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71)

......흐음,될 대로 되라군.어지간히 귀찮았나 보네,그냥 묻어버린 걸 보니.뭐 내가 요긴하게 써주도록......잠깐,두 정령?

뭐야?그럼 정령석이 두 개란 말이야?전기의 정령 말고 또 뭐가 있다는 거야?

"이봐!너!이것 하나가 아니었어?둘이었던 거야?"

내가 갑작스레 큰 소리를 내선지 아이가 화들짝 놀랐다.정령석이 두 개?내가 더 놀랐다!

"네?아,네.하나는 아버지가 보석점에 팔러 갔다가......"

"뭐어엇?그럼 팔았단 말야?"

나는 경악했다.이런 젝일!

"아,아니오.어디서 훔친 것을 팔려고 하냐면서......몰매만 맞고 쫓겨나셨어요.흐흑,그래서 아버지도 그만 쓰러지......"

"잠깐!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그럼 정령석은?그건 어떻게 했어?"

다른 소린 들리지 않았고 나는 다만 정령석의 행방만이 중요했다.잘하면 두 마리,크크큭.

"네?아......보석상에게 뺏겼......"

"뭐얏?그런 괘씸한!감히 남의 것을 날로 먹으려 들어?"

나는 광분했다.감히 내 것(?)을 가로채다니!

"하지만......저희가 주인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야!아니지,잘 들어봐?그걸 만약 안 뺏겼으면 네가 여기 나와서 팔았겠지?"

"네?그,그렇죠."

"그럼 그걸 내가 샀겠지?"

"그,그렇게 되나요?"

"그래!그러니까 내가 샀으면 내 물건이잖아."

"아,네.그,그렇군요."

"근데 내 물건을 그 보석상이 빼앗아갔다 이거지?주인 있는 물건을?응?그러면 그건 범죄잖아."

"전 잘......"

이런 답답한 놈.이럴땐 라이가 최고지.난 또다시 허리께에 있는 라이를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아이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캭!맞아?아냐?"

"히익!맞습니다.맞아요!그렇고 말구요!"

그러고 보니 라이 들이밀고 협박하긴 오랜만이네.손에 잡힌 라이가 꼼지락거리더니 내 쪽으로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마스터,아깐 남의 것을 팔려고 하다니,이유야 뭐가 됐든 도둑질이라고 그러셨잖아요?]

[아가리......콱!]

내가 차마 힘이 딸려서 찢어주지는 못하고 라이를 들어 마구 돌리려는데 필로가 저쪽에서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런데 필로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얼굴에는 피멍이 가득했고 뛰어오는 한쪽 다리는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필로!"

한센의 안타까운 듯한 비명.필로가 자신을 부축하려는 한센을 밀어내곤 나에게 가방을 내밀었다.앗,가방에 피 묻었다.

"죄송합니다.좀 지저분해졌습니다."

"아니,뭐......필로가 빨아주겠죠?"

"빠,빨아요?아,물론 그래야죠!저 빨래 아주 잘합니다."

다행이네.난 빨래 자신 없거든.

"그럼 다행이구요.그런데 필로,왜 그렇게 다쳤죠?"

"아,단장님께 징계를 좀......"

"......징계?"

그 사이에 뭔 징계?

"제 잘못이었습니다.그만 바쁘게 올라가느라 식당에 계신 단장님께 인사를 못 드려서요."

한마디로 줘 맞았다?에휴우,오늘 할 일이 왜 이렇게 많냐?보석상에도 들러야지,그 단장도 괴롭혀줘야지,새로 계약도 해야 될 것 같은데.쳇,빨리 움직여야겠네.난 바쁘게 움직이는 건 딱 질색

인데 말이지.정령사 해먹기 힘들어서 원.

여전히 라이의 위용(?)에 떨고 있는 아이에게 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걱정 마.라이는 너무 작아서 사람은 못 먹어.그리고 얘는 편식이 좀 심하거든?그러니까 너무 겁먹지 말라고."

"예?그,그거......다행인......건가요?"

"그런 거지.그보다 그 보석상은 어디야?"

이제는 볼일 없어진 라이를 땅으로 내팽겨쳤다.

그러자 라이는 익숙하게 기어오더니 다시 내 옷속으로 들어와서는 허리께에 자리 잡았다.

조만간 라이를 넣어 다닐 가방을 하나 구해야겠다.영 불편해서 말이지.

"보석상요?거긴 왜......?"

"가서 찾아와야 될 것 아냐?"

내 말에 아이가 기겁을 하면서 고개를 거칠게 내저었다.

"아,안 돼요!던헬 보석상엔 항상 깡패들이 대기하고 있어서 누군가 소란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린다구요!위험해요!저희 아버지도 그 깡패들에게 당하신 거란 말이에

요!"

