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카드에 빼곡한 하트 숫자만큼이나 현태의 미간이 험악하게 찌그러졌다.
펼친 카드를 읽는 현태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말랑이에게?”
읽기에도 민망한 별명은 독고희우와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대나무 보다 열 배는 더 뻣뻣한 그 여자에게 가당키나 한 별명인가. 어이없는 마음은 조소와 함께 흘려 버리고 작은 엽서를 꽉 채운 네모반듯한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말랑이에게.
수국 바구니를 집으로 가지고 가는 걸 봤어. 내가 보낸 꽃바구니를 소중하게 간직해 주는 네 모습을 보면서 너도 아직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깨달았어.
희우야, 비록 지금은 헤어져 있지만 우리 마음이 변하지 않는 이상 다시 함께할 수 있을 거라 믿어. 매일매일 네가 보고 싶어. 너와 함께 한 시간이 사무치게 그리워. 보고 싶어. 사랑해, 언제까지나. NH가.
“NH? 농협이야? NH는 무슨.”
현태는 신경질적으로 엽서를 구겨 옆으로 홱 집어 던졌다.
‘사랑해, 언제까지나.’
목소리도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를 바라보며 활짝 미소 짓는 희우의 모습이 상상이 됐다.
지금도 같이 있는 건가.
제일 중요한 계약서를 위반했으니 돌아오는 즉시 내 마음대로 해도 될 테지.
목표에 쉽게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기분이 엿 같았다.
만약 독고희우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땐 어떻게 할까.
비록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헤어질 수도 없었다. 현태에게 이혼은 사업 실패와도 같은 의미였다. 인생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단어 중 하나였다.
“하아…….”
현태는 말도 안 되는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에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억지로 결혼한 아내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떨쳐 버리려고 해도 희우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장면이 자동으로 재생됐다. 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몇 번을 망설이던 현태는 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희우의 번호를 누르려던 순간 휴대폰이 먼저 떨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순간 희우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얼른 통화 버튼을 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는 희우가 아닌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주변 소음에 묻힌 남자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여기 여자분이 술에 취해서 쓰러져 계시는데 이 번호를 알려주셔서요.
현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희우가 술에 취해서 아무 데서나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얼마나 마셨기에.
탐탁지 않은 마음과 반가운 마음이 한데 엉겼다. 술에 취한 건 마뜩잖았고 자기 번호 알려준 건 기특했다.
현태는 마음이 바빠졌다.
“거기가 어딥니까.”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재킷을 낚아채며 물었다.
* * *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사람은 희우가 아니었다. 현태는 다소 황망한 마음으로 테이블에 엎드려 잠든 수정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현태가 등장하자 바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석처럼 모아졌다. 처음엔 훤칠한 몸 때문에 놀랐다가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드는 얼굴에서는 눈을 떼지 못했다.
현태는 바텐더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수정의 어깨를 흔들었다. 에어컨 바람 때문에 드러난 어깨가 서늘했다.
“일어나 봐.”
“으음……”
수정은 잠결에 현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배시시 웃었다.
역시 올 줄 알았어.
현태가 이곳에 가족이 없는 자신을 외면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일부러 과하게 술을 마셨다. 현태에게 저가 어떤 존재인지 확인받고 싶었기에, 바텐더가 물어보는 연락처에 현태 번호를 댔다. 휴대폰 전원은 일부러 꺼 놨다. 자기 전화로 걸면 현태가 안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모든 상황이 수정의 의도대로 착착 흘러갔다.
“어? 기현태다.”
반쯤 풀린 눈으로 늘어지게 웃는 수정을 본 현태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 데려다줄게.”
“역시 나한텐 기현태밖에 없어. 너도 그렇지?”
수정이 둔해진 혀 때문에 느릿느릿하게 물었다.
다른 날 같으면 넘어가기 위해서라도 대충 답했을 현태는 말이 없었다.
“어? 왜 대답이 없지?”
수정이 눈을 부릅뜨며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취했다. 일어나.”
수정이 재차 물어봐도 현태는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수정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름 서운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미간이 찡그려진 걸 보니 현태도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 수정은 더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한걸음에 달려와 준 것만으로도 일단은 만족스러웠다.
역시 난 현태에게 특별한 존재야.
“알겠어. 데려다줘. 나 어지러워.”
수정이 현태의 목에 매달리며 웅얼거렸다.
* * *
약을 먹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깬 희우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많이 잔 것 같은데 겨우 30분이 지났다. 이슬은 나갔는지 방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약 기운 때문에 머리는 멍했는데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씻으려고 욕실로 가던 도중 희우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부재중 전화는 한 통도 없었다.
“너무하네.”
솔직한 심정이었다. 몸이 아파서 그런지 이상하게 더 서러웠다.
희우는 휴대폰을 던지듯 침대 위에 내려놓고 욕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누가 본 것도 아닌데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는 게 자존심 상했다.
“땀 때문에 찝찝해서 좀 씻어야겠어.”
