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71)

쾅쾅쾅

"지니 크로웰!문 여세요!옆방까지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데다가 실내에서 이 무슨 마나 유동입니까?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죠?이봐요,지니 크로웰!"

젠장,도망갈까?힐끔 창문을 봤지만 나는 그럴 배짱이 없었다.

저 새된 목소리로 보건대 분명 지금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이리토 선생이었다.

뭐라고 하지?난 유난히 새까맣게 타버린 테이블부터 시작해 전체적으로 그은 방 안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거기에다 약간의 마나 유동이라......뭐 이 정도면 가볍게 넘어갈 수 있겠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방문을 열었다.그러자 역시나 이리토 선생이 표정을 굳힌 채,한 손으로 안경을 치켜 올리며 나를 향해 눈을 번뜩였다.

"이리토 선생님!에헤헤......"

"지니 크로웰!어물쩍 넘어가려는 수작은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문 앞에 선 이리토 선생은 그 순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도 가볍게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다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쳇,뭐 상관없어.내 대응책은 완벽하니까.

"어머 어물쩍거리다니요?전 사건의 경황을 아주 일목요연하고 자세히 설명하려고 했는데요!"

"흠,그렇다면 다행이군요.한 번 설명해주시겠어요,지니 크로웰 양?"

풀 네임으로 부르다니......누가 보더라도 나 화났어요,라는 뜻이다.과연 경제학반의 선생,깐깐하기 그지없다.

"제가 어떤 사건에 연루된 것 아시죠?"

"아,그건 저도 연락 받았습니다.큰일 날 뻔했더군요?"

"네!그래서 피곤해서 잠이 들......"

"잠깐,기사 분들께 감사의 인사는 드렸나요?지니 양에게는 생명의 은인이 아닙니까?"

생명의 은인?하긴 그렇게 되겠군.근데 내가 한센과 필로에게 감사인사를 했던가?아니 오히려 욕을 바가지로 해줬던 것 같은데?나중에 인사하지 뭐.

"물론이죠.아주 찐한 감사의 인사를 드렸답니다."

"흠,그래요?다행이군요.그럼 다시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왠지 엄마를 보는 듯한 깐깐함이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나는 손짓을 섞어가며 설명했다.

"잠이 들어 있었는데 뭐가 타는 냄새가 나서 문득 눈을 떴죠.그런데 테이블이 불에 타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그래서 물의 정령인 운디네를 소환해 불을 껐답니다.사소한 일이었어요."

"불이요?다치진 않았나요?"

이리토 선생이 방 안으로 슬쩍 시선을 주며 말했다.

"네,전 무사하답니다.다만 제 가죽가방이 타버리는 바람에 돈이 녹긴 했지만요."

"흐음,지니 양이 무사하다니 다행이지만......그렇다면 불은 왜 난 거죠?"

"네?"

앗,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과연 이리토 역시 선생,예리하시군.

"불이 난 원인을 묻고 있는 겁니다,지니 양."

"아,아마도 초나 램프의 불이 번진 게 아닐까요?"

불이 난 원인이래봤자 어딜가나 비슷비슷한 것 아니겠어?

"각 방에 램프가 지급되는 시간은 오후 5시 쯤일 텐데요?"

"제......가방에 초가 있었거든요!그걸 켜놓고 잤는데 아마도 제 뱀이 넘어뜨린 모양이네요.자주 그런답니다."

난 침대 위에 배를 들어내고 누워 있는 라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엥?마스터!제가 언제 그랬습니까?저는 억울해요!]

라이의 말은 살포시 무시해주는 센스.이리토 선생이 살짝 찡그린 눈으로 라이를 보며 말했다.

"저게......그 유명한 지니 양의 애완 뱀인가요?생각보다 작군요.제가 듣기론 순하다던데,말썽꾸러기인가 보죠?"

"네,물론이죠.밖에선 얌전한 척하지만,저랑 있으면 갖은 말썽을 다 부린답니다.호홋."

나도 내숭이 갈수록 늘어가는군.

"저도 고향집에서 고양이를 기른답니다.밖에서는 항상 얌전한 모양인데,집안에서는 말썽을 많이 부리죠.밖에서 말썽 부리는 것보단 낫지만 말이에요."

"어머,그런가요?언젠가 한 번 보고 싶네요."

내가 이래봬도 잘 안 써서 그렇지 사교성 멘트가 특기라는 사실.

