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괜찮아, 희우야. 괜찮아.”
현태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면서도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희우의 얼굴을 만지며 진정시켰다.
달리기하듯 가쁘게 들리던 희우의 숨소리가 차츰 안정을 되찾아 갔다.
* * *
병원에 입원한 지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기우돌 회장을 제외한 누구의 면회도 받지 않았다. 희우의 안정을 위해 현태가 지시한 일이었다.
희우의 부탁으로 경주 본가에는 당장은 알리지 않았지만 조금 안정이 되고 나면 현태가 직접 찾아가서 있었던 일을 말할 생각이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희우는 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되찾아 갔다.
VIP실이라 그런지 보통 병원 환자식과는 차원이 다른 식단이 제공됐다. 마치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매 끼니를 시켜 먹는 기분이었다.
환자복 재질도 좋아서 희우는 새삼 돈의 위대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현태는 일주일 휴가를 내고 희우의 곁을 지켰다.
“나는 이제 괜찮아요. 병원도 안전하고, 밥도 잘 나오고.”
“의사도 잘생겼지.”
희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던 말을 들은 현태가 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현태는 입술을 일자로 늘인 채 갖가지 과일이 듬뿍 들어간 수박 화채를 유리그릇에 내왔다.
본가의 김 여사가 희우를 위해 특별히 만든 화채였다.
이렇게 다른 과일이 많이 들어갈 거면 굳이 수박 화채라고 부를 필요가 있을까 고민될 정도였다.
“기억력이 무척 좋은 편이라.”
눈까지 내리깔고 진지하고 대답하는 현태를 보며 희우는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웃어?”
어이없어하는 현태의 반응에 희우의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그럼 울어요?”
“그것도 괜찮고.”
“이 사람 인성이 참 이상하네.”
“그런 건 속으로 생각하라니까.”
“일부러 소리 내서 말한 거거든요.”
희우가 얄밉다는 듯 눈을 흘기며 수박 화채 한 조각을 포크로 콕 찍어 현태의 입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다디단 수박이 입안에서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씹혔다.
현태는 입안에 있던 수박을 꿀꺽 삼킨 후 다시 입을 떠억 벌렸다.
“아!”
“헐, 또 먹여 달라고요?”
“나는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스타일이라.”
“뭐래. 기현태 씨는 손이 없어요? 알아서 먹어요. 참나.”
희우는 가볍게 눈을 흘기며 포크로 수박 조각을 콕콕 찍어 입으로 쉴 틈 없이 날랐다.
희우의 하얀 볼이 금세 수박으로 꽉 차 햄스터처럼 부풀었다.
현태는 참지 못하고 수박을 먹느라 꼭 다물린 희우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 맞췄다.
놀란 희우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살폈다.
“뭐 하는 거예요!”
수박을 삼킨 희우가 현태의 어깨를 주먹으로 탕! 치며 눈을 부라렸다.
“수박을 너무 좋아해서.”
“이거 먹으면 되잖아요!”
희우가 유리그릇을 내밀며 소리쳤지만 현태는 어깨만 으쓱이며 유리그릇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제야 들고 있던 화채 그릇에 과일 조각이라곤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희우가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화채를 너무 좋아해서 그래요.”
“그래.”
“진짜라니까요.”
“더 줄까?”
“있어요?”
희우는 언제 민망해했냐는 듯 그릇을 내밀다 남아있는 화채 국물을 쭈욱 들이켰다.
그리고 진짜 텅텅 비어버린 유리그릇을 현태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수박 많이요. 아, 코코넛 젤리도 넉넉하게 담아 주세요. 맞다! 키위도 적당하게 담아 주세요. 노란 키위요.”
“그냥 다 많이 줄게.”
“…….”
말하고 보니 결국 많이 달라는 말이 되어 버렸다. 희우는 더 큰 그릇으로 바꾸는 현태를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 씨는 어떻게 됐어요?”
그날 저녁 희우는 처음으로 수정에 대해 현태에게 물었다.
그동안은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있기도 했고, 현태의 마음이 어떨까 싶어서 차마 물어보지를 못했다.
10년 친구였다. 그것도 자신을 대신해 다치기까지 했던.
자신만 아니었더라면 두 사람의 모습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에게 몹쓸 짓을 한 건 수정이었지만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희우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재판받을 거고, 대가를 치를 거야.”
“그렇군요.”
현태를 향해 수정이 품었던 감정의 깊이를 생각할 때는 안됐다는 마음이 들다가도 김남후와 한 편이 되어 저에게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절대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엎치락뒤치락 되는 마음에 희우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무겁게 가라앉은 희우의 표정을 읽은 현태가 그녀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 주며 말했다.
“하지만 하수정 씨가 현태 씨한테 보통 사람은 아니잖아요.”
“너 빼고 다 보통 사람이야.”
불쑥 들어온 현태의 고백에 희우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고민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싸악 사라진 기분이었다. 아니, 고백이 차지하는 자리가 너무 커서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네가 고민할 일은 없어.”