"......그게 무슨 상관이래?내가 가져올 것도 아닌데."

"네?"

"내 뱀은 편식도 잘하지만,물어오는 건 더 잘하거든.그러니까 걱정 마,넌 길만 알려주면 되니까."

이 아이는 내가 보석상에 쳐들어가서 '정령석 내놔!' 라고 소란이라도 피울 거라고 생각한 걸까?

난 그렇게 거친 사람이 아닌데 말이지.내가 얼마나 섬세하고 우아한 인간인데.

나는 다만 라이에게 정령석을 물어오라고만 시키면 되는 거였다.굳이 일을 크게 벌일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나한테 피해가 오는 건 딱 질색이었다.

"하,하지만......!"

도통 입을 열려 하지 않는 아이.

그러나 방금 보석상의 이름을 알았으니 더 이상 이 아이에게 볼 일은 없었다.까짓 길이야 사람들에게 물어서 찾아가면 되는 거니까.

"에휴,말이 안 통하는군.뭐 상관없어.네가 싫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으면 되니까.그리고 이건 정령석 두 개 값이아.이 책도 포함해서.이 정도면 되지?"

가방 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든 나는 이름 모를 아이에게 금화를 건네주었다.

아이는 자신의 손 위로 떨어지는 금화의 수가 많아질수록 점점 눈이 커졌다.눈이 더 이상 커지지 않자 이번에는 입이 벌어졌다.재밌는 아이네.

"허어억!"

"자,이제 이건 내 거지?그리고 보석상에 있는 것도 내가 알아서 찾아가도록 할게.그리고 신관에게 2골드 정도 쥐어두면 네 눈은 고쳐줄 거야.만약 네 부모가 나을 가망이 없거든,포기하고 너

나 잘 살도록 해.의외로 죽은 뒤는 편하니까 말이야."

"아......"

멍해진 아이를 뒤로 하고 천천히 사람들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가씨,10골드는......너무 과한 것 같은데요?"

"그래요?어차피 쓸 일도 없으니까.그보다 던헬 보석상 좀 수소문해주세요.되도록 빨리."

필로는 내가 시세를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몇 마디 건넸지만 돈은 이미 내 손을 떠나 있었다.

그런 이상 그 돈은 이제 내것이 아니었다.

흘깃

여전히 멍한 아이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지만 그뿐이었다.더이상 만날 일이 없기를 바랄 뿐.

보석상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라이,어때?여기 정령석이 있는 것 같아?]

[으음......네,매우 미약하지만 분명 있습니다.그다지 깊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은데요?]

흐음,그럼 여기가 확실한 건가?척 보기에도 꽤나 큰 보석상이었다.돈 좀 벌겠군.

나는 보석상과 그 옆 건물 사이에 있는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그리고 품속에서 라이를 꺼내들었다.

[좋아,그렇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겠지?]

[정령석을 회수해오라고 말씀하시는 거죠,마스터?]

[딩동댕.완수한다면 칭찬해주지.자,어서 가.]

[옙!]

라이가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지?

"저어,아가씨!"

"왜요?"

약간 당황한 얼굴로 필로가 나를 불렀다.

"뱀이......도망가는데요?"

"도망간 게 아니라 정령석 가져오라고 가는 거예요."

그다지 깊은 곳에 있는 게 아니라고 했으니까,쉽게 찾아오겠지?그것도 못 찾아오면 넌 앞으로 찬밥이다.

"정령석이라면 그......팔러 왔다가 빼앗겼다는......?"

"네,그거요.돈은 지불했으니 이제 찾아와야죠."

"뱀이......말입니까?"

"왜요?못 믿겠으면 필로나 한센이 가서 찾아올래요?내가 갈 생각은 없으니까."

영 못 믿겠다는 얼굴을 하는 필로.하지만 '네가 갈래?' 하는 말에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라이가 정령석을 물어오면 일단 어떤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쓸 만하면 내가 계약한 다음,정령석은 라이에게 흡수하라고 하면 되겠지?괜히 남겼다가 다른 사람이 계약하면 아까우

니까.나는 나만의 정령이 가지고 싶단 말이지,크큭.라이는 심부름용이니까 제외.

앞으로는 마나훈련을 더욱 빡세게 해야겠다.

일단 이 전기의 정령이랑은 계약할 테고,그렇게 되면 동시에 정령 둘은 소환해야 하니까.

나는 가방 안에 있는 책을 꺼내들었다.

계약진이 불완전하다고 적혀 있는게 조금 꺼림칙하단 말이지.음,그나저나 라이 녀석 왜 이렇게 안 나오는거야?한 10분 정도 흐른 것 같은데?그거 하나 물어오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리나?