[마스터,어디 아프십니까?]

[캭!]

이리토 선생이 방을 바꿔주겠다며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방 안으로 들어와서 녹아버린 가방을 바라보았다.

"라이!"

[넵!]

내 부름에 샤샤샥 소리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라이는 잽싸게 기어왔다.

나는 그런 라이를 덥썩 움켜쥐었다.

"자,몸에 힘줘!"

[네?넵!]

"힘 빼지 마."

빳빳해진 라이를 들어 녹아내린 가방 속을 훔쳤다.라이의 검은 꼬리에 갈색 액체가 걸쭉하게 묻어났다.

그러자 라이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이것 꼭 제가......]

"이건 내가 가장 총애하는 라이만이 할 수 있어.내 맘 알지?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물론입죠.이걸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푸헤헤헷!]

그 웃음소리부터 고치거라.잠시 뒤적거린 나는 결국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미련을 버렸다.

어차피 가져온 돈은 2골덴 정도였고,정 돈 쓸 일이 급하면 라이로 하여금 돈을 만들라고 하면 될 테니까.

음,그러니까 풀 마나면 동전이 두 개니까,하루에 총 마나의 반절씩만 써서 1골덴씩 만들어 봐?오옷,그럼 난 부자 되겠는데?

한창 사업구상 중인데 그새 이리토 선생이 돌아온 듯 문을 두드렸다.

"네,선생님."

"지니 양,203호로 이동하세요.망가진 방 수리비는 일단 제가 계산할게요.그리고 후에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지니 양에게 청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싱긋 웃으면서 나중에 청구하겠다고 말하는 이리토 선생이 왠지 두려운 건 나뿐인가?

"네,네,물론 그러셔야죠.괜한 수고를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별말씀을요."

결국 딱히 챙길 짐도 없는 나는 라이를 움켜쥐고는 그 방을 나왔다.

4층으로 이루어진 건물 중 1,2층은 식당이었고 3,4층은 여관이었다.

원래 있던 방과 달리 203호는 4층에 위치해 있어 나는 한 계단을 더 올라가야 했다.

"커거걱,피유우우.커거걱,피유우우.커어,커컥,피유우우."

[마스터?마스터!]

뭔가가 내 얼굴을 찰싹찰싹 강타했다.

어쭈,아픈데?살짝 실눈을 뜬 나는 그게 라이의 꼬리라는 사실을 감지했다.

나는 눈앞에 살랑거리는 꼬리를 덥석 잡아 냅다 던져버렸다.

"건방지게.음냐......"

벽과 충돌한 후에 벽면을 타고 주르륵 떨어지는 라이를 보던 나는 머리를 이불 속에 묻어버렸다.

[마,마스터!오늘부터는 새벽에 마나훈련을 하시겠다며 깨우라고 하셨잖습니까?안 하시는 건가요?]

아차,젠장맞을.결국 부스스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서 세숫물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대충 눈을 비빈 나는 가시지 않는 잠기운을 쫓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얼굴을 시리게 만들었다.아직 푸르스름한 기가 남은 새벽하늘은 아침잠이 많은 내게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하아암!"

차가운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여 마셨다.

그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역시 새벽공기는 차갑단 말이지.

마나훈련은 새벽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새벽녘의 마나가 가장 순수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나는 잠이 많은 관계로 항상 좀 늦은 아침에 마나훈련을 했다.

여태껏 딱히 그 행동을 고칠 생각은 없었지만 어제부로 절실히 마나 부족을 느꼈기에 앞으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새벽에 마나훈련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뭐 첫날부터 그 결심이 흔들리려 하고 있지만.난 저혈압인가?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단 말이지.

다시 창문을 닫았다.

창가 아래서 편한 자세를 취하고 두 다리를 정면으로 쭈욱 뻗었다.

두 손은 다리 위에 올려놓고는 눈을 감았다.그리고 가만히 주변 마나의 흐름에 집중했다.

나에게 마나의 느낌은 푸른 바다와 비슷했다.언제나 조용히 주변을 흐르는 마나의 흐름은 때론 거칠고,때론 부드럽기 그지없다.

그리고 약간은 서늘한 느낌.마치 내가 바다 깊은 곳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그래서일지도 모른다,유독 운디네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물의 정령인 운디네는 왠지 마나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살 끝을 살짝 간질이던 마나는 나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조금씩 피부 겉을 맴돌았다.

