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48)화 (75/75)

48화

대신 들고 왔던 종이가방을 현태 책상 위에 톡 올렸다.

“뭔데.”

“초콜릿.”

“왜.”

“으이구, 이렇게 여자를 몰라요. 원래 아프거나 스트레스 많이 받을 때는 단 걸 먹어줘야 한다고.”

현태는 대답 없이 책상 위에 놓인 금박 종이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정이 줬던 마카롱을 가져갔을 때 희우의 표정이 어땠더라.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진심으로 좋아했던 것 같지 않았다.

현태는 고개를 들고 수정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가 사서 갈게.”

“……뭐?”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나 회의 자료 검토해야 해서.”

나가라는 뜻이었다.

수정은 초콜릿을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다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그래. 네가 사서 주는 게 더 좋지. 그럼 난 이거 사무실 사람들하고 나눠 먹어야겠다.”

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매사에 무정하고 냉정한 사람이긴 해도 저를 이렇게 대한 적은 없었다. 수정은 종이 가방을 꼭 쥐고 본부장실을 나왔다.

툭.

수정은 본부장실을 나오자마자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바닥에 떨궜다. 더 이상 들고 있고 싶지 않았다.

“어? 하 팀장님!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복도를 또각또각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공 대리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저가 버린 종이가방을 들고 공 대리가 뛰어오고 있었다.

“여기요! 팀장님 떨어뜨리신 거요.”

공 대리가 얼굴을 붉히며 반짝이는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수정은 그대로 낚아채 휴지통에 버리려다 생각을 고치고 흔쾌히 받아 들었다.

“어머, 감사해요. 안 그래도 이거 공 대리님이랑 나눠 먹으려고 했던 건데. 다른 생각하다가 떨어뜨린 것도 몰랐네요.”

내 편은 많이 만들어 놓을수록 좋았다.

“하핫! 정말입니까? 이거 영광입니다!”

기분이 좋아진 공 대리가 싱글벙글 웃으며 수정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현태의 사무실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수정의 마음은 분노로 들끓었다.

지금까지 어리숙하게 굴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미국에서 있었던 그 많은 시간을 허투루 쓴 게 너무 아까웠다.

기현태의 착한 친구는 자기 자리가 아니었다.

휴대폰을 꺼내 든 수정이 화면을 몇 번 툭툭 건드린 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은 길지 않았다.

전화를 건 사람도, 받은 사람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전화를 받은 쪽이었다.

-시작할게요.

수정은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 * *

하얀색 커피포트에서 물이 부르르 끓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멍하게 앉아 있던 희우는 커피믹스 봉지 하나를 찢어 머그컵에 넣었다. 가루만 부었을 뿐인데도 달달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스푼으로 젓고 있는데 연구실 문이 열렸다. 혜정이었다.

“왔어?”

“너하고 차 마실 생각 없으니까 우리 본론만 하자.”

혜정이 의자에 앉으며 다짜고짜 말했다.

희우는 한숨을 삼키며 머그컵을 들고 의자에 앉았다.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혜정과 대각선으로 마주 보게 앉았다. 서로가 싫은 만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은 것이다.

“나를 물 먹여 놓고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하긴, 점심시간에 보니까 콩나물국하고 밥만 잘 처먹더라. 난 하루 종일 물 한 모금도 삼키기 힘들었는데.”

호로록-

혜정이 쏘아붙이거나 말거나 희우는 달콤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커피는 뜨겁게 마셔야 맛있어.

커피믹스 한 잔이 입에 들어가자 하루 종일 온몸을 잠식했던 피로가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커피믹스가 핏줄로 바로 흡수되는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희우는 입 안에 머금었던 커피를 삼킨 후 혜정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씩씩대며 째려보던 혜정은 막상 희우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의 불성실한 직장 생활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어.”

“거짓말하지 마! 아까 교무실에서 나오는 걸 분명히!”

“혜정아.”

오랜만에 희우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혜정은 움찔했다. 발령을 받은 이후로 희우가 이름을 부른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머, 뭐!”

“난 너한테 크게 관심이 없어.”

“뭐라고?”

혜정의 뾰족한 목소리가 연구실 밖으로 새어 나갔다. 연구실 밖에서 조용히 엿듣고 있던 이슬과 다른 선생님들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네가 지각을 하든, 일과 시간에 다른 곳에 있든 난 관심 없다고.”

“그런데 왜!”

“분명히 말했어. 어디 가서 떠든 적이 없다고.”

“그럼 교감이 어떻게 내가 근무 시간에 백화점에 있던 걸 알아!”

“근무 시간에 백화점에 갔었어?”

희우의 눈이 커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엉망인 친구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교사를 한다고 앉아 있는 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희우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구구절절 설득할 만큼 혜정에게 애정이 있지 않았다.

