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31)화 (31/75)

31화

현태가 비서를 통해 예약해 놓은 샵에 들른 희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리낌 없이 만져대는 손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모님, 이제 샴푸 하겠습니다.”

“사모님, 눈썹 다듬겠습니다.”

“사모님, 네일 시작하겠습니다.”

희우가 대답할 새도 없이 사람들은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희우의 모습은 점점 업그레이드되어 갔다.

결혼식을 제외하고는 전문 메이크업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남이 해 주는 대로 있는 것도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기분이 붕 떴다.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희우의 모습은 평소와 무척 달랐다.

몇 시간의 고심 끝에 고른 푸른 드레스는 피부가 하얀 편인 희우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별다른 장식 없이 아래로 툭 떨어지는 느낌의 드레스는 늘씬한 희우의 몸매를 부각시켰다.

현태는 평소와 다른 희우의 색다른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희우가 못난 얼굴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이라고도 생각한 적 없었다. 하지만 작정하고 꾸민 희우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현태의 시선에 괜히 머쓱해진 희우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좀 예쁜 것 같아요.”

이번에도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보통 괜찮냐고 물어보지 않나?”

“뭐 하러요? 딱 봐도 예쁜데.”

아직도 털이 뽑혀 나간 다리가 얼얼하긴 했지만 기분이 꽤 좋았다.

“그래. 예쁘네.”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자꾸만 입술 양쪽이 길게 늘어졌다.

희우도 본인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피부 결도 너무 좋으셔서 메이크업도 진하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런 손님은 처음인지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아, 참. 이거.”

희우의 모습을 보고 있던 현태가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품 안에서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거울을 통해 현태의 모습을 살피던 희우가 궁금한 표정으로 뭔지 묻기도 전에 현태가 희우의 등 뒤로 와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걸며 말했다.

“잠시 실례.”

등 뒤로 바싹 붙어선 현태의 목소리가 희우의 귓가에서 낮게 울렸다.

현태가 희우의 목에 걸어준 건 보석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꽤 값이 나가 보이는 목걸이였다.

“어머! 너무 아름다우세요!”

그 모습을 지켜본 샵 직원이 마치 저가 선물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설레하며 박수를 쳤다.

10캐럿은 족히 넘을 것 같은 굵은 다이아몬드 수십 개가 촘촘하게 박힌 목걸이는 자칫 단순하게 보일 수 있는 희우의 드레스를 그 어느 것보다 화려하게 만들었다.

묵직한 목걸이의 무게에 잠시 멍해 있던 희우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전문가의 솜씨를 거쳐 다시 태어나다시피 한 모습으로도 깜짝 놀랐는데 이렇게 비싼 목걸이까지 걸치고 나니 진짜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마음에 들어?”

“이거…… 엄청 비싸 보이는데. 혹시 큐빅?”

아무리 물질만능주의라 해도 이건 대놓고 좋아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물건이었다.

“4년 치 결혼기념일 선물이라고 해 두지.”

현태가 웃음을 참으며 점잖은 목소리로 답했다. 놀랄 줄은 알았지만 큐빅이냐고 물을 줄이야.

“40년 치는 되겠는데요.”

희우가 멍한 목소리로 목걸이를 손끝으로 만지며 말하자 쳐다보고 있던 현태가 피식 웃었다.

잠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마음을 뺏겼던 희우는 곧 옆에 서 있는 현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리 취향이 아니더라고 해도 객관적으로 아름답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년엔 더 좋은 것으로 줄게.”

감미로운 내용과는 달리 현태의 목소리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덤덤했다.

내년이라니…….

현태와의 이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희우는 훅 들어온 그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끔벅거렸다.

거울 속에 비친 현태의 눈빛은 차분하고 건조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거짓말은 일절 담지 않을 사람 같았다.

정신 차려, 독고희우.

지금 이런 기분이 드는 건 다 분위기 때문이야. 저 조명 때문이고, 이 목걸이 때문이야.

희우는 자신의 목에서 차갑고 묵직하게 반짝이는 목걸이를 만지며 생각했다.

* * *

“어머나! 이게 누구야? 수정이 아니야?”

먼저 도착해서 와인 한 잔을 마시고 있던 수정은 근처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아…… 잘 지내셨어요?”

수정을 부른 건 현태의 셋째 누나인 현아였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였지만 마냥 편한 사이는 아니었다.

수정은 애써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인사만 하고 얼른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생각이었다.

“오늘 힘 좀 줬네?”

언제나 그렇듯 현아의 목소리엔 비아냥이 가득했다. 처음 수정이 현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 현아였다. 그리고 최대한 현태에게서 수정을 떨어뜨려 놓으려 애쓴 것도 현아였다.

“특별한 날이니까요.”

수정이 최대한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현아 앞에서 잔뜩 주눅 들어 있던 그때와는 달라졌다.

“수정이 네가 이렇게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으면 그때 방해하지 말 걸 그랬어.”

아쉽다는 얼굴로 한숨까지 지으며 현아가 중얼댔다.