라이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나는 결국 골목 밖으로 나왔다.한센과 필로가 따라 나왔다.

그리고 골목을 빠져나와 가게 안을 들여다본 순간 제대로 열 받았다.

활짝 열린 보석상 안으로 들어가서는 라이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총 3명,그다지 나이가 든 사람은 없었고 대개 15세,18세 정도로 보였다.

회색 머리의 눈 작은 놈이랑,어딘지 모르게 기분 나쁜 검은 머리 놈,그리고 궁사로 보이는 파란 머리 여자 하나.그중 검은 머리 남자의 발에 머리가 밟힌 채 파닥거리고 있는 라이.

에라,이 쓸모없는 것.너를 믿은 내가 바보지.

라이를 밟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간 나는 의아하게 바라보는 그에게 일딴 씨익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냅다 라이를 밟기 시작했다.

[히익!잘못했어요,마스터어!]

하지만 워낙 단단해서 밟아봤자 내 발만 아팠기 때문에 라이를 발로 퍽 차버렸다.

[쿠엑!]

벽에 처박힌 라이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져서는 데굴데굴 굴렀다.

한 번 더 차버리려다가 라이가 부딪친 벽에 살짝 금이 간 것을 발견한 나는 라이를 들어 올려 마구잡이로 돌려버렸다.

[후에에엑!]

라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바로 이거거든.

그렇게 무아지경의 상태로 라이에게 징계를 내리는데 그새 다가온 필로가 나를 말렸다.

"그만하세요!뱀 죽겠습니다!"

[헉!나를 걱정해주는 인간은 처음입니다.마스터,저 감동 먹었어요!]

빠직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어졌다.열 받은 나는 라이를 냅다 필로에게 던져버렸다.

[그럼 걔더러 주인 해달라 그랫!]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라이를 놀라 바라보던 필로는 그만 라이와 정면으로 박치기하는 비운의 사태를 맞았다.

그 충격이 강했는지 필로는 찍 소리도 못 내며 그대로 이말르 부여잡고는 쓰러졌다.

하지만 쓰러진 필로와는 정반대로 라이는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내게 기어왔다.저 돌대가리......

[마스터,질투하시는구나.걱정 마세요.제게는 영원히 마스터 뿐이......]

[죽어버렷!]

다시 한 번 라이를 냅다 차버렸다.하지만 이번엔 나보다 먼저 라이를 집어든 사람이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라이를 밟고 있던 예의 기분 나쁜 기껏 18세나 됐을까 하는 남자가 물었다.

키는 컸지만 얼굴에는 아직 애티가 남아 있었다.녀석의 목소리는 매우 소름끼쳤다.마치 쇠를 긁는 듯한 듣기 거북한 목소리.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지 멋대로 말을 놨다는 거지.

"뭐하는 짓?참 듣기 안 좋은 단어를 쓰는군 그래.내 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댁이 무슨 상관이지?"

나는 딱히 말을 올려 써야 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상대의 말투도 말투였지만 나를 비웃는 듯한 그 표정이 매우 거슬렸다.

"흥,여린 소녀께서 이 뱀의 주인이시라고?"

라이를 뱅글뱅글 돌리면서 말하는 남자.지가 뭔데 감히 라이를 돌려?

"이봐,남의 뱀을 너무 멋대로 다루는군 그래.어서 돌려줘!라이는 내 거야!"

[앗,마스터.저를 그렇게나 많이 생각해주시니......흐흑,감격입니다!]

아,진짜 그냥 줘버려?

"네 것이라고?흥,증거 있나?게다가 가게 안에 들어온 이 위험 동물은 내가 잡았다.고로 이 동물의 생사 여부는 나에게 달려 있지."

"얼씨구!그럼 죽여보든가.나도 못 죽이는걸 네가 어떻게 죽일래?즐이다!"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줬지만 녀석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다만 욕이란 느낌은 있었는지 녀석과 나 사이에 살벌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 인간 저를 죽이려다 칼의 이가 몽땅 나갔습니다.화 좀 났을걸요.푸헤헤헷!]

흥,그래서 밟고만 있었던 건가?그 남자의 뒤로 일행인 듯한 푸른 머리 여자와 눈 작은 남자가 나를 째려보며 서 있었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한센이 어느새 정신 차린 듯 헤롱거리는 필로를 부축하고 있었다.이리 와야 될 것 아냐?쳇 삼대일이냐?치사하다,치사해!

"......죽이진 못하겠지만 이 녀석을 팔아버릴 순 있지.내가 잡았으니 말이야!아니면 이 단단한 허물을 벗겨서 보호구를 만들어도 괜찮겠군."

