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71)

띵,땡그르릉

"......설마 그거뿐?"

맑은 소리를 내며 나무 탁자 위로 떨어져 내린 것은 5쿠퍼 하나와 1쿠퍼 하나.6백원?내가 미쳐!

"네?이,이상하네요.돈이 이렇게 없을 리가......아!술집 외상값으로 모두......"

"......에휴."

그래,거기서부턴 안 들어도 알겠다.그래 세상만사 원래 다 그렇지 뭐.

그렇게 세상 한탄에 들어가려는데 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터,제가......제가요 저것과 똑같은 것 만들어낼까요?저 잘할 수 있는데!]

[지,진짜?]

그,그래 라이!네가 있었구나.그동안 외면해서 미안하다.앞으로 예뻐해주마.

[네!할까요?해요?]

[응!빨리 해봐!빨리!]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허리께에 매달려 있던 라이의 몸이 부우웅,하고 미약하게 떨렸다.어우,이거 운동되겠다.

생소한 진동에 낯설어할 틈도 없이 몸속에 있던 마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빠져나갔다.어찌나 무지막지한 속도로 빠지는지 두려움이 들 정도였다.

"헉,잠깐!그마안!"

빠져나가던 마나가 뚝 멈췄다.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남은 마나의 양을 살폈다.

헉스,전체의 90퍼센트가 날아가 버렸다.조금 더 뺐으면 기절할 뻔했잖아?

"아,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갑작스레 소리를 질러선지 한센과 필로가 나를 걱정하는 말을 건넸지만 나는 일단 라이를 허리에서 잡아 뺐다.

"꺄아악!"

과일가게 아줌마의 비명소리,덩치에 안 어울리게 웬 비명이셔!

[야!]

라이의 목을 움켜잡고는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태세로 눈을 부라렸다.

[네,넵?]

[너 죽을래?마나가 없잖아,마나가!대체 동전 하나에 얼마나 빼가는 거야?캬아악!]

겨우 동전 하나 만드는데 마나가 거의 다 빠져나가버렸다는 사실에 나는 분노했다.손에 들린 라이를 마구 흔들어댔다.

[히이익.흐엑!하나가 아니라 두 갠데......저기 누런 동전 두개를 똑같이 복사하라고 마스터가......]

[......두 개나 하나나!이렇게 많이 필요하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조금만 더 빼갔으면 난 실신이란 말이닷!

[아니,두개 만들면 딱 될 것 같아서......]

[캭!]

[히익!]

변명을 늘어놓는 라이를 이제는 아예 바닥에 패대기쳐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차라리 떠올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만한 것을 생각해냈다.

[야,라이.이거 만약에 말인데......만약에 저 동전이 금으로 된 거면......마나가 더 필요하냐?]

[그,금이요?금이나 동이나 그다지 차이는 없습니다.강도가 유달리 센 것도 아니라서요.둘다 다루기 쉬운 것들이죠.미스릴이라면 지금 마스터의 상태로는 하나도 무리지만요.게다가 주인님께

서 주문한 것이 저것과 똑같은 것을 만들라는 거였기에 마나가 유달리 많이 필요했던 겁니다.어제같이 그냥 합금을 채워넣는 것은 쉬운데 말이에요.그리고 원래 제가 힘을 발휘하려면 뭐가

됐든 마스터의 마나가 필요합니다.흡수하는 것만 빼고요.모르셨나요?]

......이런 바보,차라리 골드......아니 골덴을 만들라고 할걸.우씨,이게 다 마나가 이렇게 많이 들어간다고 말해주지 않은 라이 잘못이라는 생각에 나는 바닥에 던져진 라이를 마구잡이로

밟아댔다.

한센과 필로가 나를 말리려는 듯 팔을 붙들었지만 발로 밟는데 팔이 대수냐!

[이 웬수야!이 밥통아!넌!마나만!먹고!사냐!]

[흑,주인님,너무합니다.아프진 않지만......이렇게 마구잡이로 때리시다니......흑흑흑.]

[아,아쭈?안 아파?]

라이의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마침 눈에 무기가 들어오자 그야말로 나는 회까닥 돌아버렸다.

