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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식은 아주 옅었다.
아기일 때는 아기만큼만 깨어 있었고 나이를 먹을수록 정신이 차차 깨어났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히 또래 중에서는 뛰어났나 보다.
내가 완전히 정신을 차린 5살 때 부모의 곁을 떠나 책들로 빼곡한 공간에서 내 또래를 보이는 몇몇의 아이들과 매일같이 어려운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중 마법이라 불리는 것,그것의 화려함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법사가 되면 세상만물이 내 것이 된다고 했다.
매력적이었다.
그 외에도 연금술,행정학,경제학 등 갖가지 수업들.
10살이 되면 적성에 맞는 한 가지를 택해서 그것에 매진하여 이 왕국의 왕에게 모든 것을 바치라고 배웠다.
그것은 거의 세뇌에 가까웠고 그들의 목적 또한 세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 싶었다.
편하게 말이다.
홀의 구멍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이 어찌나 눈부신지,멍하니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누군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그녀는 나를 향해 상냥하게 물어온다.
"지니?넌 책을 왜 안 읽는 거야?"
햇빛에 나부끼는 화려한 금발,옅은 푸른빛의 비취색 눈동자,아이 특유의 뽀얀 피부,오밀조밀한 귀여운 생김새의 여자아이.
나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주위에서는 나와 그녀를 닮았다고 호들갑을 떨곤 한다.
뭐 제법 친한 사이라 기분 나쁘지는 않지만.
우리 둘이 전혀 닮지 않은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눈매랄까?
내 눈매는 눈초리가 올라가 있어 사나워 보이는,흔히 말해 싸가지 없는 인상이고 그녀는 약간 처진 눈매로 인해 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 소녀와 달리 나는 천재가 아니라는 거지!
다만 17살의 지능을 가진 7살짜리 꼬마랄까?
"응,난 책 읽는 건 싫어."
책을 싫어하는 내가 도서관에 있는 이유는 도서관이 매우 조용하기도 했고,홀 가운데가 뻥 뚫려 한눈에 하늘이 보이는 것이 매우 평화롭고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장에 기대어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면 잠시 쏟아지곤 한다.
하지만 오늘은 미아가 따라와서 수면을 망쳐버렸다.
그녀,그러니까 풀 네임은 카미아 드릴라 줄여서 미아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미아는 이제 후반부에 다다른 굵은 책을 펄럭이며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책은 이렇게나 재밌는 걸."
"......그게?어디가?"
그 제목도 위대하라.
『연금술에 관한 짧은 고찰』
두툼하기는 웬만한 사람의 머리 두께여서 보고 있는 나를 두렵게 했다.
그 정도면 책 제목을 '짧은 고찰'이 아니라 '긴 고찰'로 바꿔야 하는 것 아냐?
더군다나 그 책은 대륙 공용어가 아닌 원문,그러니까 고대어로 된 책이라는 사실.
그런 것을 읽는 저 소녀가 천재가 아니면 누가 천재겠는가?
물론 나도 읽긴 하지만,난 정신연령이 17살이니까 예외로 하자.
아!거기에 플러스 7을 한다면 24살인가?
"음,우선 이 책의 지은이 도나 베르세르는 말이야,매우 위대한 연금술사야.그는 황금을 구리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해.그건 곧 구리를 황금으로 바꾸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되거
든?그것에 대한 도나 베르세르의 고찰이 아주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며......"
그걸 물은게 아닌데......
뭔가 묻고 대답하기를 좋아하는 미아는 오늘도 역시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소감을 늘어놓으려 했다.
그 긴 설명에 나는 첫 소절부터 졸기 시작했다.
막 눈을 감으려는데 미아의 새된 다그침이 들려왔다.
"지니!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쓰읍......응,응.듣고 있어!"
순간 입가에 흐르려는 침을 서둘러 수습한 나는 미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니는 나빠!왜 항상 내 말을 안 들어주는 거야?"
저런,저런.얘가 사람 말을 안 믿네.듣고 있었다니까?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는 미아를 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미아?난 말야,연금술 전공이 아니라 그쪽은 잘 몰라.더군다나 너처럼 10살도 안 됐는데 벌써 전공을 정한 아이는 드물잖아?"
난 10살이 되어도 전공을 정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지니는 뭘 잘하는데?뭘 전공할 건데?"
"나?그,글쎄.아직 잘......"
"그럼......나랑 같이 연금술을 하자?응?얼마나 재밌는데!"
......그 손 떨리는 걸 어떻게 하니.
자칫 시약을 잘못 섞으면 '펑!' 하고 터져서 머리 태우기 일쑤에다가,심하면 건물을 부술 정돈데,나 같은 선량한 소시민에게는 무리야.
"미아,연금술은 나 같은 덜렁이보다는 미아같이 침착한 아이에게 어울릴 거야.그러니까 미아가 내 몫까지 열심히 해주렴."
슬쩍 미아를 띄워주자 금세 헤헤 웃어버리는 표정을 보며 천재래 봤자 결국은 애지,하고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알았어!내가 지니의 몫까지 열심히 할게!그럼 지니가 나 대신에 마법을 배워줄래?난 마나를 느끼지 못해서 마법은 무리래.하지만 선생님이 지니의 마나 감용도는 매우 뛰어나다고 그러셨잖
아.지니라면 대마법사가 될 거야!"
어쭈,어린 게 벌써부터 저런 고난이도(?)의 기술을......
"음......미아,난 수식 계산에 그다지 자신 없어.너도 알지,내가 암산에 약한 거?"