"나한테 돈 내고 해라,응?뭐 벗길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싸가지 없는 꼬맹이 같으니......"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검은 머리 남자의 눈이 순간 분노로 번들거렸다.애를 상대로 진심으로 화내다니,멀었군,그래!

"뭐야?싸가지?웃기시네!재수 없게 생긴 주제에!"

그 사이 한센과 필로가 내 뒤로 다가왔다.빨리도 온다.

그 특유의 굳은 얼굴을 한 한센이 겁을 줄 심산인지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어린 사람이 너무 건방지군,그래.이 아가씨가 뉘신줄 알고?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귀족 모독죄로 간주,처형하겠다!"

어이,처형은 좀......그리고 모르는 것 같은데 귀족 모독죄가 즉각 발동되는 건 백작 이상이거든?

그 이하는 처형까진 못해.기껏해야 손이나 발을 자르는 정도일까?

한센의 말에 겁을 먹기는커녕 검은 머리 남자는 눈을 더욱 부라렸다.

그러더니 이를 아드득 갈며 말했다.

"호오,빌어먹을 귀족이셨다?어쩐지 말하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안 든다 했지!"

"난 네 녀석 마음에 들 생각이 전혀 없거든!그리고 내가 귀족인데 네 녀석이 보태준 것 있어?"

조금 과하다 싶게 흥분한 남자는 돌연 칼을 빼들었다.

그러자 한센과 필로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견제하는 몸짓을 했다.

그가 칼을 뽑음과 동시에 그렇지 않아도 소란스럽게 가게 안이 크게 술렁거렸다.

근데......왼손잡인가?오른손에는 라이,왼손에는 검?아니,양손잡이겠군.(라이 무거울텐데 친구?)

"하!칼을 뽑아?너 미친거 아냐?"

칼을 뽑았다는 건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미가 된다.

뱀 주인이 뱀 좀 찾아가겠다는데 죽이겠다고?저거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거 아냐?게다가 이빨 빠진 칼을 들고 뭘 하겠다는 거야?

"내 인생의 목표가 뭔 줄 아나?바로 하나라도 많은 귀족을 이 땅에서 죽여 없애는 거다!"

"......누가 물어봤어?"

난 남자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그는 여전히 한 손에 라이를 붙잡고 있었다.

스릉

한센과 필로가 검을 빼들었다.

"컥!"

하지만 한센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더니 다시 검을 집어넣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반쪽짜리 검으로 뭘 하겠수?한센은 갑옷의 한쪽에 양각된 황금빛 새의 문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문장이 보이지 않는가?왕실 제 5기사단으로서 명한다.당장 검을 내려라!그렇지 않으면 법으로 다스리겠다!"

"크크큭!뭐라고?왕실?웃기는군.그딴 건 개나 주라 그래!크하하핫!"

한센의 엄한 호통에도 그는 미친 듯 웃을 뿐이었다.

정말 위험하다 싶었는지 한센은 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화려한 검 하나를 빼들었다.

미친 듯 웃어젖히는 남자를 말리려는 듯 동료들이 다가왔지만 그는 거친 몸짓으로 일행을 밀어냈다.

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내가 너무 자극했나?조금 반성하려는데 순간 뭔가가 내 얼굴로 날아왔다.

정말,정말 본능적으로 살짝 고개를 튼 순간,날카로운 단검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앞에 잘려나간 금발이 휘날렸다.그리고 귓가가 화끈거렸다.

손을 귀에 살짝 대자 붉은 핏물이 묻어났다.

저 인간......정말 미친 것 아냐?도저히 이해불가의 행동을 보이는 그 남자에게 나는 황당함도 들었지만 그보다 자칫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속에서부터 찐득한 살기 같은 것이 꾸

역꾸역 올라왔다.심장이 점점 거세게 뛰었다.잊었던 그때의 공포가 분노가 되어 살아나는 듯했다.

[마스터!]

기겁을 한 라이의 목소리,거칠게 뛰는 심장과는 반대로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날 죽이려고 했어,못 피했으면 난 죽었을 거야.그 녀석은 나를 죽이지 못한 게 아쉽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반대쪽 허리에 찾고 있던 다른 검을 빼들었다.

그의 오른손에 감겨 있는 라이가 눈에 띄었다.빌어먹을......

[라이,그 손목을 당장 비틀어버려.]

[알겠습니다.]

내 말에 라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내 귓가,아니 가게 안에 소름끼치는 소리가 지독하게 선명히 울려퍼졌다.

빠드드득

까가각

"우,우아아악!내,내 손!아아아악!"

