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70)화 (60/75)

70화

수정은 현태가 그녀를 부르는 정중한 말투에 뒷목이 쭈뼛 솟았다.

“죄송해요. 제가 더 빨리 연락을 해야 했는데. 하수정 씨 모르게 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당신! 당신이 어떻게!”

수정이 정은을 향해 들고 있던 가방을 힘껏 던졌다. 정은은 일부러 피하지 않고 날아오는 가방을 그대로 맞았다.

가방에 장식으로 달린 자물쇠 장식이 정은의 광대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얀 볼에 금세 핏기가 솟았다.

“아…….”

“하수정!”

현태가 노기 어린 음성에 수정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은은 현태와 수정의 모습을 보며 빠르게 계획을 수정했다.

원래라면 그 미친놈이 독고희우를 데리고 배를 탈 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기현태의 모습을 보니 소용없는 짓인 듯했다. 기현태는 아마 일본 열도 전역을 뒤져서라도 그 여자를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병원 뒷문으로 나갔을 거예요. 제가 두 사람을 속이느라…… 죄송해요. 저도 너무 무서워서…… 독고희우 씨에게 수면제를 놨어요. 이제 막 깨기 시작했을 텐데.”

정은은 최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라면 기현태의 숨은 연인은 못 되더라도, 은혜를 갚아야 하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제 말을 듣자마자 바로 밖으로 뛰쳐나갈 줄 알았던 현태는 그대로 원장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 즈음, 닫혔던 원장실 문이 다시 열리고 낯선 서너 명이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수정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 현태의 등 뒤에 숨었다.

“현태야, 저 사람들 뭐야?”

자신의 뒤에 서서 옷자락을 꽈악 움켜쥔 수정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게 그대로 전해졌다.

“현태야!”

수정이 거듭 그의 이름을 부르며 움켜쥔 옷자락을 흔들었다. 하지만 현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며 제 옷을 쥐고 있는 수정의 손을 무정하게 떼어 냈다.

툭.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듯 제 손을 치는 현태의 행동에 수정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네가 이럴 리 없어. 나한테 이럴 리 없잖아. 이게 다 그 여자가 시켜서 그러는 거지? 아니, 할아버지 때문에! 그 여자가 네 아이를 낳아줘야 해서 그러는 거지? 그거라면 걱정 마. 내가 말했잖아. 방법이 다 있다고.”

수정은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앞뒤 없는 말을 주절주절 내뱉었다.

그 사이 원장실로 들어온 남자들이 수정에게 다가와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차가운 수갑을 채웠다.

“하수정 씨 당신을 독고희우 씨의 납치 및 상해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철커덕.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수정은 한 번도 자신이 현태 앞에서 체포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설사 체포가 되더라도 현태가 막아줄 거라 막연하게 믿고 있었다.

“현태야!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나는 너한테 특별한 사람이잖아!”

경찰에게 끌려가면서도 수정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 현태 쪽을 돌아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 여자가 뭐라고! 그깟 천박하고 더러운 여자가 뭐라고! 10년 동안 네 곁을 지킨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수정은 눈물을 흘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마치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처럼 절망스러운 목소리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은이 한숨을 푹 내쉬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수정 씨를 진작 말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더 용기를 냈어야 했는데.”

정은은 눈물까지 꼭꼭 찍어내며 미안하다고 거듭 말했다.

하지만 현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쯤이면 괜찮다고, 이 정도로 애써 주신 것도 감사하다는 말이 나와야 했다.

정은은 미묘하게 뒤틀린 느낌에 고개를 들고 현태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아직 나가고 있지 않은 경찰 두 명을 발견했다. 그들은 저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당신들 뭐야. 왜 이래?”

경찰 두 명 중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한 사람이 다가와 정은의 손목에도 수갑을 채웠다.

“김정은 씨 당신을 독고희우 씨의 납치 및 특수 상해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아, 아니에요. 뭔가 오해가 있어요. 전 신고자라고요!”

정은이 얼굴에서 미소를 잃은 채 침착하게 대응했다.

“변호사를 선임을 권해드립니다.”

정은의 자신의 손목에 채워지는 수갑을 보며 얼굴이 하얗게 바랬다.

* * *

삼십 분 전.

