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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66)화 (56/75)

66화

물이 끓을 때까지 냄비 앞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희우는 물이 끓자마자 다급하게 라면과 스프를 투하한 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적당하게 라면이 익어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계란을 투하해야 했기 때문이다.

꼬르르르륵.

걸신들린 사람처럼 허기가 졌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라면 냄새에 저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다 끓어간다~”

라면이 얼추 익어가자 양껏 날카로웠던 심정이 눈 녹듯 부드러워졌다.

희우는 서둘러 냄비째 라면을 식탁 위에 올리고 뚜껑을 집어 들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면치기의 순간이었다.

라면 두 개를 게 눈 감추듯 해치웠을 때 식탁 위에 올려둔 희우의 휴대폰이 부르르 떨렸다.

숙모에게서 온 전화였다.

“응? 숙모가 무슨 일이시지?”

희우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좀처럼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분이었기에 발신자에 숙모가 떴을 때부터 불안불안 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여보세요?”

희우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희우니?

“네.”

다행이 숙모 목소리에선 별다른 기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하고 조금은 냉랭한 목소리였다.

-밥은 먹었어?

“네, 방금 먹었어요.”

-방학했지?

“네. 이틀 전에요.”

숙영이 일방적으로 질문을 하면 희우의 단답형 대답이 이어졌다.

“숙모는요? 식사하셨어요?”

솔직히 숙모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딱히 다른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밥은 정말 중요한 것이었기에 희우는 정해진 절차를 따르듯 판에 박힌 질문을 했다.

-…….

어려운 질문을 한 것도 아닌데 숙모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식사 아직 못하셨어요?

2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어디가 아프신가?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목소리에 힘이 많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야. 먹었어.

어쩐지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쩐지 꼬치꼬치 캐묻기가 겁이 났다.

“할아버지는요?”

역시 예의상 한 말이었다.

-…….

하지만 역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희우는 이제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거라 확신했다.

갑자기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 있어요?”

-……조금 아프셔.

“어디 가요?”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신가. 여기 저가 다 아프시지.

“네.”

희우는 이제 전화를 어떻게 끊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숙모는 어쩐지 전화 끊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 뒤로도 학교는, 집은, 직장동료들은…… 등의 시시콜콜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꼬박꼬박 대답을 하는 동안 숙모의 반응을 봤을 때 제대로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통화를 이어가기 위한 질문들이 분명했다.

“숙모,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있으시죠.”

-아니야, 그런 거.

“할아버지 많이 아프신 거에요?”

-이제 괜찮아. 오늘 퇴원 하셨어.

“입원하셨어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크게 튀어 나갔다.

딱히 할아버지에 대한 정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보다. 아버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숙모는 정말 곤란한지 서둘러 말을 흐렸다.

-손님이 오셔서 이제 끊어야겠다. 밥 잘 챙겨 먹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고. 응?

갑자기 속도가 빨라진 숙모의 말을 멍하게 들으며 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숙모도요.”

전화는 그대로 끊어졌고, 희우는 숙모와의 통화를 끝낸 후에도 한동안 찜찜한 마음이 들어 결국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괄괄했고, 아들 타령도 여전했다.

희우는 섣부른 판단으로 전화 걸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얼른 전화를 끊었다.

지잉 지잉. 지이이잉.

전화를 끊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현태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휴대폰 화면에 뜬 현태 이름 하나에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희우는 두근대는 마음을 가라앉힌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괜찮아?

양심은 있는 모양.

희우는 걱정스러운 현태의 말투에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요.”

-다행이네.

“뭐가요?”

-몸이 괜찮아서.

솔직히 안 괜찮았다. 여기저기 안 쑤신 곳이 없었지만 전화기에 대고 그런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었다.

-많이 피곤해?

“늦게까지 잤어요.”

원망스러운 마음이 살짝 솟았지만 이내 씨익 웃고 말았다.

현태는 아침에 출근할 때까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희우의 모습을 떠올리자 온몸에 열기가 솟았다. 희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미어캣이라도 된 것처럼 우뚝 서버린 바지 앞섶에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미친 건가.

한 번도 스스로가 여자를 밝힌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더럽게 느릿느릿 흐르는 시간 때문에 짜증이 솟구친 적도 없었다.

회사에 앉아 있긴 했어도 마음은 온통 콩밭에 가 있는 것도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다.

독고희우가 최근에 달성해야 할 목표이긴 했다.

