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교장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이어졌지만 희우는 못 들은 척 교장실 밖으로 나왔다.
아침부터 참 기분이 더러웠다.
혹시라도 교실이 엉망진창이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전담 시간이었던 이슬 선생이 아이들을 살펴준 덕에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고마워요.”
희우가 앞문을 열며 들어오자 이슬이 빠르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갑자기 교장실로 불려 내려간 걸 알았으니 분명 무슨 일이 있다고 짐작한 것이다.
“괜찮아요?”
걱정을 사서 하는 사람답게 이슬은 희우보다 더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별일 아니에요.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희우가 부러 밝게 웃으며 이슬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슬이 교실을 나가고 난 후 희우는 수업을 준비하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교실을 쓰윽 훑었다. 그러다 저를 말똥말똥하게 쳐다보고 있는 상우와 눈이 마주쳤다. 상우가 저를 보며 씨익 웃었다.
기세등등한 아이의 표정을 보니 부아가 확 치밀었다. 성질 같아서는 달려가 꿀밤이라도 한 대 먹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지성인이다.
나는 프로다.
나는 어른이다.
아이와 감정싸움을 하는 순간 난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다.
희우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강력하게 건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산뜻한 얼굴로 교과서를 펼쳤다.
전쟁 같은 하루가 끝이 나고 아이들이 돌아가고 난 빈 교실.
희우는 혼이 반쯤 빠진 얼굴로 교실 뒤 게시판을 멍하게 응시했다. 알록달록한 아이들의 작품이 게시판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지만 그림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멍하게 한참을 앉아 있는데 교실 뒷문이 스르륵 열렸다. 인기척을 느낀 희우가 고개를 들고 살피니 상우가 뒷문으로 들어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집에 안 가고 있어? 방과 후 수업이 있어?”
희우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백한 말투로 물었다.
“사과했어요?”
“뭐?”
나름 상냥하게 질문했던 희우는 툭 튀어나온 상우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멍했던 머리가 순식간에 쨍하게 밝아졌다.
“우리 엄마한테요.”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희우는 인상 쓰지 않으려 애쓰며 침착하게 물었다.
“내가 왜 사과해야 하지?”
“선생님이 잘못했으니까요.”
말려들지 말자. 아이와 싸움하지 말자.
희우는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상우의 얼굴을 살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호리호리한 아이는 동그랗고 커다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상우야. 이리 와 볼래?”
가까이 오라고 할 줄은 몰랐던지 상우는 멀찍이 떨어져서 보고 있다가 천천히 다가왔다. 실내화를 질질 끌며 다가오는 상우의 걸음은 나무늘보처럼 느리기만 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상우를 보며 희우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저 아이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든 건 누굴까.
교장실에서 의기양양한 눈으로 저를 노려보던 상우 엄마가 생각났다.
난 아이를 낳으면 그렇게 키우진 말아야지. 순간 아이를 낳아달라던 현태의 얼굴이 불쑥 끼어들었다.
왜 네가 여기서 나와.
희우는 고개를 짤짤 흔들어 현태의 잔상을 흩뜨렸다.
마침내 상우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희우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거야. 상우는 정말 선생님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니?”
“네.”
상우는 아이다. 상우는 우리 반 학생이다. 애하고 싸우면 너도 똑같은 사람이 된다.
희우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 미소를 만들었다. 이러니 인내심이 남아나지 않을 수밖에.
“어떤 점이?”
“내 편을 안 들어줬잖아요. 민호가 날 밀었는데. 시발.”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는지 상우의 숨소리가 빨라졌다.
“상우야, 다시 한번 말해 볼래?”
길지 않은 교직 생활이었지만 학생이 면전에 대고 욕을 하는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희우가 숨을 고르는 사이 상우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거지새끼 편만 들고.”
빠르게 씩씩대던 상우는 희우가 뭐라고 대답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교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쾅!
앞문은 거칠게 닫혔고 상우는 복도를 빠르게 내달렸다. 저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지만 저런 욕까지 듣고 나니 따라갈 힘이 없었다. 그냥 모든 게 다 피곤했다.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옆 반에서 소리를 듣고 놀라서 달려온 이슬 선생이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하아…….”
희우는 대답 대신 머리를 움켜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래저래 다 짜증 나는 날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상우의 등짝에 스매싱을 한 대 날리고 싶었다.
* * *
“이번 주말 창립 기념일 행사 내용입니다.”
현태는 수정이 가지고 온 파일을 살펴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저 번거로운 행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이었다.
현태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수정은 현태의 반응에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불필요한 절차는 최대한 생략했습니다.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던 거라 실정에 맞게 부분 수정만 했습니다.”
수정의 목소리는 자신만만했다.
“하 팀장이 세세하게 신경 쓸 만한 기획안은 아닌 것 같은데.”
현태의 목소리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그렇다고 해서 대충 넘길 내용도 아니죠. 무려 40주년 기념행사인데.”
“알겠습니다. 이대로 진행하세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차라리 3박 4일 밤새워 일을 하는 게 수월했다. 창립 기념 파티니 체육 행사니 하는 번잡스러운 일은 현태가 제일 질색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부부 동반 참석 파티인 건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
두통이 심해졌다. 적어도 독고희우는 저보다 이런 종류의 일을 더 싫어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 * *
퇴근 전, 교장으로부터 한 번 더 호출을 당한 희우는 온몸에 뼈가 사라진 사람처럼 흐물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슬이 저녁이라도 함께 먹자고 했지만 숟가락 들 힘도 없었다.
