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예상은 했지만 기 회장은 현태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근처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바뀐 기 회장 표정에 당황해하며 시선을 교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쁘게 오가는 시선 중에 답을 아는 눈빛은 없어 보였다.
“할아버님, 안녕하셨어요?”
희우가 고분고분 다가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자 기 회장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처럼 주욱 찢어졌다.
시댁 어른이긴 하지만 저를 진심으로 예뻐해 주시는 할아버지를 뵐 때마다 희우는 송구스러웠다. 오늘따라 어른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양심을 콕콕 찔렀다. 목걸이가 새삼 무겁게 느껴졌다.
“그럼, 그럼. 희우 너는 어디 아픈 곳은 없고? 학교 일은 힘드니? 좀 야위었구나.”
마주 선 희우를 이리저리 살피는 기 회장의 눈빛엔 근심이 가득했다.
“괜찮아요. 잘 먹고 있어요.”
“그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목걸이가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이제야 주인을 찾아갔어. 허허허! 그 목걸이는 내가 집사람한테 선물했던 거다. 그걸 현태 애미가 이어받았지.”
기 회장이 흐뭇한 시선으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젠장. 아까보다 목걸이가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현태가 그러는데 우리 회사 사람 중에 너희 반 학생 학부모가 있었다며?”
딸꾹!
근처에 있던 진 부장이 놀라 딸꾹질하는 소리가 희우에게까지 들렸다. 하지만 기 회장은 음악 소리에 섞여 듣지 못했는지 어린아이처럼 잔뜩 신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나 보다. 안 그러냐?”
하늘이 정해 준 인연이라고 강조하며 설교를 늘어놓는 할아버지를 보며 현태는 헛웃음이 났다.
저도 저지만 할아버지야말로 지독하게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었다. 희한한 이유를 대가면서도 절대 멈추는 법이 없었다.
현태의 시선이 다시 희우에게로 향했다. 그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하, 네. 정말 그런가 봐요.”
한울 전자 직원이 몇 명인데요. 희우는 뒷말을 꾹 삼키며 미소로 얼버무렸다.
“그 사람이 누구냐? 이 할애비한테 소개시켜 주련? 우리 희우가 가르치는 아이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한데.”
딸꾹!
또다시 딸꾹질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딸꾹질 소리를 들었는지 기 회장의 고개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기 회장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때 진 상무가 서 있던 곳은 텅 비어 있었다.
“바람처럼 사라지셨네.”
희우가 텅 빈 곳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뭐라고?”
“벌써 가신 것 같아요. 안 보이시네요.”
“그래? 아쉽구나.”
기 회장은 정말 아쉬운지 입맛까지 쩝쩝 다시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기 회장은 희우와의 짧은 인사를 끝으로 파티장을 떠났다. 피곤하다는 게 이유였지만 애초부터 기 회장의 목표는 희우를 만나는 것 외에는 없었다.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으니 더 이상 파티장에 머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기 회장의 배웅을 위해 잠시 파티장을 나갔다 오는 길.
“1년 동안 이런 자리가 많이 있을까요?”
희우가 지친 기색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재밌기는 했지만 절대 자주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차려입고 몇 시간 동안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는 낯으로 서 있는 건 고역이었다.
맛있는 음식도 배부르니 더 이상 흥미를 끌지 못했다.
희우의 질문을 들은 현태가 옆에 선 희우를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질문 중 거슬리는 단어가 있었다.
1년?
모든 것은 완벽한 계획하에 움직여야 했고, 그 계획의 끝은 흠잡을 것 없는 가정이었다.
물론 그 가운덴 독고희우가 반드시 필요했다. 현태는 희우를 1년 후에도, 그 후에도 놔 줄 생각이 없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랑 따위는 상관없었다.
“왜 1년 동안이라고 생각하지?”
“그야 그 후엔 서로 볼 일이 없을 테니까요.”
당당한 말투가 가소로웠다. 현태는 자신의 퍼즐 조각 중 가장 중요한 하나인 희우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누구 맘대로.”
저를 향한 눈동자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워 희우는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희우가 아니었다.
“전 아무리 생각해도 1년 안에 기현태 씨를 사랑하게 될 것 같지 않아요.”
“그래?”
도발적인 희우의 말에도 현태의 표정엔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여유롭기까지 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밀리는 느낌이라 희우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당연하죠.”
“어째서지?”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기현태 씨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기현태 씨 취향도 내가 아니라는 거 알아요.”
“누가 그래?”
나름 차분하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던 희우의 눈이 일순 커다랗게 치떠졌다.
“설마 내가 기현태 씨 이상형인가요?”
진지한 표정을 보니 농담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현태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설마, 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희우의 모습을 보니 묘하게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아마도?”
현태의 손등이 희우의 광대를 스치듯 말 듯 지나쳤다.
