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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43)화 (70/75)

43화

현태는 문자를 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왜 못 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연락이 안 된 하루, 그는 저를 연락도 없이 다른 남자와 뒹굴다 온 여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래, 뭐 눈에는 뭐 만 보이는 법이니까. 저를 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던 하수정이 떠올랐다.

넌 뭐가 그렇게 떳떳해서 이러는 건데.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와 싸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이 방문을 닫고 어둠 속으로 꼭꼭 숨어 버리고 싶었다.

“나와서 치워.”

현태가 쐐기를 박았다.

희우는 하는 수 없이 나가기 위해 문을 밀었다. 하지만 현태가 잡고 있어 방문은 벽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다.

“비켜요.”

희우가 낮게 으르렁대자 현태가 몇 초간 뚫어지게 바라보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희우는 그가 문에서 손을 놓자마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현태가 치웠는지 바구니가 수국을 반쯤 흘린 채 넘어져 있었다. 망가진 모습은 더 소름 끼쳤다. 마치 그때의 저를 보는 것 같아 눈을 감고 싶었다.

양말이 축축해져 고개를 숙이니 오아시스에서 나온 물이 복도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기현태의 양말도 젖었다.

미안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저깟 양말 젖는 게 대수라고.

희우가 어질러진 복도를 치우는 동안 현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누가 보면 제대로 치우고 있는 게 맞나 감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못마땅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현태의 눈매가 서늘하게 좁혀졌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주워 담을 수도 없었지만 변명 한마디 하지 않는 희우를 보니 주워 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오해라고 말할 줄 알았다. 설명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희우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현태의 말이 사실이거나, 대꾸할 가치도 없다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물기에 젖어 글씨가 번지기 시작한 엽서가 눈에 들어왔다. 현태가 살짝 밟고 있어서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현태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엽서를 바라보다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었다.

애정을 가득 담은 글씨가 물기를 잔뜩 빨아들인 종이 때문에 파랗게 번지고 있었다.

-말랑이에게…….

아직 번지지 않은 글자가 들어왔다. 현태는 들고 있던 엽서를 희우가 있는 쪽으로 툭 던졌다.

“이 사람과 함께 있다 온 건가?”

쓰레기봉투에 꽃대와 오아시스를 집어넣고 있던 희우가 바닥에 떨어진 엽서를 보고 하던 것을 멈췄다.

현태는 뭐라고 더 쏘아붙이려던 것을 멈추고 천천히 희우 곁으로 걸어갔다.

희우는 여전히 허리를 어정쩡하게 숙인 채 바닥에 붙어 버린 엽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저주에 걸려 동상으로 변한 사람처럼 미동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얼이 빠진 희우의 표정이 보였다.

“이봐. 독고희우 씨.”

현태가 어깨를 살짝 건드리자 희우는 감전당한 사람처럼 퍼뜩 놀라며 그를 올려다봤다. 희우의 얼굴을 본 현태는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희우의 표정이 평소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희우는 겁에 질려 있었다.

겁에 질릴 만큼 심하게 말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당황한 현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희우를 살펴보기만 하는데, 희우가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이봐!”

놀란 현태가 희우 앞에 쪼그려 앉아 좁은 어깨를 흔들었다. 희우의 시선은 여전히 떨어진 엽서에 고정되어 있었고, 힘을 잃은 몸은 현태가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잠시만 누워 있을게요. 이건 내일 치울게요. 그냥 둬요.”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었다. 극도로 피로해 보이거나, 말할 힘도 없는 사람 같았다. 희우는 스르륵 일어나 불이 캄캄하게 꺼진 방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현태가 손을 뻗은 순간 희우가 그대로 쓰러졌다.

* * *

코끝을 스치는 공기가 묘하게 서늘했다. 희우는 눈을 천천히 끔벅거렸다. 느린 눈꺼풀만큼 사고도 느리게 진행됐다.

“괜찮아?”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희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조금 더 정신이 맑아지니 시야가 또렷해졌다.

벽도, 천장도 온통 하얀 이곳은 병원이었다. 응급실인가 했는데 1인실이었다. 그것도 더럽게 넓은.

병실이 넓은 것도 짜증 났고, 벽이 하얀 것도 짜증 났다. 하지만 가장 짜증 나는 건 저를 부축하기 위해 뻗어온 현태의 팔이었다.

희우는 눈을 감으며 그의 팔을 느리게 밀어냈다. 그의 손에 닿는 게 몹시 불쾌했다.

“누워 있어.”

저를 밀어내는 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태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희우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지금 집에 가고 싶어요.”

“갑자기 쓰러졌어. 내 말 들어.”

현태도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다고 들을 희우는 더더욱 아니었다.

