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라면 반가웠을 식사시간.하지만 난 꾸물거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잽싸게 식사를 배급받고는 서둘러 내 마차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그 순간,역시나 그 소리가 들려왔다.
"아!지니 크로웰이잖아?쟤가 전하에게 아양을 떨어가지고 격투반의 레오 대신 시합에 나간다며?레오만 불쌍해!"
"뭣?짜증난다,얘!정령?그게 대체 뭐야?싫다,싫어.전하에게 아양이나 떨고!재수 없어!"
......이런 쓰벌,그렇다.격투반이 3명인 이유는 난데없이 정령반인 내가 끼었기 때문에 나대신 누군가가 빠져야 했다.
그 희생양이 된 것이 유아 격투반의 레오라는 아이인 듯했다.
나도 가고 싶지 않거든,얘들아.왕한테 아양 떤 적도 없단다.
내가 여기서 찍소리도 못하고 기죽어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로 시합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물 위에 뜨게 하는 마법이나,물 정화하는 마법 가지고 시합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런 제길,누구냐 대체?가만있는 나를 추천한 게?차라리 미아가 왔더라면 나았을 텐데.미아는 아쉽게도 드리케의 윈칸 축제에 나가는 일명 '대표팀' 에 뽑히지 못했다.
대표팀은 개뿔이.에휴,힘 없는 내가 참아야지 뭐.
그나마 같은 종합반의 아이들도 몇몇 있었지만 나와 친한 아이들은 없었다.앞으로 인간관계에 힘써야겠다.
나는 그동안 너무 주위에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반성했다.
어쨌든 앞으로 20일 동안 마차를 타고 현자의 나라라는 베일란 왕국에 가야 한다.
그리그 그곳에서 워프를 이용해 엘란 제국으로 들어간다는데......앞으로 20일을 어떻게 개기지?아무리 밖에 나오고 싶었다지만......이건 아니란 말이다!
[마스터,저거 흡수해도 됩니까?]
그나마 수다스러운 라이가 없었으면 자폭했을지도 모른다.
운디네는 내 말은 알아듣기는 하지만 자신의 의사를 나에게 말로 표현하기에는 서로의 친화도가 부족했다.
운디네의 목소리는 어떨까?듣고 싶어라.
[뭐?뭔가 먹을 만한 것 있어?]
[저기요!저기 적발의 기사가 가지고 있는 검.이 냄새는......미스릴이군요.아주 소량이지만.]
내 옷 속에 들어가 있던 라이가 슬쩍 소매를 통해 꼬리를 내밀었다.
그 방향을 바라보니 조금 말랐다 싶은 붉은 머리 검사가 주위를 경계하며 잔뜩 곤두서 있었다.
허리에 걸린 검집에는 고풍스러운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오래돼 보이는 것이 조상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물건 같았다.
[저건 안 돼.]
미스릴이라는 점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네......]
실망한 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라이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단 내 말에 잘 따랐고,꼬박꼬박 나를 마스터라고 불러서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가끔 건방을 떨기도 하지만 말이다.
마차 안에 올라선 나는 식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왕은 하급정령이 무슨 정령왕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으음,확실히 기사의 나라 드미트리는 마법이나 정령에 대한 정보가 적긴했다.
따끈따끈한 김을 내뿜는 빵을 입 안 가득 베어불면서 나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앞으로 20일......
깜빡 잠들었던 나는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다.싸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아무튼 소란스러웠다.
"으음......라이,이거 무슨 소리야?"
[보고 오겠습니다.]
"으응......"
여전히 잠긴 눈을 한 나는 물처럼 녹아내리더니 마차의 문틈으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라이를 보며 길게 하품을 했다.
그러는 동안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점점 또렷이 들려왔다.
[마스터.]
문틈으로 쿨럭쿨럭 물이 넘치는 모양을 하고 올라온 라이가 어느새 뱀의 형상을 갖추더니 나를 불렀다.
"오냐."
[몬스텁니다.정확히 오크 12마리군요.]
누워 있던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몬스터?
"그래?비켜봐!"
