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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51)화 (41/75)

51화

수정에게서는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향기가 물씬 풍겼다. 그녀와 어울리는 향수라고 생각했다.

나는 향수를 뿌렸던가? 아, 나는 향수 안 쓰지.

“네, 좋았어요.”

희우가 초라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요? 다행이네요. 전 또 주무시길래 연주회가 지루했나, 해서요. 제가 이 후원회를 기획한 거라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수정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상대방을 깎아내렸다. 조금 둔한 사람이라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교묘한 말투였다.

연주회는 안 보고 나만 본 거? 저 천사같이 착하고 예쁜 얼굴로 이렇게 여우짓을 하는 걸 기현태도 알까?

“좀 피곤했나 봐요. 오늘 일이 많았거든요.”

“아이들하고 있으면 마냥 행복할 것 같은데. 회사에서 찌든 얼굴 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나요?”

내가 더 힘드니까 너는 짜져라. 이 말인가?

희우는 일일이 대꾸하기가 귀찮아졌다. 수정이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뭐, 그럴 수도요. 그럼.”

희우가 화장실을 밖으로 나오자 뒤에서 수정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경쾌한 구두 굽 소리가 이상하게 귀에 거슬렸다.

수정은 희우를 끈덕지게 따라붙으며 듣고 싶지 않는 말을 계속 지껄였다.

“현태가 좀 무심하죠? 사실 미국에서도 저 말고는 별로 만난 사람이 없어서요. 제가 다 챙겼거든요.”

“네.”

대답하는 희우의 목소리가 무심했다.

“현태가 은근히 까다로운 구석이 있어요. 음식이나 사람이나 물건이나.”

“네에.”

희우의 대답에 영혼도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시큰둥한 희우의 반응에 수정은 살짝 조바심이 났다. 발끈하고 덤벼야 그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을 텐데 희우는 저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무덤덤했다.

“혹시 현태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알려드릴게요. 현태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수정은 졸졸 따라다니며 아내인 너보다 내가 더 가까운 사이다, 라는 걸 열심히 어필하고 있었다. 쿨한 척이라도 하지 말든가.

희우는 결국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바쁘게 따라오던 수정이 갑자기 멈춘 희우 때문에 놀라 멈칫했다.

“기현태 씨에 관한 건 기현태 씨한테 물어볼게요. 그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긴 한데 상대방에게도 미소로 보일지는 확실치 않았다.

“아. 잘 모르는 모양인데 현태는 자기에 대해서 잘 이야기 안 해요.”

“그래요?”

그제야 원하는 반응이 나왔는지 수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네. 같이 살면서 엄청 답답할 거예요. 저야 뭐, 10년 동안 계속 함께 있었으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답답하지 않아요. 이야기 자주 하는 편이라.”

“네?”

“아무래도 친구하고 와이프는 다르니까요.”

희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수정의 얼굴이 굳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멀리서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정은이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수정에게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정 씨. 여기서 뭐 해요?”

아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온다던 정은이 돌아왔다.

“아! 정은 씨. 아는 분을 만나서요. 여기는 기현태 본부장 사모님이세요.”

정은의 시선이 빠르게 희우에게 옮겨왔다. 수정을 바라볼 때는 따뜻하기 그지없던 눈빛이 희우에게 닿는 순간 차게 식었다.

뭐지?

희우는 수정에게서 느꼈던 묘한 기시감을 정은에게서도 동일하게 느끼며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여기저기 비슷한 눈깔 천지였다.

기현태 이 남자, 무지 흘리고 다녔구만. 피곤해라. 끼리끼리 잘 놀렴.

“안녕하세요, 저도 반갑습니다. 그럼 두 분이 이야기 나누세요. 전 남편한테 가 볼게요.”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희우가 막 두 사람에게서 뒤돌아섰을 때였다.

“그런데 그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요?”

수정과 정은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희우의 뒤통수에 닿았다.

“기현태 본부장 부부, 쇼윈도래요.”

“네? 아니에요. 두 사람 제가 잘 알아요.”

정은의 말에 수정이 빠르게 두 사람을 감싸는 척했다. 희우는 빤히 사람을 앞에 두고 노골적으로 뒷말을 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 따질까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참을 이유도 없었다.

희우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두 사람 가까이 또각또각 걸어갔다.

대리석 위에 부딪히는 구두 굽 소리에 맞춰 심장이 쿵쿵 뛰었다. 때마침 근처에 기현태가 서 있는 게 보였다. 희우는 망설이지 않고 현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너희가 아무리 그래봤자 난 아무 타격이 없단다. 이제 진정한 쇼윈도 부부란 어떤 건지 보여줄게. 대패나 준비하렴.

