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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53)화 (43/75)

53화

쉬지 않고 걷던 희우가 우뚝 멈춰 서서 어딘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희우의 시선은 두꺼운 유리 벽 너머에 고정되어 있었다.

물고기 대신 희우를 유심히 관찰하던 현태가 마지못해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처음엔 수초만 가득 있는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지팡이같이 생긴 물고기가 모래에 꼬리를 박고 꼿꼿하게 서서 수초처럼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게 뭐지?”

현태가 눈매를 찌푸리며 물었다. 이렇게 애매하게 생긴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생선은 생선답게, 해초는 해초답게 생겨야 했다.

“가든일이에요. 저렇게 구멍 밖에 몸을 내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모래 속으로 쏙 들어가요. 먹이를 먹을 때도 절대 구멍을 나오지 않는대요.”

학생을 데리고 온 선생님처럼 희우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설명을 듣기 전엔 수초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던 녀석들에게서 작은 눈과 입이 보였다. 뭔가를 먹기 위해 하찮게 작은 입을 빠끔빠끔 벌리는 모습이 웃기기도 했다.

“게으른 놈들이군.”

“치열하게 사는 거죠.”

같은 장면을 희우는 다르게 바라봤다.

현태는 여전히 가든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희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시 흔들리는 가든일에 정신을 뺏겼던 희우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저를 빤히 응시하던 현태와 눈이 마주쳤다.

동그란 눈 안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현태는 지독한 만족감을 느꼈다.

희우가 보고 있는 것이 다른 게 아닌 저뿐이라는 사실에 보람을 느낀다면 지나친 걸까.

“엄마, 잘 안 보여!”

근처에서 들려온 아이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희우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 가 볼래요? 그런데 여기 좀 덥다. 그죠?”

희우가 손부채질을 하며 서둘러 다른 곳을 향해 걸었다.

그 뒤를 조용히 따라 걷던 현태가 희우의 옆에 바싹 다가가 걸으며 물었다.

“스킨십. 닿았다가 떨어질 때까지가 한 번인 거지?”

“네?”

뜬금없이 훅 들어온 질문에 희우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사이 현태의 커다란 손이 희우의 손을 낚아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놀란 희우가 손을 빼려고 했지만 현태는 손에 힘을 주고 놔주지 않았다.

“내가 백만 원밖에 없어서.”

현태가 꼭 쥔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움켜쥔 손안에서 작고 말랑한 손이 꼬물꼬물 움직였다.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애를 썼지만 현태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백만 원을 핑계로 최대한 오래 붙잡고 있을 생각이었다.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갈 뿐이었다.

이제 손을 잡았으니 다음엔 다른 것도 할 수 있겠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겠지.

목표를 떠올리며 현재 해야 할 일을 되새김질하는 건 현태의 오랜 습관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현태의 집중력을 흩었다. 목표와 상관없이 여자의 목덜미를 만져보고 싶었다. 쇄골에 입을 맞추면 어떤 기분일지 몹시 궁금했다.

손을 덥석 잡힌 희우는 어이가 없었다.

잡기 전에 한 질문을 보아하니 고의성이 다분했다. 그런데 왜 화가 안 나지? 백만 원 때문인가? 희우는 몇 번 손을 빼려고 시도하다가 그만뒀다.

받게 될 벌금 때문이라고 거듭 생각했다.

현태는 끈질기고 집요했다. 아쿠아리움 내부를 여기저기 다니면서도 희우의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손에 땀 나요.”

희우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희우는 하는 수 없이 한숨을 푹 내쉬며 현태의 옆을 터덜터덜 걸었다.

축축해진 손바닥이 신경 쓰여 더 이상 물고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손에 땀이 그만 차기를 바랄 뿐이었다.

희우의 손이 자유로워진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현태의 끈질김에 경의를 표하며 희우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문질렀다.

레스토랑의 벽면 하나가 커다란 수족관으로 되어 있었다. 새파란 조명을 따라 다양한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헤엄쳤다.

“여긴 처음 들어와 봐요. 기현태 씨는 여기 와 봤어요?”

항상 아쿠아리움만 둘러보고 떠나기 바빴다.

“아니. 왜?”

“여러 번 와 본 것처럼 익숙해 보여서요.”

“레스토랑은 다 비슷하지 않나?”

들뜬 희우와 달리 현태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회사에서의 표정도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문득 수정이 현태와 같이 일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순간, 이리저리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설렜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따지고 보면 수정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1년 후엔 이혼할 생각이었고, 그러려면 현태 옆에 그 여자가 있는 게 저에겐 더 유리했다.

“질문 하나 해도 돼요?”

희우의 물음에 현태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을 이야기해야 해요.”

메뉴판을 훑어보던 현태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희우를 빤히 응시했다.

“계약서 4조와 관련된 질문인가?”

4조가 무슨 내용이었더라?

