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60)화 (50/75)

60화

수정이 말해 보겠다 했지만 직원들은 솔직히 현태가 회식에 참여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현태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분위기를 살린답시고 한 실없는 말에 반응을 하지도 않았다. 뭣 모르는 몇몇 임원들은 현태와 친해져 보겠다고 농담조로 말을 꺼냈다가 머쓱한 일도 몇 번 있었다.

일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현태에게 인간관계도 매한가지였다.

고기 냄새가 가득한 가게. 싸움인지, 대화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왁자한 소음, 의미 없는 감정 소모와 진심이 담기지 않은 웃음소리.

이 모든 것이 현태를 피곤하게 했다.

“고기 좀 먹어봐. 이래 봬도 맛이 꽤 좋아.”

옆에 앉아 있던 수정이 불판에서 잘 구워진 고기 몇 점을 덜어 현태의 앞 접시에 얹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기를 보니 힘을 내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 말하던 희우가 불쑥 떠올랐다.

아무래도 빨리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 * *

남후는 골목 모퉁이에서 모텔 안으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봤다.

경찰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을 살피는 시선이나 긴밀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보통 사람 같지도 않았다.

저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시발, 안에 가방이랑 다 있는데.”

미처 들고나오지 못한 옷가지를 떠올리며 남후가 욕지거리를 뱉었다. 하지만 믿을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절망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남후는 미련 없이 모텔에서 돌아서서 나오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은 길지 않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끝까지 잘난 척은.

그래봤자 자신의 손바닥 안이었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 드러난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날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상냥하고 친절한 말투였다.

* * *

현태는 회식이고, 희우는 밥하기가 귀찮았다. 그렇다고 시켜 먹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희우는 냉장고를 열어 안에 든 음식을 확인했다.

장을 보지 않았더니 안에 든 게 별로 없었다. 그나마 김치와 계란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국도 없는 밥상이었지만 김치와 계란 프라이만으로도 꿀맛이라 게눈감추듯 저녁을 해치웠다.

“아, 배부르다.”

현태도 없겠다, 경황이 없어서 구경하지 못했던 집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이런 구조를 고른 게 분명했다.

시커먼 의도 속엔 저를 조금이라도 보호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같았다. 마치 내가 밖에서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기사 같기도.

“뭐야? 독고희우. 무슨 생각하는 거야? 혼자서 소설 쓰냐?”

저가 하고도 우스운 생각에 뺨을 찰싹찰싹 두드리던 희우의 눈에 어제는 보지 못했던 공간이 들어왔다.

“오오오! 와인 저장고!”

* * *

회식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무렵이었다. 불판 위에선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사람들의 얼굴도 발그레 달아올랐다.

고기 한 판을 다 구울 때까지 앉아 있던 현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어수선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해 모아졌다.

“가게?”

광대가 붉게 달아오른 수정이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먼저 가겠습니다. 계산은 이걸로 하세요.”

현태가 지갑 안에서 꺼낸 블랙카드를 받아 든 공 대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 말로만 듣던 한도가 없는 블랙카드가 이렇게 생겼구나!

마치 성화라도 받듯 두 손으로 황송하게 카드를 받아 든 공 대리의 눈이 감탄사와 함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나도 갈래.”

현태에 이어 수정도 일어섰다.

“팀장님도 가시게요?”

조금 전까지 블랙카드를 들고 환희에 찬 표정을 짓던 공 대리가 금세 시무룩해져서 물었다.

“네, 어제 좀 무리를 했더니 피곤해서요. 현태랑 가는 방향도 같고 태워달라고 하려고요.”

“차는?”

“회사에 두고 왔어. 그럼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현태가 꼬치꼬치 캐물을까 봐 수정은 얼른 화제를 돌리며 그의 팔을 잡았다.

사람들의 아쉬워하는 시선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식당에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의 왁자한 웃음소리가 밖까지 새어 나왔다.

“역시 상사가 없는 편이 회식은 더 즐거운 법이지.”

수정이 키득키득 웃으며 한 말에 현태가 싱겁게 픽 웃었다.

그래. 이 표정이었다. 저에게만 한 번씩 보여주는 이 미소와 무른 눈매.

“네 차는 어딨어?”

“기다려. 태워줄게.”

“응. 고마워. 역시 기현태밖에 없다니까!”

수정의 집은 회사에서 제법 거리가 있었다. 충분히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현태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구했다. 미국에선 같은 아파트에 호수만 달랐는데 이렇게 다른 집으로 퇴근해야 하는 게 무척 싫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처음엔 좀 당황해할지 몰라도 현태 너도 결국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야.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걸 넌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

붉게 충혈된 수정의 시선이 운전대를 잡은 현태를 향했다.

