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방학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희우는 아무도 없는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침대 위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기절하듯 자느라 현태가 아침에 출근하는 것도 몰랐다.
피부에 바로 닿는 매끄럽고 서늘한 현태의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린 희우는 멍한 기분으로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뒤늦게 몰려오는 막막함과 낯 뜨거움, 혼란스러움이 한대 엉켜 머릿속이 엉망이 됐다.
“기현태랑 자다니.”
희우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현태가 싫은 건 아니었다.
처음에 비하면 호감의 감정이 더 짙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신없이 빠져들 정도로 그를 좋아하는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절대 좋아하지 않을 거라 호언장담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만나자마자 애부터 낳아달라던 그를 얼마나 경멸했던가.
“하아, 독고희우 진짜 벨도 없다. 너무 빨리 넘어갔잖아.”
어제는 정말 뭔가에 꼭 홀린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몸에 걸친 것이 없었고, 뜨겁고 묵직하게 파고드는 현태의 거친 몸짓에 몇 번이나 애원하듯 흐느끼고 있었다.
“미쳤어.”
지난밤의 저는 독고희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좋았지?”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던 그의 나지막한 호흡은 뜨거웠고, 달래듯 속삭이던 목소리는 몇 번이나 그에게 휩쓸릴 만큼 감미로웠다.
희우는 아직도 얼얼한 입술에 손가락을 가만히 갖다 댔다.
“부었나?”
어쩐지 평소보다 두꺼운 느낌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이불을 그대로 몸에 동인 채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호다닥 뛰었다.
아니 뛰려고 했다.
“아으윽!”
걸을 때마다 허리가 결리고 아래가 아릿하게 쓰렸다.
희우는 걷던 속도를 늦춰 천천히 유리문 앞으로 다가가 미닫이문을 스르륵 열었다.
현태 방에도 거울이 있었지만 어쩐지 부끄러워 자신의 방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보는 사람도 없지만 이불을 더 단단히 여몄다.
그리고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던 희우는 다시 한번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예상했던 대로 입술은 퉁퉁 부어 있었고 목덜미와 쇄골, 그리고 어깨에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희우는 몸에 둘둘 말고 있던 이불을 서둘러 내리고 나머지 상체의 상태도 확인했다.
“하아…….”
그나마 다행인 건 팔에는 아무 흔척이 없어서 반팔을 입었을 때 표시가 안 난다는 것이었다.
물론 목은 아니었지만.
온통 붉은 꽃이 핀 자신의 피부를 살피던 희우는 문득 떠오른 현태의 모습에 얼굴이 다시 시뻘게졌다.
지나치리만큼 차분한 그의 평소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야만스러울 정도로 거칠었고 집요했으며 멈출 줄을 몰랐다. 정말 극과 극인 사람이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맞나?”
희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제 잔 거야.”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한숨을 쉬었던 때가 새벽 4시였다. 그때까지 현태는 까무룩 잠이든 저를 깨우기도 하고, 재우기도 해 가며 온몸에 자국을 남겼다.
너무 피곤하고 배가 고팠다.
희우는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욕실로 들어갔다.
일단은 좀 씻어야 할 것 같았다.
거품이 풍성하게 생기는 입욕제를 넣고 욕조에 따끈한 물을 가득 받았다.
은은한 우윳빛으로 변한 물속으로 몸을 집어넣으며 희우가 앓는 소리를 했다.
“아으, 으으으.”
온몸에서 곡소리가 났다.
절대 약골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과 체육 시간에 피구를 할 때도 먼저 지친 적이 없었고, 달리기를 해도 웬만한 아이들보다 잘 달릴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기현태는 차원이 다른 체력이었다.
턱 끝까지 물에 푹 잠근 희우는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였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꼬르르륵.
물속에 들어가 있어도 배꼽시계는 정확하고 요란했다.
급식 때문에 늘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었던 터라 제시간에 음식을 넣어주지 않는 주인을 향한 위의 항의는 실로 대단했다.
꼬르르르륵 꼬르르륵.
“아유 시끄러워라. 알았어, 알았어. 밥 넣어 줄게.”
-알겠어. 이제 안 깨울게.
현태가 속삭이던 소리가 문득 생각났다.
“미쳤어.”
하루 종일 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게 될지.
희우는 물속으로 꼬르륵 잠수하며 민망한 잔상을 털어냈다.