혜정이 무슨 말을 더하려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희우는 더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듣느라 귀중한 오후 시간을 허비하는 건 사양이었다.

“똑바로 살아. 그리고 애들한테 함부로 하지 마.”

희우가 연구실을 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말에 혜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 뭐라고 했어!”

혜정이 급하게 희우를 홱 돌려세웠다. 그러는 바람에 희우가 들고 있던 머그잔의 커피가 희우의 손에 왈칵 쏟아졌다.

“앗! 뜨거!”

“앗!”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이 새어 나갔다. 밖에서 숨죽여 듣고 있던 이슬이 놀라 문을 벌컥 열었다.

* * *

주차장으로 나오니 현태의 차가 보였다. 희우는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차 옆으로 다가갔다. 더웠는지 차창이 내려져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현태는 눈을 감고 있었다. 피곤해 보였다.

희우는 잠시 망설이다 앞문을 똑똑 두드렸다.

완전히 잠들었던 건 아니었는지 그리 현태는 바로 눈을 뜨고 차 문을 열었다. 차 안에서 망설임 없이 내린 현태가 쑤욱 올라간 시선으로 희우를 내려다봤다.

어쩐지 아득하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빨리 왔네요?”

희우의 질문에 현태는 말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경계심이 사라지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별일 없었어?”

“네. 학교 안인데요, 뭐.”

하루 종일 마음이 쓰였던 사람이 무색해지는 편안한 말투에 현태는 어쩐지 김이 빠지면서도 안심이 됐다.

“그 붕대는 뭐지?”

현태가 희우의 손에 칭칭 감긴 붕대를 보며 물었다.

“아, 이거. 뜨거운 물을 쏟아서요.”

“화상을 입은 건가?”

현태가 붕대가 감긴 희우의 손을 들어 살피며 물었다. 보건실에서 응급처리를 해서 제법 야무지게 붕대가 감겨 있었다.

“심하진 않아요.”

별거 아니라는 듯 희우가 붕대 감긴 손을 휘휘 저었다.

칠칠치 않기는.

평소에도 덜렁대더니 기어이 다치고 말았다. 현태는 한마디 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차 문을 열었다. 다친 건 여잔데 이상하게 화가 났다.

“타.”

조수석을 여는 현태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저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데리러 온다고 한 건지.

희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운전석에 앉은 현태를 바라보며 속으로 구시렁댔다.

“다 들려.”

“네?”

“생각은 안 들리게 하는 게 어때?”

속으로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나와 버린 모양.

희우는 뜨끔하며 입을 말아 물었다. 이 남자 앞에서는 자꾸만 헛짓을 하게 됐다.

“그런데 지금 퇴근 시간 아니잖아요? 아직 5시도 안 됐는데?”

“잠시 나왔어.”

“나 때문에요?”

현태는 또다시 대답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희우는 이렇게 현태가 입을 닫아 버릴 때마다 답답했다.

“원래 이렇게 말을 잘 안 해요?”

희우와 있으면 평소보다 훨씬 더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말을 안 한다니.

큰 도로로 접어든 차 안에는 현태가 틀어놓은 음악이 은은하게 흘렀다.

“경찰이 조사하고 있어.”

“네?”

밑도 끝도 없이 현태가 불쑥 꺼낸 말에 희우의 고개가 운전석 쪽으로 홱 돌아갔다.

“김남후.”

알려주지도 않은 전남친의 이름이 현태의 입에서 나왔다.

희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자식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게 될 날이 다시 오리라곤 생각하지도 않았다.

“일본에서 석 달 전에 귀국했어. 주거지는 지금 알아보는 중이고, 얼마 안 걸릴 거야. 독고희우 씨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 중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신문 기사를 읽듯 건조한 말투였지만 희우는 오히려 이런 현태의 태도에 더욱 안심이 됐다.

차는 어느덧 집 앞에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내리려는 현태를 희우가 만류했다.

“회사로 다시 가야 하잖아요. 그냥 가요.”

“안에 들어가는 거 보고.”

희우의 만류에도 현태는 기어이 차에서 내렸다.

“집에 다 왔잖아요.”

“현관에 들어가야지.”

저만큼이나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희우는 한 번 더 말리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실랑이할 시간에 집에 들어가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희우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고, 현태도 딱히 말을 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깜빡이는 숫자만 고집스럽게 응시했다.

땡!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고 두 사람은 한꺼번에 나오다가 어깨를 살짝 부딪쳤다. 희우의 몸이 휘청 기울자 현태가 재빨리 어깨를 감싸 안았다.

“미안해요.”

“조심해.”

희우는 습관적으로 사과했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왜 내가 사과하죠? 부딪힌 건 기현태 씨인데?”

“그러게. 왜 사과를 하고 그래. 귀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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