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73)화 (63/75)

73화

넘어질 때 손을 내밀었던 기 회장은 평소 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덕수를 상대로 이 결혼을 얻어 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들을 도와준다는 명목하에서였다.

거금을 흔쾌히 빌려줬지만 선욱은 얼마 안 가 빌려 간 돈뿐 아니라 새로 낸 빚까지 떠 앉게 됐다.

우돌은 다시 선우에게 손을 내밀었고, 기어코 수연제의 문화재 명의 이전을 약속받았고 선욱은 허가 신청을 지자체에 내기로 했다.

물론 수연제의 새로운 주인은 기우돌 자신이었다.

자신이 죽고 나면 희우의 이름으로 해 주리라 생각했지만 자신의 소유였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하아…… 부질없나?”

희우가 크게 잘못될 뻔한 일을 겪으며 우돌은 생각이 많아졌다.

만약 희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더라면.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했다.

늙은이의 욕심은 태어날 손주 하나만으로 만족해야 하지 싶었다.

기 회장은 크게 한숨을 쉰 끝에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가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사돈인 독고덕수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가 길길이 날뛰며 천박한 장사꾼이라 욕할 게 눈에 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희우는 이제 기 회장에게도 너무 소중한 가족이었다.

* * *

회사는 수정에 관한 소식으로 온통 뒤숭숭했다.

“그게 정말이에요?”

“나도 들었어. 진짜 믿기지 않아.”

“왜 갑자기 미국으로 돌아가신 거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공 대리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지어 간다는 인사도 없었다.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일이 생긴 걸까요?”

“그래도 인사는 하고 살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있잖아.”

속삭이는 말 중 은근한 목소리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저에게 모이자 그녀는 또랑또랑한 눈을 빛내며 망설이듯 이야기를 꺼냈다.

“하수정 팀장님, 구속됐다는 소문이 있어.”

“뭐어?”

“왜?”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하나같이 호기심을 보이며 눈을 번뜩였지만 공 대리는 펄펄 뛰며 난리를 쳤다.

평소 그가 하수정 팀장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던 터라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잠시 후 사내 메신저로 그녀가 들은 소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메시지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현태는 회사에 수정이 급한 일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꺼내면 사건의 구체적인 일들까지 거론될 거고 그러면 희우에 관한 이야기도 덩달아 수면 위로 오를 게 뻔했기 때문이다.

기 회장도 현태의 생각에 찬성을 했고, 공식적으로 사표 처리도 매끈하게 처리했다.

희우를 생각해서 한 행동이기도 했지만 10년간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친구에 대한 마지막 배려이기도 했다.

큰일을 겪었던 터라 학교에 양해를 구하고 한 학기만 쉬기로 하고 꾸준히 정신과도 다니며 상담도 병행했다.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누르고 있던 압박감이 엄청났던 모양.

희우는 상담을 할 때마다 울었고, 조금씩 마음의 무게를 덜어냈다.

운동도 시작했다.

말로만 할 줄 안다던 호신술을 배우고, 가스총 다루는 법도 배웠다.

같은 일이 또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희우는 체력이 더 좋아졌고, 이를 가장 반긴 사람은 현태였다.

“내가 이러려고 운동 시작한 게 아니야.”

벌써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희우는 어김없이 거듭 품으로 파고드는 현태를 밀어내며 칭얼댔다.

아무리 체력을 길렀다고는 하지만 분명 한계는 존재했다.

온몸의 기력을 뽑아내고 늘어진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다. 심지어 몸의 땀도 채 식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태는 또다시 희우의 탐스러운 몸 구석구석을 맛보았고, 어김없이 자신의 흔적을 또렷하게 남겼다.

드러나는데 자국을 남기면 흔적이 사라질 동안 곁에도 못 오게 했기에 현태의 위치 선정은 신중했고, 결과는 나날이 정확해졌다.

심지어 반팔 소매가 덮어지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까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현태의 쓸데없는 치밀함에 희우는 혀를 내둘렀다. 그 혀도 얼마 안 가 현태의 차지가 되었지만 말이다.

따뜻하고 조밀한 몸속은 파고들수록 정신없이 현태를 휘감았고, 깊숙하게 빨아들였으며 더 가지고 싶어 미치게 만들었다.

“하아, 으흣!”

달뜬 희우의 숨소리마저 제 것으로 만들며 현태는 빈틈없는 만족함에 온몸을 떨었다.

