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붉고 매력적인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입술 안에 가지런하고 새하얀 이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오뚝한 코와 또렷한 눈매, 육감적인 몸매는 같은 여자가 봐도 넋을 빼놓을 정도였다.
희우는 몸매가 꿀린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격한 S라인의 몸매인 수정 앞에 있으니 어쩐지 제 몸이 초등학생 몸처럼 밋밋하게 느껴졌다. 입고 있는 드레스의 디자인도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희우가 얌전하고 단아한 이미지라면 수정은 섹시하면서도 도회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두 사람 다 다른 의미에서 강하게 눈길을 잡아끌었다.
“저 내일 생일이에요.”
“네?”
수정이 불쑥 꺼낸 말에 희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뭐 어쩌라고. 선물이라도 달라는 뜻인가?
희우는 할 말을 찾아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상투적인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축하드려요.”
“감사해요.”
수정은 또 아무렇지 않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조울증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짧은 시간에 저렇게 조증과 울증 증세를 격하게 오갈 순 없었다.
아무리 내일 생일이라고 말해도 수정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희우의 시선은 다시 휴대폰으로 느긋하게 옮겨갔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지 않아도 뚫어지게 쳐다보는 수정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백날을 노려봐라. 내가 눈 하나 깜짝하는지.
휴대폰 화면을 만지작대는 희우의 손끝이 성의 없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지잉, 지이잉-
막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어 클릭을 하려던 순간 쥐고 있던 휴대폰이 부르르 떨렸다. 현태에게서 온 전화였다.
희우는 망설이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저를 빤히 쳐다보는 수정과 일부러 눈을 마주치고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보세요?”
-어디야.
목소리 봐라. 정이 갈 수가 있나. 하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정답게 응수!
희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전시관 옆 휴게공간이요. 다리가 아파서 소파에 앉아 있는 중이에요.”
-……거기로 갈게.
이상한 걸 눈치챘는지 현태의 대답이 조금 느렸다.
“아뇨. 거기 있어요. 내가 갈게요.”
수정이 있는 곳으로 현태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심술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완전한 내 것이 아니라도 빤히 노리고 있는 게 보이는 사람과 사이좋게 나눠 쓸 만큼 희우는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다음에 봬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숙인 후 그곳을 나서는 희우의 얼굴엔 미소가 만연했다.
수정이 굳이 희우에게 내일이 생일이라는 걸 알려준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나, 파티 좋아하네.
희우는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서도 잘 먹고, 특유의 친화력도 뽐내며 파티를 즐기다가 왔다. 몇몇 사람들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는 때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 다리 아파.”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자마자 퉁퉁 부은 종아리를 주무르며 끙끙댔다. 길게 늘어진 치마 사이로 희우의 곧은 다리가 드러났다.
평소에도 무릎 위로 올라가는 치마를 곧잘 입었지만 긴 치마 아래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다리는 느낌이 또 달랐다.
현태는 자꾸만 시선을 잡아끄는 희우의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여자 몸을 보면서 만지고 싶다, 미친 듯이 파고들면 어떤 느낌일까, 이렇게까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나?
단연코 없었다.
지금껏 현태가 원하는데 갖지 못했던 것은 없었고, 원하기도 전에 먼저 다가와 그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여자는 도망갈 궁리만 하고, 저는 가질 궁리만 했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 희우만 보면 몸이 동했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랬나. 요즘처럼 스스로가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라고 느낀 적이 드물었다.
자신은 목표가 생기만 미친 듯이 달려가는 놈이었고, 지금 목표는 오로지 희우를 침대에 눕히는 것뿐이었다. 저질스러운 목표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걸 달성할 때까지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라고.
현태의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을 알 리 없는 희우는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잠시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던 현태는 곧 중간 타협점을 찾았다.
“구두가 불편했나 보군.”
살짝 인상을 쓰며 못마땅한 듯 바라보다가 희우가 앉은 소파 앞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속이 빤히 보이는 자신의 행동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하얗고 곧게 뻗은 저 다리를 움켜쥐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왜요?”
현태가 가까이 올 거라고 생각지 못하고 있던 터라 희우가 움찔 놀라며 물었다.
“다리 아프다며.”
희우가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으로 가느다란 종아리를 움켜쥐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희우가 기겁하며 다리를 뺐지만 현태의 표정은 여전히 느긋하고 덤덤했다. 속으론 목적을 달성해서 무척 기분이 좋았지만 이런 감정쯤은 얼마든지 무채색 표정 아래에 숨길 수 있었다.
“마사지.”
“그, 그걸 왜 현태 씨가 해요? 계약 조항 잊었어요?”
