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69)화 (59/75)

69화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후배가 말끝을 늘이며 걱정을 보탰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들어서였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불과 몇 분 만에 후배 보는 앞에서 전 뒤집듯 말을 바꾸고 싶지가 않았다.

지잉 지잉 지잉 지잉.

얼굴에서 짜증을 지우지 못한 채 들고 있던 수첩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데 전화가 왔다.

반대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하던 형사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이건 또 누구야.”

형사는 본능적으로 조금 전 싸가지의 통화 때문에 걸려온 전화라는 확신이 들었다.

“모양 빠지게, 쯧!”

형사는 후배 들으라는 듯 혀를 끌 찬 다음 통화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여보세요!”

옆에서 듣는 사람의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공격적인 말투였다.

-고무성 형사님 되십니까.

제법 목소리를 까는 게 무게를 단단히 잡을 태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성은 전혀 기죽지 않은 목소리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경찰청장 김태산입니다.

“네? 누구라고요?”

장난 전화인가 싶었다.

-독고희우 씨의 납치 사건을 담당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무성은 전화를 건 사람이 경찰청장이 맞는지 의심을 거두지 못한 상태로 통화를 이어갔다.

“아직 납치라고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고무성 형사님.

“네.”

-한울기업 기 우돌 회장님이 특별히 아끼는 손자며느리입니다. 사소한 일로 집을 나갈 분이 아니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보호자가 납치 가능성을 꾸준히 주장했다던데 일방적으로 묵살했다고 들었습니다.

한울기업 손자며느리, 경찰청장.

예상했던 스케일이 아니었다. 무성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낭패감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옆에 선 후배를 쳐다봤다.

왜요?

무성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본 후배가 입 모양으로 이유를 물었으나 그는 답해줄 수 없었다.

잠시간의 통화가 더 이어진 후 무성은 몇 번의 네, 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를 반복한 후 전화를 끊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선배님?”

“사건 접수하고 김남후 병원으로 다시 가봐. 입원해 있는 게 맞는지. 입원해 있는 동안 외출한 적이 있는지, 있다면 시간대는 언제인지.”

갑자기 태도를 바꾼 무성이 이상했지만 원래부터 사건을 찜찜하게 여기고 있던 터라 그는 군말 없이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발 쓸데없는 감정 소모 때문에 늦어버린 게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 * *

느리게 눈을 뜬 희우는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에 다시 눈을 감았다.

독한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머리가 몽롱하고 졸음이 쏟아졌다.

다시 자고 싶은 마음과 어서 일어나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정신없이 뒤엉켰다.

“정신이 들어?”

혼란스러운 가운데 갑자기 밀고 들어온 다정한 목소리에 희우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쉬잇! 아직 마취가 덜 깨서 어지러울지 몰라. 그러니까 소리 지르지 말고 천천히 움직이자.”

남후가 애틋한 미소를 지으며 서늘하게 식은 희우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희우는 거칠게 머리를 휘저었지만 남후가 두 손으로 양 볼을 감싸듯 쥐는 바람에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어지럽다고 했잖아. 자, 천천히 다리부터 내려. 휠체어 타자.”

이건 또 무슨 말이지?

희우는 그제야 자신이 누운 침대를, 아니 의자를 보고 공포에 질렸다.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산부인과용 의자였다.

환자복을 입은 채 두 다리를 갈라진 의자 양쪽에 걸치고 있었고 아랫배가 쿡쿡 찌르듯 아팠다.

아무래도 수술방인듯했다.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순간 내장이라도 털린 건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러기엔 몸 상태가 최악은 아닌 듯했다.

희우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남후가 곁에서 부축을 하며 희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환자복 위로 닿는 손길이었지만 끔찍하게 싫어서 희우는 남아있는 힘을 쥐어짜 허리에 닿은 그의 손을 떼어 내려 애썼다.

하지만 남후는 오히려 힘을 더 꽉 주면서 희우를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으윽!”

아릿하게 아픈 배 때문에 희우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듯 수술대 옆 테이블을 짚었다.

그리고 빠르게 남아있던 주사 하나를 소매 속에 감췄다.

“고집은…… 내가 도와준다니까.”

남후는 예뻐 죽겠다는 듯 희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만져준 후 휠체어 앉히고 손잡이를 잡았다.

“네 안에 있는 그 새끼의 흔적은 소독약으로 다 지웠어. 넌 깨끗해. 몸에 남은 흔적도 시간이 지나면 다 지워질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노래 부르듯 이어지는 남후의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희우는 공포감에 숨을 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도움을 청해보려 주변을 살폈지만 넓은 병원에 간호사도 하나 없었다.

