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이미 희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굶주린 짐승의 새끼처럼 정신없이 핥고 빨아 대는 그의 입술이 희우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단추가 하나 더 풀어진 환자복 사이로 현태가 얼굴을 파묻은 채 몸을 움직였다.
비록 옷은 입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야릇한 분위기가 됐다.
“현태 씨! 나 눈 따가워요!”
한참 정신이 혼미하던 희우는 거품 때문에 눈이 따가워서 손을 위로 올리고 이마에 묻은 거품을 닦아냈다. 그제야 희우의 머리를 다 감기지 않았다는 걸 떠올린 현태가 씨익 웃으며 희우의 몸에서 입술을 뗐다.
쪽!
미련이 남는지 여기저기 한 번도 짙은 입맞춤을 남긴 후 현태는 그 자세 그대로 희우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쑤욱 집어넣었다.
“뭐해요?”
“거품 내기?”
“이제 헹궈줘야죠.”
“사흘 동안 안 감아서 곤란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이제 헹궈줘요!”
희우가 칭얼대자 현태는 다시 앵앵대는 입술을 냉큼 잡아먹었다. 물론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희우의 두피 구석구석을 부지런히 마사지했다.
머리를 감기는 건지, 키스를 하는 건지.
희우는 머리카락도 신경이 쓰이고, 입안을 온통 헤집는 현태의 뜨거운 숨결도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간절히 그에게 안기고 싶다고 생각이 드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기현태는 여우가 아니면 늑대가 분명했다.
모든 걸 포기한 희우가 결국 현태의 등에 팔을 두르며 키득키득 웃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정신없는 키스는 처음이었다.
머리를 감으러 들어갔을 뿐인데 샤워까지 꼼꼼하게 했다.
물론 샤워를 하는 동안 희우는 손 하나 까딱할 틈이 없었다. 거품을 묻혀 주는 것도, 몰로 헹궈 내는 것도, 수건으로 닦아주는 것도 모두 현태의 몫이었다.
그동안 희우의 몸에 붉은 자국이 더 많이 생겨났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현태는 아이처럼 애원했다가 자비라곤 없이 들이쳤다가 세상에서 제일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이며 부드럽게 달랬다.
병원이 아니었다면 언제 끝났을지도 모를 시간에 희우는 다행이다 싶었다가도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와, 독고희우 완전히 넘어갔구나.
희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는 현태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이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걸. 그리고 자신도 이 남자를 언제까지 놓아주지 못하리라는 걸 말이다.
위이이이잉.
뜨거운 바람이 희우의 머릿결을 보송하게 말렸다.
“이제 그만 말려도 돼요.”
희우가 머리카락이 반쯤 말랐을 때 말했지만 현태는 에어컨 바람 때문에 바싹 말려야 한다며 고집을 피웠다.
“내 머리카락은 다 말리면 안 돼요. 엄청 부푼단 말이에요.”
“감기 걸리는 것보단 나아. 병원에 있을 때만 내 말대로 해.”
희우는 더 말하기 귀찮기도 하고, 현태에게 빼앗겨 기력이 없기도 해서 그냥 현태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위이이이잉.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바람이 희우의 머리카락 구석구석 골고루 바람을 보냈다.
현태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신중한 모습이었다.
희우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현태는 그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다 뽀얀 볼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잠시 후.
“내가 머리 바싹 말리면 안 된다고 했죠.”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희우가 현태를 보며 말했다.
“그러네.”
희우의 머리카락이 대형 푸들처럼 잔뜩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싹 말리니까. 큽!”
“웃지 마요. 웃으면 가만 안 둘 거야.”
현태는 입술을 말아 물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희우가 챙겨 오라던 붉은색 도끼 빗으로 머리끝을 주춤주춤 빗겨 주다 은근슬쩍 머리카락 한가운데 꽂았다.
하지만 희우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땅이 꺼지라 한숨만 쉬었다.
“고무줄이나 줘요. 묶고 있게.”
“그래.”
현태는 잔뜩 목소리를 깔고 일어서다 침대 위에서 희우의 공책과 볼펜을 발견했다.
문득 저 볼펜도 꽂힐까 궁금해졌다.
희우는 여전히 손에 로션을 짜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현태는 잠시 고민하다가 빗이 꽂혀 있는 자리 옆에 볼펜을 슬쩍 꽂았다.
잘 꽂히는군.