나를 말리던 한센의 옆구리에서 칼을 빼냈다.스르릉 소리를 내며 묵직한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무겁긴 했지만 나는 기필코 라이를 두 동강내고야 말겠다는 투지를 불살랐다.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그 다음 냅다 내리쳤다.몸뚱이도 기다란 라이다 보니 조준에 어려움은 없었다.

쩌저적

퍼석

"......!"

[엥?]

어느새 가게 주위로 몰려든 구경꾼들은 물론이오,한센과 필로,라이의 상태에 비명을 질러대던 아줌마까지 그 순간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듯 침묵을 지켰다.

싸한 정적이 시장 한편에 내려앉았다.난 손에 들린 반밖에 남지 않는 검을 든 그대로 몸을 천천히 돌려 한센을 올려다보았다.

경악한 한센은 입을 헤 벌리고는 알아듣기 다소 어려운 말을 내뱉았다.

"커어억!증조......4대......거......가보가......"

한마디 알아들었다.가보란다.아고 미안해라.

"쏘리,한센."

어째 되는 일이 없는 날이었다.

한센은 두 동강,아니 반쪽이 완전히 바스라진 검을 들고 오열했다.

그런 상태가 잠시 지속되자 구경꾼들은 어느새 각자 할일을 찾아 떠나갔다.

그런 한센을 필로가 위로하고 있었다.난 홀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라이가 내 쪽으로 기어왔다.

[저기......마스터.]

[왜?]

[......만든 동전은 어떻게 할까요?]

아차!

[내놔봐.]

[넵!]

라이가 입을 쫘악 벌리더니 5쿠퍼 동전 하나와 만들다 만 1쿠퍼로 보이는 동전을 내뱉았다.다행히 침은 안 묻어 있었다.

5쿠퍼 동전을 집어든 나는 일단 필로가 탁자 위로 털어낸 동전 중 5쿠퍼짜리를 집어 동전 뱉는 뱀의 모습에 또 기겁하는 아줌마에게 내밀었다.

"히익!"

"사과......아니 저 과일 값이요."

"아니,그냥......그냥 드세요!"

아마 이 아줌마는 멀쩡한 검 하나 잃어버린 한센이 안 됐기도 하고,차마 뱀이 뱉어낸 돈을 받자니 내키지 않았나 보다.

안 받는다는 아줌마의 말에 나는 두말 않고 동전을 품속으로 넣었다.

거래가 끝나자 나는 일단 종이봉투를 집어 들곤 한센에게 다가갔다.

"저어,음......한센 씨!"

"크흐흑.흐흐흐흑.어흐흑.킁,네?"

울음소리를 삼켜내던 한센이 내 부름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얼굴은 눈물범벅에 콧물 양념......

"에,미안해요.가보......인가 보죠?"

"예,아니......뭐,그렇습니다.저희 아버지에,아버지에,아버지......그러니까 증조할아버님께서 왕궁 대장간에서 일하실때 만든 것인데......그저 중한 것이니 잘 물려주라고만......흐흑."

잠시 회상하는 눈을 하나 싶던 한센은 또다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오열했다.아,거참 미안하게......

[......라이!]

[넵!]

저 멀리서 내 눈치만 보고 있던 라이가 잽싸게 다가왔다.

[아까 그 검,다시 똑같은 것 만들 수 있어?]

[물론이죠!다만,지금 마스터의 마나가 열 배로 늘어나면요.]

[......말을 말자.]

열 배라......내가 그렇게 마나가 적었었나?그래도 웬만한 2서클 마법사랑 맞먹는 마나량이라고 이엘 선생이 그랬는데.

"흐어어엉!"

"이......이봐,한센!"

쳇,앞으로 마나훈련을 뼈 빠지게 해야겠네.

[마스터,생각해보니까 아무래도 열 배는 안 되고 열두 배는 있어야겠어요.]

콰직

[쿠엑!]

항상 매를 벌어요!내 발밑에 무참히 밟힌 라이가 꾸물거리는 느낌이 신발을 통해 느껴졌다.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내 언젠가는 반드시 이놈의 주둥이를 찢어놓으리라!