분명 7살치고는 뛰어난 편이지만 이 천재만 바글거리는 곳에서 나는 겨우 평균에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머리 쓰는 일이라면 질색이었다.
"히잉,그럼?그럼,미아 대신에 신관이 되어줄래?난 용사님을 돕는 신관이 되고 싶어!아니면 공주님?"
이게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면서 가끔가다 이렇게 맹하다니까.
"공주님은 신분이 못 미친단다.게다가 신관은 성격에 안 맞는걸."
난 누구를 돕는 게 취향도 아닐 뿐더러 하루 종일 신을 찬양하며 기도할 자신이 전혀 없다.
오히려 나를 그렇게 외면했던 신을 원망한다는 편이 옳겠지.
"......음,아!10살이 될 때까지 진로를 정하지 못하면 기사의 종자가 된다고 그러던데.그럼 지니는 종자가 되고 싶어?"
"아니!절대 싫어!몸을 움직이는 건 그야말로 끔찍해!"
10살이 되도록 진로를 정하지 못하는 아이는 종자가 된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아이들에게 겁을 주려는 얄팍한 수작인 것 같다.
천재들을 뭐가 아쉬워서 종자로 부린단 말인가.
뭐,간혹 원한다면 검술을 가르쳐준다는 말을 선생들이 하고는 하지만 그런 귀찮은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엥......그럼?그럼 지니는 아무것도 안해?불쌍해라......"
이 노무 게집애가......은근히 사람 열 받게 한다니까.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럼?그럼 지니는 뭘 할 건데?"
미아의 물음에 나는 손가락을 세워 몇 가지 예를 들었다.
"음......머리 안 써도 되고,몸을 안 움직여도 되고,안전하면서,돈 많이 버는거!이 네 개 정도만 갖춰진다면 뭐든지 좋아!"
"그런 게 있어?"
있기를 바랄 뿐이지.나는 미아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올려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매일매일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하늘은 매우 멋들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문득,'비가 오면 저긴 어떻게 하는 거지?비가 셀 텐데.뚜껑이 있는 건가?'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들었다.
그러고 한참을 있자니 잠이 왔다.
눈을 천천히 감고 의식이 옅어지는 걸 느끼는데 미아의 목소리가 잠든 나를 잡아 깨웠다.
"지니!"
아 씨......'진이'라니까.
"왜에에?"
가늘게 실눈을 뜨고 늘어지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책 꽂으러 가자!"
다음부턴 기필코 혼자 오리라.
속으로는 끊임없이 불만을 구시렁거리며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미아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온통 주위에 책장이 가득한 조금 구석지다 싶은 곳에 도착했을 때 미아는 사다리를 찾아오겠으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아예 처음부터 혼자 오든가.
원문으로 되어 있는 책이 주를 이루는 곳이어서 그런지 낡은 책들이 잔뜩 꽂혀 있어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난 조금이라도 더 자보자는 생각에 털썩,바닥에 주저앉은 채 책장에 기대 눈을 살짝 감았다.
평소라면 한참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각이건만,미아 덕에 이게 웬 똥개 훈련인지.
흐릿해지는 의식을 느끼며 완전히 잠들려는데 누군가 또 나의 수면을 방해했다.
철썩
"아얏!"
뭔가가 내 얼굴의 정면을 때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고고,코를 문지르며 고개를 번쩍 든 나는 고통의 원인을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두리번거렸다.
찾아서 머리를 쥐어뜯어......책이네?
위에서 떨어진 건가?
손가락 두께 정도의 얇은 책.
한차례 책장 위쪽을 올려다본 나는 책을 주워들어 제목을 살폈다.
역시나 고대어로 적혀 있었지만 읽는 데 그다지 어려움은 없었다.
초 간단 ## 계약법
......##는 뭐지?처음 보는 단언데?난 별 생각 없이 책을 펼쳤다.
만약 책이 조금만 더 두꺼웠다면 안 폈을 테지만!
적당히 책의 중반쯤을 펼치자 이상한 그림 몇 장이 보였다.
새 같은 거랑 도마뱀 같은 거랑 요정 같은 것,그리고 웬 할아버지.
그 그림들의 밑에는 하나같이 '위의 그림은 하급##이며 중급부터는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다'고 쓰여 있었다.
맨 앞장에는 마법에서 사용되는 마법진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뭔가 다른 진이 보였다.
우선 그 진을 이룬 건 룬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대어도 아닌 이상한 글자였다.
아니,글이 아니라 그림인가?
그렇게 책을 뒤적거리는데 미아가 돌아왔다.
미아의 곁에는 사서인 듯한 남자가 사다리를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미아,이거 무슨 뜻이야?"
내가 제목의 단어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미아 또한 처음 보는 글자인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글쎄,나도 처음 보는걸.사서 아저씨한테 물어봐."
미아의 말에 나는 딱히 꼭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책을 꽂아달라는 뜻으로 사서에게 책을 건넸다.
하지만 그는 다른 뜻으로 들었는지 잠시 눈을 찡그리는가 싶더니 '아하!' 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건 정령이라는 뜻인 걸로 아는데요?아무래도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을 적어놓은 책 같습니다만......흠,그다지 수준 높은 내용은 아니군요."
정령?정령이라면 그 상큼 발랄해 보이는 그것?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번쩍하고 깨달음(?)이 스쳐지나갔다.
지니,득도하다.
과연 기사의 나라 드미트리답게 왕성,그중에서도 왕이 대부분의 시간을 기거하는 집무실이 있는 별의 궁은 항시 기사들이 겹겹이 왕을 호위하고 있다.