그리고는 일순 전신을 조금씩 흘러들어왔다.마나가 내 의지에 따라 몸속을 순회했다.그 마나들이 어느 정도 내 의지에 길들여졌다고 생각된 순간 나는 마나들을 몸속 가장 텅 빈 곳으로 이끌

었다.

본래 쌓여 있던 마나와 새로운 마나들이 서로 반발했다.섞이지 않으려는 듯 튕겨나갔다.

하지만 새로운 마나 중 극히 일부는 본래의 마나와 융합되었다.섞이지 못한 마나는 몸 밖으로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와 함께 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많은 정신력을 소모하는 탓이랄까?마나를 움직인다는 건 언제나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하지만 몸은 매우 상쾌했다.

심장에 마나를 모으는 마법사와는 달리 정령사는 가슴과 배꼽 사이에 모은다.

정령사가 가장 처음 하는 일은 마나 홀을 만드는 것.그 마나 홀을 토대로 조금씩 마나를 쌓아간다.

이 마나 홀이라는 것은 결코 꽉 들어차지 않는데 그 이유는 마나 홀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무한의 공간이랄까?꽉 들어찰 듯하면서 결코 차지 않는다.

마법사나 검사가 어떤지는 자세히 모르지만,정령사의 마나홀은 항상 모자란 듯 비어 있다.

채우면 채우는 만큼 조금씩 넓어진다.하지만 언젠가는 이 마나 홀을 가득 채워보고 싶다는게 내 무모한 바람이라면 바람.

참고로 그 바람을 목표로 정했다.

"후아......"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손바닥으로 닦아냈다.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다시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에 땀이 식자 몸이 시원해졌다.아,상쾌하다.확실히 평소보다 조금 더 마나가 많이 모인 것 같기도 하고.뭐 한동안 계속해보면 알겠지.

한 30분 정도 흘렀을까?새벽하늘의 푸르스름한 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아,저기 해 뜨네?멋진데!뭐,새벽 훈련도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마스터!누군가 옵니다.]

"음......?"

이런 시각에 찾아올 사람이라면......

딸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갈색 머리를 두건으로 감싼 15세 정도의 소녀가 들어왔다.역시 종업원인가?

"어머!"

문을 열고 들어와 테이블 위에 세숫물을 내려놓던 종업원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곤 작은 비명을 질렀다.

내가 괴물이냐?왜 놀라?

"안녕하세요?"

나름 상큼하게 인사를 건넸다.종업원이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깨어계신 줄 몰랐어요."

"말을 안 했으니까요."

"아,네......그,그렇군요."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눈이 네 개가 아닌 이상은......

"욕조 좀 부탁할게요.물은 필요 없고요."

목욕이나 해야겠다.땀이 말라붙어서 조금 찜찜했다.아침 목욕은 내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다.

"네?욕조만요?"

"네,욕조만요."

운디네를 불러서 물을 채우게 하는 건 내 작은 취미거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종업원.

잠시 뒤 그 소녀가 비슷한 또래의 소녀와 욕조를 들고 들어왔다.

내 지시에 따라 테이블 곁에 욕조를 내려놓은 종업원이 나에게 물어왔다.

"저어......물은?"

"필요 없는데요."

뭐 내가 내는 것은 아니지만 물 값도 내야 한다.욕조대여 값 따로,물 값 따로.

난 종업원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운디네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니 이만 나가보라고.

"그,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닫고 나가는 둘을 확인한 나는 문을 잠가버렸다.

아직 깨우러 오려면 삼십 분 정도 남았으니까 대충은 씻겠지.나는 우선 운디네를 불러냈다.

"운디네!"

[네,주인님.부르셨어요?]

내 부름에 변함없이 사랑스러운 운디네가 나타났다.반가운듯 주위를 연신 빙글빙글 도는 운디네.

이런 애교덩어리,캬!내가 이 맛에 정령사 한다니까.헉,나 왠지 영감탱이 같아!순간 와 닿은 작은 충격.

"흠,운디네.여기에 물을 가득 채워주렴,뜨거운 물로."

[네,주인님.]

운디네가 작은 두 손을 들어 아래에서 위로 휘젓자 욕조 안에 물이 뿌연 김을 내며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소모된 마나의 양은 전체의 약 5퍼센트 정도?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라이 녀석이 유난히 마나를 많이 잡아먹는다는 거지,뭐.나에게 마나가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잠옷을 훨훨 벗어던진 나는 익숙하게 욕조 안에 들어가 앉았다.

