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희우는 누구보다 손주를 기다리고 계실 기 회장을 떠올렸다.
희우에게 직접적으로 손주에 대해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현태가 저와 결혼한 목적이 그 이름도 유명한 조상님의 핏줄을 이어받은 손주를 얻기 위해서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땐 그동안 저에게 잘해 준 이유가 오직 손주 때문이었다는 생각에 크게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입원을 하는 동안, 몸을 회복하는 동안, 저에게 보여주었던 기 회장의 배려 깊은 행동들을 떠올려 볼 때 결코 그것이 전부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영감, 난리 나겠군.”
현태는 피식 웃으며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현태 씨.”
“응?”
“좀 빨리 달려야 하지 않을까요?”
희우가 옆을 지나갈 때마다 경적을 한 번씩 울리는 차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임신 초기에는 안정이 제일 중요해.”
“저는 지금 안전한데요.”
“과속은 좋지 않아.”
“그래도 50킬로는 좀 너무하지 않아요?”
“4주면 40킬로로 달려야 할까.”
“갑시다, 그냥.”
희우는 눈을 질끈 감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현태는 기다렸다는 듯 조수석의 등받이를 천천히 뒤로 넘겼고 그러는 동안 차의 속도는 더 줄어들었다.
나는 안 보련다.
희우는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차량의 운전자들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댔다.
* * *
“희우 왔니?”
다른 날과 다름없이 기 회장은 버선발로 나와 손주 내외를 맞이했다.
한 달 전부터 일선에서 조금씩 물러나 조촐한 취미도 가져보고, 한 번씩 등산도 갔다.
등산을 간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등산 장비는 전문 산악인 못지않았다.
“등산 가세요?”
야광 색 등산 점퍼를 입고 있는 기 회장을 보며 현태가 물었다.
“아니.”
“그런데 왜 등산복을 입고 계세요.”
“편해.”
“…….”
현태는 말이 없어졌고 희우는 야광 색 점퍼가 너무 잘 어울린다며 기 회장을 추켜세웠다.
“이런 색이 어울리기 쉽지 않은데, 어쩌면 패션 센스가 이렇게 뛰어나세요?”
“내가 좀 그렇지? 김 여사도 나한테 잘 어울린다고 했어.”
“진짜 잘 어울리세요. 바지도 예뻐요, 할아버지.”
현태는 기 회장이 입고 있는 주황색 바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독고희우에게 패션에 관한 칭찬을 받으며 저렇게 좋아하다니.
이 정도면 손주 며느리 사랑이 하늘을 감동 시키고도 남을 듯했다.
“너는 주말이라고 농땡이 부리는 거야? 내가 네 나이 때는 주말이고 휴일이고 없었다.”
“희우 병원에 갔다 왔어요.”
“왜! 어디가 아프냐?”
현태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던 기 회장은 병원이라는 단어에 질겁하며 희우의 안색을 살폈다.
희우가 무서운 일을 겪은 후 기 회장은 진작 김남후를 처리하지 못했던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 땅에는 발도 못 붙이게 해야 했는데.
비록 그 원장이 남후와 수정을 속이고 난자 채취하는 척만 했다 하더라도 희우에겐 잊을 수 없는 공포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늙은이의 괜한 욕심 때문에 희우가 험한 일을 당한 게 아닌가 자괴감이 컸다. 그래서 모든 욕심을 내려놓자 생각하며 회사 일에도 차츰 손을 떼고, 수연제도 포기를 했다.
지금 주어진 것에만 만족하고 살아도 족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병원이라니!
희우는 현태보다 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기 회장을 보며 두 사람이 참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픈 거 아니에요.”
희우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프지 않다니 다행이지만 병원을 다녀왔으니 어딘가 문제는 있을 터.
기 회장의 얼굴에서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은 근심을 보며 희우는 가방 안에서 초음파 사진을 꺼내 두 손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냐?”
“골인이요.”
“뭐?”