왕의 집무실 바로 앞을 지키는 두명의 기사는 왕의 직속 호위기사로 그 명예가 왕국 내에서도 남 달랐다.
그런 그들이 집무실을 향해 다가오는 지긋한 노인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들의 표정에는 왕에게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그 노인을 향한 동경이 번쩍였다.
곧 다시 허리를 세운 두 명의 기사 중 하나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전하,라일 후작께서 오셨습니다."
미리 연락되어 있던 알현이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라일후작과 드미트리의 왕 디켈 3세는 본디 가까운 사이였기에 어렵지 않게 알현이 이루어졌을 터였다.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 집무실 안에서 허락을 알리는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라 하라."
그 목소리는 매우 또렷하고 엄해서 디켈 3세가 어떤 사람인지 단적으로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기사들이 문을 열고 다시 허리를 숙였다.
라일 후작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문은 곧 굳게 닫혀버렸다.
디켈 3세는 매우 엄숙한 분위기를 가진 사내였다.
뒤로 적당히 넘긴 진한 푸른색의 머리칼과 회색 눈동자는 그를 더욱 차갑고,냉정해 보이게 만들었다.
라일 후작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디켈 3세는 그에게 반갑다는 눈짓을 했다.
라일 후작은 70을 넘어선 노인이었고,디켈 3세는 30대 중반의 나이였다.
그런 둘이 친구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간단했다.
라일 후작은 디켈 3세가 왕세자 시절 그에게 제왕학 등을 가르친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드리케 아카데미의 학장이기도 했다.
라일 후작이 디켈 3세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신 라일 데르트,전하께 인사 올립니다.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라일 후작의 말에 디켈 3세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하,이보시오 데르트.우리 사이니 그런 예는 잠시 미뤄두고,편하게 말해봅시다."
"예,전하."
라일이 가볍게 고개 숙이며 대답했고 디켈 3세는 서랍에서 한 장의 문서를 꺼내들며 말을 이었다.
"흠,정령사가 되겠다고 하는 아이의 이름이 지니 크로웰.보아 하니 일단은 귀족인 듯싶소만?"
"예,전하.하지만 귀족이라 해도......지방 남작가의 여식입니다."
디켈 3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손에 들린 문서를 팔락이며 말했다.
"어떤 아이인가?뭐라고 했기에 자네가 나에게 직접 부탁을 하는 거지?"
"매우 특이한......아입니다.분명 머리는 좋은데 도통 잔꾀를 부리는 것이......어찌나 영악한지,그쪽으로 천재라고 해도 될 듯싶은 아이죠.그 아이가 저에게 딱 한마디 하더군요.'정령사'가
되고 싶다.안 되면 죽어버릴란다'.워낙 천재들만 모인 곳이다 보니,그 속을 도통 알 수 없는 아이들이 많습니다.지니는 그 중에서도 유독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죠.게다가 딱히 부탁을 들어서
가 아니라,그 아이는 정령사가 되어야 한다는 게 소신의 짧은 생각입니다.왕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요."
"흠......그래?정령사라.그것은 전혀 유래가 없던 일 아니오?"
"예,그렇습니다.하지만 전하,저희 드리케 아카데미가 설립된 이유를 생각해보십시오.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도 빈약한 지식층을 메우기 위해서가 아닙니까?더불어 부족한 마법사를 키워내자는
뜻도 있었습니다.때론 마법사의 수로 전쟁의 승패가 정해지기도 하니까요.그렇게 따지자면 정령사의 존재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정령사는 매우 다각적으로 뛰어난 존재니까요.하지만 저희
드미트리 왕국에 정령사는......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죠.그런 면에서 볼 때 키워낼 수만 있다면 정령사를 양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흐음,정령사라......그 아이 하나를 위해 그런다는 게......아,여기 보면,이미 경이 궁내의 정령사를 불러 이 아이의 소질을 확인한 것 같군.어떻소?재능은 있소?"
디켈 3세의 물음에 라일 후작은 고개를 깊숙이 조아렸다.
"전하!기사의 소질을 가진 자가 천 명이라면,마법사의 소질을 가진 자는 50입니다.그리고 정령사의 소질을 가진 자는......고작 한 명이지요.그런데 이 아이는 이미 정령을 불러낼 수 있는
친화력을 충분히 지녔답니다.이것은 그야말로 저희 왕국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다소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이는 라일 후작의 말에 디켈 3세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친화력?그것이 무엇이오?"
"친화력이란 정령을 불러내 부릴 수 있는가 없는가,그것을 판가름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라고만 들었습니다.정령사에게는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하더군요.전하께서 자세한 설명을 원하신다면
정령사로 하여금 정리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디켈 3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턱을 쓰다듬었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이 지니라는 아이가 정령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오?"
"우선 스승이 되어줄 중급 이상의 정령사가 필요합니다."
라일 후작의 말에 디켈 3세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 궁에 있는 정령사라고는 고작 다섯 명 아니오?그중 두명만이 중급이라고 들었소만?그런 그들을......"
"그렇기 때문입니다,전하!지니의 친화력을 확인한 것은 그 중급정령사 이엘 로에닌입니다.그가 말하길 충분히 자신을 뛰어넘을 재능이 있다고 하더군요.그를 뛰어넘는다면 상급입니다,전하!
검사로 치면 소드 마스터,마법사로 치면 7클래스 대마법사입니다.그들 하나하나의 능력은 기사 천 명을 능가하지 않습니까?저희 왕국의 앞날을 위한 일 입니다.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 입니
다,전하!"