와작

나는 입 안 가득 사과의 모양을 한 과일을 우물거리며 거리를 살폈다.

눈에 띄는 물건들이 제법 많아서인지 눈이 즐거웠다.

뒤에서는 침울한 표정의 다소 정신 나간 한센이 축 처진 채 검을 들고 쫓아오고 있었고 그런 한센의 곁을 필로가 따랐다.

[음,라이!]

[넵!]

[아까 흡수하는 건 마나가 필요 없다고 했지?그럼 흡수했던걸 그대로 뱉어내는 건?그것도 마나가 드는 거야?]

[물론 들죠.그 물건이 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그새 어깨 위로 기어 올라온 라이가 꼬리를 흔들어댔다.아마도 화가 난 내가 말을 걸어준 게 반가운 모양이다.

[달라?어떻게?]

[예를 들어 아까처럼 동전을 똑같이 만드는 데 필요한 마나가 10이라면,흡수한 것을 그냥 뱉어내는 것은 1 정도 든다고 할 수 있죠.]

[......열 배나 차이가 나?그냥 뱉는다고?어떻게 다른건데?]

[음,쉽게 말씀드리자면 흡수할 때는 금속을 액체 상태로 돌려야 합니다.그러니 제게 흡수된다면 금속은 그 본래 원형은 잃어버리는 겁니다.이미 원형을 잃어버린 것을 다시 원래 상태로 돌리

려면 금속에 기억된 형체를 끄집어내서 다시 그 모양으로 다듬어내는 데 꽤나 많은 마나가 필요하게 되지요.하지만 뱉어내기만 하는 거라면 흡수만큼이나 쉬운 일이죠.뭐,구리를 금으로 만들

어서 뱉어내라고 하신다면 많은 마나가 필요하겠지만요.액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만......뭐,대충 그런거죠.]

[그래?너 동전도 먹어봤냐?]

[넵!]

내가 흥미를 보이자 라이는 금세 신이 나서는 꼬리를 마구잡이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 꼬리가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는데 아무래도 금속이다 보니 많이 아팠다.나는 꼬리를 잡아채서 반항하는 라이를 소매 속에 넣어버렸다.

[들어가!]

[너무하십니다.여긴 좁아서 불편한데.]

"저,아가씨!아가씨!"

"네?네?왜요?"

징징거리는 라이에게 한마디 하려는데 필로가 내 어깨를 잡아 살짝 흔들었다.

"아니,죄송합니다.멍하신 것 같아서......"

"아,그냥 딴생각 좀 했어요.마저 할 테니 말시키지 마세요."

라이와 대화하려니 역시 한쪽에는 소홀해지는 건가.흠,내 대답에 다소 멍한 표정으로 물러나는 필로.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이참에 라이에 대해 확실히 알아둬서 다신 오늘 같은 불상사가 없도록 해야 했다.

아윽,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리는구나.5쿠퍼 동전과 골드를 바꿔버린 이 기분,그 누가 알아줄까?

바삐 주위를 둘러보는데 한쪽에 자판 위로 늘어진 알록달록한 열쇠와 자물쇠가 눈에 띄었다.그러고 보니......

[아,그거 말야,저번에 녹슨 자물쇠를 원래대로 되돌린 거랑은 다른 거야?재구성 어쩌고 하는 것.]

[그것 같은 경우에는 조금 다릅니다.흡수한 것을 다듬는 것과,그렇지 않은 것을 다듬는 것은 천지차이니까요.일단 한 번 액체 상태가 되면 아무래도 그 성질만 남고 형체는 없어지게 되니까

요.그렇게 되면 형체는 무가 되어버려서,저는 무로 되돌려진 것에서 유를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에 마나가 더욱 필요하게 되는 거죠.하지만 그 자물쇠는 자신의 본래 형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저는 단지 약간의 힘을 불어넣어 다듬어준 것뿐입니다.음,헌것을 새것으로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한마디로 유에서 유를 만들어낸 거죠.]

[......]

[마스터!왜 그러십니까?]

[......대충 알아듣겠는데 너무 어려워.]

