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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54)화 (44/75)

54화

머리를 스치는 번뜩이는 생각에 수정은 숙였던 머리를 번쩍 치켜들었다.

어쩌면 도와줄 사람이 있을지도…….

때마침 현태의 차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가까워질수록 운전대를 쥔 수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급하게 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내 입술을 붉게 칠하고 머리를 다듬었다.

뿌연 가로등 빛이 차창 안으로 쏟아졌다. 흐린 불빛 아래서도 돋보이는 자신의 미모에 수정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촌스러운 그 여자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현태의 차는 수정의 차를 지나쳐 서서히 주차장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빠앙!

다급한 클랙슨 소리에 주차장으로 들어가던 현태의 차가 멈췄다. 선팅이 짙게 된 차창이 서서히 내려가자 현태의 놀란 얼굴이 나타났다.

수정은 재빨리 차에서 내려 현태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야?”

가까이 다가온 수정을 보며 현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처 지나가다가. 네 차가 보이기에. 반가워서.”

수정은 최대한 침착하게 답하면서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애썼다.

조수석에 앉은 희우가 고개를 비죽 내밀고 저를 보고 있었다.

저 자리도 내 자리야.

10년 동안 현태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은 수정의 차지였다. 다른 누구도 현태의 옆에 앉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당연한 것처럼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희우의 머리채를 잡고 차 밖으로 끌어내고 싶었다.

수정은 주먹을 꼭 쥔 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안녕하세요, 희우 씨? 또 뵙네요?”

“아…… 안녕하세요?”

저를 보며 되바라지게 행동할 때는 언제고 현태가 옆에 있다고 어리숙한 척 구는 게 꼴사나웠다.

“죄송해요. 쉬시는데. 제가 현태한테 할 말이 있어서 급히 불렀어요. 현태 잠시만 데려가도 될까요?”

희우는 대답 대신 현태를 잠깐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는 건가? 제깟 게 감히?

수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교환하는 두 사람을 노려봤다. 잠깐이면 된다고 말하려 할 때였다.

“그러지 말고 집으로 가실래요?”

희우가 수정을 보며 방긋 웃었다.

무슨 속셈이지?

수정이 도무지 생각을 가늠할 수 없는 희우를 빤히 바라보다 금세 표정을 바꾸고 환하게 웃었다.

“정말요? 그러면 전 더 고맙죠. 현태야, 들었지?”

현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희우를 쳐다볼 뿐이었다.

현태가 혼자 살던 오피스텔은 몇 번 가 본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도 현태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기에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신혼집이었다. 그것도 원래는 제집이었어야 할 장소.

수정은 착잡한 심정으로 신혼집 곳곳을 천천히 훑었다.

“집 구경해도 돼요? 그런데 신혼집치고는 너무 삭막한 거 아니에요?”

거실은 휑했고, 집 어디에도 신혼부부가 살고 있는 분위기는 없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모델하우스도 여기보단 온기가 있을 것 같았다.

주방에서 차와 과일을 준비하던 희우는 그러라고 말하려다 깜짝 놀라 거실로 튀어나왔다. 저와 현태가 각방을 쓰고 있는 것까지는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앗! 죄송해요. 다른 방은 청소를 못 해서. 다음에, 다음에 또 오세요.”

희우가 다급하게 말을 꺼냈지만 현태는 무슨 생각인지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수정에게 들켜도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래요? 아쉬워라. 그럼 다음에 꼭 다시 초대해 주세요.”

수정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소파에 앉았다.

희우는 앉아서도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집 안을 살피는 수정을 보며 괜히 들어오라고 했나 살짝 후회가 됐다.

그러다 수정의 다리를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저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희우는 상념을 가라앉히고 사과를 깎았다. 다른 과일이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사 놓은 과일이 사과가 전부였다.

“밤이라서 커피 말고 케모마일 타 왔어요.”

희우가 트레이에 차와 과일을 담아 내오며 말했다.

수정은 희우가 거실 테이블에 차와 과일을 차례대로 내려놓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나하고 현태는 밤에 커피 마셔도 잠 잘 자요. 대학 때도 시험공부 하려고 커피 왕창 마셨다가 배불러서 같이 잤잖아, 우리. 생각나?”

찻잔을 마저 내려놓던 희우의 손이 허공에서 짧게 움찔했다. 수정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할 말 있다며.”

신나게 미국에서의 에피소드를 꺼내려고 하는데 현태가 말을 자르며 물었다.

수정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할 말이 있다고는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까지 정해 놓지 않았다. 무슨 용건이어야 여기까지 들어온 게 납득이 될까.

수정은 망설이는 척 입술을 말아 물며 희우를 쳐다봤다.

