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잠이 든 것도 모르고 있다가 눈을 뜬 희우는 침대에 엎드린 채 잠이 든 현태를 발견했다.
누가 보면 엄청 애틋한 사이인 줄 알겠네.
동그란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현태를 불렀다.
“기현태 씨.”
희우가 팔을 뻗어 엎드린 현태의 어깨를 툭툭 밀었다. 손이 닿는 것도 싫어 손끝으로 꾹꾹 찔렀다.
허리를 숙인 채 침대에 엎드려 있던 현태가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팔을 베고 있던 이마에 빨간색 동그라미가 생겼다.
“좀 어때.”
현태가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피곤한지 짧은 물음 가운데 하품이 섞였다.
“괜찮아요. 간호사 좀 불러주세요. 링거 다 맞았어요.”
희우가 짜부라진 링거 팩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차 안에서도 희우는 입을 꾹 다문 채 차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현태가 앉은 쪽의 공기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현태는 여전히 외박에 대해 변명조차 하지 않는 희우가 괘씸했다. 꽃바구니를 던져 버린 것도 단순한 변덕이겠거니 했다.
잘못한 게 누군데? 당돌하고 같잖기도 하지.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현관을 지나자마자 엉망으로 망가진 수국 바구니가 다시 보였다.
다시 눈앞이 아찔했다. 희우는 그대로 방에 들어가려다 발을 질질 끌며 걸어가 수국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이리 줘.”
성큼 다가온 현태가 희우에게서 꽃바구니를 낚아챘다. 희우는 멍하게 서 있다가 현태가 쓰레기봉투에 바구니를 쑤셔 넣는 걸 본 후에 뒤돌아섰다.
약 기운 때문인지 몸이 천근만근이라 당장에라도 침대에 쓰러져 눕고만 싶었다.
방으로 들어간 희우는 불을 켤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문부터 닫았다. 아니, 닫으려고 했다.
현태가 닫히다 만 문을 잡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싫어서 희우가 힘껏 문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뭐죠?”
희우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눈을 부릅떴다.
환하게 켜진 센서 등을 등지고 선 현태는 거대한 벽처럼 보였다. 문득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희우는 더 힘껏 문을 잡아당겼다.
“이거 놔요!”
떨지 않으려 애썼지만 목소리가 저절로 갈라졌다. 하지만 희우의 힘은 현태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약속을 먼저 어긴 건 너야.”
현태가 짓씹듯 한 말에 희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무슨 당치도 않은!”
“저놈이랑 같이 있다 온 건가?”
현태의 번들대는 눈이 쓰레기봉투 안에 있는 수국 바구니로 향했다.
“하!”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더니 지금이 딱 그랬다.
희우는 현태의 황당한 발언에 조금 전까지 몸이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뭐라고?”
희우가 이를 으득 물며 한 말에 현태의 서늘한 눈매가 한층 더 차게 식었다.
“원래 뒤가 구린 사람이 그런 의심도 하는 거겠죠. 기현태 씨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물론 상관도 없지만!”
분노로 가득 찬 희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화가 나서 울고 싶은 건 오랜만이었다.
“나를 기현태 씨하고 동급으로 취급하진 말아요. 기분 더러우니까.”
“말 다 했어?”
“아니요. 도대체 날 뭐로 보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지는 거예요? 아무리 애정 따위 없는 결혼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아요.”
애정 따위 없는 결혼이라.
이 와중에 이딴 말이 더 거슬리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현태는 미칠 지경이었다.
꽃바구니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묻지 않고 넘어간다면 정말 돌아 버릴지도 몰랐다.
“태양 리조트.”
흐트러진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는 현태의 말투에 짜증이 가득했다.
이 정도로 쩨쩨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말과 행동, 마음. 어느 것 하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게 없었다.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질주했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뜻으로 쳐다봤지만 희우는 당황하기는커녕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게 뭐요!”
오히려 뭐 어쩌라고, 하는 말투였다. 멘탈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여자였다.
“거기서 묵었다는 거 내가 알고 있다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멘탈이 강한 건 매력 있지만 안하무인 뻔뻔한 태도는 질색이었다.
“당연하…….”
희우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그러니까 기현태 씨는 내가 저 수국을…….”
다시 말을 멈춘 채 마른침을 삼키고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을 현태는 말없이 응시했다.
