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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57)화 (47/75)

57화

침대도, 방 안의 작은 소파도, 화장대와 자질구레한 소품까지. 완벽하게 희우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라 마음에 안 드는 게 불가능한 방이었다.

하지만 희우는 하나부터 열까지 저에게 맞춘 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하아…….”

피곤했다.

이삿날이라고는 해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이렇게 피곤할 수가 있나?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와 온몸을 무겁게 눌렀다. 희우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전에 쓰던 매트리스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안락했지만 체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했다.

꼬로로록-

속은 더부룩한데 왜 배는 고픈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욕구가 서로 부딪혔다. 하지만 결국 승리한 감각은 허기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침대에서 뭉그적뭉그적 일어난 희우는 방문을 열기 전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피할 수 없는 거라면 그냥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나았다.

그리고 어쩌면 조금은 안심하고 있는지도…….

톡톡.

희우는 유리문을 살짝 노크했다. 현태의 방에서 인기척이 있긴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톡톡.

희우는 한 번 더 두드렸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미닫이문을 열었다.

문에 양초를 바른 것처럼 부드럽게 열렸다.

문을 열고 방 안을 살피던 희우가 화들짝 놀라 뒤로 돌아섰다.

“헉! 미안해요. 옷 갈아입고 있는 줄 모르고. 아니, 조금 전에 노크 소리 못 들었어요?”

상체를 드러내 놓고 있는 현태를 보며 미안해하던 희우가 얼른 말을 바꾸며 소리쳤다.

“들었어.”

현태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갈아입으며 대답했다. 벗은 몸을 누가 봐도 아무 상관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럼 기다리라고 했어야죠!”

“내가 왜?”

“그거야……!”

기현태 씨가 민망해지니까요, 라고 하려고 했다. 분명.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훌렁훌렁 옷을 벗어젖히는 현태를 보니 절대 그가 먼저 민망해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내 눈은 소중하니까요.”

희우가 뒤늦게 대답했다. 여전히 뒤돌아 서 있었지만 자꾸만 잘 쪼개진 근육들의 잔상이 남아 눈앞에 아른댔다.

나 변탠가?

“저녁 먹지.”

귓불이 홍시처럼 빨개진 희우를 흘깃 본 현태가 막 머리 위로 끼워 넣은 티셔츠를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운동량을 더 늘려야 할 것 같았다.

맛있는 걸 사 주고 싶었지만 이사한 날은 자장면을 먹는 거라며 부득부득 중국 음식을 시켰다.

현태는 기름진 음식을 즐기진 않았다. 거기다 면 요리라면 더더욱.

“면 요리를 좋아하나?”

희우는 자장면 그릇에 씌워진 랩을 뜯지도 않고 거꾸로 뒤집어 흔들고 있었다. 처음엔 뭘 하는 건가 의아했지만 다시 뒤집어서 랩을 뜯는 걸 보니 면과 소스를 섞은 모양이었다.

저건 좀 효율적이겠는데?

현태가 어설프게 그릇을 뒤집으려고 하자 희우가 재빨리 그의 손에서 그릇을 낚아챘다.

“이건 팍팍 흔들어 줘야 잘 섞이는 거예요.”

이게 뭐라고 저렇게 잘난 척인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장면을 섞어 건네는 희우를 보며 현태는 피식 웃었다.

별것도 아닌데 이 여자와 함께 있으면 자꾸 실없는 웃음이 샜다. 가끔은 정말 웃겨서였고, 때로는 어이가 없어서였는데 지금은……

“잘 섞어졌네.”

명치가 간지러워서였다.

“궁금한 게 있어요.”

현태의 자장면 그릇이 다 비워질 때쯤 희우가 물었다. 물론 희우의 그릇은 오래전에 비워진 상태였다.

“뭐지?”

이번엔 무슨 질문을 할까 궁금했다. 또 수정이가 친구 맞냐는 따위의 질문을 하면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왜 미국에 있을 동안 한 번도 연락 안 했어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귀찮아서.”

“와! 진짜 거짓말 못 하는구나.”

대충 예상은 했지만 대놓고 저런 대답을 들으니 희우는 살짝 열이 뻗쳤다.

“그건 독고희우 씨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요! 난 그래도 결혼 초에는 메일 보냈어요. 답장 안 보낸 건 기현태 씨죠.”

뭐라고 보냈더라? 현태는 희우가 보냈다는 메일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뭐라고 적었지?”

생각이 안 나는 건 희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신경 써서 적다가 나중엔 짜증 나서 대충 써서 보낸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10번은 채우자, 생각했던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덕분에 이렇게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됐다.

“뭐라고 쓰긴요. 안부 인사하고, 나도 잘 지낸다고 하고 그랬죠.”

희우가 대충 둘러댄 말에 현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 * *

수연제의 아침은 다른 날과 다를 바 없었다. 여전히 하늘은 청명했고, 정확하게 언제 심었는지 알 수도 없는 나무에선 정신없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게 평화로운 아침.