헛소리.

수정은 입 밖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는 것을 겨우 참으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현아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현태 와이프도 되게 좋은 사람 같던데요. 뭘.”

수정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슬쩍 현아의 눈치를 살폈다.

기현아가 독고희우를 싫어하나?

“흥! 좋기는 뭘.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데.”

현아의 툴툴대는 말에 수정의 입가에 미소가 희미하게 번졌다. 누구도 보지 못하게 잔 뒤에 숨긴 미소는 머금었다 넘긴 와인과 함께 사라졌다.

수정은 금세 친구 와이프의 역성을 드는 착한 사람 모드로 돌변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엄청 좋은 분 같던데요.”

수정의 새카만 눈동자가 빠르게 현아의 얼굴을 훑었다.

“네가 잘 몰라서 그래. 난 또 선생이라고 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숙맥인가 했는데 보통내기가 아니야. 속물도 그런 속물이 없어. 할아버지한테 올 때마다 뭐 하나라도 받아 가려고 얼마나 아양을 떠는지. 그 애 볼 때마다 소름 끼쳐. 꼭 예전의 누구 같다니까?”

이번에는 현아의 시선이 수정에게 빠르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녀의 조소 어린 시선을 수정은 덤덤하게 받아 냈다. 더 이상 시시한 눈빛 따위로 상처받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현아는 현태의 와이프를 가족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

이러면 일이 너무 쉽게 풀리잖아.

수정은 자꾸만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참아야 했다.

“그렇게 안 보이던데.”

수정이 말을 끌며 현아의 눈치를 살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결혼식 날 보고 안 봤으면서.”

“사실 얼마 전에 밖에서 본 적이 있어요. 현태랑 자주 갔던 레스토랑에서요.”

“봤어? 엄청 촌스럽지? 이름만큼이나 옷 입는 센스가 엉망이야.”

“단아하고 예쁘던데요. 뭘.”

수정은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며 현아의 심기를 북북 긁었다. 현아 입에서 나오는 희우에 대한 악담을 듣는 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단아는 무슨. 할아버지한테 매번 얻어 가는 용돈이 얼만데 매번 싸구려 옷만 입고 다닌다니까.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그 애가 며느리라고 이야기를 못 하는 거겠지.”

“회장님께서요? 설마요. 용돈도 자주 주신다면서요.”

“그거? 그 애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야. 할아버지는 그냥 빌어먹을 독고운 선생의 핏줄의 손주를 보고 싶은 거지. 독고희우가 특별한 게 아니라는 뜻이야. 그 애 말고 다른 독고운 자손의 손녀가 있었어도 그 애를 손주 며느리 삼았을걸? 갖고 싶은 건 꼭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양반이니까.”

수정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현태가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현태 또한 독고희우에게서 아이만 얻어 내면 볼일이 끝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 현태가 그렇게 아무나에게 마음을 줄 리가 없지. 그 오랜 시간 동안 옆에 있으면서 친구로 지내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수정은 새로 알게 된 정보에 온몸에 희열이 솟았다.

다른 여자에게서 난 아이 정도는 얼마든지 키워줄 수 있어.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니 내 아이나 다름없이 키울 수 있을 거야. 현태의 아이니 분명 사랑스럽겠지.

수정은 현태가 독고희우에게 그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이유를 알게 되어 앓던 이가 다 빠진 것처럼 시원했다. 아직까지 기현태를 자신의 남자로 만들 기회는 얼마든지 남아 있었다. 어쩌면 현태는 내가 곁을 지켜주길 바랄지도 몰라.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한참 상상의 나래에 빠져 있는 수정을 현아가 은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너 아직도 우리 현태 포기 못 했지?”

현아가 수정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온 것처럼 번들대는 눈빛으로 물었다.

* * *

“여보, 오늘이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잘 알고 있지?”

작년에 상무로 승진한 영운은 잔뜩 멋을 내고 온 와이프를 보며 신신당부했다. 임원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참석하는 파티라 더 긴장됐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 무리해서 와이프의 드레스와 보석을 맞췄다. 영운이 입은 옷도 마찬가지였다.

“걱정 말아요. 다른 사모들하고는 이미 친분을 다 쌓아 뒀으니까요.”

잔뜩 힘을 주고 꾸며서 그런지 와이프는 오늘따라 제법 부티가 났다. 역시 돈을 들인 보람이 있었다. 영운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와이프의 허리를 살짝 감싸 안은 후 미소를 지었다.

지방 흡입이니, 무슨 시술이니 돈을 들이부을 때는 못마땅했는데 이렇게 예쁜 마누라를 바깥에 내놓고 보니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아참, 지난번 상운이 담임 일은 어떻게 됐어?”

“참 빨리도 물어보네요. 하나뿐인 아들 일인데 너무 무심한 거 아니에요?”

와이프가 살짝 눈을 흘기면서 말하자 영운이 계면쩍게 피식 웃었다.

“바빴던 거 알잖아. 어떻게 됐어? 그 여자, 우리 아들한테 사과는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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