“저 수국을 보낸 사람하고 내가 태양 리조트에서 뒹굴다 왔다, 이거군요.”
“…….”
평소의 현태라면 희우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걸 충분히 알아차렸을 거다. 하지만 지금 현태의 머릿속엔 ‘수국 바구니, 남자의 편지, 태양 리조트, 희우의 외박’ 외에 다른 건 없었다.
이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나. 그런데 이 여자는 왜 이렇게 당당한 건가.
현태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분노로 똘똘 뭉친 희우의 말이 튀어나왔다.
“돌았나, 진짜.”
“뭐?”
사나운 반응에 현태가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귓구멍이 막혔어? 진짜 부부도 아닌데 의처증이니? 어떻게 살아왔으면 그런 더러운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건데?”
희우가 턱을 치켜들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이 와중에도 열에 달떠 붉은 입술이 짜증 나도록 예뻤다.
이 상황에서 저 부드러운 걸 자근자근 씹고 싶다면 미친 거겠지.
“지난밤 같이 있던 사람 누구야.”
현태가 붉은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물었다. 대답이 듣기 싫기도, 조금이라도 빨리 진실을 알고 싶기도 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선 후자가 나았다. 하지만 정말 그걸 원하나?
뭘 원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희우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대며 대답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
현태는 그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다. 내가 뭘 놓친 게 있나? 다급하게 기억을 더듬었지만 전혀 생각나는 게 없었다.
“내가 분명히 수련회 간다고 했잖아.”
수련회? 그건 또 뭐지?
“아니. 그런 말 들은 적 없어.”
사납게 독기가 올랐던 눈에 당혹감이 더해졌다.
“당연하지! 전화 안 받아서 내가 문자 보냈잖아!”
희우가 가방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탕탕 두드리며 소리쳤다.
현태는 눈앞이 아찔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문자는 받은 적 없었다.
“여기! 봐!”
아까부터 말이 반 토막이었다. 화가 잔뜩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희우가 휴대폰 화면을 켜서 현태 앞에 딱 들이밀었다.
“이게 뭐지?”
“눈도 삐었어? 문자잖아. 내가 당신한테 보낸 문자.”
“받은 적 없어.”
문자를 보낸 시간대를 확인한 현태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뭐?”
희우가 눈을 크게 뜨며 묻자 현태가 자기 휴대폰을 꺼내 희우에게 내밀었다.
현태는 휴대폰을 낚아채 정신없이 살피는 희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뿌연 휴대폰 빛에 비친 동그란 이마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이 눈에 거슬렸다. 떼어 주고 싶었다.
맥락 없는 감정이 툭툭 튀어나오는 건 달갑지 않았다.
현태의 집요한 시선이 다시 희우에게서 한 뼘 멀어졌다.
희우는 현태에게 받은 휴대폰을 다급하게 뒤져 저와 주고받은 문자를 살폈다. 아무리 찾아도 수련회 간다는 문자는 보이지 않았다.
“답장이 없어서 전화도 했어. 안 받아서 그만 걸었고, 애들 때문에 나도 바빴어. 알겠지만 놀러 간 게 아니라서.”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부는 희우를 보며 현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살면서 다른 사람과 대화에서 말문이 막힌 건 처음이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쳐 날뛰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감정이 이렇게 들끓었던 건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에 뒤늦게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짙게 밀려왔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 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이번 일에 대한 잘못은 저에게 있다는 거였다.
하긴. 리조트가 밀회를 즐길 장소로 적당한 장소는 아니지.
게다가 태양 리조트는 수학여행이나 워크숍 숙소로 많이 쓰이는 곳이었다. 어제는 왜 이 생각이 안 났던 걸까.
혼자 미쳐서 날뛰었던 지난밤과 조금 전 희우에게 민망하게 퍼부었던 자신의 헛소리를 삭제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불찰이야.”
현태가 잘못을 인정하는 말을 뱉었음에도 불구하고 희우의 날카로운 눈빛에서 활활 타오르는 노기는 옅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와는 별개로 아까부터 현태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있었다.
“왜 말이 짧지?”
너무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라고 대답할 거라 예상했다.
“너 같으면 예의 바르고 싶겠니?”
희우의 당찬 대답이 튀어나왔다. 바락바락 대드는 입술이 얼마나 예쁜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