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텅텅 빈 배를 두드리며 희우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대충 머리도 빗었다.
우드드득. 우드드득.
이러다가 머리카락이 죄다 뜯길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빠지는 것보다 새로 나는 게 많은지 희우의 머리는 항상 풍성했다.
제멋대로 뻗은 곱슬이긴 해도 몇 번 빗질을 하고 나니 훨씬 차분해졌다. 희우는 손목에 끼워 놨던 고무줄로 질끈 묶은 다음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일어났어?”
부스스한 저와 달리 빈틈없이 말끔한 현태의 모습을 보니 희우는 괜히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게 됐다. 현란한 무늬의 냉장고 바지와 늘어난 티셔츠.
원래 잠옷은 늘어난 옷을 재활용하는 게 국룰 아닌가.
희우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잠옷을 예쁘게 차려입고 자는 것을 보면 참 부지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잘 때 입는 옷 따위에 따로 돈을 투자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노란색 티셔츠에 초록 냉장고 바지는 너무했지? 빨간 슬리퍼였으면 신호등 완성이네.
“커피 줄까?”
현태가 들고 있던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일어섰다.
“괜찮아요.”
“그럼 주스?”
현태가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네. 주스.”
“사과? 오렌지?”
“자몽이요.”
부러 현태가 언급했던 주스를 빼고 말했다.
괜히 억지를 부려보고 싶었다. 이건 또 무슨 마음인지.
냉장고 문을 연 채로 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태가 냉장고 안으로 손을 쑤욱 뻗었다. 그러더니 안에서 자몽 주스 한 병을 꺼내 희우에게 내밀었다.
뭐야, 저건 언제 샀어?
“마셔.”
“고, 고마워요.”
작은 유리병을 받아 든 희우가 뚜껑을 잡고 잔뜩 힘을 주고 돌렸다. 하지만 뚜껑은 딱 달라붙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뚜껑을 잡고 부들거리고 있는 희우를 보던 현태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뚜껑을 따 주려고 했다. 하지만 현태를 보지 못한 희우는 뚜껑을 잡은 채 부르르 떨다 싱크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가 따줄……,”
쾅! 쾅! 쾅!
희우가 식칼을 꺼내 칼등으로 뚜껑을 쾅쾅 두드렸다. 그러기를 몇 번.
뽁!
아무리 힘을 줘도 열리지 않던 뚜껑이 산뜻하게 열렸다.
뒤돌아선 채 자몽 주스를 꿀꺽꿀꺽 들이켜는 희우를 보는 현태의 입술에 호선이 만들어졌다.
“크아. 시원하다.”
자몽 주스를 단번에 비워 낸 희우가 감탄사를 뱉었다.
저 여자는 뭐 하나 평범한 게 없었다. 그래서 자꾸 보게 되나?
현태는 자몽 주스 한 병으로 모자랐는지 다시 냉장고 문을 열고 사과주스를 꺼내는 희우를 보며 생각했다. 아침부터 찬 걸 많이 먹으면 배 아플 텐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고 느낄 틈도 없이 현태의 눈은 자꾸 희우를 좇았다.
“주말에도 출근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할 일이 있어서 오늘은 출근 안 해.”
“뭔데요?”
질문하면서도 막연하게 집안에 일이 있나 생각했다.
“이사.”
“아……. 뭐요?”
너무 놀라 저절로 소리를 질렀지만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이사라니? 그러고 보니 이사할 집을 알아보고 있다는 말을 얼마 전에 하긴 했다.
하지만 나한테도 집을 볼 기회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별건 없어. 이미 정리가 되어 있어서 거기로 바로 가면 돼.”
“내 짐은요?”
“옷만 챙겨. 다른 건 다 있으니까.”
“헐!”
“뭐가 문제지?”
“그럼 내 물건들을 다 버리고 가라고요?”
희우는 물건에 애착이 많은 편이었다. 망가진 물건도 몇 번이나 고쳐 쓰는 게 당연한 희우에게 멀쩡한 가구를 버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돈이 많고 적음과는 상관이 없었다.
“왜 내 물건의 처분을 기현태 씨 마음대로 결정해요?”
너무 화가 나서 자꾸 말이 빨라졌다.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난 버린다고 한 적 없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아무리 문맥을 따져 봐도 그 소리 같은데. 그러고 보니 왜 이삿짐센터에선 오지 않지? 오늘 이사면 벌써 들어 와서 포장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요? 이삿짐센터에서는 몇 시에 와요?”
“안 와.”
“이사한다면서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세 시간 뒤, 희우는 현태가 말한 새집으로 들어서며 입을 떡 벌렸다.
“그 집은 놔둘 거야. 짐도 그대로 둘 거고.”
원래 살던 원룸이 나가지 않아 보증금을 받지 못해 동동거리던 저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냥 그 집은 두고 다시 집을 얻고, 가구랑 전자 제품도 모두 집에 맞춰 새로 구입하고.
현태는 내심 희우가 이 집을 좋아하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 희우의 표정은 좋아한다고 보기에는 좀 애매했다.
“마음에 안 들어?”
“내 맘이 무슨 상관이 있나요.”
