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33)화 (33/75)

33화

“선생님! 그건 제가 오해를!”

당황한 선영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희우의 말을 잘랐다. 곁에 선 남편이 눈을 부라렸다. 갑자기 커진 목소리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선영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잘못 생각을 해서…… 그건 신경 쓰실 필요 없으세요. 전혀!”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신경을 더 쓰겠습니다.”

희우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자 선영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차츰 더 커졌다.

의도치 않게 등장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말았지만 희우는 기분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는 결혼이었다.

파티가 시작했을 때부터 현태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수정은 희우와 팔짱을 끼고 등장한 두 사람의 모습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부부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수정이 희우를 보는 시선은 불륜녀를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현태 옆은 내가 더 잘 어울려.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당장에라도 달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수정은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려는 찰나, 그녀보다 더 빨리 두 사람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나타났다.

수정은 기회를 놓친 걸 아쉬워하며 네 사람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형식적인 인사만 대충 하고 말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들의 대화는 꽤 길어졌다. 급기야 진 부장의 와이프가 희우 앞에서 쩔쩔매기까지 했다.

뭐야, 벌써부터 갑질하는 거야?

수정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희우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현태에겐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천박하지?”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는데 불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현태 부부의 등장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현아였다. 희우는 얼른 얼굴에 가득하던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뭐가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수정의 반응에 현아는 피식 웃더니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지나가는 웨이터의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현태 와이프.”

“너무 우아한데요?”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고.”

현아의 빈틈없는 대꾸에 수정은 긴장이 탁 풀렸다.

아군 한 명쯤 만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선배님은 독고희우 씨가 별로인가 봐요.”

일부러 현태 와이프라고 부르지 않았다.

“완전.”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두 사람을 바라보는 현아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진영운 상무 부부와 멀어진 후 현태는 희우를 슬쩍 살폈다. 긴장감으로 살짝 굳어 있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괜찮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

현태의 말에 희우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쁘지 않아요.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는데 엉뚱한 곳에서 해결이 됐어요. 이럴 땐 잘난 남편을 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잘난 남편이라…….”

희우는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현태에겐 꽤 기분 좋게 다가왔다. 희우의 입에서 저를 남편이라고 지칭하는 게 이번이 두 번째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점점 익숙해져 가는 거지. 그러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보통 부부처럼 살 수 있을 거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현태의 시선이 머리를 틀어 올려 하얗게 드러난 희우의 목덜미에 닿았다. 잡티 하나 없는 희우의 피부는 만지면 녹아내릴 것처럼 뽀얬다. 손에 닿으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현태는 그 궁금증을 참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까짓 백만 원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줄 수 있었다.

“이상해요?”

자꾸만 빤히 쳐다보는 현태의 시선을 느낀 희우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예쁜 것 같다고 큰소리를 탕탕 치긴 했지만 발목까지 치렁치렁하게 떨어지는 드레스는 입을 기회가 없던 터라 어색하긴 했다.

하지만 푸른색은 워낙 좋아하는 색깔이기도 했고 현태가 선물이라며 걸어준 목걸이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니. 잘 어울려.”

“다행이네요.”

내심 예쁘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건조하게 한 마디 툭 던져진 말에 희우는 왠지 실망감이 앞섰다.

그때였다. 저를 물끄러미 보던 현태의 손이 어깨로 스윽 올라왔다. 깜짝 놀란 희우가 살짝 몸을 뒤로 뺐지만 현태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주목된 터라 희우는 집에서처럼 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우아하게 행동했다. 억지로 웃느라 입꼬리가 아팠다.

“목걸이가 잘 어울리는군.”

현태의 시선은 이제 희우의 목덜미에 머물렀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현태에게 말을 걸어올 타이밍을 재느라 쭈뼛대는 게 보였다. 하지만 현태의 시선은 집요하게 희우만을 좇았다.

넥라인이 깊게 파인 드레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에 온 첫날 현태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희우의 쇄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목걸이에 닿았던 현태의 손끝이 살짝 희우의 쇄골을 쓸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저 살짝 중심이 비틀어진 목걸이를 바로 해 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반짝이는 목걸이 아래 드러난 새하얀 피부에 손이 저도 모르게 닿아 버렸다.