“현태 씨, 자기야.”

다른 사람과 한참 이야기를 하던 현태는 갑자기 튀어나온 희우의 목소리에 고개가 홱 돌아갔다.

자기야?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현태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희우 옆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수정과 동수의 와이프였다. 동수의 와이프를 발견한 현태의 눈매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현태는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희우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현태가 가까워질수록 수정의 심장도 두근두근 뛰었다.

마치 현태가 저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아닌 줄 알면서도 이성과 아무 상관 없이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댔다.

“희우야.”

희우야?

희우는 현태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현태가 한 번도 이름만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꼭 앞에 성을 붙여서 불렀는데 이름만 따로 부르니까 정말 이상했다.

“어, 자기야.”

희우라고 질 수 없었다. 희우는 현태만큼이나 자연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현태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팔짱을 끼는 것도 잊지 않았다.

1년 후의 일은 지금 생각할 바가 아니었다. 계약서 조항도 알 바 아니었다. 임시 보호라고 해도 지금은 내 것이었다.

현태의 팔짱을 낀 희우의 팔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현태의 눈썹이 살짝 꿈틀댔다. 정말 이상하고 웃긴 여자였다.

다가오는 걸 극도로 꺼리면서도 막상 다른 사람 앞에서는 친근한 척 구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특히 수정 앞에서는 행동이 더 과감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기꺼이 이용당해 줄 수밖에.

현태는 수정이 서 있는 앞에서 희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희우의 몸이 순간 굳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저 말고는 뻣뻣해진 몸 따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테니.

최소 투자로 최대 이익을 보는 것. 지금은 삶의 모토를 철저히 따를 타이밍이었다.

현태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희우의 옆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희우의 몸은 더 딱딱해졌고, 보지 않아도 그녀의 표정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

“지루해?”

이제 어떻게 할 거지? 현태의 숨은 질문이 눈에 뻔히 보였다.

“사, 살짝? 우리 언제가?”

희우가 칭얼대듯 물었다.

이 여자, 연기 한 번 제대로 할 모양인가 보다. 현태는 물론 이 기회를 충분히 잘 활용할 생각이었다.

“나가지.”

“그래도 돼?”

현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우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희우는 현태의 팔짱을 낀 채로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현태야, 가게?”

희우의 말에 수정이 현태를 보며 물었다. 수정은 희우의 허리를 감싼 현태의 팔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먼저 갈게.”

현태는 뒤돌아보며 건조하게 대답한 후 희우와 함께 멀어졌다.

수정은 두 사람이 입구를 나설 때까지도 그 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현태 가까이 가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급격하게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이게 아닌데.

“두 사람, 연기가 제법이네요.”

수정이 속상한 마음을 감추며 겨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서 있는데 옆에서 정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정의 고개가 정은을 향해 홱 돌아갔다.

어쩐지 저보다 정은이 희우를 더 싫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기라고 확신하세요?”

“그럼요. 저 두 사람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요. 기현태 씨와 어울리는 건…….”

정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듯 말을 끌다가 정은은 수정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보는 사람도 차분해질 만큼 단아하고 얌전한 미소였다.

“하수정 씨라고 생각해요.”

“그런 소리 마세요. 현태는 이미 결혼했는걸요.”

수정은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겨우 참으며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시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들, 결혼은 언제든 계약 파기처럼 끝낼 수 있다는 거.”

정은의 시선이 이제는 두 사람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출입구로 향했다.

“그러니 아직 끝난 건 아니죠.”

정은의 의미심장한 말이 이어졌다.

수정은 자신의 편을 대놓고 들어주는 정은을 보면서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째서 자신의 편을 이렇게 들어주는 걸까.

“아, 이건 제 명함이에요. 다음에 우리 같이 밥이라도 먹어요. 수정 씨 명함도 주시겠어요?”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아군의 등장에 수정은 오히려 그녀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전 두 사람이 잘 지냈으면 좋겠네요. 현태는 제 소중한 친구니까요.”

수정은 정은과 명함을 교환한 후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분명 친절한 사람이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따뜻한 호의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선뜻 손을 잡기엔 꺼려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수정은 현아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도 정은이 한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아까 받은 명함은 제대로 살피지도 않았다. 수정은 문득 솟은 호기심에 그녀가 내민 명함을 살폈다.

-미래 불임센터 원장, 김정은.

수정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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