[으음......다르긴 하지만 쉽게 말하자면,전 금속의 성질을 다루는 것이 전문이고,다듬는 것은 비전문이다.뭐,그렇게만 알아두시면 됩니다.아무래도 비전문인 것을 해내려면 힘이 들지 않습

니까?그래서 그쪽도 그쪽 나름의 전문가가 있는 거니까요.]

라이의 대답에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내가 배워왔던 것과는 다소 다른 내용들......

[그게 뭐야?좀 다른데?]

[그런가요?하지만 세공의 정령도 있으니까요.그 녀석은 저완 반대로 물건을 다듬는 것이 전문이죠.]

세공의 정령?조각하는 건가?별의별 정령이 다 있네.그러고 보니 이엘 선생이 말했던 저주의 정령은......어둠의 정령이라고 했던가?뭐가 다른 거지?세공의 정령은 또 라이랑 어떻게 다른 거

고?나 원,3년간 배운 건 거의 도움이 안 되잖아!

[그 세공의 정령은 너랑 어떻게 다른데?]

[음,아무래도 제가 그 녀석보다 우위라는 것?]

[넌 급이 없다며?]

[하지만 기본적으로 발현할 수 있는 권능의 차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흐음......]

[아,그리고 세공의 정령,그 녀석은 소환이 불가능합니다.왜냐면 본인이 소환에 응할 생각이 없거든요.]

어쭈,건방진 정령인가?

[어째서?정령은 소환되어 주인을 만나야 의미가 있는 것 아냐?]

[아뇨,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정령들은 모두 나름의 생각이 있고 같은 종류 같은 급의 정령이라도 성격의 차이가 있으니까요.계약을 하고 안 하고는 그 정령 개인의 의지일 뿐입니다.그리고

세공의 정령,그 녀석은 자신의 주인이 되려면 훌륭한 세공 실력이 있어야 한다며 주인을 고르는데,그 녀석의 눈에 들려면 드워프 정도는 되어야 하죠.하지만 드워프는 정령과는 거리가 먼 종

족이니까,평생 계약은 불가능할 겁니다.그런 류의 녀석도 많죠.주인을 고르는 케이스요.]

[......넌 어떤 케이슨데?]

[저도 주인을 고르는 케이스죠.그 덕에 꽤나 오랫동안 마스터없이 홀로 지냈지만요.]

대화를 할수록 느끼는 거지만......이 녀석 은근히 연륜이 있단 말이지.

[근데 너 대체 나이가 몇 살이야?]

[나이요?]

[그래,나이!정령이라도 자기가 태어나고 몇 년이 흘렀는지 정도는 알겠지?]

[음......한 일만 이천 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만 정확하진 않군요.본래 시간이라는 것은 매우 귀찮은 것이라서 말이에요.]

일만 이천?천 이백도 아니고,백 이십도 아니고......으음,열 두살은 더더욱 아니지.정령은 원래 불로불사인가?어쩐지 좀 바보 같다 했더니......치맨가?

[......그렇게 늙었어?근대 주인을 고른다면서 나와 계약한 이유가 뭐야?일만 이천 년 동안 뭐하고?]

[음,사실 계약을 해보려고도 했지만 한......만 년 전쯤,그보다 덜 되었던가,아무튼 어느 날부턴가 아무도 계약을 신청하지 않더군요.그래서 그냥 계약 같은 걸 잊고 살았는데 문득 누군가

자신과 계약할 정령을 부르더군요.아주 또렷한 목소리로요.제게 그 목소리가 그만큼 강하게 들렸다는 것은 소환주가 그만큼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는 얘기가 되거든요.상성이 잘 맞을 때도

그렇긴 하지만,저는 무속성이니까 단지 강력한 정신력에 끌려온 겁니다.]

[강한 정신력?누가?내가?]

내가 그렇게 굳센 인간이었나?단지 죽었다 다시 태어난 운명,이 한생 편하게 살아보자는 평범한 생각의 소유잔데?