희우는 말없이 현태를 응시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응시하던 현태의 시선이 희우에게로 옮겨왔다.
“희우야.”
“네?”
정답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현태의 목소리가 무척 감미로웠다.
머리카락을 만져주던 그의 섬세한 손길이 계속 이어졌으면 했다.
“머리 언제 감았지?”
하지만 이어진 현태의 질문에 희우는 설레던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동시에 그의 집요한 그의 시선을 주춤주춤 피하며 창밖을 쳐다봤다.
“와~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비 오는데?”
“빗소리가 참 좋아요.”
“태풍 주의보 떴더라.”
“제가 원래 태풍을 참 좋아해요. 몰랐죠?”
딴청을 피우는 희우가 귀엽기도 하고, 민망해하는 모습이 사랑스럽기도 했다.
“머리 감겨 줄까?”
건성 두피라 머리를 삼사일 안 감아도 별로 표가 안 나는 머리였다.
희우는 링거 때문에 불편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감겨 달라고 말하기도 싫어서 차일피일 미루던 참이었다.
링거는 안 맞아도 된다고 했지만 이번 참에 몸에 좋은 영양제는 다 맞힐 생각인지 끼니처럼 주사가 끊이지 않았다. 영양 과다로 죽는 건 아닐까? 고민이 될 정도였다.
“콜!”
잠시 망설이던 희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승낙했다.
“콜?”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 두피니까 아주 정성스럽게, 구석구석 잘 감겨 봐요. 아, 참고로 저 삼일 머리 안 감았어요.”
현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쓰며 조금 전 희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던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차갑지 않아?”
마침 수액을 다 맞아서 링거 바늘을 뺐지만 현태는 희우의 머리를 감겨 주겠다고 했다.
샤워기로 희우의 긴 머리카락을 적시며 물었다.
“딱 좋아요.”
환자용 샤워 베드에 누워 머리만 침대 밖으로 뺀 희우가 아이처럼 방긋 웃으며 말했다.
현태는 따끈한 물 때문에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희우의 입술에 쪽 입 맞춘 후 머리카락 전체를 적셔나갔다.
곧 희우의 머리 전체에 풍성한 거품이 몽글몽글 일었다.
손에 힘이 좋아서 그런지 머리를 감기는 손끝이 제법 야무졌다.
“오오오! 시원하다. 거기! 거기 좀 박박 문질러 봐요.”
“여기?”
“아니, 조금 더 위에.”
“여기?”
“아니, 조금 더 오른쪽으로”
눈까지 감고 저에게 여기 감기라고, 저기 감기라고 명령하는 희우의 모습이 어이없고 귀여워서 현태는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까다로운 손님이네.”
“당연하죠. 누구 와이픈데.”
“뭐라고?”
“네?”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가락을 일순 멈춘 현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방금 한 말.”
“당연하지?”
“그 뒤.”
“누구?”
현태의 의도를 빤히 알아차린 희우가 부러 딴청을 피웠다.
“그다음.”
“와?”
“까분다!”
“이?”
“한 글자 더.”
“프.”
“이제 붙여서 말해봐.”
“기현태 와이프.”
“미치겠네.”
머리를 감느라 얼굴에 가득 물기를 묻힌 희우가 너무 예뻤다.
누군가가 좋아서 미칠 수도 있다는 걸 현태는 알게 되어 놀라는 중이었다. 스스로 제어가 안 될 만큼 위험한 감정이라고 생각되면서도 이런 감정이라면 얼마든지 죽어도 좋다는 어이없는 생각도 불쑥불쑥 들었다.
누워있는 희우의 머리맡에 선 현태의 허리가 점점 숙어졌다.
입고 있는 티셔츠에 거품이 잔뜩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대로 희우의 입술에 현태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위치가 교차한 입맞춤은 색달랐다.
현태는 희우의 아랫입술과 물었다가 동그란 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촉촉하게 젖은 희우의 입술 모두를 한꺼번에 답삭 베어 물고 힘껏 빨아 당긴 후 살짝 벌어진 입술 틈으로 망설임 없이 파고들었다.
현태는 입술을 물고 있는 채로 몸의 위치를 바꿔 그대로 희우가 누워있는 샤워 베드 위로 올라갔다.
촙촙.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와 달뜬 호흡 소리가 욕실 가득 울렸다.
현태는 이제 희우의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입술을 끊임없이 탐하며 그의 몸이 저절로 희우의 몸 위에서 리듬을 탄 듯 움직였다.
툭툭.
자연스럽게 환자복의 단추가 하나씩 풀려나갔다.
하얀 피부가 드러날수록 현태의 호흡이 빨라지고 목덜미를 따라 흩뿌리듯 이어지는 키스는 점점 농밀해졌다.
“현태 씨! 여기 병원이에요!”
당황한 희우가 꼭 닫힌 욕실 문을 힐끔 보며 숨죽인 채 소리쳤다.
어느새 현태의 입술은 긴장으로 꼿꼿하게 선 동그란 살덩이 끝을 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