그 목표를 드디어 이루었고.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현태는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런 감정은 낯설고 조금은 두려웠다.

두려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감정에 현태는 천천히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늦게까지 잤어요.

침대에서 꾸물대는 희우의 옆에 나란히 누워 귀찮은 듯 저를 밀어내던 작고 말랑한 몸을 숨 막히게 끌어안고 싶었다. 제 것으로 가득 차 헐떡대던 뜨거운 숨을 남김없이 앗아오고 싶었다.

“늦지 않게 갈 거야.”

-오늘은 일이 많이 없어요?

“많아.”

-그런데 어떻게 빨리 와요.

“몰라.”

전화기 너머 큭큭대는 희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 때문에 발갛게 부푼 어여쁜 입술이 둥글게 휘어지는 모습이 저절로 상상이 됐다.

아무래도 당분간 책상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 * *

김 비서는 퇴근 시간 삼십 분 전부터 집에 갈 준비를 서두르는 현태를 보며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함께 일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오랜 경력의 그가 현태의 업무 스타일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파악한 현태는 사생활보다는 일을 몇 배는 더 중요시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김 비서의 눈앞에서 허둥대며 가방을 드는 현태는 그가 파악한 기현태와 아무래도 동일인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얼마 전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본부장님 사모님이 우울증이라며?

-그러니까. 저렇게 멋진 남편이 있는데 왜지?

-재벌들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하팀장님은 본부장님하고 진짜 친구 사이는 맞아?

-부인이 그 모양이면 다른 곳에서 위로받고 싶지 않을까?

-하긴 하팀장님이 보통 미모는 아니니까.

가만히 듣고 있다가는 정말 헛소문이 단단히 퍼질 것 같아 서둘러 그게 아니라고, 본부장님 사모님은 아주 건강한 분이라고 말을 했지만 당황해하며 흩어지던 그들은 김 비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진 않았다.

드디어 퇴근 시간이 되고, 현태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퇴근하세요.”

김 비서에게도 퇴근하라고 말하는 그의 뒷모습은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해 보였다.

현태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응시하고 있던 김 비서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돈이 많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구나.”

그때였다.

“본부장님 어디 가셨어요?”

하수정 팀장이었다.

김 비서는 365일 예쁘기만 할 것 같은 수정을 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방금 퇴근하셨습니다.”

“네? 퇴근이요?”

수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휴대폰과 비서실 벽에 걸린 시계를 연달아 확인했다.

이제 막 퇴근 시간이 1분 지났을 뿐이었다.

설마 집에 가면서 이렇게 서두른 건 아니겠지?

수정은 휴대폰 화면을 불안하게 쳐다보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통화 버튼을 길게 눌렀다.

길게 이어지는 연결 음만 들릴 뿐 현태의 목소리는 들리지가 않았다.

혹시 그 일을 눈치챈 건가?

“김 비서님.”

“예, 팀장님.”

오랜만에 정시에 퇴근하는 김 비서가 가벼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본부장님, 이사한 집 주소 알고 계시죠?”

“예.”

비서니 알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소 좀 불러주세요.”

수정은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곤란합니다. 하수정 팀장님.”

“네?”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수정의 눈썹이 위로 쑤욱 올라갔다.

“개인정보라 함부로 타인에게 공유가 불가능합니다.”

수정은 어이가 없었다. 타인이라니.

“김 비서님. 제가 현태한테 남인가요?”

마치 세상에서 제일 험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수정은 잔뜩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김 비서는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수정의 태도에 조금 전까지 얼굴에 가득하던 사람 좋은 미소가 단번에 싸악 사라졌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본부장님 주소는 아무에게나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정 궁금하시면 기현태 본부장님께 직접 여쭤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 비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자기 자리로 돌아가 컴퓨터 전원을 껐다.

가방을 들고 일어나는 그의 표정엔 다시 느긋한 미소가 가득했다.

“비서실 문을 닫아야 해서요.”

김 비서가 잔뜩 인상을 쓴 채 버티고 서 있는 수정을 향해 말했다.

지잉.

그때 수정의 휴대폰에 짧은 진동이 울렸다. 문자 수신음이었다.

-독고희우집 찾았음. 조만간 행동 개시 예정. 잔금 입금 요망.

“죄송해요. 제가 마음이 급해서 실수를 했네요. 나중에 현태한테 전화해서 물어 볼게요.”

수정이 김 비서를 보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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