의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희우의 힘 빠진 말투를 들으니 현태는 덩달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살짝 심술이 올라왔다. 놀라기는커녕 남의 가게 구경하듯 심드렁한 표정이라니.
“상관이 있지. 독고희우 씨가 살 집이니까.”
“그래요?”
“뭐가 문제지?”
아. 이 남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희우는 세상 무해한 얼굴로 도리어 화를 내는 남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현태 씨.”
“말해.”
“나도 생각이라는 게 있고,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해요.”
평소와 달리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어쩐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하기는커녕 칭찬 들을 일만 했을 뿐이다.
보안이 이중삼중 견고한 집으로 이사했잖아. 그것도 독고희우는 전혀 신경 쓸 일 없게 하고. 가구가 취향이 아닌가?
짧은 시간에도 현태는 희우 방에 있던 낡은 가구의 디자인이 어땠더라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가구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면 바꿔주면 그만이었다.
“알아.”
“내 안전을 위해서 애써준 거 알아요. 그건 고맙게 생각해요.”
그건? 그럼 다른 문제가 더 있다는 뜻인가.
현태의 머릿속이 팽팽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내가 이사할 집인데 나한테도 선택권을 줬어야죠. 어떤 집으로 갈지, 어떤 가구를 들일지. 물론 전부 내 것이 아니라서 상관없지만 그래도 이건 중요한 문제예요. 이런 식이면 호텔에 머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죠? 호텔도 내 집이 아니고, 여기도 내 집이 아닌데.”
현태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해 줬는데 고맙다는 말을 하기는커녕 짜증을 낸다고?
“그게 뭐가 중요하지? 지금은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텐데.”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느낌.
희우는 더 이상 말해 봤자 에너지만 뺏길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여긴 내 집이 아니야. 그냥 잠시 머무는 공간일 뿐이야.
하지만 서운한 마음이 자꾸 비집고 올라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뭘 기대하는 거야. 정신 차려, 독고희우.
희우는 얼굴에 남아 있는 표정을 지우고 무심하게 물었다.
“제가 사용할 방은 어디죠?”
이유는 모르지만 현태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방을 쓰면 돼.”
궁금한 마음을 억누르며 현태가 멀뚱하게 선 희우를 한쪽으로 안내했다.
“이 방을 쓰라고요?”
위치나 크기로 봤을 때 마스터 룸이 분명했다. 희우는 이렇게 큰 방이 필요가 없었다. 쓸 마음도 없었고.
그런데 좀 휑한 느낌인데?
“아니, 이건 내 방.”
어쩐지 썰렁하더라니. 희우는 살짝 안심하며 방에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어디가?”
“기현태 씨 방이라면서요. 난 내 방에 가야죠. 어딨어요? 내 방?”
“여기.”
“여긴 기현태 씨 방이라고…….”
희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태가 드레스룸 문을 스르륵 열었다. 까만색 철제 프레임과 아쿠아 유리로 만들어져 아주 예쁜 문이었다.
저 문을 왜 열지? 설마?
“여기가 독고희우 씨 방.”
“장난해요?”
희우의 목소리가 뾰족하게 튀어 나갔다.
“지금 나더러 기현태 씨 드레스 룸 안에서 살라는 거…….”
가 아니네?
드레스룸일 거라 생각하고 연 문 안에는 현태 방보다 훨씬 더 큰 방이 나타났다. 그것도 완벽하게 독고희우 취향대로 꾸며진.
문제는 희우 방으로 들어가려면 현태의 방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거였다.
“방 구조가 왜 이렇죠?”
희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돈도 많다면서 왜 이렇게 불편한 구조의 집을 구했지?
“저 다른 방 쓸게요. 좁아도 상관없어요. 불편해서 어떻게 써요!”
이런 구조라면 방에서 나갈 때마다, 방으로 들어갈 때마다 현태와 부딪혀야 했다.
“다른 방은 없어.”
“왜 없어요? 아까 보니까 문이 세 개는 더 있던데!”
“확인해 보든가.”
현태가 심드렁하게 말하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먹으로 인중을 한 대 치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희우가 신경질을 박박 내며 방문을 열고 나가자 딴청을 피우듯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현태의 입꼬리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현태의 말대로 나머지 문들은 욕실이거나 팬트리 룸, 창고였다.
마음 같아선 창고를 방으로 삼고 싶었지만 너무 작아서 침대도 안 들어갈 크기였다.
“일부러 저러는 거 맞지? 저거!”
희우가 씩씩대며 다리를 동동 구르는데 방문이 열리며 현태가 밖으로 나왔다.
“다 확인했나?”
“다른 집 알아봐 줬으면 좋겠어요.”
“당분간이야. 그 새끼 허튼짓 못 하게 만들 때까지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현태의 음성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만에 하나 밤중에 김남후가 들어오더라도 현태의 방을 지나야만 희우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불편한 구조의 옛 아파트였지만 현태가 굳이 이 집을 고집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현태의 설득이 통한 건지, 포기를 한 건지 희우는 그 뒤로 말이 없었다.
꼭 닫힌 희우의 방문을 바라보면서 현태는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희우는 완벽하게 현태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