언제 봐도 완벽한 모습이었다. 비록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아도 현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저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현태야.”

현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정이 문득 그를 불렀다.

“왜.”

“결혼하니까 좋아?”

평소와 다름없는 대답을 듣기 위해 한 질문이었다. 그 여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현태의 대답을 들으면 지금 느끼는 불안과 초조가 조금이나마 옅어질 것 같았다.

너도 나하고 같은 마음이라고 대답해.

수정이 현태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응시했다.

“그런 것 같기도.”

기어이 현태의 입에서 나오고야 만 대답에 수정의 눈에서 눈물이 뚝 흘렀다.

“그래?”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물었지만 현태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수정은 어둠이 제 표정을 가려줘서 다행인 건지, 서운한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음.”

앞을 응시하는 현태의 짧은 대답을 들은 수정이 휴대폰을 꺼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은행 어플을 켜고 계좌 이체를 끝낸 후였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었다.

* * *

집으로 돌아오니 희우는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희우에게선 은은한 와인 향이 났다. 침대 옆엔 텅 빈 와인 병과 와인 잔이 놓여 있었다.

“이거 한 병을 다 마신 건가?”

도수가 꽤 높지만 첫맛이 달콤해서 취하는 줄 모르고 마시게 되는 와인이기도 했다.

나름 기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던 현태는 약간은 허탈한 마음으로 침대 옆에 의자를 당겨와 앉았다.

새액새액 고르고 일정한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술에 취해서 잠든 희우는 얼굴도, 입술도, 목덜미도 발그스름했다. 꼭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이대로 껍질을 까서 달콤한 과육을 남김없이 털어먹고 싶을 만큼 단내가 났다.

아직까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놈이 불뚝 불뚝 존재감을 드러내며 몸집을 키워갔다.

“돌겠네.”

아무래도 내일 계약서를 다시 작성해야 할 것 같았다.

“으으으으, 머리야.”

아무래도 어제 마신 와인이 과했던 모양.

희우는 욱신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 고개를 숙인 채 끙끙댔다. 소주 세 병을 마셔도 끄떡없는데 겨우 와인 한 병에 이렇게 숙취에 시달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많이 약해졌네.”

아침부터 라면이 간절했다. 얼큰한 국물에 꼬들꼬들한 면을 호로록 빨아들이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희우는 아직도 낯설기만 한 방 안을 슬쩍 쳐다본 후 문으로 비틀비틀 걸었다.

톡톡톡.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상하게 심장도 같이 쿵쿵쿵 뛰었다.

망했다.

현태의 방 앞에서 속절없이 나대기 시작한 갈대 같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긴장하고 인기척을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안 들어왔나?

이 넓은 집에 밤새 혼자 있었다고 생각하니 순간 소름이 좌악 돋았다. 더 넓은 집에서 4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살았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치더라도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독고희우, 정신 차려. 내 인생이야. 다른 사람한테 의지할 생각 하지 마.

마음을 다잡은 희우가 미닫이문을 스르륵 열었다. 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부드럽게 잘 열려서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방 안은 암막 커튼 때문에 어두컴컴했다.

침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새삼스럽게 드는 안도감에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희우는 현태가 깨지 않도록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었다.

그러다 문뜩 침대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단순히 잠든 현태의 얼굴이 궁금하다는 이유였다. 다행히 자신의 방에서 새어 나온 불빛에 현태의 얼굴이 보였다.

잠든 현태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남자 속눈썹이 왜 이렇게 길어.”

옆에서 나오는 빛을 받아서 그런지 유독 속눈썹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가 길었다.

짤뚱한 자신의 속눈썹을 만지며 희우는 현태의 얼굴을 찬찬히 구경했다.

계속 보아왔던 얼굴이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유심히 관찰하는 건 처음이었다.

“코도 되게 높네. 수술한 건 아니겠지?”

동글동글한 자신의 코도 괜히 꾹꾹 눌러봤다. 솔직히 조각 같은 현태의 오뚝한 콧날을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성격이 더럽고 예민한 현태는 손이 닿는 즉시 잠에서 깰 것 같았다.

희우의 시선은 이제 현태의 굳게 다문 입술로 향했다.

저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던 건가.

희우는 자신의 입술을 괜히 만지작거리다 조용히 일어섰다. 현태가 깨지 않게 살금살금 걸어가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조심히 문을 닫았다.

달각.

아주 미미한 소리가 들린 후 현태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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