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화장실에서 나온 수정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다가 머리를 가까이 맞대고 숙덕대는 두 사람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는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대화 내용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현태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리긴 했는데 명확하지 않았다. 무슨 내용의 대화를 나누는지는 몰라도 눈앞에서 딱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보기 싫었다.
눈썹을 찡그리고 걸어가던 수정은 조금 전 실수로 열었던 방 앞을 지나가며 표정이 풀렸다.
아직 희망이 있어.
수정은 두 사람에게로 다가가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게스트 룸이 소박하고 예뻐요.”
아직은 저가 알고 있는 걸 까 보일 필요가 없었다.
* * *
교실 정리를 하던 희우는 문득 지난밤 현태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휴대폰을 꺼냈다.
-위치 추적 앱을 깔았어.
제 것인 양 휴대폰을 가져가서 만지작거리던 현태가 다시 휴대폰을 건네며 한 말이었다.
-내키지 않으면 지워.
결국 지우지 않았다. 감시받는다는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지금은 두려운 마음이 조금 더 컸다. 휴대폰을 잠시 들여다보고 있던 희우는 짧은 한숨과 함께 청소를 시작했다.
정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누군가 등골이 오싹한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뭘 그렇게 놀래? 죄지은 거 있어?”
교실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던 것 혜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상대방이 존대를 하지 않는데 예의 차릴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도 다 가고 없었다.
희우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혜정은 빈정 상했는지 입술을 씰룩이다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희우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내려놓고 혜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표정을 보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아니면 부탁할 게 있거나.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서 생각보다 퉁명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남자, 누구야?”
갑자기 남자라니?
“누구?”
“아침에 주차장에서. 너 데려다줬던 남자 말이야.”
아. 기현태를 말하는구나. 출퇴근을 도와주고 있는 현태를 본 것 같았다.
“왜?”
“궁금해서 그러지. 남자……친구는 아니지?”
희우와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외모로 보나 재력으로 보나 희우 같은 애를 만날 리가 없었다.
“아니야.”
“그렇지? 난 또! 그럼 누구야? 친척?”
혜정의 표정이 순식간에 다정하게 바뀌었다. 기대에 찬 표정을 보니 기가 막혔다.
기현태, 이 사람 도대체 뭐지? 왜 다들 이 난리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태라면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드는 하수정이나, 알지도 못하면서 겉모습만 보고 침 질질 흘리는 옥혜정이나.
“가족.”
“설마 오빠? 너한테 오빠가 있었어?”
혜정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가진 걸 다 내주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남자친구도 있으면서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됐다.
“나 외동이야. 알잖아. 그리고 신경 꺼. 너하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나와 버렸다.
“그냥 말해 주면 될 걸 뭘 그렇게 뜸을 들여? 혹시 그 남자가 나한테 반하기라도 했대?”
이것도 무슨 헛소리인지.
희우는 자뻑 대회가 있다면 대상을 타고도 남았을 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김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편이야.”
“뭐? 누구?”
“마이 허즈번드. 됐냐?”
“너 결혼 안 했잖아! 왜 거짓말해?”
“피곤해, 가. 너랑 말 섞고 싶지도 않다.”
희우는 더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휙휙 비질을 했다. 먼지가 폴폴 이는데도 혜정은 눈만 둥그렇게 뜬 채 그 자리에서 떠나지를 못했다.
도대체 뭐에 충격을 받은 건지. 도대체 왜 다들 기현태를 좋아하는 거야?
희우는 혜정이 멍한 얼굴로 교실을 나갈 때까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쓸었다.
* * *
퇴근 시간이 되어 나오니 주차장에 현태의 차가 보였다. 조금 뒤에서 따라오던 혜정이 갑자기 희우를 휙 지나쳐 앞질러 가며 어깨를 툭 쳤다.
“아!”
“미안.”
제법 세게 부딪혔는지 어깨가 아팠다. 사과를 하는 혜정의 얼굴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희우는 보고 있다가 빠르게 걸어가 다시 혜정이 했던 대로 그녀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유치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자꾸 건드리는 건 혜정이었다.
“아!”
이번엔 혜정에게서 외마디 소리가 나왔다.
“미안.”
희우가 짧게 인사한 후 빠르게 앞질러 갔다. 뒤에서 혜정이 “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안 들리는 척 고개를 털었다.
“퇴근 시간 아닌데 자꾸 나와도 괜찮아요?”
데리러 와주는 건 고마운데 왠지 부담스럽고 미안했다. 안전벨트를 하며 희우가 묻는 말에 현태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괜찮아.”
하긴. 저도 교감이나 교장이 출장 가는 날은 괜히 기분이 좋았으니까.
“고마워요,”
희우가 불쑥 꺼낸 감사 인사에 현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오늘은 제가 저녁 살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저녁까지 희우와 먹을 생각은 없었다. 회사로 다시 들어가 봐야 하기도 했고. 하지만 생각과 달리 제멋대로 대답이 나가 버렸다.
“아무거나.”
대답해 놓고도 대책 없는 저의 행동에 현태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일까지 내팽개치면 어쩌자는 건지.