남자의 손이 기괴한 모양으로 비틀어졌다.라이의 몸이 휘감은 오른손은 그대로 꼴사납게 부러졌다.

마치 무슨 나무젓가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나도 쉽게.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그만......!"

그 소리에 라이가 몸을 풀어냈다.

그리고 지지대를 잃은 라이는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내 쪽으로 기어오는 라이.라이가 기어오는 바닥에 피가 진한 그림을 남겼다.

라이의 검은 몸이 붉게 번들거렸다.남자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방으로 비틀어진 손,아니 더 이상 손이 아닌 살덩이가 되어버린 그것에 새하얀 뼈가 날카로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으웨엑!"

"으읍!"

사방에서 입을 틀어막고 구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젠장.

"크아아악!"

남자는 연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그런 그에게 다가간 일행은 차마 그의 꼴사납게 뭉개진 손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 일행은 울고 있었다.

[마스터,저 잘했죠?]

기분 나빠,소름 끼쳐,저 남자를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내가 무서워.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건지 박동소리가 너무 거세 주위의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다만 내 눈에는 나를 향해 무기를 치켜들고 달려오는 남자와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을 뿐이다.

그중 여자의 얼굴이 어느 순간 몸에서 떨어져 허공으로 떠올랐다.

데구르르

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주인 잃은 머리가 내 쪽으로 굴러왔다.

새파란 머리카락과 붉은 피가 범벅된 머리의 눈이 나를 노려보았다.맙소사,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눈을 돌렸다.

사람들이 나를 괴물 보듯 하고 있었다.다시 눈을 돌리자 심장에 한센의 칼이 박혀 입에서 피를 꾸역꾸역 뱉어내는 남자가 보였다.눈을 감아버렸다.

[이런,즉사에 과다출혈 둘.곧 다 죽겠군요.뭐 마스터에게 덤비다니 당연한 결과지만요.]

담담한 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냐!내가,내가 한 게 아냐!난 몰라아!

"히힉,시......싫어어어어!아아악!"

**

어쩌다 대표팀 파트가 끝났습니다.저의 끈질기고도 감미로운(?)타이핑은 해냈습니다!

화이팅!

**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던헬 보석상에서 살인이 일어났다고?"

번쩍거리는 보석이 알알이 박힌 화려한 검집에 광을 내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보고를 올린 부하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가 세심하게 매만지는 검은 아무리 보석이 많기로 유명한 호덴의 것이라지만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했다.

"네,그렇습니다."

"던헬이라......말귀를 잘 알아듣는 가게이긴 한데 말이야,문제는 소란을 너무 자주 일으킨단 말이지.쯧,난 깡패 놈들 뒤처리하는 건 딱 질색이지만 이번에 던헬에게 받은 것도 있고 하니 조

용히 처리해주도록."

남자는 다시 검집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나가보라는 뜻이었다.

"대장님,이번 범인은 던헬의 깡패가 아닙니다."

"뭐야?그럼 싸움이 일어난 건가?"

상사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그러자 부하는 손에 들린 서류를 상사에게 내밀며 설명했다.

"네,인원은 A측 3명 B측 3명으로 사건의 개요는 A측의 애완동물이 던헬 보석상 안으로 들어갔고 그것을 B측이 포획했습니다.그러자 애완동물을 따라 들어온 A측과 그것의 소유 여부를 따지는

말싸움이 크게 벌어진 것으로 보입니다.B측이 먼저 칼을 빼들자 A측이 대응해 유혈사태가 벌어졌습니다.그 결과 먼저 소란을 피운 B측 3명은 즉사 한 명,과다출혈로 인한 사망 한명,나머지

한 명은 현재 치료중이며,A측은 조사를 끝낸 뒤 숙소로 돌려보냈습니다."

서류를 보지 않은 채 여전히 검집을 닦으며 부하의 설명을 듣던 상사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뭐?상대는?먼저 칼을 뽑았다고 해도 죽은 건 B쪽 놈들이니,일단 A쪽은 살인자로 간주된다.그것도 도시 안에서 동물 하나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게 되지 않나?그러니 함께 감옥에 처넣으면

될 것 아닌가?대체 자네는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상사의 노성에 부하가 담담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었다.

"하지만,B측은 그동안 3명의 지방귀족을 살해한 혐의로 수배자에 올라 있는 흉악범들이었으며,A측은 드리케 아카데미의 학생과 그녀를 보호하는 기사 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또한 주변

의 진술로 통일되는 바,B측은 A측의 드리케 학생이 귀족이라는 사실에 돌연 화를 내며 먼저 공격을 시도했습니다.그것이 미수로 그치자 A측 학생의 애완동물이 B측 남성을 공격,유혈사태로

번지고 이에 흥분한 B측의 두 사람이 A측의 학생을 공격,이에 학생을 보호하던 기사들이 그들을 살해한 것으로 정당방위가 성립됩니다.더군다나 드리케 아카데미의 학생은 기본적으로 준 남

작의 지위를 얻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귀족 모독죄는 적용되지 않아도,미수이긴 하나 귀족 살인죄가 적용됨으로써 법적으로 A측은 무죄가 됩니다."

