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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37)화 (37/75)

37화

희우는 벌떡 일어나 그대로 나가려다 다리 아래로 드레스가 툭 떨어지는 바람에 옷을 갈아입었다. 방문을 열고 나갔지만 이미 늦은 시간이라 거실엔 불빛 한 점 없이 깜깜했다.

“하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시간을 확인한 희우는 괜히 아무도 없는데 혼자 흥분한 것 같아 머쓱해졌다.

“일어난 김에 세수나 하고 자자. 독고희우, 더러워 죽겠어.”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 있던 현태는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았다.

몇 시간 전. 까무룩 잠든 희우를 조심스럽게 안아 침대에 눕히면서 불편할 것 같아 등 뒤의 지퍼만 열어주었다. 하지만 현태는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대로 희우가 입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것을 다 벗겨 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와인을 제법 많이 마신 까닭인지 희우는 거실에서 방으로 옮겨오는 동안에도 잠이 깨지 않았다. 이대로 옷을 다 벗긴다고 하더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갈등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었다.

손에 닿던 피부의 부드러운 감촉이 잊혀지지 않았다. 내 것인데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애가 닳았다. 도둑놈에 미친놈이라고 욕해도 좋았다.

온통 신경이 희우가 있는 방으로 향해 있는데 그녀의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쿵쿵대는 발걸음 소리는 자신의 방을 향하고 있었다.

기대하는 마음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그대로 돌진할 것 같던 씩씩한 발소리는 얼마 안 가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들리는 방문 닫히는 소리.

현태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힘이 빠진 사람처럼 털썩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게 무슨 꼴인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발정 난 개가 된 기분이었다.

* * *

희우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현태의 방문을 두드렸다. 물어볼 게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똑똑 두드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아직 자나?”

똑똑.

“기현태 씨? 출근 안 해요?”

희우는 아까보다 목청을 좀 더 키웠다. 여전히 방 안에서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희우는 방문을 빼꼼 열었다.

“어? 없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먼지 한 톨 없어 보이는 방 안은 칼같이 정리, 정돈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보기 좋으라고 살짝 비스듬하게 세워두었던 액자들까지 반듯하게 줄 세워져 있었다.

“내가 청소했을 때보다 훨씬 깔끔하네.”

희우도 청소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현태의 방 안은 차원이 달랐다. 마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정돈된 호텔 방 같았다.

안에 들어갔다간 현태가 눈치챌 것 같아서 그대로 방문을 닫았다. 현태는 아침 일찍 출근을 한 모양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 들어 희우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미친. 뭘 섭섭해하는 거야. 정신 차려!”

* * *

별다를 것 없는 날들이 흘렀다. 의외로 상우 엄마도 조용해 이대로 넘어가나 싶었다. 어쩌면 다행이다 싶기도 했고, 한편으론 사과를 받지 못해 언짢았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교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스트레스가 정수리를 뚫고 치솟을 것 같았지만 희우는 마음을 겨우 갈무리한 후 교장실로 향했다.

“지난번 읽던 책, 마저 읽자. 독서 노트 쓰는 것 잊지 말고! 소개 글 그대로 베끼면 다시 쓰게 할 거야!”

여기저기서 터지는 탄식에 희우가 심술궂게 웃었다.

난 애들이 저럴 때가 제일 좋더라. 흐흐흐.

기분 좋게 교실을 나섰을 때와 달리 교장실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토요일 파티장에서 상우 부모님을 만나긴 했지만 아직까지 개운하게 일이 해결된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오오오! 독고 선생! 어서 와요!”

희우가 문을 열자마자 교장이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희우를 반갑게 맞았다. 지난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라 희우는 당황하여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뭐해요, 여기 앉지 않고.”

교장은 희우에게 비어 있는 소파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테이블 위에는 꽃차 두 잔이 놓여 있었다.

“들어요. 향이 아주 좋아요. 독고 선생, 꽃차 좋아하나요?”

“네, 감사합니다.”

희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교장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발그레한 광대는 동그랗게 뭉쳐 있고, 입술 끝은 버선코처럼 산뜻하게 들려 있었다.

불길한데…….

결국 희우는 꽃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먼저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뭔가요. 교장 선생님.”

교장에게 품고 있는 안 좋은 감정이 겉으로 드러날까 최대한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아.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이야기했던 그 상우 학생 건 말입니다.”

“전 사과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교장 선생님.”