[그야 마스터지요.뭐랄까,죽음을 초월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력이랄까?아무튼,정령에게 있어서 강한 정신력이 매우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죠.정령을 소환하고 다루는 데는 마나는 물론

정신력의 소모도 매우 심하니까요.게다가 저희 정령은 마스터와 직접적으로 교감하기 때문에 정신력이 나약한 마스터는 애초에 섬기지 않습니다.피차 피곤해지니까요.아아,그러고보니 제가

마스터와 계약을 하려고 할 때도 무슨 잔챙이들이 그리도 많이 달려들던지,그래서 제가 모조리 날려버렸죠.]

죽음을 초월한 건가?하긴,솔직히 죽어도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쩐지 죽음,아니 삶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옅어졌다.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의 진실을 알아버려서일까?

[그럼,나는 다른 정령을 소환할 때도 남들보다 유리한 건가?정신력이 강하니까.]

[그렇죠!정령은 두 가지를 따집니다.달콤한 친화력의 냄새와 자신의 마스터가 될 존재의 정신력이 얼마나 굳건한가를요.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소환주의 정신력이 빈약하면 정령 또한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왜냐면 소환주가 느끼는 불안감이나 흥분감이 정령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니까요.만약 소환주가 약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면 그 소환주는 강한 정신적 충격을 받기가 쉽겠죠.그

리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정령에게도 돌아가는데 정령은 소환주가 받은 것보다 더 강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지만,정령은 대게 정신체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강한 정신적 타격은 곧 소멸을 뜻하니까요.]

[아......]

그건 들은 적이 있었다.

정신체인 정령에게 강한 정신적 충격은 자칫 정령을 소멸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난 왠지 라이가 생각보다 대단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는 육체가 있는 것도 좋아합니다.나름 재미있거든요.]

[......근데 운디네는 육체가 있잖아.]

[흠,그건 육체라고 표현하지 않죠.운디네라면 단지 물이 모여 있는 것뿐이니까요.]

[......어쨌든 몸이잖아.]

[몸은 아닙니다.단지 그 정령이 가진 정신이 형상을 이룬 거죠.]

[흐음......]

알수록 어려워져만 가는 정령의 세계.

내가 머리 쓰기 싫어서 정령사가 된 면도 있는데,이러다간 마법사 꼴 나겠군.

나는 그런 폐인이 되긴 싫단 말이지!

더 이상 라이와 대화하다간 점점 더 기억해야 할 것이 많아지겠다는 생각에 나는 정신을 시장통에 집중했다.아니,하려 했다.

[마스터!마스터!]

"아,왜에?"

[저기요!저기 오른쪽 잡화점 바로 옆에 있는 돗자리요.]

난 라이의 호들갑스러운 설명에 잡화점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웬 초췌해 보이는 꼬마가 돗자리 위로 물건을 늘어놓고 있었는데 그 물건들이 하나같이 이상해 보였다.

통일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물건들,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해괴한 것들이 많았다.

[......저게 왜?]

[저기서......뭐랄까,미약하지만 정령석의 냄새가 나는군요.흡수할까요?]

정령석?그......뭐더라,정령과의 친화력을 높여주는 거라고 했나?

정령이 정령석을 흡수하다니......그거 동족상잔?아니 그정도는 아니어도 좀 그렇지 않나?

잠시 고민한 나는 일단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갑작스레 방향을 바꾸는 나를 뒤에서 필로가 허둥대며 따라왔고 필로의 한 손에는 정신이 반쯤나간 한센이 잡혀있었다.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거칠 것 없이 발을 옮겼다.

몇 걸음 뗴지 않아 돗자리 앞에 다다랐다.내가 다가서자 소년지 소녀인지 모를 내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나를 반겼다.

"어,어서 오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일단 돗자리 앞에 쪼그려 앉았다.

[라이!정령석이 어디 있는데?]

[에......거기 그 오래된 갈색 책 옆에 있는 노란 보석이요.]

라이의 말에 따라 나는 오래된 듯 부분적으로 바스라진 책의 옆에 있는 보석이라기보다는 원석 같은 것을 집어들었다.

표면이 거칠었고 전체적으로 투명한 원석 속에는 노란,아니 번쩍이는 황금 같은 것이 마치 속에서부터 금이 간 것처럼 원석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흐음,예쁘네.다듬으면 뭔가 만들 수 있을지도......하지만 딱히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게 정령석이야?]

