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뭐, 뭘 만져요.”
희우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현태는 놔 줄 생각이 없었다. 대신 그녀의 손을 다시 가져가 말랑한 손바닥에 입술을 맞췄다.
“아직도 키스할 만큼만 친한가?”
“……그렇죠. 그게 아침인데. 반나절 사이에 어떻게…….”
“결혼식도 같이 갔다 왔는데?”
“그건 현태 씨가 같이 간다고 우겨서…….”
“운전도 오래 했어.”
“그것도 현태 씨가 한다고 했잖아요.”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희우는 지금 이렇게 우길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진 채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현태는 열심히 희우의 손을 지분거리다 서서히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손에 하는 가벼운 입맞춤일 뿐이었다.
희우는 뭔가에 홀린 듯 그의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 얼른 손에 힘을 줘서 그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곳은 손목인데 어쩐지 온몸에 열기가 올랐다.
요망한 남자 같으니라고.
희우는 부러 차창 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지금 토마토처럼 벌게진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가 싫었다. 알량한 자존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내려요, 우리.”
“그래. 집으로 가자.”
그의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고막까지 간지러운 느낌인 건지.
희우는 낭패감을 느끼며 차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얼굴을 쓸었다.
“하아!”
열에 달떴던 몸이 빠르게 식는 게 느껴졌다.
고작 손이 빠져나간 것뿐인데 큰 상실감이 몰려왔다.
현태는 비어 버린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차 옆에 서 있는 희우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싫으면 지금 말해.”
“뭐, 뭘요?”
“어깨동무.”
“아!”
화들짝 놀랐던 희우는 의외로 건전한 그의 대답에 민망해져서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현태가 짓궂게 질문했다.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그래?”
“당연하죠.”
“난 또. 괜히 기대했네.”
이 남자는 중간이 없구나.
희우는 현태의 거리낌 없는 행동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극과 극이었다.
결혼을 했지만 그날 바로 미국으로 갔고, 4년 동안 연락 한번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 아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찬 바람이 쌩쌩 부는 평소와 달리 한번 달라붙으면 입술에 쥐가 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비록 몇 번 해 보지 않은 키스지만 희우는 기현태라는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슬슬 감이 왔다.
큰일 났네.
희우는 그에게 안기다시피 해서 에스컬레이터로 걸으며 머리가 멍해졌다.
일단 지금 이 상황을 냉정하게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 생각 없이 기현태에게 휘둘리다가 정신 차리는 순간 분만실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건 안 되지.”
“뭐가?”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입으로 또 튀어나와 버린 모양.
희우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현태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다행히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으로 보이기 직전, 희우의 발걸음이 뭔가에 막힌 듯 우뚝 멈췄다. 파란 선물상자가 집 앞으로 배달된 이후 생긴 버릇이었다.
“괜찮아. 아무것도 없어.”
희우의 생각을 읽은 현태가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며 달래듯 말했다.
한없이 쾌활하다가도 문득문득 그녀에게 드리우는 어두운 그늘을 볼 때면 현태는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희우는 저도 모르게 움켜쥐고 있던 현태의 옷자락을 스르륵 놓았다. 이렇게 약한 모습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희우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현태를 올려다봤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그러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현태보다 먼저 현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현태가 천천히 희우의 뒤를 따랐다.
띠리릭-
현관의 문이 열리고 희우가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갔다.
현태가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살피자 그들의 뒤를 따르던 경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신호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태는 그제야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희우보다 조금 늦게 안으로 들어왔던 현태는 휴대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희우를 보고 깜짝 놀라 곁으로 다가갔다. 희우의 표정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야?”
현태가 성큼성큼 다가가 희우의 휴대폰을 얼른 낚아채 살폈다.
또 그 새끼한테서 연락이 온 거면 당장 있는 곳을 알아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고파서요. 현태 씨는 배 안 고파요?”
희우가 심각하게 보고 있는 건 배달앱의 음식 메뉴였다.
희우는 다시 휴대폰을 가지고 갔고 열심히 먹고 싶은 메뉴를 찾아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유가 저녁 메뉴 때문이라니.