라이를 구석으로 밀쳐낸 후 마차의 문을 열고는 고개를 살짝 내밀어 밖의 경황을 살폈다.
우리 대표단을 호위하는 기사의 수가 약 20명.그들은 여유 있게 오크를 제압하고 있었다.
그나저나......저게 오크로군.사람 몸에 돼지머리가 달려 있네,그것도 털이 많은 돼지.멧돼지 머린가?
[마스터,저것 흡수할까요?]
"응?"
라이가 꼬리로 가리키는 곳에는 낮에 봤던 그 검이 떨어져 있었다.어라?검의 주인은?고개를 더 내밀어 붉은 머리의 기사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곧 한쪽에서 어깨를 부여잡고 쓰러진 기사를 발견했다.
이런,내가 만약 물의 상급정령 엔다이론을 소환할 수 있으면 치료해줄 텐데.
물론 보상으로 검 속에 든 미스릴을 약간 받을 수 있을지도......
나름 순수한 나지만 미스릴이 워낙에 희귀한 것이니 욕심이 생겨났다.
갖고는 싶었지만 공짜로 받아먹으면 조금 미안한데......부상을 입은 그를 곁에서 치료하는 갈색 머리의 기사.
그는 뭔가를 찾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그의 손에 들린 마른 천을 보건대 아마도......
[물을 찾나본데요?]
이놈이 진짜......
[우씨,나도 그 말하려고 했어!]
선수 치지 말라 이거야.
마차의 의자 밑에서 신발을 꺼내든 나는 외투를 걸치고는 마차의 뒤쪽으로 돌아 기사에게 다가갔다.
크큭,살짝 미친 짓 좀 해볼까나!공짜로 얻어가면 미안하잖아.
[마스터!위험합니다.]
[괜찮으니까,넌 가서 저 검이나 챙겨와.미스릴인지 뭔지 조금만 빼내고 다른 것 채워넣어.좋은 걸로.알겠지?]
[네,알겠습니다.마스터]
여기 자동정수기 가신다.
라이는 바닥을 기어 검 쪽으로 다가갔다.
가는 중에 오크들의 발에 몇 번인가 무자비하게 밟혔지만 꿋꿋이 기어가는 라이를 뒤로 하고 나는 부상당한 붉은 머리의 기사에게 다가갔다.
그와 그를 치료하던 갈색 머리의 기사는 나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이 무슨 짓입니까?위험합니다.어서 들어가세요!"
"물이 필요한 것 같아서요.물을 드릴까요?"
"......?"
갈색 머리 기사의 눈이 찡그려졌다.빈손으로 와서는 난데없이 물을 주겠다고 하니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운디네."
뽀르륵
투명한 몸을 가진 운디네가 나타났다.
어두운 밤에 횃불이 투과되어 운디네가 붉게 보였다.
"......이게 뭐지?불의 정령?"
"아니거든요!물의 정령 운디네예욧!기분 나쁘게 불의 정령이라닛!"
불의 정령이라는 말에 나는 기분이 나빠져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아님 말고요!"
적의를 드러내는 내 모습에 갈색 머리 기사가 머리를 긁적였다.
"운디네,기분 나빴지?이렇게나 예쁜 너를 보고 불의 정령이라니......무식도 하지."
머리 위를 날아다니던 운디네에게 눈을 마주치며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뜻을 보냈다.
그러자 운디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미약하게나마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뇨.]
"......뭐?"
[괜찮아요,주인님.]
"다,다시......"
[주인님?]
마치 아기처럼 가냘프고 가는 그 목소리에 나는 그만 울어버렸다.
"흐흑,운디네에......아우,나 감동 먹었어!흐흐흑."
무려 넉 달,아니 이제는 다섯 달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드디어 운디네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에 나는 너무나 감격해버렸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데 어깨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던 붉은 머리 검사와 갈색 머리 검사가 나더러 '미쳤냐' 고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저기......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아무래도 마차로 돌아가시는 게......"
"흠흠,운디네!여기에 물을 채워주렴."
[네,주인님.]
내가 가리킨 빈 물동이 속에 물을 그득 채우는 운디네.