디켈 3세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잠시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그 아이에게 내 지원을 아끼지 않으리다.그러니......꼭 그 아이를 뛰어난 정령사로 키워내시오!"
왕의 음성이 내전에 쩌렁쩌렁 울렸다.
"자,지니.오늘부터 네 스승이 될 왕국 수석정령사 이엘 로에닌님이란다.저번에 한 번 뵈었지?자,인사하렴."
부학장의 말에 나는 치마를 신발 끝이 살짝 보일 정도로만 올린 뒤 고개를 왼쪽으로 까닥하고는 이름을 말했다.
"안녕하세요.저는 드리케 아카데미의 종합반에 재학 중인 진이 크로웰입니다.잘 부탁드려요."
옅은 초록색 머리를 가진 20대 후반의 그는 나에게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 손은 남자의 손 같지 않게 하얗고 부드러웠다.
"네,지니 양.저도 잘 부탁드려요."
인간아,지니가 아니라 진이야!어째 이쪽 인간들은 하나같이......발음을 못하지?
난 그가 내미는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과연 남자의 손.내 손의 세 배는 되어 보였다.
그가 손등 위에 가볍게 입 맞추는 것으로 인사는 끝났다.
"자자,이제 인사도 끝났겠다,지니 양은 그만 들어가 보세요.자세한 일정은 추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네,부학장님.진.이.크로웰,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한차레 고개를 오른쪽으로 까닥인 뒤 나는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려 부학장실을 빠져나왔다.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내 발소리가 복도에 쾅쾅 시끄럽게 울렸다.
하지만 이내 그 소리는 '텅텅' 하는 가벼운 소리로 바뀌었다.
오늘은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마치 오랜 방황 끝에 갈 길을 찾은 것 같달까?
불만에 가득 찬 내 볼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이엘 선생님!계약 할래요!가르쳐줘요.네?제바알~."
"안 됩니다."
발을 붙들고 애절하게 부탁하는데도 이 인간은 그저 '안 돼'를 반복할 뿐이다.
유순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바람의 중급 정령사인 이엘 로에닌은 상당히 독한 인간이다.
속이야 어떻든간에 겉은 이렇게나 귀여운 10세 소녀건만,눈물을 머금은 내 공격을 가볍게 피하다니.
"왜요?오늘은 가르쳐준다고 했잖아요!"
"분명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는 했지만,그건 지니 양이 일주일간의 수업을 착실하게 들었을 경우지요.일주일......그중에서도 수업이 있는 날은 고작 5일!그런데 그중 지니
양이 수업을 빠진 날은 무려 사흘입니다!이게 말이 됩니까!"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탁,소리 나게 덮은 이엘 선생은 잔소리를 시작할 태세였다.
그에 나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쳇!"
"'쳇'이 아닙니다,'쳇'이!이제 열 살이 되었으니 좀 더 조신하게 행동해야 되지 않겠습니까?생각해보세요!지니 양이 그동안 마나훈련을 열심히 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 외의 수업을 대
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일쑤였지 않습니까!정령을 소환하는 데 필요한 것은 마나뿐만이 아닙니다!탄탄한 정신력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내 특기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를 발휘한 나는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엘 선생을 구슬리지 못하면 결국 일주일 내내 수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싫었기에 나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아!"
"정령이란 말입니다,순수한 자연의......네?질문이 있나요,지니양?"
"선생님!저요,정령과 계약할 때 필요한 계약진에 대해 알려주세요!"
난 처음 정령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그날을 떠올렸다.
분명 그날 봤던 책의 제목은 『초 간단 정령 계약법』이었고 맨 앞장에는 한 장의 계약진이 그려져 있었다.
"계약진이라......음,그거라면 분명 2주일 전에 수업했던 것 같은데요?"
......그랬나?기억 안 나는데?나 없을 때 수업한 건가?아,정령반의 학생은 나 하나뿐이지,참.
"아,어려운 내용이었잖아요.그래서 다시 듣고 싶어요!"
"흠,그다지 어려운 수업은 아니었습니다만?"
기억 안 나니까 어려운 거 분명하다니까!
"그래도 다시 듣고 싶어요!"
내가 이렇게나 이론수업에 열정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엘 선생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분필을 들어 칠판에 몇 개의 동그라미를 그려나갔다.
"뭐,원하신다니 설명을 하도록 하죠.자,보시면 일단은 기본적으로 크게 4개의 계약진으로 나눌 수 있죠.우선 바람의 정령 소환진,이것은 이쪽에 이런 글자가 들어갑니다.이건 정령어죠.그리
고 불의 정령은 불을 뜻하는 정령어가 오른쪽과 왼쪽,정가운데......지니 양,이해 되나요?"
생각보다 단순한 그림들을 보며 나는 머릿속에 어렴풋이 기억나는 책 속의 계약진과 그것을 매치시켰다.
그때의 그 계약진에 비하면 너무 단순한 형태이다.
당시에 본 것은 계약진이 아니었나,하고 생각하는데 이엘 선생이 멍한 표정의 나를 불렀다.
"네?네!물론이죠."
"흠......그럼,다시.여기서는 간단하게 불,물,바람,땅을 표시하는 네 가지 단어로 어떤 속성의 정령을 소환하는 정령진인지를 구분합니다.그리고 그 네 가지에서 또 다시 하급,중급,상급,최
상급,정령왕으로 구분되지요.이중 정령왕과 최상급 정령의 계약진은 거의 소실되어 계약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네,질문하세요,지니 양."