살과 살이 촉촉하게 맞닿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튼튼한 침대는 어느덧 다리가 삐걱대기 시작했다.

희우의 길고도 피곤한 밤은 어김없이 새벽까지 이어졌고, 다음 날 아침 겨우 눈을 뜬 희우 코앞에 토스트와 따끈한 커피를 대령하고 나서야 현태는 원망으로 가득한 시선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러게 적당히 예뻤어야지.

현태는 눈을 반쯤 감고 토스트를 와삭 깨어 무는 희우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한 후 일어섰다.

그때였다.

“우욱!”

맛있게 토스트를 베어 물던 희우가 구역질을 했다.

음식 앞에서 처음 보는 희우의 행동에 현태는 얼굴이 노랗게 떴다.

“왜 그래?”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러게 작작 좀! 우우욱!”

희우는 결국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침대 위에 내팽개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희우가 음식을 버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태는 출근하려 들었던 가방을 그대로 내팽개치고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어 진료 예약을 했다.

심각한 병이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죽을 것 같았다.

* * *

진료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현태는 희우보다 더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어쩐지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지 살짝 긴장되어 보이긴 했지만 편안한 얼굴이었다.

컴퓨터 모니터로 진료 결과를 꼼꼼히 살피던 주치의가 두 사람을 보며 활짝 웃었다.

유난히 동그란 그녀의 얼굴은 커다랗게 벌어진 입 때문에 더 동그란 모양이 됐다.

“어떻습니까?”

현태가 의사의 말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내과 진료가 아니라 산부인과로 가셔야겠는데요?”

“네?”

“임신하셨어요. 축하합니다.”

“…….”

“……”

의사의 말을 들은 현태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희우를 끔벅끔벅 바라보다가 다시 잔뜩 굳은 얼굴로 의사를 쳐다보았다.

“임신하셨다고요, 사모님.”

낯선 언어로 말하는 것도 아닌데 이해가 더딘 사람처럼 앉아 있던 현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말입니까?”

“네, 정확한 주 수와 분만일을 알려면 산부인과로 가셔야 해요. 나가서 산부인과에 접수하시고 바로 진료받아 보시는 게 좋을-”

친절하게 안내를 하던 그녀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현태가 희우의 얼굴을 잡고 정신없이 키스를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해리슨 빌딩을 매입했을 때보다 몇백 배는 더 기뻤다.

단순히 목표를 이루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울 전자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온몸을 부술 것만 같았다.

살면서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현태가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흠, 흠. 다 끝나셨으면 산부인과로 가서 접수하시겠어요? 다음 환자분이 기다리셔서요.”

쪼옥.

마지막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주치의인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 우돌 회장댁의 주치의를 한 지 6년째였다. 미국으로 가기 전 현태를 몇 번 진료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본 것으로, 들은 것으로 기현태가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본 현태의 모습은 이제껏 알고 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달라 보였다.

“죄송합니다. 어서, 일어나요!”

먼저 정신을 차린 아내가 얼굴을 붉히며 현태를 툭툭 쳤다.

얼핏 보면 기현태에 비해 많이 평범해 보이는 여자였다. 하지만 희우를 진료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더없이 맑은 웃음과 현태를 바라보는 애틋한 미소를 보며 독고희우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제 눈에도 이렇게 빛나 보이니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엔 더없이 사랑스럽겠지.

그녀는 약간은 부러운 눈빛으로 진료실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을 가만히 응시했다.

“다음 환자 들어오시라고 해요.”

인터폰을 누르며 진료를 시작한 그녀의 얼굴은 다시 본연의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 * *

산부인과 진료를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은 차에 타서도 한참 동안 초음파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기집이 두 개라니.”

희우의 뱃속에서 두 개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나란히 자리 잡은 완두콩보다 작은 아기 집을 보며 희우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게 머리인 거야?”

“아기집이에요.”

“그럼 이게 머리인 건가?”

“아기집이라니 까요.”

“그냥 콧구멍 같은데?”

희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초음파 사진을 응시하는 현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현태는 지나치게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특정 분야에 대해선 지나치게 무지하고 무심했다.

관심 있는 것과 관심 없는 것의 차이라고는 했지만 현태는 그 정도가 좀 심했다.

희우는 설명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이제 기현태가 관심이 생겼으니 조만간 임신과 출산에 있어 산부인과 의사 못지않은 지식을 습득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우리 할아버지께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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