정신 차려, 독고희우. 할 수 있어.

희우는 점점 또렷해지는 시야로 출구가 어디 있는지 부지런히 찾기 시작했다.

* * *

“성공했어요?”

원장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수정이 정은이 들어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글쎄요, 성공이라고 해야 하나?”

정은은 수술실을 빠져나갈 때처럼 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다행히 배란기와 겹쳐서 성공은 했어요. 아무 준비 없이 해서 걱정했는데.”

수정은 마른세수를 한 후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사람의 난자로 수정된 수정체를 내 자궁 안에 넣는 것도 가능하죠?”

“풉!”

정은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터뜨린 웃음에 수정은 눈을 크게 뜨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수정 씨 목적은 독고희우 씨 난자와 푸흡! 기현태 씨 정자로 만들어진 수정체를 자신의 자궁에 착상시켜서 그 아이를 낳고 싶다는 거네요.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아주 재밌네요.”

정은은 자기가 한 말이 웃겨 죽겠다는 듯 한참을 클클 대며 웃었다.

나중에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웃어서 수정이 모욕감을 느낄 정도였다.

“이 봐요! 김정은 씨!”

결국 수정이 버럭 소리를 질렀고, 정은은 어깨를 부르르 떨다 이내 웃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남은 미소는 수정을 한없이 보잘것없는 존재로 느끼게 만들었다.

“나는 네가 늘 마음에 들지 않았어.”

불쑥 튀어나온 정은의 말에 수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당신.”

“십 년 동안 기현태 옆에 붙어서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모든 여자를 차단했잖아. 친구? 좋아하시네. 이것 봐 누구보다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있었으면서 친구? 하!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어.”

“김정은 씨!”

수정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원장실에서 새어 나갔다.

“네가 이런 걸 나한테 부탁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 뭐, 나야 손해 보는 거 없어서.”

수정은 언뜻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유가 어찌 됐든 분명히 한배를 탔고, 정은이 이 일에 절대적인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맞았다. 그런데 왜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지…….

“설마 당신!”

수정이 부르르 떨며 한 말에 정은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뭐?”

“꿩 먹고, 알 먹고?”

“그게 무슨 소리야!”

수정이 정신없이 몰려오는 불안감에 이성을 잃고 수정에게 소리쳤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봐.”

정은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그 정신 나간 새끼가 그 여자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가고도 남았다.

“내가 뭐 하러 내 커리어까지 무너뜨리면서 범죄를 저지르겠어. 생각해 봐. 내가 하수정 씨하고 죽고 못 사는 우정을 쌓은 것도 아닌데. 그리고 난자 채취가 무슨 열매 따듯 그렇게 간단하게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난자 채취까지 실패했다는 말이었다.

“실패했어?”

“멍청하기는. 실패했겠니? 하는 척한 거지.”

“도대체 왜! 분명 당신이!”

“그래, 하수정 씨가 기현태 씨한테 더 어울린다는 말은 했지. 그게 왜?”

“내가 독고희우 데리고 온다고 했을 때 분명히 도와준다고 했잖아!”

“당신을 돕는다고는 한 기억은 없는데?”

“뭐?”

수정은 온몸이 벌벌 떨렸다.

그리고 이곳에 그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판단이 서자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이번 생일에 현태에게 선물로 받은 핸드백이었다.

수정이 막 원장실 문 앞에 섰을 때였다. 수정이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먼저 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수정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빈 공간으로 저승사자처럼 서슬 퍼런 분위기를 풍기는 현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혀, 현태야.”

“희우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현태가 수정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차게 식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독하게 차분한 말투였지만 마주 선 사람의 오금이 저릴 만큼 살벌했다.

벌벌 떨던 수정은 저를 보자마자 희우부터 찾는 현태의 모습에 오히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너는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수정이 비명처럼 지른 말에 현태가 눈을 차게 내리깔고 다시 물었다.

“그 여자는 벌써 전남친이랑 떠났어. 현태야, 네가 원한 것도 그 여자가 아니잖아. 단순히 그 여자의 유전자가 필요한 것이었잖아. 그런 거라면 방법이 있어! 너하고 나로도 방법이 있다고.”

정은은 이성을 잃고 현태 앞에서 폭주하는 수정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그러나 겉으로 티 나지 않게 감상했다.

“박사님.”

현태가 수정에게서 고개를 돌려 원장실 한쪽에 서 있는 정은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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