“스포츠 마사지 자격증 있어. 왜? 백만 원 줘야 하나?”
현태는 최대한 사무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해서 입술에 힘을 꽉 주는 것도 있지 않았다.
갑자기 다리를 움켜쥐는 현태 때문에 내심 놀랐던 희우는 현태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괜히 저가 오버한 것 같아 무안해졌다.
그래. 스포츠 마사지 자격증 있다잖아. 근육을 풀어주려는 거겠지. 안 그래도 높은 굽을 오랫동안 신고 있어서 종아리가 단단하게 뭉쳐 있어 힘들었다.
선한 의도로 다가온 사람한테 계약서 들먹이면서 돈 내놓으라 하는 건 너무 못됐지?
“그럼 부탁해요.”
희우는 현태만큼이나 무던한 말투로 대답하려 애썼다.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태의 손이 매끄러운 종아리를 다시 움켜쥐었다.
선이 굵고 핏줄이 불거진 현태의 손등과 희우의 희고 매끄러운 종아리가 유독 대비되어 보였다.
희우의 종아리는 손안에서 녹을 것처럼 부드러웠다. 다른 곳은 얼마나 부드러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기현태 씨도 피곤할 텐데 그냥 쉬어요.”
살짝 야릇한 분위기에 민망해진 희우가 다리를 빼며 말하자 현태가 잽싸게 다시 잡아챘다.
“피곤하지 않아.”
현태의 손이 희우의 종아리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가느다란 발목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바닥은 따뜻하기보다 뜨거운 쪽에 가까웠다. 어디 아픈 거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여긴 어때.”
현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손은 여전히 희우의 복숭아뼈와 발목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단순한 마사지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풀어진 셔츠 자락 사이로 드러난 단단한 가슴 때문인지 몰라도 묘하게 색정적이었다.
희우는 그의 탄탄한 가슴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얼른 고개를 돌리며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조금 뻐근한 정도?”
애무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이겠지?
희우는 천천히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귓불이 홧홧해지는 걸 느꼈다.
“여기 만지면 아파?”
이제 현태의 손은 희우의 종아리 한가운데를 감싸 쥐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현태의 손이 큰 탓에 손아귀 안에 든 종아리는 보이지도 않았다. 정말 피곤하지 않은지 그의 손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처음엔 야릇한 기분에 움찔대던 희우는 어느새 그가 해 주는 마사지에 피로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살짝 긴장해 있던 몸이 풀어지며 희우는 꼿꼿하게 세워져 있던 등을 소파에 털썩 기댔다.
늘 느끼는 거지만 비싼 소파라 그런지 기가 막히게 편했다.
희우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현태의 손은 이제 다른 쪽 다리로 옮겨갔다.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피곤했던 탓인지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자면 안 되는데.
눈을 감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거운 눈꺼풀은 희우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다. 1분만, 아니, 10초만.
울툭불툭 솟아오르는 뜨거운 마음을 차가운 표정 아래 감추고 마사지에 집중을 하던 현태는 규칙적으로 변한 희우의 숨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긴장해서 어깨를 웅크리고 있을 땐 언제고 희우는 소파에 기대 세상 편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심지어 입까지 살짝 벌리고.
“하!”
어이가 없어진 현태는 종아리에서 손을 떼고 한참을 그대로 희우의 얼굴을 살폈다. 마사지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희우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돌겠네.”
저를 편안하게 생각하는 게 좋기도 하면서도 묘하게 짜증 났다.
현태는 희우의 종아리를 다시 부드럽게 주무르며 살짝 드러난 허벅지를 대놓고 감상했다.
어차피 제 것이 될 몸이니 보는 것쯤은 괜찮다는 기적의 논리였다.
* * *
눈을 번쩍 뜬 희우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한참 동안 눈만 깜빡거렸다.
“언제 잠들었지?”
희우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마사지를 받다가 눈을 감았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왜 지금은 침대 위지?
“설마!”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희우는 벌떡 일어나 입은 옷을 살폈다. 드레스는 그대로 입은 채였다. 몸에 딱 달라붙는 디자인이 아니라 그럭저럭 불편하진 않았다.
“놀라라. 옷까지 갈아입힌 줄 알았네.”
하지만 안심하는 것도 잠시. 입고 있던 드레스가 어깨 아래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등 뒤 지퍼가 다 열려 있던 까닭이었다.
“헉! 이게 뭐야.”
희우는 방 안에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옷을 가슴 언저리로 끌어 올렸다. 분명 지퍼를 내린 기억이 없었다. 기현태가 내린 게 분명했다.
“이 남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