대답하는 목소리도 어쩜 이리 예쁠까!아,감동,감동.
[마스터......]
뭐야 저놈은?순간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고개를 홱 돌리자 꼬리로 검을 휘말고 열심히 기어오는 라이의 모습이 보였다.
"엇!저건......내 검?배,뱀이 검을 훔쳐간다!"
붉은 머리 검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라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이봐,이봐,그렇게 말하면 기분 나쁘지!
"저건 제 애완용 뱀이에요.검은 제가 가져오라고 시켰고요."
"하!뱀이......그런 것도 합니까?"
"못하란 법 있나요?"
어느새 오크 무리는 진압된 듯했다.사실 굳이 저 검을 가져올 필요는 없었지만 미스릴을 나눠준다는데 그냥 받으면 미안하잖아.
라이에게 건네받은 검을 내밀자 붉은 머리 검사는 다치지 않은 쪽의 손을 내밀어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고맙습니다,아가씨."
"별말씀을......"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아마 그들은 지금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이해를 못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살짝 맛 간 짓을 하고 얻은 것이 있었다.
"운디네!"
[네,주인님.]
사랑스러운 운디네와 드디어 의사소통도 이뤄냈고,
[마스터!미스릴 흡수 완료했습니다.대신 합금을 채워줬습니다.]
[크크큭.잘했어!]
미스릴도 얻어냈다.그리고 오크 구경도 했지!살짝 미친 짓한 것치고 많은 것을 얻었다.
앞날이 캄캄하긴 하지만......그냥 이대로 가출해버려?발걸음을 멈추고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소심한 나는 결국 다시 마차로 기어들어가야 했다.
드미트리를 벗어난 우리는 도시 하나를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밤이 될 무렵 두 번째 도시에 도착했고,이제 남은 것은 방을 잡는 일이었다.
헌데 여기서 또 내가 문제가 되었다.나랑 같은 방을 써야 할 격투반의 미리네라는 아이가 나와 같은 방을 쓰느니 차라리 돌아가겠다며 난리를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나는 마차에 이어 여관방까지 홀로 쓰는 비운의 신세가 되어버렸다.
[마스터.]
[......왜?]
[힘내세요.제가 있잖아요.]
[닥쳐!]
눈치라곤 쥐뿔도 없는 라이.왠지 혼자 있기 민망해진 나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내 방이 있는 곳은 3층,1층과 2층은 식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나는 2층에 내려서자마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어딜 가십니까,지니 양?"
이번 대표팀에 인솔자로 따라온 2명의 선생 중 하나인 격투반의 선생,나에게 강한 적의를 보이는 그는 결코 달갑지 않은 상대였다.쳇......
"에,시장구경이 하고 싶어서요.안 되는 건가요?"
"물론 안 되죠!학생은 학생답게 방 안에서 얌전히 자숙하고 있어야......"
잔뜩 비꼬는 말투로 나에게 외출금지선언을 내리려는 이름 모를 격투반 선생.
하지만 그 선생의 말을 잘라먹은 것은 경제학반의 이리토 선생이었다.
"잠깐,디넬 선생님!학생 한 명당 한 명의 기사를 대동하면 외출이 가능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제가 잘못 안 건가요?"
"아......흠.그,그랬었나요?"
이곳에선 드문 안경 착용자 이리토 선생은 학자 분위기의 여자 선생이었다.
그녀의 말에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소유자인 격투반 선생ㅡ아,이름이 디넬인가 보다ㅡ은 금세 꼬리를 내리더니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호오,난 슬쩍 이리토 선생을 살폈다.
얼굴도 예쁘장하고,몸매도 좋았다.분위기도 차분한 것이 이 정도면 충분히 미인이었다.그렇군.디넬 선생은 이리토 선생을......
"지니 양,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예?아니오.선생님이 너무 예쁘셔서요."
내가 아이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이리토 선생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자칫 디넬의 마수에 빠져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외출을 가능하게 해주었으니 이 정도 칭찬이야,후훗.
"그,그래요?고맙군요.그나저나 외출하려는 건가요?"