“비켜줄까요?”

희우가 물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파티장에서, 레스토랑에서 만났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랐다. 왜지? 설마 현태 앞이라고 내숭 떠는 건가?

어떤 이유에서든 달라진 희우의 태도는 탐탁지 않았다.

“그래 주면 고맙죠. 현태하고만 할 이야기라.”

수정이 미안한 듯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렸다. 표정과 달리 말투에서는 전혀 미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야기하세요, 그럼.”

희우는 찻잔 한 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그게 뭐든 말이다.

하지만.

“괜찮아, 앉아 있어.”

현태가 일어서려는 희우의 손목을 잡아 그대로 다시 앉혔다.

희우가 놀라 눈을 치켜떴지만 더 놀란 건 수정이었다.

“그, 그래요. 희우 씨가 있어도 크게 상관없긴 해요.”

억지로 웃느라 예쁜 수정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희우와 현태의 얼굴을 차례로 살피는 수정의 동공이 바쁘게 움직였다.

수정은 곧 현태를 가장 약하게 만들 수 있는 걸 찾아냈다.

“사실 요즘 나 다리가 다시 아파.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권 박사님 연락처 알 수 있을까?”

수정이 훤히 드러난 오른쪽 허벅지를 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물었다. 몇 년 전 산산조각이 났던 다리였다.

자세히 살피면 희미한 흉터도 볼 수 있었다.

“은퇴하셨어.”

“알지. 그러니까 너한테 물어보는 거잖아. 권 박사님은 너희 식구들하고는 계속 연락하시잖아. 나 그분 아니었으면 다시 멀쩡하게 걸어 다지니 못 했을 거야. 그래서 꼭 그분한테 다시 진료받고 싶어.”

“나도 몰라.”

“그래? 회장님은 아시지 않을까?”

“글쎄. 꼭꼭 숨으신 분이라. 전화로 물어도 될 걸 왜.”

“근처 지나다가. 이렇게 얼굴 보면 좋지 뭐. 어쨌든 꼭 알아봐 줘. 부탁이야.”

수정이 현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어맛! 미안해요. 제가 버릇이 남아서 나도 모르게 남의 남자 손을 막 만졌네.”

현태가 손을 빼내려는 걸 느낀 수정이 먼저 손을 떼며 호들갑을 떨었다. 곁눈질로 희우의 표정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에 띄게 표정이 굳은 현태와 달리 희우는 오히려 침착하고 담담해 보였다. 수정의 손이 닿았던 현태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녀의 차분한 모습에 수정은 치기가 솟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도발을 했다가는 현태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현태는 적어도 자신에게 속한 사람에게는 늘 최선을 다했다. 부하 직원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아마 별 감정이 없는 희우에게도 같은 책임감과 의무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수정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희우는 손가락으로 복도 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손님용 화장실이 있어요.”

그곳은 희우가 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고마워요.”

수정은 복도 쪽을 천천히 걸어가면서도 벽에 걸린 액자며, 장식품들을 찬찬히 살폈다. 화장실에 가는 사람치고는 굉장히 여유로운 걸음걸이였다.

그러다 복도에 있는 문을 벌컥 열었을 때였다.

“앗! 거긴!”

희우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지만 이미 수정이 문을 열어 버린 후였다. 수정이 문을 연 곳은 손님용 화장실이 아닌 희우의 방이었다.

“어머? 여긴 화장실이 아니네요? 미안해요.”

다행히 수정은 별다른 말 없이 희우의 방문을 닫고 그 옆에 있는 손님용 화장실 문을 열었다.

수정이 화장실로 들어간 후 현태와 희우 사이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먼저 깬 건 희우였다.

“혹시 수정 씨가 알게 되면…….”

“계약위반이지.”

초조한 저와는 달리 현태는 무슨 생각인지 여유롭기만 했다.

“네?”

“11조, 타인에게 본 계약에 관해 발설할 시 일어나는 피해는 발설한 사람이 보상한다. 잊었나 봐?”

희우는 기가 막혔다.

“아니! 내가 무슨 발설을 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잔뜩 숨죽여 말했다.

“단서 제공?”

“헐! 그건 아니죠. 하수정 씨는 현태 씨를 찾아온 건데.”

“들어오라고 한 건 독고희우지.”

“그야 현태 씨 손님이니까…….”

“내 손님이라서 들어오라고 했다?”

“당연하죠!”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잖아요!”

희우는 애가 탔다. 만약 수정이 각방 쓰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했다.

현태는 전혀 위기의식이 없어 보였다. 희우가 타온 캐모마일 차를 우아하게 입으로 가져가며 살짝 미소까지 지었다.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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