아이들에게 맞추어 작게 만들어진 아카데미의 욕조와는 달리 조금 커다란 감이 있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뜨끈한 물에 목까지 담그고 있는데 운디네가 욕조 끝에 살짝 내려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우물거리는 운디네.

"왜 그래?"

[헤헤,주인님.전 주인님이 너무 좋아요.]

싱긋 웃으며 해맑게 말하는 운디네.

"쿨럭!"

순간 나는 주르륵 하고 욕조 속으로 미끄러졌다.

당연하게도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와 다소 괴로웠다.만약 그 원인이 라이라면 욕을 해줬겠지만 그 상대가 운디네다 보니 마냥 좋았다.

게다가 하급정령이 소환자에게 감정을 표시한다는 건 서로에 대한 친화도가 높다는 뜻이 된다.

운디네와 계약한 지 약 5개월,운디네가 나에게 말을 튼 것이 바로 며칠 전이건만......운디네에게 애정을 쏟은 보람이 있구나.

[주,주인님.괜찮으세요?]

"푸하!우,운디네!넌,넌,어쩌면 이리 귀엽니!"

[저,정말요?헤헷.]

또다시 운디네를 끌어안고 눈물을 훌쩍였다.

아,운디네는 역시 소환하는 맛이 있다니까.그에 반해 라이는 영 키우는 맛도 없고,눈치는 더 없고!아도르는 싸가지가 없지!아차차.

"운디네?너에게 친구는......아니고,앞으로 너의 종이 되어줄 아이를 소개할게."

[조,종이요?종이 뭔가요?]

운디네는 종이 뭔지 모르나?

"종은......음,어려우니까 그냥 동생 정도로 생각하려무나."

[아하,동생을 종이라고 하는 거군요?]

......그렇게 되나?하긴,내 친구들은 동생을 종처럼 부려먹더군.(어이,동생이랑 종이랑은 부려먹는 이유부터가 틀리다고.)

"비슷해.자,소환할 테니까 인사하렴.아도르!"

파지직

요란한 스파크와 함께 아도르가 나타났다.

어제는 그렇게 눈부셨는데 오늘은 그저 연한 빛 덩어리 정도로만 보였다.

빛 주위에 전류가 흐른다는 게 약간 다르지만.

[주인!왜 이제야 부르는 건가?심심해 죽을 뻔했네!]

......죽지 그랬냐,흥!아도르가 소란스럽게 방 안을 돌아다녔다.

"자자,아도르.인사해,이쪽은 운디네야.내가 가장 예뻐하는 아이지."

[저는 운디네예요.잘 부탁드려요.]

운디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뭐야?주인,이건 겨우 하급 물의 정령 아닌가?]

[앗!마스터?절 가장 총애한다고 하셨잖습니까?거짓이었습니까?]

빛덩이,그러니까 아도르가 내 쪽으로 날아와서 말하자 침대 밑에서 졸고 있던 라이가 지지 않겠다는 듯 욕조 밑으로 기어와서 말했다.

전에 아마 욕조 안에 기어들어왔다가 뒤지게 욕 먹었지?

"아도르,겨우라고?난 앞으로 네가 운디네 말을 듣지 않으면 다신 널 소환하지 않을 생각인데?"

[컥!그,그런 엄청나고 무지막지한 시련을!그러고도 당신이 나의 주인인가!]

"닥쳐,그리고 라이?"

상심한 듯 비실거리는 아도르를 뒤로 하고 욕조 밑의 라이에게 눈을 돌렸다.

[네,넵?]

"넌 가장 총애하는 정령이고,운디네는 가장 예뻐하는 아이야.알아들어?"

[......그럼 아도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음,아도르는 두 번째로 총애하는 아이로 하자."

[아닛,감히 나를 두 번째라고 표현하다니!이보게 주인,그런 경우가 어디 있나?]

아도르 이 자식,은근히 시끄럽네!아도르가 제 딴에는 화났다는 표현인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욕조로 다가왔다.

"잠깐,아도르!넌 그 이상 다가왔다가는 두 번째가 아니라 꼴찌라고 표현하겠어!"

욕조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고 스파크를 튀겨대는 아도르가 다가왔다가는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할 거다.