듣는 사람도 없는데 변명처럼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희우는 욕실 문을 닫았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침대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진동과 함께 깜빡였다.
한참을 떨어대던 휴대폰은 희우가 나오기 직전까지 울려대다가 시치미를 떼듯 뚝 멈췄다.
* * *
수정이 새로 얻은 오피스텔은 현태의 빌라와 가까운 곳이었다.
늘 제 곁을 맴돌았던 수정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수정이 알려준 주소로 가기 위해선 현태의 집을 지나쳐야 했다. 수정이 퇴근할 때마다 이 길을 지나간다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기분이 나쁜 건지, 찜찜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미안한 건지.
저조차도 명확하게 정의 내려지지 않는 애매한 감정에 현태의 눈매가 구겨졌다.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에도 수정은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렸다.
“나는 친구가 너밖에 없어. 나한테 너 말곤 아무도 없어, 현태야.”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밀번호가 뭐야.”
자꾸 주저앉는 수정을 일으켜 세우며 현태가 물었다.
“일공삼공.”
현태의 생일이었다.
현태의 눈매가 더 구겨졌다.
현태는 수정을 집에 침대에 눕힌 후 거실로 나오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번호를 누를 필요도 없었다.
혹시라도 집을 나온 사이 퇴근하진 않았을까? 그럴 리는 없지만 저를 찾지 않을까 살짝 기대도 됐다. 하지만 현태의 이런 기대는 1분이 채 되지 않아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희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유치한 편지와 함께 배달된 꽃바구니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기분이 더러웠다.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방문이 딸깍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현태는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깊은 한숨을 뱉었다.
“현태야.”
저를 부르며 거실로 걸어 나오는 수정은 속살이 훤히 비치는 속옷만 걸치고 있었다.
“술주정이 바뀐 모양이네.”
놀라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현태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오히려 저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 같아 수정은 속이 상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수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술 핑계를 대서라도 현태의 마음을 흔들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너무 어리석게 굴었어. 그런 여자도 현태 옆에 있을 수 있는데 나라고 못 할 거 없잖아.
수정은 스스로에게 자신 있었다. 아름다웠고 유능했으며 기현태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수없이 많은 여자들이 접근했어도 결국 현태 곁에 남은 건 저뿐이었다.
난 다른 여자들과 달라.
수정은 천천히 현태에게 다가가며 상체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작은 천 쪼가리를 풀어 버렸다.
툭-.
수정은 들고 있던 레이스 조각을 바닥에 던지듯 놓았다. 꼿꼿하게 솟은 것만 가까스로 가리고 있던 것을 풀어내니 한 손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풍만한 가슴이 어둠 속에서 탐스럽게 출렁였다.
아름다운 나신은 실내조명을 받아 조각상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현태의 시선이 가린 것 하나 없는 수정의 가슴에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제 수정과 현태의 거리는 한 발자국도 되지 않았다.
수정이 뿌린 향수가 위스키 냄새와 섞여 아찔하게 현태를 덮었다.
이리 와서 나를 만져 줘.
수정이 애타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현태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현태를 처음 봤을 때부터 10년 동안 꿈꿔 왔던 순간이었다. 이리 와서 나를 움켜쥐어. 내 안으로 거칠게 파고들어.
아직 안기지도 않았는데 아랫배가 아릿하게 뜨거워졌다.
“현태야. 널…….”
현태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제 두 사람의 사이는 한 뼘도 되지 않았다.
둥글고 말랑한 살이 마주 선 현태에게 닿아 살짝 눌려 아찔한 골이 더 깊어졌다.
나를 만져, 현태야. 제발.
수정은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이대로 현태에게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안기고 싶었다. 자신의 뜨거운 몸 안을 현태로 채울 수만 있으면 무엇이든 내 줄 수 있었다.
“술주정이 과하다.”
현태의 말투는 차분하고 건조했다. 그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아찔하게 드러난 상체를 덮어 주며 싸늘한 눈빛으로 수정을 바라보았다.
안 돼.
수정은 현태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한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걸 감지했다. 이대로 가 버린다면 모든 게 끝이었다. 더 이상 그의 곁에 친구로 남는 것도 불가능할지 몰랐다.
“나 너무 더워, 현태야.”
현태가 바에 데리러 왔을 때부터 수정의 머릿속은 얼음처럼 말짱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순간만큼은 만취해서 기억에 남지 않을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수정은 현태가 걸쳐준 재킷을 휙 던져 버리고 그대로 거실 바닥에 웅크리고 드러누웠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술기운이라 우기며 넘겨 버리면 그뿐이었다.
이제 현태가 저를 안고 침대에 눕혀주기만을 바랐다. 당장 그의 여자가 되진 못하더라도 속살에 닿은 손길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차근차근해 나가면 돼.
이런 내 모습이 익숙해지도록. 나를 네 여자로 만들고 싶어서 돌아 버리도록. 다시 한번 내가 벗은 모습이 보고 싶어지도록.
하지만 현태의 손이 수정의 맨몸에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