부하의 설명에 상사가 표정을 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하긴 자네가 얼마나 일을 잘 처리하는지는 내 잘 알고 있지.자네만큼 믿을 만한 부하가 또 어디 있겠나?잘했군.일단 수배자를 잡은 것으로 됐으니 드리케 학생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상부에는 이 서류를 올리도록.그리고 던헬에는 이번 상납금이 부족하지 않느냐고 넌지시 운을 띄워보도록."

"네,알겠습니다."

부하는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상사의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런데 말이야,드리케 학생이 왜 여기 있는 거지?그것도 기사까지 대동하고?"

"......제가 일주일 전에 보고를 올렸는데요,윈칸 축제로 향하는 드리케 아카데미의 대표팀이 얼마 뒤면 저희 호덴 도시를 지날 거라고요."

부하의 말에 상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가?난 금시초문인데......자네가 착각하는 것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겠군요.죄송합니다,제 불찰입니다."

부하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말했고 상사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뭐 그 정도야 가볍게 용서해주도록 하지.그만 나가보도록."

부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문 밖으로 나선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고 집무실에서 조금 멀어졌을 때쯤 그의 입이 열렸다.

"개만도 못한 놈 같으니라고......"

멍하니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터,사람이야 원래 언젠가는 죽는 것 아닙니까?다만 좀 빨리 죽은 것뿐이지요.조금 잔인하긴 했지만 그 정도야 비일비재합니다.그냥 사람이 죽는 거나 쥐가 죽는 거나 똑같다고 생각하세

요.]

[아니,아니야.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봤기 때문이 아냐!]

[네?]

[죽은 뒤가 꼭 고통스러운 건 아니니까,의외로 죽은 뒤가 더욱 편할 수도 있거든.문제는 내가 죽였다는 거야.나 때문에 죽었다는 거.누가 누굴 죽이든 살리든 그건 상관없어!다만 거기에 내

가 관여되어서는 안 되는 거라고!]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움켜쥐었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그게......무슨 말씀이시죠?]

"나도......나도 모르겠어!내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정말 싫어!내가 왜 고민하고,왜 아파하고,왜 힘들어야 해?왜 나야?왜,왜 내가 죽어야 됐었느냐고?"

내가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지금의 내가 너무 슬프다는 것,너무 무섭다는 것,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냐는 거야!

애초에 전생 따윈 기억 안 났으면,아니 그때 그렇게 죽지 않았더라면!그,그 이전에 아예 버스 따윈 타지 않았으면!

어디부터 꼬인 거야?대체 뭐가 문제냐고!외로워,모든 게 힘들어,나만 이 세상에서 이방인 같아.나만 남들과 달라.전생을 기억해서?그게 문제야?아니면 대체 왜!뭣 때문에!

뒤죽박죽으로 엉킨 자문자답이 이어졌다.

이대로 숨을 멈춰버리고 싶었다.격한 감정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돌연 방 한쪽에서 뭔가 생소한 느낌이 강하게 일렁거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테이블 위의 가방 안에서 무언가가 번쩍하고 황금빛을 뿜어냈다.

그 빛 속에 있던 내 가방이 파치직 하고 녹아내렸다.가방 안에서 녹아내린 무언가가 뚝뚝 떨어졌다.

황금색의 액체.내......돈?

침대에서 내려와 그쪽으로 다가갔다.하지만 난 더 이상 그 빛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 강한 빛은 위험하다고 느껴졌으니까.

[마스터,전기의 정령입니다.마스터의 강한 마이너스 감정에 반응을 보이는 겁니다.스스로 소환되려 하고 있어요.]

[......스스로?]

[네,스스로 마스터를 섬기길 원하고 있습니다.]

......나를?내 마이너스 감정?아무래도 좋아.이 짜증나는 감정 같은 건 모조리 태워줬으면 좋겠어.

치지지직

치지직

방전되는 듯한 현상이 십여 분 동안 이어졌다.하지만 그뿐.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아무래도 힘이 딸리는 모양이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마스터가 정령석에 마나를 주입해주시면 될 겁니다.]

그러려고 해도,도대체 다가갈 수가 있어야 말이지.

윙윙하는 소리를 내며 황금색의 빛이 테이블에서부터 온 방 안을 검게 그을리고 있었다.