[허헉!나,나를 이리 푸대접하다니......어찌 주인의 몸으로 그런단 말인가?]

"그럼 너도 운디네처럼 사랑스럽게 변신해 봐.그러면 첫 번째로 바꿔주지."

[헉!마스터,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라이가 욕조 위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넌......글쎄,변화하지 못하면 아도르에게 밀리겠지.크크큭."

[저,저 정도면 충분히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네가 정녕 미쳤구나?"

그 뱀 얼굴을 가지고 어디서 그런 사랑스럽다는 망발을!그 단어가 어울리는 건 운디네뿐이야.

[주인,이보게 주인!나는 변화 같은 건 못하는데......그럼 평생 두 번째인가?]

"글쎄,하는 짓 봐서."

[마스터!마스터!안 됩니다.저런 건방진 것을 첫 번째라니요?아무렴 그 자리는 저의 것 아니겠습니까?]

[주인!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가?난 두 번째로는 못 사네.이 몸이 두 번째라니?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정령 역사상 또 있겠는가?]

이것들이 두 배로 시끄럽네.솔직히 그놈이 그놈이란 말이지.라이는 미운 정이라도 있으니 첫 번째랄까?

"내 총애를 받고 싶거든 둘 다 분발하도록."

[마스터!그럼 운디네 녀석은 뭡니까?아무것도 안하고 첫 번째 아닙니까?]

[헛!정말인가?이보게 주인,그런 차별이 또 어디 있나?정령 역사상......]

"캬악!더 이상 시끄럽게 굴었다가는 둘 다 공동 꼴찌로 삼아주겠어!"

내 으름장에 라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아도르는 방구석으로 날아가서는 연신 조그맣게 투덜댔다.

[까르르르.]

운디네만이 내 손장난에 웃음소리를 냈다.

창밖으로 환하게 해가 떠올랐다.아,학자의 나라라고 했나?

베일란까지 앞으로 17일이군.

"아가씨!저녁시간입니다."

"네에......"

다소 이른 저녁이었지만 배가 고팠던 나는 마부의 보고가 반갑기 그지없었다.

전에 있던 도시인 호덴에는 어제 이른 저녁쯤에 도착,그 다음날인 오늘 점심을 먹고 출발했다.

조금 긴 휴식 시간으로 너무 늑장을 부린다 싶었다.

대표생 중 반절이 어린아이들이다 보니 하루 정도 이동하면 하루의 반 정도 쉬게 되는 것이었다.

똑같이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운동반의 아이들은 오히려 간혹 마차에서 내려 기사들과 얘기하며 걷기도 하는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이동 내내 마차 안에만 있는 종합반 아이들은 그것도 힘들다고 앵앵거리기 일쑤였다.

그렇다 보니 당연 기사들과 종합반 아이들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연신 '힘들다,쉬자' 를 연발하는 종합반 아이들이 기사들에게는 귀찮기만 하리라.뭐,그래도 나만큼 기사단장이랑 앙숙인 아이가 또 있을까?

[마스터,저녁은 크림 스튜입니다.]

[정말?그거 내가 좋아하는 건데.]

음식 보급할 시간이 길어서인지 식사는 제법 풍족하게 나왔다.

게다가 오늘의 주식은 크림 스튜.기쁜 마음으로 마차 문을 열고 나와 줄을 섰다.

줄은 두 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한쪽은 종합반이,다른 한쪽은 운동반 아이들이 서 있었다.

본래 나뉘어 있는 줄은 아니었지만 운동반과 종합반 자체가 서로를 경계하는 경향이 강하게 있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줄도,식사도 따로 이루어졌다.게다가 운동반의 존재조차 몰랐던 아이도 있지 않은가.아니 그건 나뿐이려나?

종합반 줄에 선 나는 내 앞으로 남은 아이가 몇 명인가를 살펴보았다.한 4명 정도인가?

옆줄의 운동반 아이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그러고 보니 나를 비꼬는 아이들은 대부분이 운동반이다.

종합반 아이들로서는 친하진 않아도 일단 같은 반인데다가 내가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점이 없어서인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새 내 차례가 다가왔고 스튜와 빵,사과 하나를 배급받은 나는 나무 밑에 앉아 끼리끼리 식사하는 아이들에게 잠시 눈길을 주고는 마차로 몸을 돌렸다.

막 마차에 오르려는데 유난히 또렷한 목소리 하나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 살인자!"

