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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47)화 (74/75)

47화

교감의 질문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튀어나왔다. 혜정은 머리가 하얘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억울한 눈빛은 덤이었다.

“근무 시간에 옥 선생님을 백화점에서 봤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운영 위원회 학부모님한테서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수업 시간에 자꾸 영화 보여준다고 민원이 들어왔어요.”

“그건 수업 내용하고 관련 있는 내용이라서…….”

혜정이 다급하게 말꼬리를 자르며 대답했지만 교감의 눈매는 구겨진 채 펴질 줄 몰랐다. 변명은 오히려 불쏘시개처럼 교감의 화를 부채질했다.

“그래서 세 시간 동안 내리 영화만 보여줬습니까? 수업이 담임 재량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건 지켜야지요. 옥 선생님 신규도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근무 시간에 백화점이라니요. 조퇴 신청한 날도 아니잖아요.”

날짜까지 들었는지 교감은 세세한 것까지 들먹이며 잔소리를 해 댔다.

혜정은 할 말을 잃고 고개를 푹 숙였다. 도대체 누가 전화를 한 거야. 그러다 언뜻 교무실에 내려오다 마주친 희우를 떠올렸다.

히죽히죽 웃고 있었지. 분명 그게 미주알고주알 다 떠들었을 거야. 제 입장이 난처해 질까 봐 학부모 핑계를 댄 거겠지. 게다가 교무실에 별일 없다고 거짓말까지 했어.

진짜 꼴값이네.

희우가 교무실에서 이런저런 말을 퍼뜨렸다고 생각한 혜정이 교감의 잔소리를 듣는 내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혜정의 의심은 곧 확신으로 굳어졌다. 의기소침해져서 교무실을 나서다 교감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독고희우 선생이랑 동긴데 어떻게 저렇게 다르지? 쯧쯧쯧!”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성질을 못 이긴 혜정은 발을 세게 구르며 계단을 쿵쿵 올라갔다. 우유 상자를 들고 가던 아이들의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당장 교실로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그 정도로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혜정은 씩씩대며 교실 문을 열다가 이상한 기분에 멈추고 교실 푯말을 확인했다.

“우리 반이 아닌가? 맞는데?”

저만 없으면 시장통처럼 교실을 시끄럽게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웬일로 이렇게 조용히 앉아 있어?”

그나마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건 반 아이들밖에 없다 생각하니 부글부글 끓었던 속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반장의 대답에 혜정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1반 선생님께서 독서 활동하라고 하셨어요.”

반장의 눈빛이 뿌듯함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항상 조용한 반을 열망했는데 오늘이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뭐라고? 독고희우 선생이?”

‘님’자도 붙이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심상치 않은 담임의 표정에 아이들은 책에서 눈을 떼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네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반장의 대답 소리가 개미만 했다.

혜정은 크게 숨을 몰아쉬더니 반장과 아이들을 향해 고함을 빽 질렀다.

“너희들은! 선생님 말은 안 듣고 다른 반 선생님 말을 잘 들어?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너희들이 그러고도 우리 반이야? 그 선생님이 그렇게 좋으면 다 그 반가서 수업 들어! 나도 내 말 안 듣고 옆 반 선생님 말만 듣는 애들은 필요 없어!”

발작 같은 혜정의 소리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순해서 평소에 아이들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하던 반장 예진이는 울기 직전이었다.

칭찬을 받을 거라 기대하고 있다가 난데없이 불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뭐해? 안 나가고?”

혜정이 예진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예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두리번거렸다. 반 아이들은 예진과 혜정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나가!”

혜정이 한 번 더 고함을 질렀다. 결국 예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교실 밖으로 나갔다.

이성을 잃은 혜정의 고함이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돼서 나와 봤던 교사들이 복도에 서서 훌쩍이고 있는 예진이를 발견했다.

다른 반 일이라 참견하기가 애매했지만 희우는 망설임 없이 아이에게로 걸어갔다.

예진이는 작년에 희우 반 아이였다.

“예진아, 왜 그래? 선생님한테 혼났어?”

예진이는 마음이 여리고 예의가 바른 아이였다. 또래 아이들이 흔히 하는 욕이나 비속어도 예진이 입에서 나오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아이가 왜 복도에서 울고 있을까, 희우는 걱정이 앞섰다.

희우의 질문에 예진은 끄윽, 끄윽 울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다른 반 선생님 말만 잘 듣는…… 아이는 필요가 없다고, 으윽. 끅”

끝까지 설명을 듣지 않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단번에 파악됐다. 만약 예진이의 부모님이 아이 일에 민감하신 분이라면 이러지도 않았겠지.

혜정이 화풀이하는 아이들은 정해져 있었다. 예진이처럼 대들지 않으면서도 부모님이 관심이 없거나 안 계셔서 편들어 주지도 못하는 아이들. 예진이는 조손가정이었다.