자꾸만 늘어지는 희우를 휠체어에 태우고 다급하게 주차된 차 앞으로 간 남후는 차 문을 열기 위해 주머니 안을 뒤졌다. 차 키를 찾기 위해서였다.

“희우야, 불편하지? 조금만 참아. 내가 곧 편하게 해 줄-”

이 주머니 저 주머니를 뒤적여 가며 차 키를 찾던 남후는 갑자기 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눈을 부릅뜨고 뒤를 돌았다.

제 목에 주사 바늘을 꽂고 뒷걸음치던 희우가 빠르게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년이!”

남후는 목에 꽂힌 주사를 빼내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도망가는 희우의 뒤를 쫓아갔다. 병원 휴무일이었던 데다가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병원 주차장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약에 취해 비틀대면서도 속력을 줄이지 않던 희우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얼마 가지 못해 주차장 바닥에 구르듯 넘어졌다.

치마 형태의 환자복을 입고, 맨발로 뛰던 희우의 다리에 크고 작은 상처가 한꺼번에 생겼다.

“으윽!”

“거봐,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뒤따라오던 남후가 속도를 줄인 채 느긋하게 걸어오며 나무라듯 말했다.

저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남후를 보면서도 희우는 앉은 채 몸을 뒤로 밀기만 할 뿐 뛸 수가 없었다. 다시 일어서 보려고 했으나 한 번 힘이 풀려버린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가까이 오면 죽여 버릴 거야.”

희우의 목소리가 분노와 공포로 덜덜 떨렸다.

“그래. 그것도 괜찮겠다. 네가 목을 조르는 동안 나는 희우 너를 몇 번이고 가질 거야. 넌 아마 좋아 죽겠지. 지금도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지만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조금만 참아주면 좋겠어.”

남후의 시선이 훤히 드러난 희우의 허벅지에 닿아 있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말했잖아. 나는 너 사랑한다고. 그리고 너도 나를 아직 못 잊고 있…….”

끼이이익.

남후의 말을 멈추고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달려오는 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차가 자신을 덮치기 직전 몸을 굴러 다른 쪽으로 피했다.

“미친 새끼가! 누구야!”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벌떡 일어나 차량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차는 다시 그를 향해 달려왔고 남후는 피하지 못한 채 승용차 범퍼에 부딪혀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퍼억!

“으으윽!”

허벅지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전류가 다리를 조각조각 내는 것 같은 고통이 몰려왔다. 남후는 한쪽 허벅지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고통으로 벌벌 떨었다.

너무 아파서 저절로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렀다.

“너 이 새끼 미쳤어!”

소리 지르면서도 차가 다시 덤벼들까 봐 무서워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남자는 저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차 너머에 있는 희우에게 달려갔다.

그제야 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챈 남후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발! 시발!”

다 된 일이었다. 이제 희우와의 행복한 일본 생활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저 새끼가 다 망쳐 버렸다.

이날을 위해 견뎌 왔던 지난 5년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당장이라도 저 새끼의 목을 비틀고 온몸에 칼을 꽂아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아아아아악!”

남후의 발악과 같은 비명소리와 동시에 경찰차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주차장 안으로 들어왔다.

모든 게 끝나는 소리였다.

“희우야!”

현태는 만신창이가 된 채 주차장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벌벌 떨고 있는 희우를 발견하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 알았다.

다시 저놈에게 달려가 몇 번이고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태 씨.”

하지만 저를 부르는 희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희우가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현태는 눈물로 범벅이 된 희우를 꼭 끌어안은 후 아기처럼 안아 들었다.

자신의 목을 꼭 끌어안은 희우는 겁먹은 강아지처럼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죽여 버리는 건데.

현태는 다리가 부러진 채 기어가는 남후를 바라보며 이를 아득 물었다.

만약 그때 경찰차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몇 번이고 저자를 뭉개버렸을지도 모른다.

현태는 경찰차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희우를 조심스럽게 경찰차 뒤에 따라온 앰뷸런스로 옮겼다.

구급요원들이 서둘러 들것을 마련해 다가왔지만 현태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결국 현태가 앰뷸런스 안의 간이침대에 눕힌 후 곁을 지켰다.

겁을 먹은 희우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도 현태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환자분 호흡이 불안정해서 산소마스크 좀 끼겠습니다.”

안에 있던 구급요원이 희우의 상태를 살핀 후 산소 호흡기를 희우의 머리에 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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