[네,안에서 미약하지만 정령의 힘이 느껴져요.]

[......무슨 정령?]

[글쎄요?찌릿찌릿한 느낌이 드는 게......아마도 번개의 정령?아니,그 이하인가?으음,너무 약해서 잘 모르겠네요.일단 흡수할까요?]

먹으라고 하려고 해도 옆에 주인이 있었다.

그것도 며칠은 굶었는지 너무 말라서 광대뼈가 보일 정도의 주인이었다.어쩐다?잠시 여관으로 가서 돈을 가져올까?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문득 투명한 원석 속에 있던 황금빛이 움직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찌리릿하는 느낌이 찾아왔다.

그리고 불현듯 늙은 라이와는 달리 사랑스러운 운디네의 얼굴이 번쩍 떠올랐다.신은 날 버리지 않았다!

물과 전기,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전기의 정령이라는 게 정말 있기만 한다면......

[라이!전기의 정령이라는 거 어떻게 해야 계약할 수 있어?]

[계약이요?바로 이 정령석을 이용해서 하는 겁니다만?]

[뭐?정말?정령석은 친화력을 높여주는 도구 아니야?이걸로 계약도 할 수 있어?]

[정령석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친화력을 높여주는 것,정령 계약진이 새겨져 있는 것,정령이 봉인되어 있는 것.그중 이것은 계약진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만......뭐랄까,꽤나 오래된

물건이라 제대로 작동할지는 모르겠군요.]

라이,네가 도움이 될 때가 다 있구나!나는 그야말로 환희에 가득 찼다.

여기까지 고생고생하면서 온 보람이 있었어!만약에 계약을 해낸다고 해도 강력한 힘을 내기는 힘들겠지만,운디네와 만난다면 충분히 위력적일 거라는 기대에 정령석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냥 이상한 돌멩이 정도로만 보였던 것이 지금은 구세주가 되어 있었다.

[계약진을 발동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해?넌 알지?]

[그냥 마나를 불어넣으면 됩니다.]

크크큭.이거야말로 진정한 득템이로다!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온 것을 참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정령석을 집어 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는지 비쩍 마른 아이가 입을 열었다.

"저,저어......"

"음?아,이것 내가 사고 싶은데.얼마면 돼?"

정령석을 들어 보이며 말하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더듬었다.

"아?아아,그......"

"설마 아직 가격을 못 정한 거야?"

"죄,죄송합니다!"

흠,살짝 속여서 싸게 사버려?장사는 처음인지 아이의 행동은 어색하기 그지 없었고 늘어놓은 물건들은 하나같이 이상한것들이었다.

개중에는 돈 주고 가져가래도 가져가고 싶지 않은 그런 물건들도 보였다.

흠,일단 돈을 가져와야겠는데,내가 가자니 귀찮다.

"저기 한센 씨,미안한데 여관에서 돈 좀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네?아,알겠......"

"잠깐!아가씨,한센은 지금 부상 중이라......제가 대신 다녀오면 안 되겠습니까?"

아차,난 문득 어젯밤 한센이 어깨 부상을 입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어쩐지 행동이 좀 굼뜨더라니.그러고 보니 내가 도망갔을 때도 잡으러 온 것은 필로였다.

"저야 아무나 상관없지만......음 제방은 106호구요,방 안에 들어가시면 한가운데 테이블이 있을 거예요.거기에 있는 가방을 통째로 가져오시면 돼요.그럼 부탁드릴게요."

"106호 말씀이십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필로는 곧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 아이가 어디서 이런 정령석을 구한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봐,그런데 이거 어디서 구한 거야?"

어디서 캐온다든가 하는 거라면 나도 가볼 심산으로 가볍게 던진 질문에 아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저,절대 훔치지 않았어요!믿어주세요!정말 훔친 게 아니에요!"

"뭐?누가 뭐라던?"

얘가 왜 이러나 싶어 그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순간 나는 시선 둘 곳을 잃어버렸다.아이는 한쪽 눈이 이상했다.