생전 질문은커녕 수업기간에 어떻게든 자기 위해 안달하던 내가 오른손을 번쩍 들자 이엘 선생이 놀랐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정령진의 수는 총 16개,맞나요?"
"네,그렇습니다.하지만 그중 정령왕과 최상급 정령의 계약진 7점은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어서 거의 소실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정령 계약진이 단 하나로 통일된 줄 알았는데요?"
분명 그 당시 책에는 단 한 장의 계약진이 그려져 있었을 뿐이다.
그 외에 그림이라고는 하급정령의 모습을 묘사해놓은 것이 전부였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요.이 정령진은 약 8천년 전부터 이어져온 것으로 아주 체계적이고 안전하게 만들어진......아,그러고 보니 분명 고대에는 단 하나의 정령진만이 존재했
다고 합니다.그리고 그 하나의 정령진에서 파생된 것이 지금의 정령진이라고 하더군요."
"어째서 하나였던 것이 열여섯 개로 나뉜 건가요?하나가 더 편할 텐데."
"아주 좋은 질문이군요.고대에 있던 정령진은 소환될 정령을 정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그러니까 어떤 정령이 나올지 알수가 없는 거지요."
"......그럼 차라리 그것을 이용하면 정령왕이나 최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내 물음에 이엘 선생을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그 정령진은 소환자의 파장에 가장 흡사한 파장을 지닌 정령을 소환해주는 것입니다.과거 이 하나의 정령진이 사용되던 시절,어떤 사악한 정령사가 정령을 소환했습니다.그 소환된 정령은
'저주의 정령'이라는 것으로 수많은 종류의 정령이 존재하던 고대에도 처음 소환된 존재였답니다.그 저주의 정령과 계약을 맺은 정령사는 온갖 사악한 악행을 저지르며 다녔다는 군요.한 나
라의 왕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거슬리는 자들에게 끔찍한 저주를 내려 죽지도 못하고 괴로움에 떨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와우,무적이군요?"
"무적......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하지만 그는 저주의 정령과 계약을 맺고 1년도 되지 않아 사망했습니다.그 저주의 정령은 빛의 정령이 아닌 어둠 속성의 정령인데,그들 어둠의 정령은
소환자의 마나가 아닌 목숨을 갉아먹는 계약을 하거든요.매우 위험한 존재들입니다.그 당시 어둠의 정령이 정령학회에 알려지면서 정령학회의 수뇌부들은 오랜 연구를 거쳐 지금의 16개 정령
진을 만들어낸 겁니다.그 외에도 9개의 정령진을 더 만들어냈다는데 그것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다만 그 6개의 정령진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소실되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흐음,그렇다면......"
내가 본 그 정령진은 고대어였으니까,약 8천 년 전 고대인이 쓰던 정령진이라는 게 확실하군.
다만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이거지?
"그럼 수업을 계속......지니 양?지니양!어딜 가시는 겁니까?"
나를 부르는 이엘 선생의 음성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도서실을 향해 뛰어갔다.
까짓,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냐!
"미아~?"
나는 연금술반에 얼굴을 들이밀곤 미아를 불렀다.
문가 근처의 실험대 있는 곳이 자기 자리인 미아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앗!지니?웬일이야?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흥건히 묻은 장갑을 벋어낸 미아가 나를 향해 눈을 빛냈다.
"있잖아......마나농축액 있으면 조금만 줄래?"
"마나농축액?있긴 하지만......나도 실험에 써야하는걸.그건 거의 모든 실험에 사용되는 재료란 말이야."
쳇,역시 공짜로는 안 된다 이거지.
"비커 하나만큼만 주면 되는데......내 노란색 프릴 리본과 바꾸자.어때?"
"앗,정말?음......하지만 비커 하나면,실험 세 번은 하는데......"
"......그럼 요정가루 조금 얹어주는 조건으로,내 리본 달린 분홍치마도 함께 줄게!아직 두 번밖에 안 입었어.어때?"
"음,요정가루라면......안 쓰는게 있긴 한데......흐음."
고민하는 듯 눈을 살짝 감을 채 턱을 괸 미아를 향해 나는 문에 가려 보이지 않은 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살며시 세웠다.
"알았어!캔디 한 상자,어때?포장도 안 뜯은 새 거야!그래도 안 된다면 나 이루제한테 부탁할래."
"앗!이루제는 안돼!이루제랑 놀지 마.이루제는 나쁘단 말야!"
"......그럼 바꿀 거야?"
"음......알았어.대신 리본이랑 치마,캔디 한 상자......꼭 줘야 해?"
"알았다니까!얼른 가져와!"
커다란 지출이기는 했지만 캔디는 원래 즐기는 체질이 아니었고 그 외에 옷도 대부분 교복 차림이기 때문에 입을 일이 적었다.
꼭 줘야 한다며 몇 번이고 다짐을 받는 미아에게 단단히 약속한 나는 결국 재료를 손에 쥐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렀다.
역사는 오늘 밤에 이루어진다!
밤이 되었다.
주위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을 때 나는 살며시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 한 개와 책상 한 개뿐인 방이지만,나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우선 나는 누워 있던 침대를 옆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침대 밑에 쌓인 먼지가 공기 중에 흩날렸다.
"콜록!콜록!"
젠장,이 방 청소 누구야?먼지를 모조리 침대 밑에 몰아놨잖아?우이씨,걸리기만 해봐라.
예상과 달리 아닌 밤중에 청소를 하게 된 나는 먼지를 모두 문 쪽으로 몰아냈다.