귀에 상당히 거슬리는 단어.난 천천히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라색 머리를 가진 남자아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딱 봐도 '꼽냐?' 라고 묻는 시선이었다.

"......나 불렀니?"

담담한 내 반응에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무슨 반응을 기대한 걸까나?

"이......너,너는 사람을 죽여 놓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는 거냐?이 악마 같은 계집애야!"

"흠,그러는 넌?너는 앞으로 아무도 안 죽일 모양이지?네가 마치 성인군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솔직히 내가 죽인 건 아니다.직접 손을 쓴 건 한센과 필로였으니까.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내가 죽였다는 말도 맞기는 하다.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죽은 걔네들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고.

만약 똑같은 일이 다시 닥친다면 그땐 내 손으로 직접 상대를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나는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을 용서할 만큼 마음이 넓지 못했으니까.내가 죽을 때는 내가 정할 거니까!

"난,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아이가 따지듯 말해왔지만 요지는 그게 아니었다.

"그렇겠지.하지만 앞으로는?네가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난 단지 내가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이었고,남들도 했을 일을 한 거야.너는 누군가 너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걸 내버려둘 만큼

바보인 모양이지?"

"난 멍청하게 당하지 않아!나는 강하단 말야!"

"그래?너 참 잘났구나.부러워."

"날......조롱하는 거야,이 살인자 주제에?"

아이가 자신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아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에 얇은 건틀릿을 착용하고 있는 아이.아마도 격투부 아인 듯했다.그렇다면......그 탈락된 레오와 같은 반이겠군.나한테 적의를 품을 만하다고 해야 하나?

"조롱이라니?나는 네가 뭘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라고.난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나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불사할 수 있어.하지만 넌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야.고마워하라

고!못 알아듣겠으면 애들은 꺼져!"

마지막에는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났찌만,말귀를 못 알아듣는 애들은 딱 질색이었다.

"이......으윽,흐아아앙.우아앙!디넬 선생님!후아앙!"

흥,눈 좀 크게 뜨게 해줬다고 울기는......아무리 훈련을 시켜놔도 애는 애라니까?뭐 나도 애니 할 말은 아니지만.

그리고 누군 그냥 마음 편히 죽였는지 아는 거야?나도 나름대로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거야!내가 얼마나 감수성이 예민한데!

뭣 모르는 애들은 가만히 좀 있어줬으면 좋겠어.그런데......디넬이라면?

"쳇,재수 없기는 그 선생이나 애나 똑같군."

외출을 방해하던 그 선생이잖아?울고 있는 아이에게 비난의 시선을 아끼지 않고 보내준 나는 마차에 올랐다.이 몸은 배가 고프시다 이거야.

식사를 마치고 막 마차가 출발하려는데 누군가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마스터,웬 여자아인데요?]

여자아이?날 찾아올 여자아이는 없을 텐데?살짝 문을 열자 화려한 핑크색 머리의 아이가 막무가내로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뭐,뭐야,너?"

"안녕!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화려한 핑크색 머리와 파란 눈동자를 가진 이 여자아이는 아주 뻔뻔했다.

"뭐지?멋대로 남의 마차에 올라타다니.당장......"

"이건 선물이야."

아이가 내민 것은 고급스러운 글씨가 눈에 띄는 초콜릿 상자였다.

"헤헷,내 마차다 생각하고 편하게 있도록 해."(헐..)

"고마워!"

만약 사탕이었다면 택도 없었겠지만 그것보다 구하기 훠얼씬 어려운 초콜릿,그것도 나도 몇 번 먹지 못한 고급이었다.

게다가 한 박스.초콜릿은 잘 녹기 때문에 보관이 어려웠고 고로 비쌀 수밖에 없었다.

사탕이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공용된 간식거리라면,초콜릿은 그야말로 부유한 귀족의 전유물이었다.어쨌든 먹기 힘든 음식이다,이 말씀.

그 자리에서 초콜릿 몇 개를 꺼내든 나는 포장을 뜯어내고 조그만 그림이 찍혀 있는 초콜릿들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음,꿀꺽.맛있다!"

"그렇지?나도 그거 좋아해."

마주보고 웃는 아이,그러고 보니 연금술반에서 몇 번인가 봤던 아이네?나랑은 아니지만 미아랑은 제법 친할지도......

"자,너도 하나 먹어."

"아,고마워!"