정령석이 들어 있던 가방은 물론이고 가방 안에 있던 많은 것들도 이미 녹아버렸다.

가죽 가방의 진갈색 걸쭉한 액체를 바탕으로 동전이 녹은 황금색이 보였고 책이 타버린 듯 새까만 재가 떠다녔다.

"다가가긴 무리라고 보이는데?"

[흠,그렇다면 스스로 나오기를 기다려야겠군요.]

결국 그건가?난 녹아버린 동전이 아깝기도 했지만 그보다 스스로 소환되는 정령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기대감이 커졌다.

번쩍이던 빛이 조금씩 사그라졌다.아마 어지간히도 힘이 딸리는 모양이었다.

마나를 주입하는게 무리라면......난 내 몸속에 있는 마나를 조금 몸 밖으로 빼냈다.

마나를 흡수하기는 해봤지만 밖으로 빼는 건 처음이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조금씩 빼낸 마나가 미약하나마 온 방 안에 퍼졌다.

그리고 일순 그 마나들이 정령석으로 흡수되듯 거세게 빨려 들어갔다.

내 생각이 적중해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난 이내 코를 움켜쥐었다.

걸쭉한 액체가 파지직 소리를 내며 역한 냄새와 함께 증발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조그마한 빛이 느리게 튀어나왔다.

비실거리며 공중에 떠오른 그것은 매우 작았지만 눈이 아릴 만큼 강한 빛을 뿜어냈다.

[이름을......]

다소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그런데......어디서 들어본 대사다.

라이 때였던가?가는 목소리,여자도 아니고 남자의 것도 아닌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말투에는 강한 자신감이랄까,당당함이 묻어났다.다소 비실거린다는 것이 옥에 티였다.

"......전기의 정령?"

[그렇다.특별히 내 주인으로 삼아줄 테니 내게 이름을 다오.]

"......다시 기어들어가라!"

얘는 싸가지가 매우 없군.

[뭐,뭐야?감히 이 몸이 계약해주겠다는데 거부하는 거냐!]

"다시 가라고.전기의 정령이 너뿐이냐?"

작은 빛 덩어리가 허공에 8자를 그리며 사납게 휘돌았다.

[이익!후회할 거다!이 몸은 전기의 정령 중에서도 가장 높은 서열의 몸으로......]

"닥치고 들어가."

[푸헤헤헷!]

비속성 정령한테 등급이 어디 있어?사기치고 있네.라이 또한 비웃었다.

[이익!감히 나,나를 비웃다니!넌 뭐냐?]

[이 몸은 마스터의 첫 번째 정령인 라이님이시다.금속의 정령 이시지.]

라이는 자랑스러운 듯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금속의 정령?어디서 이런 듣보잡이......난 그런 건 들어본적 없다!보나마나 하급정령일 테지!]

[크큭,너 따위가 나를 어찌 알겠느냐!푸헤헤헷.꺼져라,꺼져!]

"둘 다 닥쳐."

......지들끼리 싸우는 건데 왜 그 목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리는 거냐고.말이 곱게 나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치하게 싸우는 두 마리 정령을 보자니 무겁던 기분이 조금 가벼워졌다.

[쳇,조금만 주제에 입이 거칠군.하지만 좋다.내 특별히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지!나와 계약하겠는가?]

사실 다른 녀석을 부른다고 해도 불려나올지 알 수 없었고,또 난 반드시 전기의 정령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녀석이라면 왠지 라이와 죽이 잘 맞을 것 같단 말이지.그럼 성가신데 어쩔까나.

"좋아,대신......"

[대,대신?소환자가 감히 무슨 조건을 내밀려는 거지?정령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소환했나?지가 튀어나왔지?

"그럼 다시 기어들어가.난 아쉬울 것 없다."

[쳇,좋다.일단 들어는 보지.]

"그래?아주 간단한 거야.네 이름을 지으면 돼."

난 정령이든 뭐든 이름 짓는 게 매우 어렵단 말이지.라이 때도 이름 짓느라 머리 좀 굴렸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넌 지능도 떨어지는 거냐?네 이름을 지으란 말이야,네 이름을!"

[그,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정령 스스로 자기 이림을 짓다니......그런 황당한 일은 정령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말든가."

[이 몸은 절대 그런 바보짓은 할수 없다!]

내가 피식 콧방귀를 뀌는데 바닥에 있던 라이가 빠르게 몸을 타고 올라왔다.

어느새 목까지 올라온 라이가 내 눈앞에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마스터!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좋은 생각?"

[저 건방진 전기의 정령의 이름 말입니다.]

"오,뭔데?"