"네,기사 한 분만 대동하면 되는 건가요?"
"혹시 있을지 모를 위험을 대비해서지요.저기 기사단장님 보이시죠?저분에게 말씀하면 된답니다."
이리토 선생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식당 안임에도 완벽하게 중무장한 중년 기사가 그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게 탁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뭔가 상당히 언밸런스한데 그래.안 어울려!
[마스터,저 기사의 검 흡수......](라이는 툭하면 먹을려고 하네요 캬캬~)
[안 돼.]
얘가 걸신들렸나?좀 뻔지르르한 검만 보면 모조리 흡수한다고 하니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군.
독서 중인 기사단장에게 다가가자 그가 책을 덮으며 눈을 돌렸다.
"무슨 일이지?"
기사단장 쯤 되니까 말도 놓는다,이건가?기사들은 꼬박꼬박 존댓말 쓰던데 말이지.
"외출하려구요.기사를 대동해야 한다던데요?"
"아아,그건가......그래 무슨 반이지?"
......외출하는데 반은 왜 물어?
"정령반인데요?"
"정령......?피식."
이 써글 영감이,피식?피식?지금 날 비웃은겨?
[라이!]
[넵?]
[저기 검에 들어 있는 거 몽땅 먹어버려.](헐...)
[넵!]
우리 착한 라이,말도 참 잘 들어요.크크큭.
"어디 보자......정령이라면 약하겠군.그럼 특별히 기사 두명을 붙여주지.감사하도록!어이,그 녀석들 불러와."
"됐거든."
사실이긴 한데 기분이 매우 나쁘거든요.이 싸람이,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 다하네.누가 두 명 불러 달라든?
"......뭐야?"
"됐다구요.전 한 명이면 충분해요!"
얼결에 반말을 해버렸지만 내가 반말했다는 증거 있어?흥,자리에서 일어난 기사단장이 나를 내려다보며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이런 젠장,적이 늘었다!
"호오,그래?그렇다면 제 5기사단장의 권한으로 약하신 정령반의 숙녀는 앞으로 기사를 두 명 이상 대동하지 않으면 외출이 불가능하도록 조치해주도록 하지."
"뭣......?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누구 맘대로!"
"하하핫!그야 연약한 숙녀를 걱정하는 왕실 제 5기사단장의 마음대로!"
"뭐예요?대체 누가 연약하다는 거죠?"
"그야 정령반의 숙녀님이지.억울하면......출세하라고!카카캇!"
웃음소리도 웃긴 주제에,게다가 제 1기사단도 아니고 겨우 제 5기사단 단장 주제에 출세 타령은......
난 이래봬도 왕이랑 차까지 마신 사이다,이거야!겨우 차 한잔뿐이지만.
"......연약한 거랑 출세랑 뭔 상관이래?웃긴 아저씨야,흥."
"이,이......건방진 꼬맹이가!"
"숙녀거든요?"
책 읽던 사람이 어쩜 이다지도 무식할까.슬쩍 책의 제목을 읽은 나는 그럼 그렇지 하고 납득해버렸다.
『건방진 부하 길들이는 1253가지 방법』그 1253가지는 대체 어디서 나온 숫자지?
여전히 눈에서 불똥을 튀기는 기사단장의 시선을 무시하는데 그의 뒤로 다가오는 3명의 기사.그새 부르러 갔었나 보다.
"단장님,데려왔습니다."
"으,으음!그래,자......한센,필로 인사해라.이 숙녀께서 외출하신단다."
......왠지 숙녀란 말이 듣기 좋지 않단 말이지.
"안녕하십니까,제 5기사단의 한센입니다."
"안녕하십니까,제 5기사단의 필로입니다."
앗,어딘가 낯익은 빨간 머리......덤으로 갈색 머리까지!
이런걸 보고 운명이라고 하는 건가?아니,인연인가?아니 우연?그래도 안면 있는 사람들이라고 살짝 반가워졌다.
그들도 날 알아 본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걸걸한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흐흣,이봐.보아 하니 귀족 집 숙녀 같은데,이 평민 녀석들이랑 잘 놀다오라고!왜?이제와서 평민이랑은 안 나간다 그럴건가?카하하핫!"