닿기만 해도 녹아 버릴 것 같은 피부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부드러웠다.

“므흐는 거예요?”

현태의 엄지가 가만히 쓸고 있는 곳을 흘깃 내려다본 희우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다정한 본부장 내외 모습 보여주기.”

“그렇다고 꼭 거기를…….”

거기를 만질 필요가 있냐고 물어보려던 희우는 현태의 시선에 하려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의 짙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마치 옷을 입고 있지 않은 것처럼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피부에 닿은 그의 손끝은 서늘한데 그의 손길이 스친 자리는 열이 홧홧하게 올랐다.

희우의 당황스러운 표정에도 현태의 손은 떨어질 줄 몰랐다.

현태는 대놓고 희우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었다. 계약서의 내용이 떠올랐지만 상관없었다. 그까짓 백만 원, 열 번이고 백번이고 줄 수 있었다.

근처에 사람도 없겠다, 희우는 계약서 7조를 재빨리 들먹이려고 했다. 두 사람을 향해 또각또각 걸어오는 수정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희우는 현태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서려던 마음을 바꾸고 일부러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수정 씨, 안녕하세요?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요.”

희우의 당당한 인사에 수정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수정이 희우의 목덜미에 닿은 현태의 손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아래턱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신혼이라고 티 내는 거야?

수정의 질문이 현태에게로 향했다.

희우의 몸에 닿아 있는 팔과 손바닥에 온 신경이 가 있던 현태는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손을 뗐다.

“언제 왔어?”

“좀 전에.”

현태는 그리 질문을 하면서도 희우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싸 안았다.

“보는 눈도 많은데 너무 닭살 커플 아니야?”

수정이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애를 쓰는 게 빤히 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태는 이런 방면으론 눈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낯선 곳이라.”

망설임이라곤 전혀 없는 현태의 대답에 수정은 기가 막혔다. 입술을 억지로 당겨 만들어 내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언제부터 다른 사람을 그렇게 신경 썼다고.

“누가 보면 희우 씨가 어린애라도 되는 줄 알겠어. 희우 씨 난처하게 왜 그래?”

수정의 타박에 현태는 고개를 돌려 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난처해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희우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수정이 기분 좋아질 일은 눈곱만큼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전 괜찮아요. 이이 말대로 제가 낯을 좀 가려서요.”

이이?

수정의 눈썹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꿈틀댔다.

너무 티 나게 연기를 했나 싶어 희우는 곁에선 현태를 쳐다봤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수정이 떨떠름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현태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그 뒤로 짧게 대화를 이어가던 현태가 희우를 돌아보며 양해를 구했다.

“저쪽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은데.”

미안해하는 기색 하나 없는 얼굴이었지만 예의 바르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평소 싸가지를 바가지로 퍼먹던 기현태는 출장 간 모양이다.

그의 소름 끼치는 연기력에 감탄하며 희우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를 하는 날이야. 평범한 부부 연기.

“갔다 와요.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그래. 좀 부탁해.”

대답은 희우를 향한 것이었지만 이어진 말은 수정을 향한 것이었다.

수정은 살짝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활짝 미소 지었다.

“걱정 마. 사모님은 내가 잘 모시고 있을 테니까.”

수정은 희우에게서 현태를 떼어내듯 스윽 밀어냈다.

현태는 순식간에 품에서 멀어진 희우의 온기에 주변의 온도가 갑자기 낮아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장난처럼 시작한 행동이었지만 이대로 저 여자를 계속 옆에 끼고 있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불쑥 솟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뒤를 돌아본 현태는 옆에서 재촉하는 직원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자리를 옮겼다. 다른 곳으로 가면서도 빨리 희우의 옆자리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현태가 멀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수정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 희우를 흘깃 쳐다봤다. 현태가 있을 때 생글생글 웃으며 대화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순식간에 변한 표정에 희우의 입가에 실소가 흘렀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왜 진작 사귀거나 결혼하지 않았을까 무척 궁금했지만 어쩐지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현태는 잘해 줘요?”

수정이 살짝 빈정대는 말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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