그리고는 베개 속에서 몇 가지 물건을 꺼내들었다.
우선,단단한 바닥을 그림 모양으로 파내기 위한 조각도.
이건 보통 조각도가 아닌 마법이 걸린 물건이라 이런 돌 정도는 순풍순풍 깎여나간다.
마법반에서 마법진 연구를 주로 하는 친구에게 살짝 빌렸지.
도서실에 있는 책 중 고대어로 된 책은 대여금자로 다만 도서실 안에서만 읽을 수 있었기에 나는 그 그림을 베낀 종이를 펼쳐들었다.
그림 솜씨가 엉망인 나이지만 3십 분 정도 고전하니 베낄 수 있었다.
우선 분필을 집어든 뒤 그 그림을 바닥 위에 따라 그렸다.
무엇보다 원의 정확성이 중요했기에 몇 번인가 그림을 지워낸 나는 결국 정확한 원을 완성했다.
"젠장......"
원 그리는 데만 10분이 소요됐다.
그림에 있는 글씨 하나하나를 각도까지 재가며 정확히 그려낸 뒤 이내 완성된 그림에 만족감을 느끼며 조각도를 들었다.
혹여 삐져나갈가 봐 아예 바닥에 엎드린 나는 심혈을 기울여 계약진의 문양을 조심스레 파나갔다.
얼마나 그렇게 쪼그리고 있었을까?
다리가 저려오고 이마에 땀이 맺혔다.
"완성이다!"
작은 환호성을 내지른 나는 입가를 씰룩이며 베개 속에서 마나농축액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파인 자국 위로 조심조심 부어넣었다.
이내 파인 돌 위로 진녹색의 계약진이 드러났다.
다시 한 번 잘못된 부분이 없나 살핀 나는 그 위에 요정가루를 뿌렸다.
황금빛 요정가루가 방 안에 반짝이며 흩날렸다.
진녹색의 마나농축액은 요정가루와 만나자 밝은 빛을 뿜어냈다.
계약진이 그려진 종이를 서둘러 주워든 나는 거기에 적어둔 주문을 외웠다.
다소 길었기 때문에 호흡을 조절해야 했다.
"wkdusdml wjddldu, tptkd ahems rjtdml wjddldu,durl rm fuddmf qnffjsorhwk gksek,skdhk rPdirdmf aowdj dudghsdml dkvskfdmf gkaRpgkf wjdfuddldu,so qnfmadp ekqgkdu skmeodml wndlsdl e
hlfusl meo skdml whddl ehldjfk." (똑같이 베껴 쓰느라 죽는줄 알았어요. ㅠ.ㅠ )
모르는 단어가 많았기에 그저 발음 그대로 읽었을 뿐이었다.
중간 중간 아는 단어들이 보였다.
작게 웅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여전히 빛을 내고 있던 계약진에서 순간 더욱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놀라서 그만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 몸 안에서 마나가 쑤욱,빠져나갔다.
누군가 내 마나를 뭉텅이로 뽑아가는 것 같았다.
소환이 된 건가?
소름이 돋았다.다시금 눈을 떴을 때 계약진을 채우고 있던 녹색 액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방 안에 요정가루가 조금 남아 흩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정령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계약진 위에 정령이 있어야 하는데.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실망감이 피어올랐다.
역시 실팬가?
"......정령아?"
혹시 해서 불러봤지만 답은 없었다.
실망감을 금치 못하고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데 사방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마치 초음파처럼 사방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정령아?있는 거야?어디 있어?나와 계약하자!"
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계약하자!' 하고 말한 순간 그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이름을......저에게 이름을......]
여전히 사방에서 울려오는 목소리.
"이름?넌......무슨 정령이야?어둠의 정령?"
[어둠의 정령은 아닙니다.인간계의 잣대로는 저를 표현할 단어가 없습니다.]
이내 윙윙 울리던 목소리가 통일되었다.
여럿이 말하는 것 같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그럼?그럼 넌 하급이야?아니면 중급?난 하급과 계약할 정도의 마나밖에 없어."
[저에게는 급이 존재하지 않습니다.다만 주인의 능력에 따라 변할 뿐.아,저를 굳이 말씀드리자면,광물......아니,금속의 정령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금속의......정령?"
그제야 나는 미약한 진동을 내는 주위의 물건들을 보았다.
커튼을 다는 곳의 금속이 붕붕거리며 연신 울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박힌 못들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그 자리에서 벗어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저에게 이름을......]
다 좋은데 말이야,그전에......
"못 다시 꽂아줄래?책상 무너져."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계약이 완료되기 전에는 제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저에게 이름을 지어주셔야 비로소 계약은 성립됩니다.]
"알거든?"
내가 3년 동안 배운 게 그건데 설마 모를까.
나의 티껍다는 말투에 정령은 입울 다물어버렸다.
또다시 잠시 침묵이 흘렀다.이번에 침묵을 깬 건 나였다.
"넌 남자야 여자야?"
이름을 짓는 데 성별은 중요한 거거든!
[저는 성이 없습니다.]
"......그럼 중성이야?"
아차,정령은 대부분 중성이지.
[아뇨,무성입니다.]
"......다른 거야?"
[다릅니다.]
젠장,한 방 먹었네.흠,이름이라.난 이름 짓는 건 딱 질색인데.센스가 부족하거든.
한참의 고민 끝에 나는 결국 이름을 지어냈다.
"아,라이,어때?"
내가 전생에 키우던 개 이름이란다.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았지만.