"미친놈......"
평민이든 귀족이든 신경도 안 쓰고 있었구먼.난 운명인지,인연인지,우연인지를 구별하는 아주 우아한 생각 중이셨다.이거야.
"......미,미친놈?"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기사단장,나는 시침 뚝,떼고는 쏟아내듯 말했다.
"미친놈?무슨 소리죠?누가 미친놈이라 그랬나요?어머 상스러워라,미친놈이라니!어디 미친놈이 있나 보죠?그럼 미친놈이랑 잘 놀아보세요!저는 바빠서 이만......"
기사들도 소개받았겠다,나는 그 말을 내뱉고는 냅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뒤에서 자신들을 한센과 필로라고 소개했던 두 명이 따라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당탕탕 커다란 소리를 내며 내려오는 세 명에게 1층 식당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그러거나 말거나,나는 지금 열 받았다 이거야!
[라이이이!]
[넵!알겠습니다!]
[......알긴 뭘 알아?]
[방금 그 건방진 기사 놈의 갑옷을 흡수하라고 말하시려던 거 아닌가요?]
옷!그동안 나랑 놀더니 제법 적응했나 본데?하지만......
[땡!그 녀석이 가진 금속이란 금속을 싸그리 먹어버려!돈도 포함해서.크크큭]
어느새 여관 문을 나온 나는 그대로 마차를 타고 오며 봐두었던 시장골목을 향해 달렸다.
뒤에서 나를 향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같이 가요!"
알아서 따라오겠지,뭐.아카데미에서 나와 처음으로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베일란까지 앞으로 18일인가?
화창한 날씨와 시끌벅적한 시장분위기가 좋았다.
사람들 하나하나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은 어딜 가나 똑같다는 생각을 하며 시장가에 들어선 순간,난 또 기피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모세의 기적이냐?"
이런 썩을,내가 시장통에 들어서자 내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아니,정확히는 내 앞을 피해 갈라져버렸다.내가 뭐 죄지었어?난 어느새 뒤따라온 한센과 필로에게 눈을 흘겼다.
햇빛에 반짝여 번지르르하고 빛나는 갑옷차림의 기사 둘을 대동한 여자애라니,그거야 말로 기피대상 1순위지,뭐.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냥감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일반적인 평민에게는 분명 기피대상이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말이다.
[마스터!사람들이 왜 저러는 겁니까?무슨 괴물이라도 보는 표정이군요.]
[닥치랬지?]
그럼 내가 괴물이냐?아무튼,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라이녀석.그나저나,어쩐다?이 상태로 시장에 들어서긴 좀 찔렸다.
사람들에게 피해만 줄 테니 말이다.
"왜 그러십니까?"
자신을 한센이라고 소개한 붉은 머리의 기사,난 힐끔 그의 검에 눈길을 주었다.미안,그거 사실 합금이야.
"저기요.그 갑옷 벗으면 안 되나요?너무 튀는군요."
내 말에 한센이 표정을 굳혔다.
"죄송합니다.근무 중 무장해체는 상부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띠벌......
"잠깐도 안 되나요?"
"안 됩니다.명령불복종으로 간주되어 징계를 받게 됩니다."
쳇,라이를 시켜서 홀딱 벗겨버려?아니지,아니야.그랬다가는 라이의 존재가 드러날 테고.으음,아무튼 라이 녀석 정작 중요한 때(?)쓸모가 없다니까!어쩔수 없군,이렇게 되면......
"아앗!"
"아가씨!"
난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듣는 이를 안타깝게 하는 한센과 필로의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나에겐 당장 노는 것이 급했다.돌아갈 때 만나면 되겠지,뭐!
"꺄악!놔아!안 놔!캬악!"
"아가씨,대체 왜 이러세요?위험하다니까요!"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시면 저희가 동행하겠습니다."
필로의 팔에 잡힌 채 그의 허리에 데롱데롱 매달린 신세라니......이런 젠장,잊고 있었군.