마치 고장 난 것처럼 홀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왼쪽 눈동자.아이의 왼쪽 눈과 내 눈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엇갈렸다.

뭐야,눈이......서리가 낀 것처럼 허연 눈동자.

"앗,죄송합니다!죄송해요!보기 흉해서 최대한 가리고 다닌다는 게......"

"......별로 상관은 없어.내가 물은 건 이걸 어디서 났냐는 거야."

저 정도 가지고 거부감이 들 정도면 어제 오크가 피와 살을 튀기는 것을 봤을 때 기절했겠지.

사람이 오크에게 밟혀죽은 것이 더 잔인했다.

질식해서 눈을 허옇게 뒤집고 입에서 거품을 흘리며 죽어가던 사람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이는 마치 뭔가에 잔뜩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과민반응을 보였다.

"아,그건 저희 아버지가 산에서 약초를 캐시던 중 저 책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신 거예요.아버지 말씀이 일 년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 있었다고 했어요.결코 훔친 게 아니에요!다만......어

머니의 병이 악화되어 혹시 돈이 되지 않을까 해서 팔려고 한 것뿐입니다."

가만히 그 말을 듣던 나는 왠지 피식 비웃음이 나왔다.

"내가 보기엔 도둑질이나 그거나 별로 다를 것이 없는데?어쨌든 너의 것은 아니란 얘기잖아.남의 것을 멋대로 팔려고 하다니......이유가 뭐가 됐든 결국 그건 도둑질이야."

"아윽,하......하지만......주인도 나타나지 않았고......"

"난 상관없어.훔친 거든 뭐든,내 것을 훔친 건 아니니까.난 이 물건의 주인이 아니고,고로 나한텐 너를 나무랄 권리가 없는 거거든."

"아가씨......"

한센의 목소리에 나는 바들바들 떠는 아이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곤 아이가 가리켰던 책을 집어 들었다.이게 정령석과 함께 있었다고?

정령석의 옆에 있던 책은 제목 없는 갈색 표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진한 갈색의 표지.가죽인가?

잠시 겉표지를 살핀 다음 책을 펼쳐 들었다.

첫 장에 있는 글씨는 분명 고대어,다음 장을 펼쳤지만 아무 글씨도 없었다.

책을 한차례 뒤졌지만 글이 써져 있는 것은 첫 장뿐이었다.결국 첫 장으로 돌아온 나는 거기에 써진 문자를 해석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마스터,고대어군요.]

[그래.]

라이도 고대어를 읽을 줄 아는 건가?

[근데......흡수는 언제 해요?]

[닥쳐!]

이놈이 걸신들렸나?흡수는 개뿔,이 정령석은 내 유일한 생명줄이란 말이지.건드리면 죽여 버릴 거야.

흐느끼는 듯한 라이의 울음소리를 전주곡으로 나는 그 한 장을 해석해갔다.

내 이름은 아르도,나는 이곳에 정령석을 묻으려 한다.

일긴가?아니,메모?

오랜 연구 끝에 우린 25개의 계약진을 만들어냈지만 그중 완전한 것은 단 16개뿐이었다.

정령 자체가 체계화 되어 있는 4대 속성의 정령과 달리 급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계 정령들의 계약진은 매우 불완전했다.

결국 우리는 불안전한 9개의 계약진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의논했고 우린 각자 자신이 연구한 계약진을 나누어 파기하든,아니면 완전하게 만들든,본인의 의사에 맡기기로 했다.

결국,결정 못해서 각자 책임을 미뤘다는 거지?네 건 네가,내건 내가?뭐,몰랐던 사실이군.

만약 파기하게 된다면 이 계약진의 정령들은 아마 다신 인간들의 세상에 나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고 티끌만큼의 영향도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글쎄,세상 잘 돌아가는데 말이지......

나는 이것들을 여기 묻으려 한다.

완전하진 않지만 후대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가 될지 몰라 정령석으로 만들었지만,이것도 영구적이진 못하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르게 되면 정령석은 제 구실을 잃을 것이고 결국엔 스스로 파괴될 것이다.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두 정령이 또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어 영원히 인간의 기억 속에 묻히는 것 또한 그들의 운명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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