“독고운 선생의 핏줄이자 기우돌 회장님의 핏줄인 쌍둥이입니다.”
“뭐어어어어?”
기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현태는 조용히 희우의 두 귀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말했다.
“임신 초기에는 안정을 취해야 해. 큰 소리는 좋지 않아.”
기 회장은 희우가 쥐여준 초음파 사진을 들고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이토록 큰 선물이라니!
마음 같아선 거리로 뛰어나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그동안 열심히 산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희우야! 아이고, 이 복덩이!”
기 회장이 자리에 앉으며 희우를 덥석 끌어안았다.
하지만 현태가 기 회장을 가만히 밀어내며 말했다.
“조심해주세요. 안정을 취해야 해서요.”
“그래, 그래. 맞다. 안정이 중요하지. 김 여사!”
큰소리로 외치던 기 회장이 아차차 하더니 다시 작은 소리로 김 여사를 부르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요? 아이고! 우리 회장님 소원성취하셨네! 정말 축하드려요! 이게 무슨 경사래요? 게다가 쌍둥이라니요?”
“우리 희우가 뭐든 야무지게 잘해. 하나를 해도 허투루 하는 게 없어.”
이상한 방향의 칭찬 같았지만 희우는 저렇게 좋아하는 할아버지를 보니 바로 이곳으로 달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주에는 언제 말씀드리지?”
“나중에 집에 가서 전화해요.”
“전화로?”
“네. 그렇게 해요.”
“하긴 안정이 중요하니까.”
“아 쫌! 그 말 금지! 안정 단어 사용 금지!”
희우가 질린다는 듯 도리질을 하자 현태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안정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희우의 분만일이 다가왔다.
남산만 하게 부푼 배 때문에 똑바로 눕는 것도 힘들어하는 희우를 보며 현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엎드려 누워보면 소원이 없겠어요.”
희우가 커다란 배를 만지며 말했다.
“그리고 다른 건? 아이 낳고 나면 해 보고 싶은 거 없어?”
“으음…… 운동화 연달아 열 켤레 갈아 신을 거예요. 끈 있는 걸로.”
배가 부풀기 시작하면서 희우는 허리를 숙이지 못했다.
양말도 혼자 신기 힘들었고, 발톱은 더더욱 깎지 못했다.
희우다운 소원에 현태는 제게 기대앉은 희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행히 머리를 감기는 것도 현태의 몫이라 희우가 며칠째 머리를 감지 않고 버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머리카락을 말릴 때 적당한 물기를 남겨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애들이 내 머릿결은 안 닮으면 좋겠어요.”
“왜?”
“곱슬머리가 얼마나 스트레스받는데요.”
“예뻐, 괜찮아. 많이 힘들지?”
현태가 둥근 희우의 배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래도 배 속에 있을 때가 더 편하대요.”
“누가?”
“이슬 샘이요.”
“아기 낳았어?”
“내가 말했잖아요. 두 번씩이나!”
“그랬나?”
현태는 여전히 관심 없는 사람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선택과 집중이라나 뭐라나.
하지만 희우가 보기에 선택과 집중, 집중, 집중, 집중이었다.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본다는 사람을 많이 만나 봤지만 현태처럼 지독하게 끝장을 보는 사람도 드물었다.
희우의 예상대로 현태는 임신과 출산에 관한 서적을 밤낮으로 읽었고, 그 결과 웬만한 산부인과 용어는 알게 될 정도가 됐다.
이런 걸 보면 현태가 이슬의 이름을 기억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아아…….”
“왜 그래?”
느긋하게 앉아 티비를 보고 있던 희우가 갑자기 인상을 썼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배가 아파. 아아아…….”
희우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더 많이 구겨졌다.
그 뒤로 희우의 진통은 몇 차례 더 이어졌고, 주기도 짧아졌다.
출산 예정일이 아직 일주일 남아있었기에 현태는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읽었던 전문 서적의 내용이 Delete 키를 누른 것처럼 한꺼번에 현태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이것 또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