그들은 엄청난 훈련으로 육체 탄탄한 현역 기사들이었고,나는 허구한 날 빈둥거리는 연약한 10세 소녀라는 사실을.
나는 채 열 걸음도 뛰지 못한 채 필로의 손에 잡혀버렸다.
반항을 시도했지만 필로의 팔뚝은 굳건했다.젠장,그래 기사라 이거냐!너 근육질이라 좋겠다!
[마스터,잡히셨군요.]
[캭!]
[히끅!]
내가 그렇게 씩씩거리며 분에 못 이겨 거칠게 숨을 내쉬는데 머리 위에서 나를 잡고 있던 필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희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하아?"
"저희가......평민이라서 그렇지요?죄송합니다."
얼씨구,불쌍한 평민 하나 나셨네.아니,둘인가?
"이봐요.만약 내가 그런 걸 따지는 입장이라면 댁의 팔뚝은 당장에 잘릴 겁니다.감히 평민이 귀하신 귀족님을 이렇게 다루다니,팔뚝은 고사하고 목이 남아날 것 같아요?"
"아,이런......죄,죄송합니다!"
그 말에 충격 좀 받았는지 나를 바닥에 내려놓는 필로,기사가 이렇게 겁이 많아도 되는 거야?
얼굴이 파랗게 질린 필로와 그 옆에서 여전히 표정을 굳힌 한센.
"......뭐,어쩔 수 없죠.일단 이대로 돌아다니는 수밖에."
내가 옷을 털어내며 말하자 필로가 여전히 파리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어차피 도주는 불가능하고,이대로 돌아다니면 좀 성가시겠지만 돌아다니지 못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렇게 나는 뒤에 기사 둘을 대동하고 만인의 기피를 받으며 시장통에 발을 올렸다.
마침 과일가게가 보였기에 나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겨 과일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과일은 오랜만에 보네.사과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는 하나 사볼까 고민하는데 한센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어......어젯밤에 제 검을 주워주셨던 그 아가씨 맞으시지요?"
필로가 물어봤으면 별 신경 안 썼겠지만 약간 찔리는 바가 있는 한센의 물음에 나는 살짝 경직되었다.
"아뇨,전 마차에서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답니다."
들킬 때 들키더라도 우길 때까지 우겨보자는 심산에 나는 시치미를 떼었다.
"......아니라구요?분명 어젯밤,몬스터가 습격했을 때 저희에게 물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네?아니에요.나는 오크 따윈 질색이거든요.그런데 왜 밖엘 나가겠어요?"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질기긴......
"오크요?"
"네,오크요."
"전 어젯밤 몬스터가 침입했다고만 말씀드렸는데요?"
이런,내가 내 손으로 무덤을 파버렸군.아 정말,나 왜 이러니?일단은 천재들만 모았다는 드리케의 종합반인데 이러면 안 되지.
"......아,운디네가 알려줬어요.오크가 나타났다고!"
사실 라이지만,라이라고 할 순 없으니......
"......운디네요?물의 정령?"
"......헙."
그래,나 바보였지,참.그동안 혼자 노느라 까먹고 있었다.
[마스터!운디네가 아니라 제가 알려드렸는데요.네?마스터!]
[캭!]
그나마 더 바보가 있다는 사실에 위안이 될 뿐이었다.
"왜 숨기시려는 겁니까?저는 단지 감사했다는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요."
"오호홋!원래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잖아요."
엉?거꾸로였나?뭐 그놈이 그놈이지.
"그런......가요?"
"그럼요!선행을 남모르게 하라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이쪽으로 천재 같단 말이지.
내말에 한센은 굳어 있던 인상을 살짝 폈다.
원래 우겨볼 때까지만 우겨보자는 심산이었기에 곧 관심을 돌려버렸다.
새빨간 사과 모양의 과일,여기도 사과가 있구나.
그동안 먹었던 과일은 분명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대부분이 잘려 나왔기 때문에 원래 모습 그대로의 과일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힐끔 사과의 가격을 확인했다.세 개에 10쿠퍼.3개 천원 꼴인가?괜찮네.내가 살고 있는 이 크란시아 대륙은 모든 나라의 화폐가 통일되어 있었다.
