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태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조금 진정이 된 두 사람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엔 현태가 준비한 커피와 메밀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묻고 싶은 게 남은 사람과 듣고 싶은 게 남은 사람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마주 보는 시선엔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사과하지.”
손끝으로 미간을 긁적이던 현태가 고개를 들고 희우를 응시하며 다시 사과했다.
“그게 지금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예요?”
다리를 꼬고, 잔뜩 귀찮은 표정을 한 채, 적선한다는 말투로, 사과하지? 태어나서 처음 마주하는 뻔뻔함이었다.
“독고희우 씨가 원하는 걸 말해. 이혼은 안 돼.”
이혼은 저도 지금 할 생각이 없었다. 지난 4년이 너무 아까웠으니까. 열 달만 버티면 된다. 열 달만.
희우는 이를 악물고 현태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진심 어린 사과.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의심 하지 않겠다는 약속.”
“…….”
현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무언의 긍정으로 이해한 희우가 다음 말을 이었다.
“조금 전 내가 느꼈던 모멸감은 절대 간단한 사과로 해결되지 않아요.”
“보상이라도 해야 하나?”
“진짜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엉망이네요. 정말 최악이에요.”
희우의 극렬한 반응에 현태가 눈매를 찌푸렸다.
“원하는 게 진심 어린, 사과라고.”
지극히 주관적이고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현태는 분명 사과를 두 번 했고, 백 퍼센트 진심이었다. 하지만 독고희우의 기준엔 한참 못 미치는 사과였던 모양이다.
같은 건에 대해 사과를 세 번이나 반복한 적은 없었다. 아니, 사과를 했던 기억 자체가 별로 없었다. 누구에게든, 무슨 일에 관해서든.
희우의 올곧은 눈빛이 현태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네.”
진심이 왜 뭐가 중요하지?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건 말과 행동인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진심 따위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 거 아닌가?
현태는 복잡한 속내와 달리 꼬았던 다리를 풀고 다시 정중하게 사과했다.
“한심하게 굴고 의심해서 미안해.”
현태의 까만 눈동자가 붉은 희우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까보다 더 붉어진 것 같은 건 착각인가.
“멋대로 의심하고 함부로 말하는 일도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당장 눈앞에서 꺼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무척 양호했다.
“약속 지켜요.”
이번에는 진심이 느껴졌는지 희우의 눈빛에서 사납게 번뜩이던 공격성이 옅어졌다.
“이번엔 내 차례. 그 수국.”
수국이라는 말에 희우의 좁은 어깨가 움찔 떨렸다.
조금 전까지 바득바득 대들던 사람은 어디 가고 소심한 겁쟁이가 앉아 있다.
수국이 희우의 무언가를 건드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태는 멈추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움찔움찔하는 모습을 보는 게 묘하게…… 즐거웠다.
다른 새끼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 우는 건 괜찮을지도.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인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현태는 원하는 것에 더 집중하기로 한다.
“누가 보낸 거지?”
“…….”
원해는 대답은 들리지 않고 무릎 위에서 마주 잡은 손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말 안 해 줄 건가?”
한참을 손톱을 뜯어대던 희우가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제법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전 남친이요.”
물기라곤 없는 건조한 대답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아내의 입에서 나온 다른 남자의 존재는 생각보다 훨씬 불쾌했다.
현태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아직도 연락하는 건가?”
추궁에 가까운 현태의 말투에도 희우는 눈빛은 잠잠하기만 했다.
“5년 만이에요.”
“5년?”
이건 또 뭐지?
머릿속이 복잡해진 건 오히려 현태였다. 5년이면 결혼하기 전에 이미 헤어졌다는 뜻인데.
“어떻게 우리 집을 알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
이 와중에도 ‘우리’라는 카테고리에 자신이 포함된 것에 살짝 기분이 좋아진 현태가 얌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슬픈 사연이라도 있나 아니꼬운 마음으로 듣고 있는데 당당하기만 하던 희우의 눈빛이 불안한 듯 흔들렸다. 찰나였지만 현태가 알아차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헤어지고 나서도 집착이 심했어요.”
점점 힘이 없어지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질문한 저가 천하의 잡놈이 된 기분이 들었다.
희우는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현태는 보채지 않았다.
“사귈 때도 집착이 심해서 헤어졌는데 그 뒤로 스토킹이 시작됐어요.”
스토킹이라……. 눈앞에 섬광이 일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지?
잠잠히 이야기를 듣는 현태의 미간에 세로로 주름이 깊게 파였다.
“학교도 아는 것 같은데.”
현태가 학교로 배달됐던 꽃바구니를 떠올리며 물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희우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다른 일이 있었나?”