희우는 모두 기억하고 있는 척 여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살면서 머리 나쁘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비교는 항상 상대적이었다.

“네.”

“질문해. 진실하게 답할 테니.”

아! 진실!

그제야 4조 내용이 떠올랐다.

배우자에게 거짓을 말했을 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상대방의 요구에 무조건 응한다.

기현태가 사실대로 말해도, 거짓으로 대답해도 저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하수정 씨와 기현태 씨의 관계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싶어요.”

“지난번에 다 설명했던 걸로 아는데.”

“그냥 친구라고만 했어요.”

“신경 쓰여?”

현태의 눈빛이 번뜩인다고 느낀 건 혼자만의 착각일까?

희우는 원하는 사냥감을 발견한 것처럼 눈빛을 빛내는 현태를 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그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기 싫었다. 유치한 심술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뇨.”

“그런데 왜 물어보지?”

“알아야 하니까요.”

“뭘?”

“……기현태 씨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함부로 대하면 안 되잖아요.”

현태의 시선이 희우의 얼굴을 뚫을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희우는 순식간에 달라진 현태의 표정에 움찔했지만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하수정 씨가 기현태를 좋아하는 건 알아요.”

현태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희우는 현태가 당장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아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자신의 마음에 희우는 점점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1년 뒤에 하수정 씨가 기현태 씨 옆에 있을 사람이라면 제가 지금처럼 대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솔직한 내 마음인가? 질문하면서도 다른 걸 기대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건 왜 독고희우 씨가 결정하지?”

할 말이 없었다.

“내 옆에 있을 사람은 내가 결정하니까 신경 꺼.”

현태의 냉랭한 말투에 어쩐지 크게 잘못한 사람처럼 죄책감이 느껴졌다.

난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거지?

“대답해 주세요. 들을 권리 있어요.”

희우가 살벌한 현태의 시선을 받아 내며 담담하게 물었다.

“하아…….”

대답 대신 짧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현태는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말라 버린 아랫입술을 축이는 혀가 유난히 붉었다.

“수정이는 어머니의 친구 딸이야. 대학 때 처음 알았고.”

“10년 된 사이라는 건 들었어요.”

“오래 알았다고 해서 깊이 아는 건 아니야.”

현태는 정말 말하기 싫은지 자꾸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만 이야기하라고 할 법도 한데 희우는 끝까지 입을 꾹 다문 채 현태를 응시했다.

“나 때문에 수정이가 크게 다친 적이 있었어.”

“어쩌다가요?”

지금은 아주 멀쩡해 보이던데.

“교통사고였어. 다리를 크게 다쳤고.”

“설마 현태 씨가 하수정 씨를?”

희우가 눈을 크게 뜨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현태는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희우의 상상력에 기가 막혔다.

“그럼요?”

“나를 밀쳐내고 대신 다쳤어.”

“헉!”

아까보다 희우의 눈동자가 두 배는 더 커졌다.

희우는 현태의 말을 들으면서 괜히 질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찐 사랑 아닌가? 대신 다칠 정도면 정말 많이 사랑하는데?

희우는 입을 막았던 손을 천천히 내려 테이블 위로 올렸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동시에 가슴 한가운데가 뒤틀렸다.

“다리를 삼 년 절었어.”

욱신.

아직 먹지도 않은 저녁이 체한 것 같았다. 희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괜찮아 보이던데. 정말 다행이네요.”

이건 진심이었다.

만약 아직까지 하수정의 다리가 불편했다면 비록 허울뿐인 결혼일지라도 그녀에게 깊은 죄책감이 들었을 테니 말이다.

희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을 본 현태가 근처에서 서성이는 웨이터를 향해 손을 들며 말했다.

“신경 쓸 거 없어.”

그렇겠지. 내가 신경 쓸 일 없겠지.

하지만 찜찜한 이 기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 * *

“하아, 내가 왜 여기 왔지?”

현태의 집 근처로 차를 몰고 온 수정은 캄캄하게 불이 꺼진 현태의 집을 올려다보다 핸들에 이마를 박았다.

답답한 마음에 드라이브나 할 겸 나온 길이었다. 멍하게 운전대를 잡고 그저 달렸을 뿐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이었다.

현태의 결혼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기에 수정의 마음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그 여자를 보니 현태를 향한 마음이 거대한 파도처럼 수정을 집어삼켰다. 막연하게 알고만 있던 태풍을 온몸으로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눈길과 발걸음, 손짓 하나도 제멋대로 현태를 향해 내달렸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음을 수정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

툭, 툭.

이마를 핸들에 툭툭 부딪히며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 하면 현태를 다시 제 옆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여자를 현태 옆에서 하루라도 빨리 쫓아낼 수 있을까.

그 여자가 낳을 현태의 아이는 상관없었다. 다만 현태의 품에 그 여자가 안겨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아이가 목적이라면 독고희우의 난자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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