사랑채 안에서 단 한 사람만 잔뜩 얼어붙은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버지,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둘째 아들 선욱의 애원에 덕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때문에 수연제가 넘어갈 뻔했어. 그걸 벌써 잊은 게야?!”

덕수의 호통에 선욱의 어깨가 움찔 우그러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쩍 마른 몸이 근래 더 살이 내려서 뼈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편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이번엔 정말 승산이 있다니까요.”

선욱의 커다란 눈이 절박함으로 번들댔다.

죽은 첫째 아들과 유일하게 닮은 곳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천지 차이였다.

“넌 지금도 희우한테 몹쓸 짓을 하고 있어. 그건 알고 있냐!”

덕수의 목소리가 여전히 높았다. 하나 남은 아들이라고 하자는 대로 해 줬더니 결국 사달이 났다.

“몹쓸 짓이라뇨! 재벌 집에 시집가서 떵떵거리면서 잘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다 제 덕입니다, 아버지! 그때 제가 잘 판단해서 일을 추진했기 때문에 희우가 그렇게 좋은 집에 시집갈 수 있었어요. 막말로 그런 과거가 있는 여자를 어느 집에서 데리고 간답니까!”

“뭐야! 이놈이!”

격분한 덕수가 눈앞에 보이는 물건 아무거나 집어서 아들에게 힘껏 던졌다.

퍼억!

대나무로 만든 연필꽂이는 선욱의 광대를 스치고 지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짝에 가 박혔다. 창호지는 찢어지고 얇은 문살은 부러져 꺾였다.

“이까짓 낡은 집! 누구 손에 넘어가든 무슨 상관입니까!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죠! 더군다나 그분이 남입니까? 이제는 희우 시댁 어르신인데! 좋은 값을 주겠다잖아요!”

“그래도 안 된다. 절대로 안 돼. 내가 죽기 전에 수연제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는 꼴은 못 봐!”

“그럼 내가 죽어 버리면 되겠네요! 네! 아들 둘, 먼저 보내고 잘난 이 집, 이고 지고 평생 사십쇼!”

선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너! 너 이놈이! 그게 지금 애비 앞에서 할 소리야!”

“내가 죽게 생겼는데 못할 소리가 뭐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 명의로 된다고 수연제가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전 정말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희우한테도 연락할 겁니다. 수연제 가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선욱아!”

덕수가 큰 소리로 불렀지만 선욱은 그대로 방을 뛰쳐나와 마당을 가로질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남편을 보는 숙영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여보! 희재 아빠!”

숙영이 목놓아 불렀지만 선욱은 이미 대문을 뛰쳐나간 후였다.

쿵!

따라 나가야 하나 어쩌나 다리를 동동 구르는데 사랑방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에 숙영은 남편 따라가던 것을 포기하고 얼른 마루 위로 뛰어 올라갔다. 신발도 벗지 못한 채 사랑방 문을 연 숙영이 발견한 건 문 앞에서 쓰러진 덕수였다.

“아버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연제를 빠져나온 선욱은 씩씩대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자린고비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5년째 쓰고 있는 핸드폰 화면은 여기저기 깨진 곳이 많았다.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집어던진 결과였다.

그거 조금 뛰었다고 숨이 가빴다.

“내가 못 할 줄 알고!”

씩씩대며 연락처 하나를 검색해 낸 선욱이 화면에 뜬 글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금은 자신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선욱은 망설임을 끝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의 휴대폰 화면에서 ‘회장님’이라는 글자가 한참 동안 깜빡였다.

* * *

모처럼 여유 있는 주말이었다.

일이 없다던 현태는 전화를 몇 통을 받고 잔뜩 굳은 얼굴로 출근했다.

보고 있던 프로그램이 끝나자 희우는 텔레비전을 끄고 방문을 열었다.

자신의 방으로 가려면 통과의례처럼 지나가야 하는 현태의 방 앞에서 희우는 한참 동안이나 그대로 서 있었다.

어쩐지 제 앞을 가로막고 선 현태의 모습이 상상되는 방 구조였다.

“정말 내가 걱정돼서 그런 건가? 왜? 무슨 사이라고?”

-당신의 아이가 필요합니다.

불쑥 떠오른 그의 말에 희우는 얼굴이 홧홧해졌다.

이 타이밍에서 왜 그 말이 생각나는 건데…….

현태의 조각 같은 몸이 연이어 떠오르자 희우의 얼굴은 붉게 달았다.

아우 진짜. 이상한 소리를 해서 이상한 사람 만들고 있어.

희우는 일부러 현태의 방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그러다 협탁 옆에 있던 액자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걸 가지고 왔어?”

침대 옆에 놓인 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 담긴 액자였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물건이기도 했다. 희우는 액자를 들고 사진을 살피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표정들이 다 가관이네.”

기현태는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처럼 비장했고, 제 표정은 처연하기 짝이 없었다.

행복이나 설렘의 기운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살벌한 결혼식 사진이었다.

“드레스는 예뻤는데.”

그러고 보니 우리 반지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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