“으음. 분식 어때요?”
나쁘지 않지. 현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희우가 현태를 데리고 간 곳은 골목길에 있어서 찾기도 힘든 조그마한 분식집이었다. 오래된 간판은 햇빛에 바래 글씨가 희미했다.
미희 분식.
“여기가 이 근처에서 제일 맛있어요. 할머니 솜씨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희우는 불쑥 그 남자와도 여기에 왔었냐고 묻고 싶었다.
“뭐해요. 안 들어오고.”
색 바랜 선팅지가 붙어 있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며 희우가 현태에게 손짓했다.
가게는 밖에서 봤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테이블이 세 개만으로도 꽉 차는 실내는 매콤하고 달콤한 냄새로 가득했다.
희우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익숙하게 인사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오오! 우리 슨상님 왔네?”
분식집 주인인 할머니가 주방 안에서 고개를 쑥 내밀며 희우를 반겼다. 직업까지 알고 있는 걸 보니 단골인 모양이다.
“애인 델고 왔나! 무신 일이고!”
할머니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주방에서 쪼르르 달려 나와 현태를 휘휘 돌아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이고, 훤칠하네. 언제 이런 애인을 다 만들었노? 맨날 혼자 다이드만!”
할머니가 현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기현태는 기어이 할머니까지 꼬실 예정인가보다.
“애인 아닙니다.”
현태가 무뚝뚝하게 대답한 말에 할머니가 무안하게 웃었다.
“그래요? 어쩐지 우리 독고 슨상님 이상형은 아니라고 했다, 내가.”
못 맞힌 게 억울한 건지, 희우의 애인이 아니라고 해서 속상한 건지. 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현태에게 보이던 무안한 미소를 단번에 거두고 희우의 이상형이 아니라며 대놓고 디스까지 했다.
희우에게 들었던 이상형이 떠올랐다. 그땐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는데 분식집 할머니까지 알고 있는 걸 보니 빈말은 아닌 모양이다.
“애인은 아니고 남편입니다.”
“그래에?”
할머니가 잇몸까지 웃으며 활짝 웃었다.
“아니, 우리 슨상님 결혼했었어? 나는 하도 혼자 댕기길래 애인도 없는 줄 알고 내 손주놈 소개시켜 줄라고 그랬다 아이가. 아이고, 잘했네, 잘했어.”
남편이라는 한 마디에 갑자기 친밀하게 구는 할머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할머니, 떡볶이하고 김말이 그리고 라면이랑 김밥 주세요!”
현태는 뭘 그렇게 많이 시키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것만 시켜서 되겠어? 혼자 먹는 양이잖아.”
현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이고, 할머니 내가 언제 그렇게 많이 먹었다고! 하하하하!”
희우가 시치미를 뚝 떼자 할머니가 입을 비죽 내밀더니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알았다, 알았다. 우리 슨상님 새똥만큼만 먹는데 오늘 남편이랑 같이 왔으니까 마이 주께.”
작고 낡은 테이블은 빠른 속도로 채워졌다. 손님이 올 걸 미리 알고 있다가 바로 내왔나 싶을 정도로 기다림의 시간은 짧았다.
윤기를 자르르 내는 새빨간 떡볶이와 따끈따끈하고 말랑한 순대, 칼칼한 국물이 일품인 어묵 꼬치, 마지막으로 바삭하게 튀겨 낸 야채 튀김.
두 사람이 다 먹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음식량에 현태는 난감해졌다.
“너무 많지 않나?”
“먹다 보면 금방 없어져요. 여기 할머니 솜씨가 장난 아니거든요.”
희우가 호언장담했지만 현태 입맛에 썩 훌륭한 음식은 아니었다.
떡볶이는 지나치게 달았고, 어묵 국물은 짰으며 순대는 원래 안 먹었다. 그나마 먹어줄 만한 건 튀김이었지만 기름진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폭풍 흡입하고 있는 저와 달리 깨작이는 현태를 본 희우가 우물우물 떡볶이를 씹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왜?”
“별로예요?”
할머니 들을까 봐 걱정이 되는지 떡볶이를 꿀떡 삼키고 질문하는 희우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작았다.
“응.”
“헐. 예의상으로라도 괜찮다고 할 줄.”
“거짓말은 못 해.”
“눼에, 눼에. 어련하시겠어요.”
희우는 툴툴거리면서도 다음부턴 분식집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 생각했다.
아무리 꼴불견이어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 * *
정신없는 일주일이 지나가고 꿀맛 같은 주말이 다가왔다.
주말 아침이라 늦잠을 잔 희우는 침대에 앉아 주먹으로 허리를 퉁퉁 두드렸다.
“너무 많이 잤나?”
허리가 아플 정도로 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희우는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비비고 협탁 위에서 충전시키고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헐. 12시?”
어쩐지 눈이 부은 느낌이더라니.
“밥은 먹었으려나?”
순간 기현태의 식사를 여부를 궁금해 하던 희우가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먹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라고.
꼬르르륵, 꼬르륵.
“내 배는 상관이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