현태는 몇 개 더 꽂아볼까 고민하다 그만두기로 했다.
왠지 지금 저가 하고 있는 행동이 희우와 무척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답지 않은 행동에 현태는 살짝 심란해졌으나 고무줄을 빨리 달라는 희우의 말에 금세 머릿속은 고무줄이 어디 있지? 라는 문장으로 가득 차 버렸다.
서랍을 열고 고무줄을 찾아 뒤적이던 현태는 문득 로션을 얼굴에 찹찹 바르고 있는 희우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자신은 여우에 홀린 게 분명하다고.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행동할 수 없다고.
“고무줄은요?”
“잠시만.”
하지만 이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일단은 고무줄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 * *
기 회장은 제 앞에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은 현아를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이번 사건을 조사하면서 손녀딸인 현아가 연관되어있다는 걸 알게 된 기 회장은 충격을 받아 한동안 말을 잃은 사람처럼 굴었다.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를 반복하다 현아를 집으로 불렀다.
“죄송해요.”
현아는 눈을 내리깐 채 흐느꼈다.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현숙과 현애도 기가 차긴 마찬가지였다.
동생이 현태 와이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자신들 또한 나쁜 감정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얄미운 정도였지 현아처럼 미련한 짓을 저지를 정도는 아니었다.
비록 범죄에 직접 가담한 적은 없다 하더라도 수정을 부추기고 잘못된 정보를 넘긴 걸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사과는 나한테 할 게 아니지.”
현아의 고개가 한층 더 숙어졌다.
“저도 수정이 그 애가 이렇게 잔인한 짓을 저지를지 몰랐어요. 전 그냥…….”
“다 필요 없고, 당장 희우한테 가서 사과하고 미술관 정리하거라. 그리고 서준이랑 같이 미국으로 가.”
“할아버지!”
현아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원망하듯 우돌을 쳐다봤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손녀의 얼굴을 본 기 회장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번복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할아버지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현아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스르르 일어났다.
“다녀올게요.”
시무룩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나가는 현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숙과 현애가 우돌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따라 나갔다.
“너희도 가서 사과하고 와!”
“저희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요?”
둘째 현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니들이 돼서 동생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지도 못하고!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하고 있었어! 그러고도 너희가 자매라고 할 수 있어?”
현숙은 그러는 할아버지도 몰랐지 않느냐고 대꾸하고 싶은 걸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할아버지 앞에서 무슨 말을 해 봤자 소용없을 게 뻔했다.
“그걸 게요. 현아랑 같이 가서 올케 만나고 올게요.”
“언니!”
현애가 발끈했지만 현숙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현애는 하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고 툴툴대며 현아 뒤를 따라 나갔다.
“쯧쯧!”
나이를 먹어도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손녀들을 보며 기 회장은 한심하게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에 기 회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도 미리 사과를 해야 하나.”
단순한 욕심에서 출발한 일이었다.
몸이 가장 아팠을 때 우연히 접한 게 독고운 선생의 책이었고, 그 책은 기 회장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 뒤로 하나둘 사 모으던 독고운 선생의 저서는 어느덧 그의 서재를 가득 메웠고 사지 못한 건 그의 본가에서 보관 중인 것들이 유일했다.
그가 가진 것보다 본가에 보관하고 있는 원서가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게 된 기 회장은 망설임 없이 경주로 향했고, 수연제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미치도록 가지고 싶었고 노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다는 열망으로 밤잠을 설쳤다.
눈을 감으면 수연제에서 한가롭게 거닐며 독고운 선생의 저서를 읽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이 됐다.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운 열망은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수연제에 열 번째 갔을 때 기 회장은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독고희우.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저절로 하나뿐인 손주와 맺어주는 상상이 됐다. 그러면 희우가 낳은 손주는 자신의 피와 독고운 선생의 피가 섞이게 된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뛰고,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가 예뻐서 미칠 것 같았다.
기 회장의 상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수연제를 손주에게 물려줘야겠다.
딸인 희우에게 수연제가 상속될 리가 없었다.
포기를 모르는 기 회장이 찾아낸 돌파구는 바로 독고덕수 영감의 둘째 아들인 선욱이었다.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 첫째 아들 부부와 달리 가진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표적을 찾아낸 후에 일이 진행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선욱은 생각이 깊지 않았고, 기 회장이 의도한 대로 잘 넘어오고, 잘 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