그의 목소리를 떠올린 것뿐이었지만 온몸이 아릿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여우한테, 아니 늑대한테 단단히 홀린 게 분명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회의실에서 우르르 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리둥절했다.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지나치게 좋았던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해지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이 와중에 기현태 혼자만 편안한 분위기였다.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수정이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난 후 물었다.
저가 없는 곳에서 일어난, 현태에게 좋은 일이 무엇인지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만약에 두 사람 사이가 전보다 조금이라도 발전된 기미가 보인다면 딱 죽고 싶을 것 같았다.
“없어, 그런 거.”
단호한 말투였지만 표정만큼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냉기가 풀풀 흐르던 눈매는 무름하게 풀어져 있었고, 가끔씩 입가에 맴도는 미소는 기현태가 아닌 것처럼 순간순간 따스했다.
지금 넌 도대체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현태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수정의 두 주먹이 옷자락을 움켜쥔 채 하얗게 바랬다.
“왜? 할 말 있어?”
현태의 질문이 이어졌다.
회의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장승처럼 우두커니 버티고 서 있는 수정이 평소와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무슨 일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뾰족하게 튀어 나갔다.
수정은 이 모든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야.
다 잘 되고 있었는데, 불청객처럼 갑자기 튀어나온 그 여자 때문에 인생 전체가 엉망으로 뒤엉키고 더러워졌다.
만나지 않아도 될 역겨운 새끼를 만난 것도, 현태와 함께 해서 매일이 꿈결 같아야 할 회사생활이 지옥이 되어 버린 것도 전부 독고희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현태가 거듭 물었다. 그의 시선은 수정에게 똑바로 가 닿아있었다.
다른 곳이 아닌 오로지 저만을 향한 시선이 얼마 만이었던가.
수정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 된 현태의 시야에 조금 전 느꼈던 서운한 감정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렸다.
현태야, 나는 너만 있으면 돼.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나만 필요로 해야 해. 그게 공평하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두통 때문에 좀 예민해진 모양이야.”
수정은 말을 돌리면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계속 현태와 마주 봤다가는 엉엉 울면서 매달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약은.”
현태의 짧은 질문이 울고 싶을 만큼 좋았다.
“아직 안 먹었어.”
“참지 말고 약 먹도록 해.”
현태는 툭 던지듯 말 한 후 수정을 지나쳐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앞을 지날 때 수정의 눈썹이 사납게 와락 구겨졌다.
평소 현태에게서 나던 향이 아니었다. 같은 향수를 썼지만 묘하게 다른 향이 섞여 있었다.
10년 동안 한결같이 맡았던 향이었다.
미묘한 차이를 수정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넌 변하면 안 돼.
기현태 넌 함부로 다른 사람한테 마음 주면 안 돼.
회의실 밖으로 빠져나가는 현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수정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렀다.
* * *
개운하게 목욕을 마친 희우는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이리저리 뻗어 스트레칭을 했다.
여전히 몸 여기저기서 근육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희우는 거울 앞에 가 목에 얼룩덜룩하게 남아 있는 붉은 자국을 보며 인상을 썼다.
“일부러 이랬나? 나가지 말라고?”
다른 곳보다 유독 목에 자국이 많았다.
“이 더운 날에 목에만 스카프를 맬 수도 없고. 하아…………”
고민하던 희우는 고민 끝에 파운데이션을 목에 툭툭 발랐다.
완벽하게 가려지지는 않았지만 바르지 않았던 때보다 훨씬 나았다.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렇게 지난밤의 흔적을 드러낸 채 집안을 활보하고 싶진 않았다. 혼자 있다고 해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라고나 할까.
희우는 대충 가려진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마지막 점검을 한 후 부엌으로 갔다.
뭐라도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흐음…….”
냉장고 안을 유심히 바라보던 희우가 신중한 손길로 먹을 만한 것들을 차례차례 밖으로 꺼냈다.
열무김치, 계란, 시금치나물, 그리고 명란젓.
“이 정도면 훌륭하지.”
희우는 비빔밥을 해 먹을 요량으로 의기양양하게 밥솥 앞으로 갔다.
그리고 뚜껑을 연 순간.
“안 돼에에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얀 쌀밥을 상상하며 열었던 밥 솥 안에는 말라비틀어진 밥알 몇 개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밥이 완성되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배가 고팠다.
절망을 딛고 비틀대며 일어선 희우는 다시 싱크대 안을 뒤적거리며 라면 두 개를 찾아냈다.
분노의 마음을 담아, 라면 두 개 분량의 물을 냄비에 담고 나서야 가까스로 마음이 진정됐다.
이래저래 힘든 하루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