초콜릿을 하나 건네자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받아들었다.

"......그런데 묻고 싶다는 게 뭐야?"

마차가 덜컹거리는 걸 보니 이미 출발한 모양이었다.

이제 마차가 서기 전에는 못 내리겠군.그때까진 이 애랑 함께 있어야 하나?딱히 나쁠 건 없지만......

"별건 아니고,음......우선 내 소개부터 할게!난 연금술반의 이루제 페이루라고 해.이루제라고 불러줘."

아아,생각났다.미아가 유난히 싫어해서 항상 '이루제는......이루제가......' 하면서 얘기하던 아이.

"아아,난 진이 크로웰.정령술반이야,지니라고 불러."

"응,지니!히히."

"......참 잘 웃는구나?"

꼭,미아 같군.잘 웃고,잘 울고.모든 애들의 공통점이지,나도 포함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음......그거 칭찬이야?"

"물론 칭찬이지."(너무 잘 웃는것도 안좋을 때가 있답니다!)

"히히,그래?고마워.우리 아버지가 웃는 사람에게 복이 오는 거라고 했어."

"흐음,그래?"

어느새 몇 개 남지 않은 초콜릿,그 개수를 세어본 나는 아쉽지만 나중을 기약하며 초콜릿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음......지니는 굉장히 어른스러운 것 같아.아까 미리네에게도 그렇고."

"미리네?"

"격투부의 보라색 머리 남자아이 말야.아까 울어버렸 던......"

"아아,한심했지."

어른스럽다고?당연하지.내 나이가 이래봬도 전생에 17살에 이쪽에서 10살,흐음 27살인가?쳇,이건 앞으로 생각하지 말자.

"멋졌어!난 굉장히 감동해버렸는걸."

"감동까지야......그런데 묻고 싶은 게 있다며?난 변덕이 심해.빨리 말하지 않으면 대답 안 할지도 모른다고."

"아,맞아!뭐냐면 지니 네가 키우는 애완 뱀 있지?그 뱀에 대해 묻고 싶어서."

"라이 말야?"

라이가 어디서 사고 치다 들켰나?내가 그렇게 증거만 남기지 말라고......음,그나저나 그새 라이가 안 보이네?

"라이?그 뱀 이름이 라이야?"

"응,너도 라이라고 불러."

"그래,라이......이름 좋은데?음,그런데 라이라는 뱀은 어디 있어?"

"글쎄,나도 몰라.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라이는 간혹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돌아오곤 하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보나마나 뭔가 흡수하러 갔겠지.

"모,몰라?지니 네 뱀인데?"

"아마 사냥하러 갔을 거야.알아서 돌아오니까 신경 안 써."

조금 당혹스럽다는 표정의 이루제.

"그렇구나.흠,역시 내 생각대로 그 뱀,아니 라이는......"

"......라이가 왜?"

"지니,너 라이가 무슨 종류인지 아니?"

금속의 정령이지 아마?뱀 종류는 글쎄,어쩌다 보니 입수한 녀석이라 그것까진......

"뱀 종류?모르겠는데."

"히힛!지니,라이는 웬만한 칼로는 상처도 남지 않는 단단한 껍질에 머리가 아주 좋아서 주인인 지니 너의 말은 하나같이 다 알아듣는다며?"

"그렇지."

일단은 뱀이 아니라 정령이니까 말이야.

"그래!그게 바로 라이가 전설 속의 금강사라는 증거라고!"

이루제는 흥분한 듯 벌떡 일어나며 목청을 높였다.금강사가......뭐시기?

"금강사?그게 뭔데?"

"금강사는 말야,전설 속의 동물이라고!금강석이 있는 곳에서만 서식하며,금강석 같은 단단한 강도의 껍질을 가진 환상의 뱀!게다가 지능이 매우 뛰어나서 사람의 말귀를 다 알아듣는대.내가

얼마 전 지니 네가 키운다는 라이의 소식을 들었을 때 혹시나 해서 직접 실험해봤는데,맙소사,정말로 칼이 두 동강 나는 게 아니겠니?"

실험?설마하니......

"무슨 실험?"

"응?칼로 내리쳤지.혹시 불량인가 해서 열 개 정도 실험해봤어."

[헉,역시 그때 그 악독한 아이!마스터,슬프지만 잠시 동안 절 찾지 말아주세요.]

어디선가 라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어쩐지 골 때리는 아이를 태운 것 같았다.