[좋습니다.제 이름은 라이,마스터의 성함은?]
"내 이름은 진이 크로웰."
[지니 크로웰님의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함께 하겠습니다.나의 마스터에게 영광을......]
이젠 정령까지 내 이름을 무시하네.진이라니깐......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그런 내 귓속으로 목소리가 울렸다.
[마스터,마스터,누군가 다가옵니다.마스터!]
뭐래니......난 무시한 채로 꿈속에서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문득 왜 쟤가 여기 있지,하는 생각에 눈을 떠버렸다.
"라이?어디 있어?"
[여깁니다.문고리요.]
"......넌 왜 정령계로 안 돌아가?"
[전 자연계 정령이라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습니다.저는 평생 마스터의 곁에 있습니다.]
......자연계 정령?그건......음,그러니까 정령계가 아닌 자연에서 태어난 정령이었지,아마.
"그런데......넌 왜 형체가 없어?"
[저는 금속을 흡수해서 형체를 만듭니다.하지만 여기에는 흡수할 만한 것이 없더군요.]
흐음,하긴 문고리를 흡수했다간 나에게 갖은 욕을 먹을테니까.
그럼 저 녀석에게 금속을 먹여줘야 하나?금속이라......연금술반에 가면 넘쳐나겠지.
"알았어!나만 믿어.배 빵빵하게 먹여줄게."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교복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마스터,누군가 문 앞에 서 있습니다.어떻게 할까요?]
"응?누군데?"
[연두색 머리카락에 냄새로 보니 바람의 정령사인 듯싶은 남잡니다.]
오올,제법 쓸 만한데.인터폰 대용인가?그나저나,저건 이엘 선생이겠지?웬일이지?아침 부......아 벌써 시간이 12시가 지나버렸네.
수업에 안 나가서 온 건가?쯧,참을성이 없다니까.
마지막으로 목에 리본을 맨 나는 문을 세차게 열어젖혔다.그러자 역시나......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크큭,문 뒤에선 이엘 선생이 이마를 부여잡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헬로?"
"으윽!지니!이게 무슨 짓입니까?"
"왜요?"
"문을 열 때는......"
뭔가를 말하려던 이엘 선생은 여기가 내 방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열 때는?실례합니다~할까요?아니면 똑똑?"
"흠흠,아니......아무튼,주의하세요."
"네에~."
힐끔 내가 잡고 있는 문고리를 바라보았다.
이 안에 있는 건가?평소랑 똑 같은 느낌인데 말이지.
"지니 양,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직접 왔답니다."
"중요한 일이요?"
문고리를 보던 눈을 돌려 이엘 선생을 올려다보았다.
"네,오늘은 지니 양에게 계약을 시켜주려고 합니다.다음부터는 수업에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요."
"아,이미......"
"네?"
"아,아니에요.좋다구요.너무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내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는 이엘 선생을 외면한 나는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이미 라이와 계약을 해버렸지만 능력 있는 사람들은 본디 자신의 능력을 숨기는 법!
게다가 정령사들 중에는 한 속성이 아닌 서로 상성이 잘 맞는 두 개의 정령과 계약을 하기도 하니까,다른 정령과 계약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흠,그럼 따라오도록 해요,지니 양."
"네에!"
나는 느릿한 걸음으로 기숙사를 벗어나는 이엘 선생을 따라 발길을 옮겼다.
뭐랄까?수지맞은 기분이랄까?헤실헤실 웃고 있다가 문득 라이의 존재를 떠올렸다.
앗,라이는......여전히 문고린가?항상 내 곁에 있는다고 하더니?
고개를 휙 돌려 내 방쪽을 바라보는데 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뭘 찾으십니까,마스터?]
순간 라이가 내 앞에 있었다면 금속이고 뭐고 한 대 갈겨줬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놀라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야!넌 어디 있는 거야?"
[저요?전 지금 지퍼에 있는데요?]
"뭐?지퍼!"
순간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러자 이엘 선생이 걸음을 멈추고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냈다.
난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뒤로 손을 올려 지퍼를 더듬었다.
"여기 있어?너 여기 있는 거야?"
[네,마스터.그런데 왜 그렇게 조그맣게 말씀하시죠?]
"너랑 계약한 건 비밀이니까 그렇지!"
[아하,그렇군요.하지만 마음속으로 말하셔도 들리는데요.물론 마스터가 저에게 하고 싶은 말 만이지만요.]
......이런 썩을,이엘 너는 그런 거 안 가르쳐주고 뭐했니?
[그런 거냐?들려?]
[물론이죠.생생하게 들립니다.]
나는 이엘 선생을 향해 살짝 가운데 손가락을 뻗어준 다음 그를 불렀다.
"선생님!"
"음?왜 그러시죠,지니 양?"
"정령과 계약하면요,말로 하지 않아도 대화할 수 있나요?"
그 질문에 이엘 선생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물론이죠.다만......으음,정신력 소모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닙니다.왜 그런 질문을......?"
"하핫,그냥 물어봤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이자 이엘 선생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발길을 옮겼다.
[야,근데 너 딴 데로 가면 안 돼?왜 하필 지퍼야?]
[그야 마스터의 몸에 있는 금속이라고는 이 지퍼뿐이니까요.]
그런가?하긴 옷에 금속이라고는 지퍼 말고 어디 또 있겠냐마는......그도 없을 때가 많군.흠......
[그럼 너는 쇠가 있어야만 나를 따라다닐 수 있어?]