희우는 무척 화가 났지만 지금은 아이를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예진아, 잠시 학년 상담실에 가서 앉아 있을래? 담임 선생님이 예진이가 미워서 화내신 건 아닐 거야. 너희 반 선생님이 널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너도 알지? 가서 따뜻한 물 한 잔 마시면서 마음 좀 가라앉히자.”

아이를 데리고 막 교실 앞을 떠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2반 교실 앞문이 벌컥 열리더니 얼굴이 벌게진 혜정이 눈을 부라리며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놀란 예진이 얼른 희우 뒤로 가서 몸을 숨겼다.

“너 뭐해?”

혜정의 질문은 예진을 향한 것이었다.

예진은 선생님의 질문에 우물쭈물 희우 뒤에서 나와 혜정 앞에 섰다. 희우는 파들파들 떨고 있는 예진의 뒷모습에 속이 상했지만 꾹 참고 차분하게 말했다.

“예진이 진정을 좀 시키고 있었습니다.”

아이들 앞이라 말 한마디 한마디에 더 신경이 쓰였다. 희우의 말에 혜정의 날 선 눈빛이 번뜩 움직였다.

“안 그래도 너한테 할 말 있어.”

혜정은 아이들 앞인데도 말을 높이지 않았다.

복도에서 일어난 소란에 교실 창문 사이로 까만 아이들의 머리통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여기서 계속 서 있다가는 일이 더 커질 것 같았다.

“예진이 너는 다시 교실로 들어가.”

혜정의 서슬 퍼런 말에 예진은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2반 교실로 들어갔다.

아이의 주눅 든 뒷모습에 희우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이들 앞에서 이성을 잃는 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뭐해? 안 따라오고.”

어느새 앞장선 혜정이 뒤를 휙 돌아보며 희우를 향해 쏘아댔다.

“지금 수업 시간입니다. 나중에 쉬는 시간에 이야기해요.”

교실에 아이들만 남겨 둘 수 없었던 희우가 그런 혜정을 스쳐지나가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졸지에 혼자 복도에 남겨진 혜정은 저를 보는 수많은 눈빛을 발견하고 그들을 있는 힘껏 째려보다가 씩씩대며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로 돌아간 희우는 혹시라도 또 혜정이 예진에게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지를까 걱정하며 2반 교실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조용해졌다고 걱정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서럽게 훌쩍이던 예진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 * *

수정은 회의 시간 내내 다른 사람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국에 있을 때는 이렇게까지 조급하지는 않았다. 현태가 그런 허수아비 같은 여자와 결혼식을 올렸다고 해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집안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결혼식이었고, 두 사람이 진지한 관계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현태 곁에 머무는 내내 저 외의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독고희우의 아이가 결혼의 목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살짝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현태에게 과정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몰두하는 건 오직 손에 움켜쥔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꾸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당당한 여자의 태도가 아니꼽고 거슬렸다. 저보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 주눅 들지 않는 덤덤한 태도도 싫었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는 장면이 그려지면 누웠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현태의 손이 닿은 여자의 피부를 뜯어내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어. 다 되돌려야 해.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일을 기현태 네가 전부 이해해 줘야 해.

수정은 무표정하게 회의 자료를 읽고 있는 현태를 보며 생각했다.

“희우 씨는 좀 어때?”

회의가 끝난 후 본부장실로 들어온 수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잘 그린 눈썹 양쪽 끝이 아래로 축 처졌다. 뭔가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나오는 표정이었다.

현태는 수정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주말에 잘 쉬어서 괜찮아졌어. 출근도 했고.”

머리가 묵직하게 아팠다.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현태의 미간에 세로줄 몇 개가 연하게 생겼다.

“아프다면서 출근을 했어? 말리지 않고.”

최대한 진심처럼, 걱정해 주는 것처럼. 수정은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내 말을 들을 여자가 아니라서.”

대답하는 현태의 입술이 비뚤어졌다 빠른 속도로 제자리에 돌아왔다.

“그래?”

그의 표정을 살피는 수정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멋대로 행동하는 여자에 대해 말하는 사람치고는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기현태는 지독한 통제 광이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못 견뎌 했다. 그런데 마음대로 행동하는 희우에 대해 말하면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정말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수정은 초조해져서 목이 바싹바싹 말랐다.

기현태가 편하게 대하는 사람은 저 하나뿐이어야 했다.

“희우 씨가 고집이 센가 보다.”

수정이 떠보듯 한 말에 현태의 입술이 조금 더 길게 늘어졌다.

“조금. 그런데 무슨 일이야?”

현태가 남아 있던 미소를 지우고 물었다.

순식간에 현태의 얼굴에서 사라져 버린 온기에 수정은 살짝 당황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이거 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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