현태가 설마 하며 물었다.
희우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지 심호흡을 천천히 한 후에 고개를 들었다.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커다란 눈에 눈물이 금세 그렁그렁 매달렸다.
그걸 보는 순간 현태의 마음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들끓었다. 내 것에 욕심내는 새끼에 대한 분노일 뿐이다.
집착하면 기현태도 못지않았다. 내 돈, 내 건물, 그리고 내 사람.
현태의 욕심과 야망을 아는 사람은 그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그건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주지 않았으면 모를까, 기현태에게 한 번 준 물건을 되돌려 받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
“교대에서 만난 사람이었어요.”
캠퍼스 커플이었던 모양. 현태는 다른 남자와 정답게 캠퍼스를 거니는 희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사이가 좋았겠지?
조용히 듣고 있는 현태의 무심한 표정을 확인한 희우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정하고 착한 애였어요. 나를 많이 좋아해 줬고. 그런데 다른 남자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만 봐도 질투를 불같이 성질을 냈어요. 처음에는 그게 좋았는데.”
“좋았다고?”
어느 지점에서 좋았다고 하는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 현태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질투해 주는 줄 알았거든요.”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뜨거운 머그컵을 내려다보며 희우가 픽 힘없이 웃었다.
울다가 웃는 얼굴이 왜 예뻐 보이는지 의아해 하며 현태는 희우의 말을 기다렸다.
“그게 점점 심해지더라고요. 나중엔 자기하고 다른 수업을 듣는 것도 못 견뎌 했어요. 내가 가는 곳, 만나는 사람, 심지어 옷까지 일일이 다 간섭을 하려고 하니까 숨을 못 쉬겠더라고요. 그래서…….”
희우가 미지근해진 메밀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헤어지자고 그랬어요.”
현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새끼는 차여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순순히 헤어져 줬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다시 돌아올 줄 알았대요.”
“나중에?”
헤어졌으면서 왜 나중에 다시 만났을까 궁금했다. 현태가 한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린 희우가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납치당했었거든요.”
“뭐?”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현태는 이제야 희우가 왜 수국 바구니를 집어 던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걸 더럽다고 치우라고 했으니…….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뉴스에도 났었어요. 잠깐이지만.”
희우가 남의 일 이야기하듯 싱겁게 웃으며 차가 든 머그컵을 입에 갖다 댔다.
호로록.
이번엔 마신 것 같았다.
이 여자가 차를 마시는 게 왜 신경 쓰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마음이 편해졌다.
“경찰에는?”
“신고했죠. 구속도 됐었고. 당연히 교사 일은 못 하고요. 그 일이 있고 나서 일본에 가서 산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다시 귀국했나 봐요.”
목소리는 담담한데 컵을 쥔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다.
희우는 차를 더 마시려다 그대로 머그컵을 식탁 위에 올렸다.
궁금한 건 많았지만 담담한 척 떨고 있는 여자를 보니 그럴 수 없었다. 자세한 걸 알아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짙어졌다. 조금 전 사과에 진심이 부족한 건 아니었나 그답지 않은 생각도 잠깐 했다.
“당분간 내 차로 출퇴근하도록 해.”
아무렇지 않게 툭 뱉은 말에 희우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다음에도 문자에 답이 없거든.”
현태의 시선이 희우의 입술에 닿았다.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배고픈 사람이 맛있어 보이는 음식에 시선이 가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비서에게 연락하고.”
거래처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무적인 말투였지만 그의 시선만큼은 끈질기게 희우의 입술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달아 보였다. 말랑한 입술을 벌리고 그 안에 있는 뜨거운 살덩이를 힘껏 빨아 당기면 어떤 기분이려나 궁금했다.
같잖게 노려보는 저 눈빛을 무시하고 다시 달려들고 싶을 만큼.
충동을 참느라 멀미가 날 것 같았다.
현태는 눈을 치켜뜬 희우를 서늘하게 쳐다보다 그대로 뒤돌아섰다. 발정 난 개처럼 들끓는 속이야 혼자 삭이면 그만이었다.
이까짓 게 뭐라고.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가는 현태의 눈매가 사납게 일렁였다.
복도 끝 쪽에 있는 현태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턱, 하고 들리자마자 희우는 숨을 크게 내 쉬었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숨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 지가 더 화를 내고 지랄이지?”
똥 싼 놈이 더 화를 낸다더니 기현태가 하는 짓이 딱 그랬다. 누가 봐도 기현태가 잘못한 일이었다. 문자가 안 간 건 재수 없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지만, 추잡스러운 의심을 한 건 기현태니까.
어쩐지 서러워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