희우는 제 얼굴을 아슬하게 지나가는 현태의 커다란 손을 흘깃 본 후 한숨을 내쉬었다. 백만 원을 받아 내지 못해서 아쉬운 건지, 그의 손이 닿지 않아 안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독고희우 씨의 이상형을 말해 보실까?”
“왜요? 이상형인 척하려고요?”
다소 공격적인 질문이었다.
어째서 저렇게 바락바락 대들고, 저에게서 빠져나가려고 애를 쓰는지……. 현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정도면 꽤 괜찮은 남편감 아닌가?
독고희우의 대단한 이상형을 들어나 보자, 싶었다.
“연기엔 소질이 없어서.”
이상형인 척하진 않겠다는 소리였다.
희우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 눈빛으로 현태를 쳐다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웃음을 삼켰다.
“일단 저는 공포영화 잘 보는 사람이 좋아요, 나랑 취향이 맞아야 하니까.”
현태의 짙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희우는 못 본 척 딴청을 피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외모가 동글동글한 사람이 좋아요.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니까.”
현태는 둥근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쓰윽 훑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더 암담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괜히 물어봤나?
“아!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희우는 현태는 전혀 아닐 거라는 전제하에 말하고 있었다.
남편을 뻔히 눈앞에 세워두고 전혀 연관 없는 이상형을 줄줄 늘어놓는 희우를 보며 현태는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희우가 말한 이상형 중에 현태와 가까운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여자는 이상형까지 이상하군.
현태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손가락까지 접으며 말하는 희우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동그란 얼굴은 어떻게 해 볼 수도…….
현태는 각진 얼굴을 쓸며 그렇게 생각하다 얼른 고개를 털었다.
지금 이 여자 때문에 일부러 살이라도 찌우겠다는 거야?
현태는 후덕해진 자신을 떠올리는 자신의 모습에 정말 간절하구나 싶었다.
“기현태 씨 이상형은 어떤 사람인가요?”
희우가 나란히 걷던 것을 멈추고 현태를 향해 물었다.
“아까 말했잖아. 독고희우 씨라고.”
“진지하게 묻는 거예요.”
희우의 표정을 보아하니 장난 같진 않았다. 현태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희우를 향해 한 발자국 성큼 다가갔다.
“그게 왜 궁금하지?”
“그야, 서로 진짜 행복해지면 좋으니까.”
“난 내가 행복해질 방법을 알아.”
“뭐, 뭔데요.”
희우는 설마 하며 물었다. 현태를 바라보는 희우의 눈빛에 불안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희우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현태가 입술을 뒤틀며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독고희우가 완벽하게 내 여자가 되는 거.”
현태의 짙은 시선이 희우의 목덜미와 귓불을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와, 항…….”
“왜? 항마력 달리나?”
희우의 커다란 눈이 두 배는 더 커졌다.
“내가 원래 뭐든 빨리 배우는 편이라.”
대답하는 현태의 말투에 옅은 웃음기가 뱄다.
지잉, 지잉, 지이이잉-
희우가 다른 말로 반박하려는데 현태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을 확인한 현태의 얼굴에서 미약하게 남아 있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화를 받은 현태의 눈매가 짜증스레 구겨졌다.
“잠시 실례.”
잠자코 상대방이 말하는 걸 듣기만 하고 있던 현태가 손을 들어 양해를 구한 후 어디론가 걸어갔다.
유치하면서도 묘하게 설레는 말만 남겨 놓고 사라진 현태를 보며 희우는 괜히 손부채질을 했다.
“아, 진짜. 항마력 달리네.”
하지만 자꾸만 비죽비죽 올라가는 입꼬리는 어찌하지 못했다.
밤이 되자 공기가 제법 쌀랑했다. 로비에 틀어놓은 에어컨 때문인 것 같았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어서 다리도 너무 아팠다. 다리가 길어 보이는 건 좋지만 높은 굽은 정말 최악이었다.
“앉을 곳 없나?”
번잡스러운 파티장과 달리 넓은 로비는 꽤 한산했다. 파티장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여기저기 보였다. 모두 친한 사람들인지 간간이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희우는 문득 외로워졌다. 이럴 때 친한 친구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쪽에 놓여 있던 소파를 발견한 희우는 아픈 다리를 끌고 그곳으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우, 다리 아파.”
허리를 숙여 퉁퉁 부은 종아리를 주무르다 고개를 들었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수정과 눈이 마주쳤다.
아…… 하필이면 이곳에 앉아 있다니.
희우는 수정과 단둘이 있는 상황이 별로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수정에게는 그 어떤 틈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나와 계시네요?”
먼저 말을 건 사람은 희우였다. 수정은 짧게 고개만 까딱인 후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지?
희우는 어떻게 반응할까 잠시 고민하다 클러치 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을 붙들고 있을 생각은 저도 없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희우는 이마에 와 닿는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모른 척할 땐 언제고 지금은 제 이마를 뚫을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을 피할 필요가 없었기에 희우도 수정을 곧게 응시했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뜻이었다. 잠시 탐색하듯 응시하던 수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