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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34)화 (34/75)

34화

미묘한 차이라 얼핏 들으면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지만 분명 조롱이었다. 별의별 학부모를 다 만나본 희우에게 이 정도 눈치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요. 얼마나 다정한지 몰라요.”

대답하면서 희우는 양심의 가책을 살짝 느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못 해 주는 것도 아니잖아?

수정에게 두 사람이 아직도 서먹한 사이라고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네요. 현태가 원래 감정 표현에 서툴러서요. 사실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무슨 걱정이요?”

희우는 목소리가 뾰족하게 나가지 않게 하려 애쓰며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유지했다. 말리지 말자, 말리지 말자, 속으로 되뇌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 사람 결혼에 사랑이 있던 건 아니잖아요? 얼굴도 몰랐던 사람들인데.”

단정적으로 말하는 수정의 말투에 짜증이 화악 치밀었다. 얼마 전 자신이 현태에게 했던 말이라는 걸 잘 알았지만 다른 사람, 특히 남편에게 마음이 있는 여자에게서 듣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빙빙 돌려 말하는 건 희우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꾹꾹 눌러 참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희우의 직접적인 질문에 속으로 희우가 상처받길 바라던 수정이 오히려 당황했다. 느긋하게 와인 잔을 천천히 돌리며 약을 올리려던 수정은 희우의 시선을 빤히 응시했다.

커다란 눈동자는 한 톨의 거짓도 없는 것처럼 말갰다. 복잡한 생각 따위 거치지 않은 직관적인 시선에 도망칠 곳을 찾는 사람은 오히려 수정이었다.

하지만 수정은 꿋꿋하게 견뎌냈다. 이대로 피해 버리면 저에게 영영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별 뜻은 없어요. 걱정이 되니까 하는 말이지.”

“무슨 걱정이요?”

수정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희우의 질문이 이어졌다. 수정은 이제 살짝 짜증이 났다.

“친구의 결혼생활이 원만하게 잘 이루어지고 있나 하는 걱정이요.”

“그런 걸 수정 씨가 왜 걱정하는지 모르겠네요.”

“현태가 저에게 친구 이상이니까요.”

“그래요?”

선 넘지 마라. 나 착하게 살고 싶으니까.

희우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네. 희우 씨도 짐작하고 계실 거라 생각은 하지만요.”

수정이 은근히 미소를 지으며 희우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전혀요. 현태 씨가 수정 씨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요.”

희우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산뜻한 미소를 지었지만 반대로 수정의 눈매는 사납게 올라갔다.

수정은 일을 할 때나 사람을 대할 때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걸 자신의 장점으로 여겼다. 하지만 현태와 관련된 일이라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불쑥불쑥 화가 나고, 서운해지기도 했다가 한없이 행복해지기도 했다.

현태의 말 한 마디, 표정 한 자락에 수정의 기분은 하늘로 치솟았다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현태가 눈앞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정의 기분은 엉망진창이었다. 조금 전까지 느긋했는데 지금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말 한 마디에 세상이 끝난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두 사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

희우가 나름 선방을 날리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불쑥 끼어들었다. 현아였다.

시누 중에서도 희우를 보는 눈이 제일 곱지 않은 사람이었다.

“올케, 여기서 보니까 새롭네?”

현아의 시선이 희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었다.

저보다 더 좋은 것, 비싼 것을 몸에 걸치진 않았는지 부지런히 살피던 현아의 시선이 우뚝 멈춘 곳은 희우의 목이었다. 목걸이를 발견한 현아의 눈매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 목걸이는…….”

“현태 씨가 준 거예요.”

“그걸?”

“네.”

현아의 말투에서 묘한 느낌을 받은 희우가 살짝 머뭇대며 대답했다. 현아는 마치 희우가 만져서는 안 되는 물건을 지닌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목걸인지 알아?

현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옆에 서 있던 수정도 눈치를 챘는지 두 사람을 유의 깊게 살피기 살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분위기라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제발 두 사람이 여기서 싸워줬으면 했다.

“무슨 목걸인데요?”

희우가 목걸이를 매만지며 물었다. 손끝에 닿는 다이아몬드의 서늘한 감촉이 묘하게 불안했다. 설마 훔친 건 아니겠지?

“엄마 유품이야.”

“네?”

놀란 건 희우뿐만은 아닌지 옆에 서 있던 수정의 목소리가 더 컸다. 그 바람에 주변의 시선이 더 자석처럼 달라붙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눈에 익은 목걸이 같기도 했다. 오래전, 현태의 지갑 안에 있던 사진에서 본 목걸이였다.

저 목걸이를 현태가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목걸이를 저 여자가 걸게 될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수정의 흔들리는 시선이 희우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어머니 것이었군요.”