[전기는 찌릿하잖습니까?]

전기가 찌릿하던가?전기에 감전되면 그렇던가?

라이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게다가 왠지......눈이 웃고 있어.

"그,그렇지.찌릿하지?"

[그러니까 녀석의 이름은 찌리가 어떻습니까?]

라이의 제안에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라이도 가끔 도움이 된단 말이지.

"오,좋다.그래,전기의 정령.네 이름은 찌리......"

[자,잠깐!차,차라리 내가 짓겠다.]

쳇,그 이름 마음에 드는데.

"그러든가."

마나의 양을 보니 반 정도 남아 있었다.

본래 소환하고 대기 상태라면 5분 정도 유지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방 안에 마나를 뿌려댄 것이 원인인지 마나가 조금 부족했다.

[으으음.끄응,끄으응......]

"너......똥 싸냐?"

[으으윽.이럴 수가......무려 8천 년만의 계약이 겨우 이름 때문에 좌절되다니......크흐흑.으흐흐흑.]

얼씨구!갑자기 서럽게 울어대는 전기의 정령?나 원,한심해서......

"그냥 찌리로 하라니까?"

[그렇겐 절대 못한다!차라리 날 죽여!어흐흐흑.]

라이도 그렇고 정령들은 어째 잘 우는 것 같단 말이지.

운디네는 한 번도 안 울었는데.그나저나 이렇게 거부하는데 어쩐다?이름이라......으음,흐으으음.라이랑 커플로 해서 코스?

아니지,그런 어감이 영......우씨,이름 정하기 힘든데 그냥 계약하지 말아버려?찌리!이름 좋구만,대체 왜 싫다는 거야?그렇다면......아,맞아.그 이름!

"아,그럼 아도르 어때?네가 나온 전기의 정령석을 만든 정령사의 이름인데."

[아,아도르?그건 고대어로 불꽃이라는 뜻이 아닌가?그건 좀......]

"아,그러면 찌리로 할래?"

[아도르......그것 멋지군.아도르로 하지.아니 꼭 아도르로 해주게!]

그래,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이로써 한 건 해결인가?

"좋아,전기의 정령.너의 이름은 아도르다."

[좋다,내 이름은 아도르.주인의 이름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위험해 보이던,실제로도 위험한 빛 덩어리였던 아도르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눈부시던 빛은 어느새 사그라지고 작은 스파크를 튀기며 천천히 주위를 배회했다.

"내 이름은 진이 크로웰."

[지니 크로웰,그대가 죽는 그날까지 주인으로 모시겠다.]

왠지 건방지단 말이지,아도르......

"좋아,그럼 일단 돌아가 봐.마나가 부족하니까."

[좋다,주인.오늘은 이만 돌아가지.그 대신 빠른 시일 내에 이 몸을 다시 부르도......]

마나를 끊어버렸다.

일종의 컴퓨터 전원을 끈 것 정도라고 보면 된다.시끄러운 정령한텐 이게 딱이지,뭐.정작 라이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후아......"

엉망이 된 방에서 침대를 찾아 다시 누웠다.

방 안 곳곳이 그을어 있었다.조금 멍하니 그을린 방 안을 둘러보는데 라이가 나를 불렀다.

[마스터?]

"음?"

[아니,아까와 같은 자세인데 느낌이 다르군요.]

"아아,왠지......편해졌어.뭐,좋아 이번엔 한 번 겪었으니 다음엔 조금 더 편하겠지!내가 아니라도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누가 혼란스럽지 않겠어?그렇지?난 인간이니까 죄책감을 느낀

것뿐이고,앞으로도 그럴 거야.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를 죄책감이 무뎌지겠지.하지만 드리케의 정령사가 된 이상 나는 언젠가 전쟁에 참여할 테고,그렇게 되면 난 분명 나를 위해 다른 사람

들을 죽일 거야."(왠지 무서워...)

이미 수차례 겪어왔던 혼란이었다.

내가 왜 그때 그렇게 죽었고 왜 전생을 기억하는가.

하지만 항상 대답은 없었고 이제는 대답이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자기합리화일지도 모르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역시 저의 마스터시군요.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는 쉽게 정신이 무너지지도 않지만,무너진다고 해도 빠르게 회복되죠.누구나 겪는 겁니다,혼란이라는 건.하지만 그걸 이겨내느냐.아니면 함께

무너지느냐는 본인의 정신력에 달린 거죠.]

"......역시 라이 너는 늙은이야.하긴,무려 만이천 살이신데 어련하겠어?"

[켁!느,늙은이라니요?그런 심한 말씀을!]

라이가 강하게 거부하는 몸짓을 했다.내가 피식 웃는데 누군가 방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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