[아뇨,일단 형체를 갖추면 그 뒤로는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오올,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
금속의 정령이라는 게 생각보다 쓸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지금 마스터의 능력으로 변화는 무립니다.]
이 자식이......장난하나?
[야,그럼 말을 말던가?]
[아,하지만 시체가 있다면 그 시체의 껍질을 뒤집어쓸 수는 있습니다.한마디로 속은 금속,겉은 껍질이죠.]
시체?맙소사,껍질?갑자기 속이 미식거려왔다.
[으악,시체?그거 꼭 사람이어야 해?]
[아뇨,딱히......동물이어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나마 다행이군.
[시체라......너는 몸이 있는 게 좋아?아니면 없는 게 좋아?]
[저야 있는 게 좋습니다만.아무래도 움직이기가 편해지니까요.]
시체라......흐음,어디 구할 데가......아!
[아,쥐 시체는 어때?널렸는데.]
[그냥 이렇게 살겠습니다.]
이 자식을......콱!감히 이 몸의 성의를 무시해?뭔가 한마디 하려는데 이엘 선생이 발을 멈췄다.
"지니 양."
"아,네!"
"도착했습니다.이곳이 계약진을 새겨둔 방이 있는 곳이죠."
양쪽으로 쫘악 늘어진 방들.그 각각의 방에는 불,물,바람,땅을 뜻하는 정령어가 새겨져 있었다.
"와아......"
사방에서 풍겨오는 기분 좋은 느낌에 나는 왠지 정신이 맑아진다고 느꼈다.
"지니 양,어떤 정령과 계약하겠습니까?이젠 정하셔야죠."
이엘 선생의 말에 나는 고민해야 했다.
그간 이엘 선생은 항상 계약하고 싶은 속성의 정령을 미리 생각해놓으라고 말하곤했지만 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계약하고 싶다고 해도 그 정령의 속성과 친화력이 부족하면 계약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 될 뿐이기도 했다.
"음,으으음......끄응."
내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는지 이엘 선생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불의 정령은 어떤가요?공격적으로나,실용적으로나 꽤나 쓸 만한 정령이죠.공격력은 4대 정령 중에서 최강이니까요."
"기각!"
"네?"
"불은 절대 싫어요!죽어도 안 해!배 째!"
"네에?"
너 같으면 불에 타죽었는데 불의 정령이랑 계약하고 싶겠냐?
난 짧게 혀를 찼다.
확실하진 않지만 내가 그런 상황에서 죽어버렸으니 필시 내 시체도 불에 타버렸으리라.
그만한 불효가 또 있을까?새삼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쳇,내가 살던 세계로 확실히 돌아갈 수만 있으면 마술사라도 할 텐데,그것도 아니니......
에휴,버럭 화를 내다가 의기소침해졌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는 내 모습에 이엘 선생은 머리를 긁적였다.
"음,선생님은 바람의 정령이죠?그건 뭐가 좋죠?"
"바람의 정령이요?바람의 정령은 다루기가 어렵다는 점을 빼면 가장 다각적으로 이용할 수 있죠.공격력이나 방어력은 평균이라고 볼 수 있고요.전쟁 시에는 연락용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흐음,난 그간 받았던 정령에 관한 수업내용을 떠올렸다.불의 정령은 빼고.
바람의 정령은 다루기가 어렵다.
성격이 변덕스럽기 때문이다.하지만 소환은 비교적 쉬운 편이다.
게다가 이엘 선생이 말했듯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고루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밸런스 형이라고나 할까?
물의 정령은 성격이 유순하여 다루기는 용이하나,소환하기는 가장 어렵다.
방어력은 뛰어나지만 공격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하지만 중급부터는 미약하나마 치유의 능력을 갖게 된다.
중급은 가벼운 상처 정도는 치유할 수 있고,상급이라면 깊은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
최상급은 잘린 팔도 붙인다고 하며,물의 정령왕은 죽은 자도 되살린다고 한다.
물의 정령은 치유의 정령이라고도 불린다.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곳에서 물은 생명의 원천이라 불리며 치유를 뜻한다.
마지막으로 땅의 정령.성격은 보통,소환은 쉽게 이루어진다.
방어력은 가히 최강이라 불리며 공격력은 보통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상급 정도 되면 광범위 지진을 일으켜 대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사실 내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부분은 물의 정령이었기에 역시 물의 정령에 비해 다른 정령에 대한 지식은 부족했다.
아무래도 치유라고 하는 부분이 내 마음을 끌었다고 해야 하나?
[마스터,왜 멍하니 계시죠?]
[멍하니 있는 게 아니라 생각에 잠긴 거란다.]
[무슨 생각을?]
[어떤 속성의 정령과 계약을 할까......아,너랑 상성이 좋은건 어떤 정령이야?바람?물?땅?불은 안 돼!]
불은 절대 싫어!끔찍해!안 되고말고!
[제 속성은 무 속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굳이 말하자면 땅이라고 할까요?땅에서 나오는 것 중 대부분은 제 휘하니까요.하지만 굳이 속성에 구애받지는 않습니다.]
흠,땅이라......그렇다면!
"선생님!저 정했어요!"
"오,무엇으로?"
"물이요!"
내가 해맑게 말하자 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물이신 겁니까,마스터?]
[그냥,크크큭.]
이엘 선생은 자신의 소매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물이라는 뜻의 정령어가 선명하게 새겨진 자물쇠와 한참 씨름했다.
하지만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 10분이 다 되도록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미치겠네.
"......선생님?"
"네,지니 양.잠시만,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아무래도 못 여는 것 같지?왜 저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