 여자.걱정스러워하는 그 목소리에 나는 그만 왈칵 눈물을 흘렸다.

"흐어어엉.어엉,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흐어엉."

그대로 그 품에 안겨 마구 눈물을 쏟아내는데 라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쿠엑!마스터!저 좀!쿠억!살려주세요!]

"크아악!왜 이리 질긴 거냐?"

건장하다 못해 거대한 체격의 남자가 웬만한 사람의 허벅지 만한 팔뚝을 불끈거리며 라이를 비비꼬기도 하고,땅에 내려치기도 하며 씩씩거렸다.

눈을 홱 돌리니 아도르는 저 멀리에서 혼자 휭휭 날아다니고 있었다.

"훌쩍......"

"네 뱀이니?"

은색 머리 여자가 라이를 바라보는 나에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하지만 원래 가끔 다져줘야 하니까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생명의 은인에게 라이 정도야 제공할 수 있었다.

[샤악!놔라!놔라,이놈아!]

이내 라이와 거대한 남자의 피 튀기지 않는 혈투가 시작되었다.

윈칸 축제로 향하는 자랑스러운 드미트리 왕국의 왕립 드리케 아카데미.

그 대표팀 인원은 대표생 20명,인솔교사 4명,그들을 호위하는 기사 25명,마부를 포함한 요리사 외 잡일꾼 16명 등 총 65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학생들과 선생들이 이동,숙면 시 사용하는 고급마차의 수가 12개,그 외에 중요한 짐을 실은 짐마차가 2개,천막이나 요리재료를 실은 수레의 수가 6개로,간략하기 그지없는 인

원과 짐으로 꾸려졌다.

베일란까지 약 16일을 남겨둔 대표팀의 아침은 기사단장의 째지는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밝았다.

"우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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