당장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뻗지 않으면 교장에게 육두문자를 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스트레스 지수가 매우 높았다.
털썩.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그대로 침대에 누운 희우는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에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깐 누워 있는다는 게 까무룩 잠이 든 모양.
잠결에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를 듣고 희우는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네?”
“잠깐 나오지.”
현태 목소리였다. 현관문 여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희우는 묵직한 두통에 느릿하게 대답했다. 누군가 뇌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는 것 같았다.
“잠시만요.”
밖으로 나가기 전 거울을 보고 부스스해진 머리를 대충 가다듬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니 거실에 커피 향이 가득했다.
먼저 든 생각은 ‘저녁밥도 안 먹었는데.’ 였지만 지금 시간을 보고 저녁 먹기엔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벌써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무려 네 시간을 자 버렸다.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참 솔직한 내장이었다.
부엌으로 오자마자 냉장고 문부터 여는 희우를 쳐다보던 현태가 물었다.
“저녁 못 먹었어?”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현태의 반말에 희우는 움찔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백만 원은 소중했다.
“네. 깜빡 잠들었어요.”
희우의 목소리가 까칠했다. 목이 까끌까끌 아픈 걸 보니 인후염이 도진 모양. 피곤하거나 컨디션이 떨어지면 희우는 항상 인후염부터 생겼다. 스트레스와 체력이 떨어진 지금, 가장 약한 부분부터 탈이 났다.
냉장고 안을 살피던 희우는 뚫어질 듯 처를 바라보는 현태의 시선을 느끼고 대충 얼버무렸다.
“괜찮아요. 아스피린 한 알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런데 할 말이 뭐예요?”
희우가 냉장고 안에서 계란 두 알을 꺼내며 물었다.
계란이라도 삶아 먹을 건가?
작은 냄비에 물을 올리는 희우의 행동은 무척 자연스럽고 거리낌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굶든, 밥을 먹든, 라면을 먹든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뭐라도 먹을 것처럼 구는 희우를 보니 안심이 됐다.
하지만 희우는 현태의 예상을 깨고 싱크대 안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냈다.
“할 말이 있으니 잠깐 앉지.”
현태가 내린 커피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희우는 물을 올려놓은 다음 현태의 맞은편에 앉았다.
배도 고프고, 머리도 아프고, 몸도 무거웠다. 현태가 할 이야기가 제발 골치 아픈 이야기가 아니기를 빌었다. 오늘은 더 이상 남아 있는 에너지가 없었다.
현태가 커피를 한 잔 내려 희우 앞에 놓아 주었지만 빈속이라 그런지 별로 당기지가 않았다. 게다가 오늘도 저녁에 커피를 마셨다간 잠을 자지 못해 내일 컨디션이 엉망진창이 될 게 뻔했다. 희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할 말이 뭐예요?”
“주말에 시간 좀 내줘.”
“무슨 일인데요? 혹시 다음 데이트?”
문득 자기가 장소를 정할 차례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이면 아직 시간이 넉넉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아무 데나 한번 다녀오면 되겠지.
“그런 셈이지.”
은근슬쩍 핵심을 피해 가는 현태의 대답에 희우는 점점 잠이 깼다. 두루뭉술 시선을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 누나들 만나요?”
“누나들도 만나고, 다른 사람들도 만나야 해.”
“집안 행사 있어요? 할아버님 생신도 아닌 것 같은데?”
“창립 기념일 파티가 있어.”
“파티요?”
희우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TV 드라마에서만 보던 그 파티? 막 얼음 조각상 서 있고, 여자들이 멋들어지게 꾸미고 와서 샴페인 마시고 음악이 흐르는 그 파티?
놀란 얼굴로 눈만 끔벅대는 희우를 보던 현태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대로 희우의 반응이 그다지 좋진 않았다. 현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일인 것처럼 말했다.
“별것 없어. 가서 얼굴만 비치면 돼. 임원들 부부가 필히 참석해야 하는 파티라.”
“좋아요.”
희우가 흔쾌히 답했다. 다시 한번 예상을 깨는 반응에 현태는 희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희우를 보면 어렸을 적 즐겨 했던 해적 룰렛 게임이 생각났다. 언제 튀어 오를지 몰라 찌르는 사람의 간이 조마조마해지는 그 게임.
저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현태의 시선을 뒤로하고 희우는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냄비 앞으로 다가갔다.
순식간에 라면 봉지를 뜯어 끓는 물에 내용물을 넣었다. 매콤한 라면 분말 수프 냄새가 확 번졌다. 배고프지 않은 사람까지 시장하게 만드는 마성의 냄새였다.
“한 젓가락 할래요?”
희우가 뒤돌아보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아니.”
현태의 대답에 희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냄비 앞에 서 있다고 더 빨리 끓는 것도 아닐 텐데 희우는 라면이 다 끓을 때까지 냄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서 있었다. 못생긴 슬리퍼 앞으로 비죽 튀어나온 발가락이 보글보글 소리에 맞춰 까딱까딱 움직였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창립 기념일 파티가 있는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