약 4천 년 전,위대한 영웅 미테스가 대륙을 통일한 뒤 이뤄낸 업적 중 하나였는데 1쿠퍼는 한국 돈으로 백 원 정도에 해당되었다.
1쿠퍼,5쿠퍼,10쿠퍼,50쿠퍼,이렇게 동전이 세세하게 나뉜다.
100쿠퍼는 1실버로,1실버는 약 만 원의 가치를 가진다.
실버 역시 5실버,10실버,50실버로 나뉘며 100실버는 1골드가 된다.
그리고 1골드는 약 백만 원의 가치를 지니는데 1골드가 보통 한 가정의 한 달 수입이라고 볼 수 있다.뭐,귀족 집안에는 한 끼에 1골드가 기본으로 들어가지만.(헐..)
이곳의 화폐 단위는 이처럼 꽤나 알기 쉬운 형태다.골드 위로도 골덴이 있는데 10골드가 1골덴이 된다.그러니까 1골덴 하나는 천만 원 꼴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의 돈이 오가게 될 때는 전표를 사용했다.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용돈은 한 달에 1골드,그러니까 약 백만 원이 된다.(헐..)
그리고 여기서 1골드를 받은 아이들의 반응은 확연히 갈린다.
드물지만 귀족 집안인 아이들은 그것도 돈이냐며 돈 취급도 안한다.그런 아이들은 대게 집에서 돈을 따로 보내준다.
그리고 평민층의 아이들은 그 돈을 자신이 아닌 부모에게 보내주길 아카데미 회계과에 신청한다.
그런 유의 아이들은 전체의 90퍼센트 해당한다.참고로 나머지 중 5퍼센트는 귀족 집안 아이들,그 외 5퍼센트는 부모나 친인척이 없는 경우다.
하지만 돈을 부모 앞이 아닌 자신의 앞으로 나오도록 해놓은 아이들도 대부분 그 돈을 쓸 기회가 별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1년에 네 번뿐이다.게다가 아카데미 안에서 돈 쓸 일은 거의 없었다.
나 같은 경우는 쓸 일이 없어서 모아놓았는데 그 금액이 벌써 50골드를 넘어갔다.(헐..)
50골드쯤 되고부터는 귀찮아서 더 이상 세지도 않았다.쉽게 말하면 나는 5골덴의 소유자,즉 개인재산이 5천만 원이 넘는 다는 얘기다.
한마디로......나는 부자다,이거지!
"크크큭."
"아,아가씨,왜 그러십니까?"
"흠흠,아무것도 아니에요.목이 좀 아파서......아줌마!이거 세 개만 주세요."
나는 그만 소리 내어 웃었다는 사실에 조금 머쓱했다.아,이거 참,이래봬도 일단은 레이디란 말이지.
품위 유지를 해줘야 하는데.
어딜 가나 있을 법한 인상의 과일가게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갈색 종이봉투에 사과 같은 것 세 개를 넣어줬다.10쿠퍼가......
"헉!"
"네?"
"뭣?"
급작스런 내 기함소리에 한센과 필로는 놀란 듯했다.나는 울것 같은 얼굴을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돈이 없다."
"아,돈이라면 제게 있습니다."
"아,저도요!"
아이 참,미안하게.뭐 내준다면 사양은 안 하겠지만......크큭.
각자의 주머니를 뒤지는 한센과 필로를 보며 나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여관에서 별 생각 없이 나온 것이라 돈은커녕 아무것도 안 챙겼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지만 내준다는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뭐 어떠랴 싶었다.
믿음직스럽군,그래.같이 오길 잘한 것 같다.
"저......아가씨?"
"네?"
"죄송합니다.급하게 나오느라 돈을......"
"......"
한센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나는 필로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필로......너만 믿는다!필로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참 뒤적거리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돈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아,있습니다!여기요."
장하다,필로.나는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필로가 주머니 여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주머니를 연 필로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과일가게 한구석에 마련된 시식대 위로 주머니를 털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