현태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쌀국수 어때요?”
“좋을 대로 해.”
“그럼 쌀국수 시킬게요.”
무척 먹고 싶었던 메뉴였는지 현태의 동의에 희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 * *
선욱은 기죽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값비싼 것들뿐이라 저도 모르게 어깨를 오므리게 됐다. 잘못 건드리기라도 했다가 실수로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회장님 곧 나오실 겁니다.”
탤런트만큼이나 예쁜 비서가 선욱이 앉은 자리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친절하게 말했다.
그릇에 대해 잘 모르는 그였지만 얼핏 봐도 수십만 원짜리 커피잔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잔은 무척 고급스러웠다.
선욱은 잔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조심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선욱이 스스로를 달래듯 속으로 되뇌는데 회장실 문이 열리며 기우돌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님 오셨습니다.”
조금 전 그 비서가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귀로 들리는 회장의 등장은 또 다른 긴장감으로 다가왔다.
기우돌 회장은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아버지보다 키가 십 센티 정도 작아 보였지만 느껴지는 위압감은 그보다 훨씬 커 사람을 크고 강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선욱은 긴장감으로 바싹 마른입을 혀끝으로 축인 후 침을 꿀꺽 삼켰다.
“사돈 오셨습니까.”
기 회장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선욱은 허리를 넙죽 숙이며 그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는데 오늘에서야 뵙는군요.”
기 회장이 허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선욱은 그가 상석에 앉는 것을 지켜본 후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기 회장 앞에 찻잔을 내렸다. 찻잔에서 인삼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기 회장은 바싹 언 채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선욱을 흘깃 본 다음 찻잔을 천천히 입술로 가져갔다. 그는 주름진 입술에 찻잔을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며 차를 천천히 음미하듯 마셨다.
선욱은 그가 먼저 입을 열어주길 기다렸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기 회장은 절대 먼저 이야기를 꺼낼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기 회장의 찻잔이 모두 비워지고 난 후, 선욱의 입이 뗐다.
“수연제 말입니다. 회장님.”
선욱의 입에서 수연제가 언급되자 느긋하게 빈 잔을 응시하던 기 회장의 시선이 선욱에게로 반짝 옮겨왔다. 늘 여유롭고 사람 좋아 보이던 미소 대신 먹잇감을 앞에 둔 하이에나처럼 번들대는 그의 눈빛은 무척 낯설었다.
선욱은 저도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말해 보세요.”
선욱에게서 말이 곧바로 이어지지 않자 기 회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얼굴에서는 결코 미소를 지운 적이 없지만 어쩐지 선욱은 그가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문화재 소유자 변경 신청하겠습니다.”
수연제는 문화재로 묶여 있는 건물이었다. 절대 거래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기 회장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대신 가격은 그때 말씀하셨던…….”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네?”
선욱은 불에 덴 듯 놀라 하마터면 테이블 위의 찻잔을 엎을 뻔했다.
그 모습을 본 기 회장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그러면…….”
“접수되는 것 확인하고 절차가 끝이 나는 즉시 이백억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니, 사돈어른!”
선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테이블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혔다.
기 회장은 말리는 대신 그의 휑한 정수리를 보며 느긋하게 비서가 추가로 내온 인삼차를 들이켰다. 오늘따라 차 맛이 기가 막혔다.
* * *
서울 외곽의 한 모텔 안.
수정은 내키지 않았지만 꾸역꾸역 다시 김남후 앞에 섰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이라면 이따위 불쾌한 시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쪽이 우리 희우한테서 얻어야 할 게 뭐죠?”
목소리와 표정만 본다면 남후는 희우를 지키기 위해선 못 할 것이 없는 애틋한 보호자처럼 보였다.
희우는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명함 하나를 올렸다.
“쯧!”
남후는 말을 아끼는 수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 놓겠다는 심산이 빤히 보이는 수작이라 가소롭고 같잖았다.
“불임센터?”
명함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남후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뜻 봐선 조합이 안 되는 퍼즐 조각들이었다.
“내가 필요한 건 독고희우의 난자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라 아래로 축 처진 그의 눈썹이 사납게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