희우의 말투는 오히려 아까보다 담담해졌다. 놀란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려 용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어쩐지 아까보다 목걸이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파티가 끝나면 현태에게 다시 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도 그렇고, 현태도 그렇고…… 가만 보면 올케는 기 씨 집안 남자들 홀리는 덴 뭐가 있나 봐. 아! 맞다. 조상님의 덕을 단단히 보고 있었지!”

평소 할아버지가 희우에게 특별 대우하는 게 못마땅했던 현아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네가 독고운의 후손이라는 것 빼면 뭐 내세울 게 있냐고 노골적으로 비아냥대는 것과 다름없었다.

희우가 막 반박을 하려고 할 때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어느새 다가온 현태가 현아를 바라보며 냉랭하게 물었다.

현태는 볼일을 보며 희우 쪽을 돌아봤다가 현아를 발견하고 서둘러 돌아왔다. 셋째 누나가 희우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이잖아? 두 사람이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니고, 할아버지 고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는 거. 알 사람은 다 알아. 그건 올케도 마찬가지고. 안 그래?”

현태의 냉랭한 표정을 보고 한 걸음 물러설까 생각했던 현아는 희우의 목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목걸이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저 목걸이는 결혼하기 전부터 자신이 탐내던 것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에게 달라고 이야기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더니. 오늘 같은 날, 가족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여자가 목에 턱 걸고 나타났으니 신경질이 날 수밖에. 게다가 현태는 엄마의 친아들도 아니었다. 따라서 희우에게 엄마의 유품을 가질 자격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낚아채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목걸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현아의 날카로운 시선이 희우의 얼굴로 옮겨갔다. 도둑을 보듯 험악한 눈빛이었다.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셔.”

현태가 희우를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희우가 아닌 현아에게 향했다. 누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냉랭했다.

“그럼 실례.”

희우는 두 사람에게 벗어났지만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현아가 저에게 불만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눈빛을 보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희우는 걸음을 멈추고 나란히 걸어가던 현태의 팔을 살짝 잡아 세웠다.

“왜.”

“이 목걸이요.”

희우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현태의 시선이 잠깐 목걸이에 가 닿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더 오래 머문 곳은 조명 아래 화려하게 반짝이는 목걸이가 아니라 그 아래 더 눈부신 현아의 목덜미였다. 아까 손에 닿았던 매끄러운 촉감이 생생했다. 다시 만져보고 싶었다.

“마음에 안 들어?”

새것이 아니란 걸 알게 돼 싫어진 건가 했다. 만약 그렇다면 다른 걸 사 주면 그만이었다.

“제가 받기엔 너무 과분한 것 같아요.”

“왜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라 현태의 신경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뭐든지 예상을 벗어나는 일은 현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현태는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가 있던 손을 바지 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다. 뭔가 불안하거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을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주머니 안에서 현태의 손끝은 불안한 마음을 담고 끊임없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이거 돌아가신 어머니 물건이라면서요. 이렇게 귀한 걸 나한테 주면 어떡해요.”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벗어서 현태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걸고 있다가 흠이라도 나거나 잊어버리면 어쩌나 걱정돼서 목걸이에 신경 쓰느라 음식도 맘 편하게 못 즐길 것이다.

“이젠 네 거야.”

“하지만!”

1년 뒤에 이혼할 거잖아요,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듣는 귀가 많기도 했지만 어쩐지 말을 뱉기 망설여졌다.

“가지.”

현태가 희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커다란 손안에 들어간 희우의 손은 어린아이의 것처럼 작게 느껴졌다.

현태는 꼼지락대는 희우의 자그마한 손을 깍지를 끼듯 그러쥐었다. 한 손에 쏘옥 들어오는 손은 꼭 쥐면 뭉개질 것처럼 말랑했다.

이 여자의 모든 부분이 이렇게 말랑한 모양이다.

“손잡는 거 싫으면 지금 말해.”

현태의 말에 희우는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떠나온 자리에서 수정과 현아가 망부석처럼 서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희우는 현태의 손을 꼭 움켜쥐며 대답했다.

“다정한 본부장 부부 행세해야죠.”

대답을 들은 현태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 옆에서 따라오는 희우의 인기척에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현태가 희우를 데리고 간 곳은 기우돌 회장이 있는 곳이었다. 기 회장은 근처에 서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리 끄트머리엔 상우 아버지도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고개를 잘게 끄덕이는 기 회장의 눈매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희우는 심각해 보이는 분위기에 끼어들어도 되는 걸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곧 쓸데없는 걱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오오! 우리 손주 며느리! 희우 왔구나!”

희우를 발견한 기 회장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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