희우는 억울한 마음에 저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교장은 크게 놀라며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아이고, 독고 선생님 마음이 많이 상했네요.”

“…….”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마음이 상한 건 맞았고, 교장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잠시 희우의 표정을 살피던 교장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상우 어머님께서 독고 선생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 하십니다. 오해가 있었다고요. 아! 마침 저기 오시네요.”

교장이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상우 엄마의 발걸음은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하이힐을 신고 있던 지난번과는 달리 내빈용 슬리퍼도 얌전히 신고 있었다.

액세서리 하나 착용하지 않은 무채색 옷차림도 꽤 수수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상우 엄마가 교장실로 들어와 희우를 보자마자 허리를 꾸벅 숙였다.

희우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과를 받고 싶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상우 어머니!”

깜짝 놀란 희우가 얼른 다가가 허리를 세워 주었지만 희우와 눈을 마주친 상우 엄마의 허리는 다시 아래로 푹 숙어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상우한테도 잘 일러두었어요. 그러니까 너무 화내지 마세요, 선생님.”

교장은 하루아침에 태도가 싸악 달라진 상우 엄마의 모습에 싱글벙글했다. 갑자기 태도가 바뀐 이유가 궁금했다.

어제저녁에 갑자기 독고 선생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일이 잘 풀리겠다 예상은 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통쾌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왜 찜찜하지?

교실로 돌아온 희우는 뒷자리에 뚱한 얼굴로 앉아 있는 상우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의자에서 흘러내릴 것 같은 자세로 앉아 샤프를 성의 없게 쥐고 독서 노트를 끼적이고 있었다.

아, 진심으로 한 사과가 아니구나. 기현태가 남편이기 때문에 받을 수 있었던 사과구나.

상우를 물끄러미 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희우는 쓰게 웃었다.

나는 결국 사과를 받지 못한 거네. 더러운 세상. 그래도 덕분에 그럭저럭 해결됐으니 고맙다고 해야겠지.

아이들이 책 읽는 모습을 물끄러미 살피던 희우는 고민에 빠졌다.

퇴근길에 작은 선물이라도 사야 하나. 무엇을 살까 하다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저를 올려다보던 현태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아아악-

얼굴이 불에 덴 듯 붉어져 급하게 부채질을 했다. 눈빛은 또 왜 그랬담.

희우는 현태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열심히 부채를 흔들었다.

금세 잠든 탓인지 잔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럴 땐 아무 데서나 잘 자는 무던한 성격이 꽤 고마웠다.

* * *

출근한 후에도 수정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희우와 나란히 서 있던 현태의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여자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현태의 단단한 팔, 어머니 유품인 다이아몬드 목걸이.

빼앗긴 기분이었다.

현태의 옆자리도, 그 목걸이도.

원래 주인은 나였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현아에게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내일 저녁 식사 어때? 우리 할 말이 꽤 많을 것 같은데.

문자를 읽는 싸늘하게 식은 눈매와 달리 입꼬리는 위로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 우울했던 마음에 희망이 비집고 들어왔다. 기현아가 내 편이라는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했다.

문자에 대한 답을 보낸 수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태에게 가야 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한 현태는 묵직한 두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날 같으면 찡그린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냐고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수정은 별말 없이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무슨 일인데?”

현태는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로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수정은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현태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나 오늘 생일. 알고 있지?”

“아…….”

“아?”

현태의 망연한 표정을 본 수정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설마 잊고 있던 거야?”

현태는 한 번도 수정의 생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망감에 눈앞이 흐려졌다.

수정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본 현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근래 온통 희우에게 정신을 쏟다 보니 수정의 생일을 잊었다. 현태는 원래도 누구의 생일을 잘 챙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수정이 워낙 생일 언저리가 되면 주문처럼 외우고 다녀서 저절로 외워진 것이었다.

“와이프 생겼다 이거야? 난 네 와이프랑 같이 먹으라고 마카롱도 챙겨 줬는데.”

현태가 수정의 생일을 신경 쓰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마 오늘 생일도 혼자 보내야겠지. 수정의 가족은 모두 미국에 있었다.

현태는 한숨을 참으려 애쓰며 수정을 쳐다보았다. 수정은 실망했는지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었다.

“미안.”

“미안하면 오늘, 저녁 쏘든가.”

오늘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반드시 오늘이어야 해. 수정은 어제 희우의 모습을 떠올리며 현태의 대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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