"그래서 말야,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너무 약 올라서 일부러 그 녀석에게 실험하던 비커에 든 화약가루를......듣고 있는 거야 지니?"

"커걱.어!어어,물론이지.쓰읍,그래.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이루제는 강적이었다.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얘깃거리들,그리고 나는 마차 안이다 보니 피할 수도 없이 그저 그 얘기를 꼼짝없이 들어야 했다.

내가 듣다,듣다,한계에 다다라서......

"이루제,내가 좀 많이 졸리거든.나중에 들으면 안 될까?"

하고 말했다.나름 사교성 멘트였다.하지만 돌아온 이루제의 답은......

"어,그래?그럼 그냥 자면서 들어도 돼.헤헷."

되긴 뭐가 돼!나는 자면서 남과 대화하는 능력 따윈 없단 말이다!

내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이루제와 상식적인 대화는 불가능하니 그냥 듣고 있으라고.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이루제의 말을 뒤로 하고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마침 정면에서 대표단을 호위하는 기사와 얼굴이 마주쳤다.난 마차 위였고,상대 기사는 말을 타고 있었기에 눈높이가 비슷했다.

흐음,나를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는 기사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은빛의 투구,갑옷,검에는 하나같이 황금색 새가 새겨져 있다.

거기에다가 새하얀 말까지.흔히 소녀들이 꿈꾸는 백마 탄 왕자님?아니,백마 탄 기사님이군.

뭐 기사의 얼굴이 좀 딸리는 것 같지만 삼박자를 고루 갖추기란 어려운 거니까.

나는 그나마 안면 있는 한센과 필로를 찾아 마차 밖으로 몸을 쭈욱 빼냈다.

마침 일행의 가장 뒤쪽에 있는 한센과 필로가 눈에 띄었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멋들어진 말을 타고 있었는데,말의 색은 가지각색이었다.

검정,갈색,흰색,점박이.그런데 어째서 한센과 필로는 뛰어오고 있는 거지?말은 어쩌고?말이야말로 기사의 로망 아니던가?

한센과 필로에게 의아한 눈길을 보내는데 마침 필로와 눈이 마주쳤다.

까닥

내가 손짓을 하자 필로가 달리는 속도를 높여 마차 옆으로 다가와 섰다.그러자 원래 옆에 서 있던 기사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욕을 내뱉으며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저것이 감히!

"무슨 일이십니까?"

필로의 시선은 나보다 밑에 있었다.위로 치켜보던 사람을 위에서 보자니 조금 어색하군.

"말은요?"

"네?"

거두절미하고 던진 물음에 필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어왔다.

"왜 뛰어오느냐고요?"

"아,아직......말을 지급받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그,그것이......남는 말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말이 되니,그게?왕궁에 말이 모자란다는 게 말이 돼?

왕궁기사가 되면 특별히 왕궁마구간에서 길러진 혈통 좋은 최고급 종마가 지급된다는 건 주위에 극도로 무관심한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전공을 정하지 못하면 종자가 된다는 것과 왕궁기사가 되면 멋진 말을 지급받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라는 식의 소문이 함께 떠돌았었으니까.

"......그걸 믿어요?"

"물론입니다.단장님 말씀은 절대적이니까요."

"바보군요?"

"그,그렇습니까?"

난 다시 마차 안으로 몸을 들였다.뭔가 까먹은 듯한......아차,그 단장 물건 몽땅 흡수해서 골탕 먹인다던 걸 잊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보석상에 뺏겼다던 정령석도!앗,돈 미리 냈는데,내 정신 좀 보게나.라이 녀석,시킨 건 하나도 안 하고 저런 혹덩이만 붙여놓고 날름 튀어?

[라이!]

대답이 없었다.

[라이이이이!]

나 열 받았어,크큭!

"운디네!"

[네에,주인님.]

"가서 라이 찾아와!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겠다고 해."

[네,주인님!]

우리 운디네는 대답도 잘해요.운디네가 가벼운 몸짓으로 창밖으로 날아갔다.

라이 이 자식,내가 정령석까진 바라지도 않아.하다못해 단장 녀석 옷이라도 벗겨놨어야 될 것 아냐?

내가 씩씩거리고 있는데 이루제의 황홀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그거 정령이지?응?정령 맞지?"

"음?응,운디네라고 해."

"어쩜,너무 귀엽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우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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