희우는 그대로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손등에 꽂힌 링거를 발견했다. 링거액이 아직 반이나 남아 있었다. 그냥 뽑아 버리고 싶었지만 이 와중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청승이다.

희우는 마음을 바꿔 다시 침대에 누우며 눈을 감았다. 새하얀 조명 때문인지 눈을 감아도 눈이 부셔서 한쪽 팔로 두 눈을 가렸다.

“이것만 다 맞고 갈 거예요. 입원할 필요 없어요.”

“어디 아픈가?”

지병이 있냐는 뜻이겠지. 희우는 그가 자신을 아이를 낳아 줄 건강한 대리모쯤으로 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어이없게도 픽 웃음이 났다.

“뭐가 우습지?”

현태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아까부터 희우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그렇게 아끼던 수국을 던져 엉망으로 만든 거 하며, 더러운 집 안을 그대로 두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 것, 마지막으로 그 눈빛. 모든 사고가 정지해 버린 것 같은 눈빛은 분명 공포를 담고 있었다.

“아픈 곳 없어요. 그리고 같은 말 반복하기 싫으니까 입 좀 다물어요. 잠 좀 자게.”

희우가 여전히 눈을 가린 채 느리게 말했다.

귀찮아 죽겠으니 저리 꺼지라는 말로 들렸다.

질문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에게 꼬치꼬치 캐묻기가 그랬다. 장소도 적당하진 않았다.

현태는 답답한 마음에 병실 밖으로 나왔다.

저답지 않게 감정이 들끓었다.

생각해 보면 그리 화를 낼 일도 아니었다. 법적으로 부부이긴 해도 둘 사이에 있는 거라곤 허접한 계약서뿐이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지.”

밖으로 나온 현태는 담배를 꺼냈다가 병원이라는 걸 깨닫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담배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기분이 엿 같은 날에는 한 번 깊게 빨고 나면 기분이 나아졌다.

지이이잉-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틀었을 때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현태는 보지 않아도 누가 걸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시간에 저에게 전화할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여보세요.”

-현태야! 벌써 자는 거야?

수정의 목소리는 야밤에 어울리지 않게 쾌활했지만 듣고 있으니 피로감이 예리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야.”

피곤함에 눈이 뻑뻑했다. 현태는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느리게 물었다.

-오늘 너 엄청 힘들어 보여서. 걱정되기도 하고.

“괜찮아.”

대답하는데 한 무리의 의사들이 복도를 빠르게 지나갔다.

-왜 그렇게 시끄러워? 밖이야?

눈을 동그랗게 뜬 수정의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수정은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때도 있었다.

“병원.”

-어디 아파?

수정의 목소리가 단번에 높아졌다. 목소리만으론 당장에라도 뛰어올 기세였다.

“와이프가 아파.”

-와이……프? 어디가?

잠시 끊어졌던 수정의 말이 다시 평소의 발랄한 말투로 돌아왔다.

“나중에. 지금은 끊자. 피곤해.”

-……어. 알았어. 아참, 현태야.

현태는 대답 대신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냥 끊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수정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

-네 와이프, 희우 씨 어디 갔다 왔는지 말했어?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이 길게 나와 버렸다. 현태는 이제는 정말 전화를 끊어야겠다 생각했다.

“나중에. 끊을게.”

멀어지는 휴대폰 너머 다급한 수정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현태는 무심한 표정으로 종료를 눌렀다. 수정이 무척 섭섭해 하겠지만 지금은 친구의 기분까지 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한숨을 쉴 때마다 제 손을 완강하게 밀어내던 희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잘못한 사람이 누군데.

현태는 희우의 손이 닿았던 자신의 팔뚝을 잠시 바라보다 인상을 찡그리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여자였다. 수정을 신경 쓰는 것과는 좀 달랐다.

한 번 보면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 수정과 달리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머릿속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갉작였다. 약을 먹기엔 애매한, 그럭저럭 견딜 만한 두통 같은 여자였다.

“쯧!”

현태의 시선이 유리 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로 옮겨갔다. 표정이라곤 없는 얼굴은 삼일 밤을 새운 것처럼 버석했다.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한 후 현태는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희우는 잠들어 있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이 얼굴 옆으로 툭 떨어져 있었다. 의사도 있고, 간호사도 있으니 굳이 자신까지 있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현태는 자연스럽게 침대 옆에 앉았다.

열이 채 식지 않은 입술이 얄밉게 붉었다.

저 입술을 다른 누군가가 빨았으려나.

이런 상황에서도 제 것을 탐낸 그 누군가가 괘씸했고, 고작 든 생각이 이런 거라 기가 찼다.

11시 30분.

평소라면 피곤하지도 않을 시간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머리가 묵직하고 눈꺼풀이 뻑뻑했다. 삼 일 밤을 새운 것처럼 몸이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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